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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행 지 : 운토종주 01차(토함산 ~ 함월산) 경북 경주시.
산 행 일 : 2018. 05. 12.(토)
산행코스 : 불국사 입구 ~ 석굴암 ~ 토함산 ~ 추령 ~ 수렛재 ~ 함월산 ~ 수림사 주차장
(14.6km, 8시간)
산행참가 : 22 백두.
<산행지도>
본디 2018년 시산제는 보령의 진산 성주산에서 거행을 하기로 예정했었으나, 전국적인 비 예보에 따라 한국에서 가장 늦게 비가 올 것으로 예보된 경주의 토함산으로 산행지를 급하게 변경하였다. 출발 당일에서야 산행지를 변경함에 따른 제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준 여러분께 감사를 드리고, 갑작스런 변경에도 큰 혼란 없이 산행을 마무리한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포항 운제산에서 토함산까지의 '운토종주' 산행은 올 가을쯤에 계획하고 있었으나, 뜻하지 않게 시산제 장소로 토함산 산행을 하게 됨에 따라, 운토종주 산행을 두 번에 나누어 나머지 무장봉 구간은 가을에 진행하기로 한다.
<운토종주>
포항 운제산에서 경주의 토함산을 잇는 산행은 흔히 '운토종주'라 부르고 있다. 도상거리만도 31km 이상 되는 장거리 산행으로, 포항과 경주 마니아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으며, 극기훈련의 장으로 이용되며 꽤 각광을 받고 있는 코스다. 전체적으로 포항 경주 경계 산지와 호미기맥(형남기맥)이 중복되는 구간이라, 산길도 뚜렷할뿐더러 각 갈림길마다 표지기가 훤히 걸려 있어서, 개념도 정도만 지참하면 크게 길을 잘못들 일은 없는 코스다. 또한 대부분이 달려도 좋을 정도의 완만한 능선으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길이라, 욕심껏 걸어보고 싶은 산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시루봉과 함월산 사이에는 옛 목장터인 오리온목장의 드넓은 억새밭이 펼쳐져, 늦가을쯤엔 은빛 억새의 사열을 받으며 걷게 되는 낭만도 덤으로 얻게 될 것이다. 다만 운제산에서 토함산으로 향할 경우의 산행 후반부가 되는 함월산 근방부터는, 야트막한 봉우리 오르내림이 심해지고, 마지막 추령에서 토함산 오르는 꾸준한 오르막이 체력적인 부담이 될 수 있으므로 적절한 체력 안배가 필요할 것이다. 운제산~토함산을 잇는 산행은 걷는 시간만 10시간 안팎이 소요되고, 휴식과 식사를 포함하면 12시간 이상이 소요되므로, 새벽 일찍 산행을 시작하여야 일몰 전에 불국사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운토종주는 운제산 혹은 토함산 어느 쪽에서 시작해도 무방하지만, 중도탈출 혹은 날머리 대중교통편을 감안한다면, 포항 쪽 운제산을 들머리로 잡는 편이 좋을 것이다. 기왕의 운토종주를 한다면 운제산 오어사를 출발하여 불국사까지 두 절을 연결하는 불국토의 길을 걸어보는 것도 꽤 괜찮을 것이다.(펌)
<운토종주 코스>
대각(해림이네집)~(3.1km)~운제산~(4.2km)~시루봉~(7.5km)~오리온목장정상(무장산)~(3.8km)~함월산~(5.2km)~추령~(2.8km)~토함산~(4.6km)~불국사주차장 총 31.2km
양재를 출발한 버스는 시종일관 술에 취한 듯 비틀거려 손 총무님을 뜬눈으로 지새우게 하더니, 예정보다 한 시간쯤 늦게야 겨우 경주 불국사 앞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지켜보던 나도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며 여성회원분들이 준비해 온 제물들을 배낭에 나눠 담고, 토함산을 향한 산행을 준비한다.
산행하기 좋은 계절이고, 산행거리도 평소보다 짧아서,
별다른 부담 없이 버스에서 내려 토함산을 향한 산행을 준비한다.
석탄일이 다가옴에 따라 연등으로 장식된 불국사 일주문은 아직도 단잠에 취해 있다.
<불국사(佛國寺)>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에 위치하며, 대한불교 조계종 11교구본사(敎區本寺)로 그 경내(境內)는 1995년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록되었다.
불국사 창건에 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그중 하나는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로, 여기에 보면 528년(신라 법흥왕 15)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의 발원(發願)으로 불국사를 창건하여, 574년 진흥왕(眞興王)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절을 크게 중건하면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과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주조하게 하여 봉안하였고, 670년(문무왕 10)에는 무설전(無說殿)을 새로 지어 《화엄경(華嚴經)》을 강설(講說)하였고, 그 후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城)에 의하여 크게 개수되면서 탑과 석교 등도 만들었다고 하였다.
한편, 《불국사 사적(事蹟)》에서는 이보다 연대가 앞선 눌지왕(訥祗王)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고, 경덕왕 때 재상(宰相) 김대성에 의하여 크게 3창(刱)되었다고 하였다. 이상으로 미루어 처음에는 소규모로 창립되었던 불국사가 경덕왕 때의 재상 김대성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확장된 것이 확실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 <대성효 2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조에는 경덕왕 10년 김대성이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으며, 김대성이 이 공사를 착공하여 완공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국가에 의하여 완성을 보았으니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당시의 건물들은 대웅전 25칸,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 극락전 12칸, 무설전(無說殿) 32칸, 비로전(毘盧殿) 18칸 등을 비롯하여 무려 80여 종의 건물(약 2,000칸)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불국사고금창기》에 있는 이 기록을 보면, 글씨도 일정하지 않고 크기도 달라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추측되므로, 여기에 나열된 건물들이 당시 한꺼번에 창건되었다고는 보기 힘들며, 오히려 임진왜란 때까지 조금씩 건립된 것으로 추정함이 옳을 것 같다. 1593년 5월 임진왜란의 병화로 2,000여 칸의 대가람이 불에 타버리자, 1604년(선조 37) 경부터 복구와 중건이 시작되어, 1805년(순조 5)까지 40여 차례에 걸쳐 국가적으로 또는 승려들에 의하여 부분적인 중수(重修)가 이루어졌으며, 1805년 비로전 중수를 끝으로 그 이상의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조선 후기 국운(國運)의 쇠퇴와 더불어 사운(寺運)도 쇠퇴하여, 많은 건물이 파손되고 도난당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대규모의 개수공사를 실시하여 다보탑의 해체보수, 법당의 중수 등을 실시하였는데, 이때 다보탑 속에 있던 사리장치(舍利藏置)가 행방불명되었고, 공사에 대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8·15 광복 후인 1966년 석가탑의 해체복원 등 부분적 보수가 있었다가, 1969년 불국사 복원위원회가 구성되고, 1970년 2월 공사에 착수, 1973년 6월 대역사(大役事)를 끝마쳤다. 이 공사로 유지(遣址)만 남아 있던 무설전·관음전·비로전·경루(經樓)·회랑(廻廊) 등이 복원되었고, 대웅전·극락전·범영루(泛影樓)·자하문(紫霞門) 등이 새롭게 단장되었다.
모든 사찰이 그러하듯이 여기에 다듬어진 돌들, 나무들, 그리고 적절히 꾸며진 공간(空間)들은 모두 사람의 정성이 깃든 것이며, 그 정성은 우선 연약한 인간의 비원(悲願)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구원(救援), 부모의 명복(冥福), 국가와 민족의 안녕, 부처의 가호(加護), 그 모든 것을 비는 절실한 염원(念願)이 이곳 돌 하나하나에 담겨 있다 하겠으며, 이러한 정성으로 이룩된 불국사는 신라인이 그린 불국(佛國), 즉 이상적 피안(彼岸)의 세계 그 자체라 하겠다.
이 불국을 향한 염원은 대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으니, 하나는 《법화경(法華經)》에 근거한 석가여래의 사바세계(娑婆世界) 불국이요, 다른 하나는 《무량수경》 또는 《아미타경》에 근거한 아마타불의 극락세계 불국이요, 또 하나는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불국이다. 이 셋은 각각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는 일곽(一廓)과 극락전을 중심으로 하는 일곽, 비로전으로 종합되는 전체의 구성을 통하여 그 특징적인 표현을 이루어 놓았다.
이곳에 정성을 바친 승려와 선현(先賢)들을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으나 주요한 인물만을 열거하면,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는 영제부인(법명 法流), 절을 중건한 지소부인, 헌강왕비(憲康王妃) 권씨(법명 秀圓), 의상의 제자 표훈(表訓), 불국사의 개조로 불리는 김대성, 탑을 조성한 백제의 예술가 아사달(阿斯達), 그에 대한 애정을 자비(慈悲)로 승화시킨 아내 아사녀(阿斯女), 지금은 불타 없어졌지만 광학장강실(光學藏講室) 벽에 석가상을 수놓았던 경문왕(景文王)의 공주로서 비구니가 되었던 원해(圓海) 등은 모두 이 절에 염원을 건 사람들이다.
고려시대에는 지율(持律)이 엄하기로 이름난 유가학승(瑜伽學僧) 해원(海圓)이 이곳에 살았으며, 조선시대에는 효령(孝寧)·안평(安平)·영응(永膺) 등의 대군(大君)과 세종·노산군(魯山君), 왕실의 대비(大妃)·상궁(尙宮) 등의 지성(至誠)이 끊임없이 불국사로 쏠렸다.
불국사 경내에는 다보탑(多寶塔, 국보 20), 3층석탑(국보 21), 연화교·칠보교(蓮華橋·七寶橋, 국보 22), 청운교·백운교(靑雲橋·白雲橋, 국보 23), 금동비로자나불좌상(金銅毘盧遮那佛坐像, 국보 26), 금동아미타여래좌상(金銅阿彌陀如來坐像, 국보 27), 사리탑(舍利塔, 보물 61) 기타 많은 문화재가 잔존한다.(펌)
오늘은 시산제와 산행을 하러 왔으니 잠자는 불국사는 깨우지 않고,
불국사 매표소 옆 등로로 들어서며 토함산을 향한 산행을 시작한다.
들머리 이정표에 토함산까지 3.6km라 표시되어 있다.
불국사에서 석굴암으로 이어지는 등로는 우거진 숲을 따라 걷기에 적당한 경사도로 잘 정비되어 있다.
급한 비탈면을 之자로 오르도록 등로가 이어져 있다.
오름길 도중 딱 한개의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는데 거의 호텔 수준의 외향을 갖추고 있다.
화장실 옆 쉼터에는 우측 계곡에 약수터가 있다는 이정표가 있다.
날씨가 후텁지근하게 더운 상태라 겉옷을 배낭에 갈무리하고 석굴암을 향한 오름길을 이어간다.
배낭에 시산제 제물을 넣었음에도 별로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등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우측으로 경주시 불국동 방향 조망이 트인 곳을 지난다.
석굴암 입구에 도착하여 우측의 종각에 들어가 보고 싶었으나,
한번 타종에 천원씩을 내고 타종하는 분들만 들어간다 하여 그만 돌아선다.
토함산 방향 들머리는 석굴암 입구 좌측 편에 있다.
<석굴암(石窟庵)>
통일신라시대에 경주 토함산(吐含山)에 세워진 한국의 대표적인 석굴사찰이다. 신라인들의 신앙과 염원, 뛰어난 건축미, 성숙한 조각기법 등을 보여주는 역사 유적으로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되었다.
문화재청에 등록된 정식명칭은 석굴암석굴이며, 《삼국유사》에 나오는 원래 이름은 석불사이다. 임진왜란 이후 불국사에 예속되었고, 1910년경부터 일본인들이 석불사 대신 현재의 석굴암(石窟庵)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보면, 석굴암은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751년(경덕왕 10)에 대상(大相) 김대성(金大城)이 불국사(佛國寺)를 중창(重刱)할 때, 왕명에 따라 착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그는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는 한편,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는 불교의 인과응보(因果應報) 설화를 기반으로 한 요소가 엿보이는 전설적인 유래이지만, 대상 김문량(金文亮)의 집에 환생(還生)하였다는 김대성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타나듯이 경덕왕대에 중시(中侍)로 있었던 김문량이 실존인물임에 비추어, 그의 아들인 김대정(金大正)이 신라의 기명(記名) 방식에 의해 대성과 동일 인물인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따라서 김대성은 왕명을 받들어 토함산의 정상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전개하여 불국사와 석굴암이라는 김씨 왕족(金氏王族)을 위한 2대 사찰의 건립에 마지막 생애를 다 바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석굴암은 김대성 생전에 완공을 보지 못하여 그 조영사업은 국가가 마침내 완성시켰다고 한다. 이 점은 분명히 석굴암의 창건이 김대성이라는 개인의 원력(願力)으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왕실을 비롯한 당시 신라인 모두가 염원한 거족적인 일대 불사(佛事)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그것은 석굴암의 방위(方位)가 김씨 왕족의 공동묘역(共同墓域)인 신라의 동해구(東海口)와 일치하고 있음을 보아도 더욱 뚜렷해진다. 동해구란, 삼국통일의 영주(英主)인 문무왕(文武王)의 해중릉(海中陵), 즉 대왕암(大王巖)이 자리잡고 있는 곳을 말한다.
문무왕은 욕진왜병(欲鎭倭兵)하고자 동해의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저승에서까지 국가수호의 집념을 잃지 않겠다는 군왕이었다. 이 같은 호국사상은 동해구의 유적인 해중릉을 비롯하여 감은사(感恩寺)나 이견대(利見臺), 그리고 석굴암과 동해구와의 관계 등에서 같은 맥락으로 파악될 수 있다. 이 점은 석굴암의 창건주인 경덕왕의 선왕(先王), 즉 효성왕(孝成王) 역시 화장 후 산골(散骨)된 곳이 이 동해구여서, 석굴암 대불의 시각(視角)이 동남동 방향으로 동해구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과 연관성이 있다.
그것은 곧 신라인의 믿음과 호국정신의 요람으로서 국찰(國刹)과도 같았던 석굴암의 존재를 뚜렷이 부각시켜 주는 예라고 하겠다. 이로써 석굴암이 지니고 있는 신앙적인 측면은 물론, 조형적인 면까지 신라 미술의 최고 절정을 이룬 민족 최대의 석조미술품으로 꼽아 결코 손색이 없는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1995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석굴암의 구조적 특색은 무엇보다 화강암의 자연석을 다듬어 인공적으로 축조한 석굴사찰이라는 점이다. 즉, 인도·중국 등의 경우와 같이 천연의 암벽을 뚫고 조성한 천연석굴이 아니다.
이 같은 토목기술을 바탕으로 이룩된 석굴의 기본적인 평면구조는 전방후원(前方後圓)의 형태를 취하면서 네모진 공간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로 나뉘어 있다. 주실에는 단독의 원각(圓刻) 본존상(本尊像)을 비롯하여 보살과 제자상 등이 있으며, 전실에는 인왕상(仁王像)과 사천왕상(四天王像) 등을 부조(浮彫)하여 배치하였다. 이 전실의 기능은 곧 예배와 공양을 위한 장소이다.
천장은 궁륭형(穹窿 形)의 둥근 양식이며, 그 위에 연화문(蓮花紋)의 원판을 두어 천개(天蓋)로 삼고 있다. 조각상의 배치는 전실부터 시작하여 팔부신중(八部神衆) 8구, 인왕(仁王) 2구, 사천왕 4구, 천부(天部) 2구, 보살(菩薩) 3구, 나한(羅漢) 10구, 감불(龕佛) 8구와 본존여래좌상 1구가 있다. 이들 불상의 배치에 있어 두드러진 특징은 무엇보다 좌우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고대 조형미술의 기본원칙과 같은 것이기도 하여서 석굴의 안정감을 한층 강조하는 구실도 하고 있다.
조각상 가운데 가장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본존여래좌상이다. 이 석굴 자체가 본존상을 봉안하기 위하여 조영되었던 만큼 그 의미가 매우 큰 불상이다. 예배의 주대상이 곧 이 본존상임은 물론, 중앙에 자리잡아 석굴의 내부 공간을 구획한 신라 조각미술의 결정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뛰어난 작품이다. 본존상은 연화문이 새겨진 대좌(臺座)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있다. 광배(光背)는 석굴 후벽의 천장 밑에 둥근 연화판석(蓮花瓣石) 1매로 조성하였다. 이는 전실의 법당에서 본존상에 예배할 때, 동일시각 위에 놓이는 치밀한 계산에 따라 처음부터 마련된 것이다.
본존상의 양식적 특징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 7세기 후반부터 유행하여 고려 전기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여래좌상의 기본양식이다. 법의(法衣)는 오른쪽 어깨를 벗고 왼쪽 어깨에 가사(袈裟)를 걸친 우견편단(右肩遍袒) 양식을 보이고 있다. 또한 수인(手印)은 악마의 유혹을 물리친다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결(結)하고 있다. 머리 위에는 육계(肉髻 )를 표시했으며 머리는 나발(螺髮)이다. 상호(相好)는 원만한 모습에 자비(慈悲)를 지니고 있다.
신부(身部)는 매우 당당할 정도의 거구로서 장부의 상을 보이고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으며 오른손은 무릎에 올려놓고 두 번째 손가락을 다음 손가락 위에 겹쳐 운동감을 주고 있다. 왼손은 두 발 위에 놓아 편안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어떻든 본존상의 신앙적인 의미와 조형적인 가치가 훌륭히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부드러운 자태와 인자한 표정에서 고도의 조각술을 살필 수 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불교의 구원상(久遠像)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석굴암 본존상에서 중요한 부분은 명호이다. 지금까지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그것은 석가여래로 통칭되어 왔으나 이는 뚜렷한 오류임이 구명되었다. 즉, 19세기 말엽 중수 당시의 현판(懸板)에 미타굴(彌陀窟)이라는 기록이 있었다는 점과, 오늘날까지 전래되고 있는 편액(扁額)에도 수광전(壽光殿)이라는 표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분명히 '무량수(無量壽)·무량광(無量光)'을 뜻하는 수광(壽光)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자료는 본존상의 명호가 석가여래 아닌 아미타불(阿彌陀佛)임을 말해주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또한 신라시대에 보편적이던 우견편단과 항마촉지인은 곧 아미타불이었다는 점도, 본존상의 명호를 밝히는 데 중요한 뒷받침이 된다. 이는 영주(榮州)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에 안치된 본존상이나 군위(軍威) 팔공산(八公山)의 석존 본존상 등 같은 양식의 불상에서도 분명히 입증되고 있다.
이와 같은 신라 불상의 양식계보로 비추어 볼 때 석굴암 본존불상의 명호는 7∼8세기 신라에서 유행했던 아미타불임이 분명한 것이다. 또한 김대성이 현세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고 전세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세웠다는 창건 유래 역시 미타정토(彌陀淨土)를 표현한 것으로, 동해구의 유적과도 연관되고 있다.
이상의 여러 관점에서 석굴암 본존상의 명호는 마땅히 신라인의 정토신앙을 기반으로 한 아미타불이며, 왕족의 발원에 의해 이루어진 거국적인 불사(佛事)이었음을 확인케 한다.(펌)
석굴암에는 수차레 갔었지만 이 등로를 따라 토함산을 향하기는 이번이 초행이다.
석굴암 입구에서 토함산으로 오르는 등로도 석굴암으로 이어지는 능선 동쪽의 진입로와 마찬가지로, 완만하게 능선을 따라 잘 조성되어 있다.
여느 휴양림 산책길에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의 등로가 이어지더니,
채화대 갈림길이 나오는데 대부분 우측 우회길을 따라 토함산을 향하고,
나는 좌측의 채화대 방향 오름길로 들어선다.
경북도민체육대회 등의 성화 채화 장소로 사용되는 채화대에 도착한다.
채화대에서 바라본 서쪽 방향 조망.
채화대에서 채화(採火) 장면을 연출하라고 하였는데, 아직 잠에서 깨어나기 싫은 듯한 표정이다.
채화대를 뒤로하고 완만한 능선길을 따르면,
추령 방향 갈림길이 나오는데 직진하여 토함산 정상에서 시산제를 거행하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나와 우측 추령 방향으로 가야 한다.
추령갈림길 이정표.
토함산 직전 갈림길에서 어느 길로 가도 토함산 정상에 닿지만,
좌측 길은 헬기장을 거쳐서 가게 되고, 우측 길이 능선길이다.
우측 수림사 방향으로 온통 산들만 조망된다.
마치 강원도 첩첩산중에 온 듯한 느낌이다.
토함산 정상에 도착한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백두들만이 토함산 정상에서 주변 조망을 즐기고 있다.
토함산 정상석.
<토함산(吐含山, 746m)>
경북 경주시 진현동에 위치한 토함산은 신라의 얼이 깃든 영산으로, 일명 동악이라고도 불리며 신라 오악(五岳)의 하나로 손꼽힌다. 문무왕 수중릉이 있는 감포 앞바다가 굽어 보이는 토함산은, 옛부터 불교의 성지로서 산 전체가 마치 하나의 거대한 유적지인 우리나라 문화재의 보고이다. 정상 가까이에 석굴암이 있으며, 기슭에 자리한 불국사 경내에는 석가탑, 다보탑, 청운교, 연화교 등 빼어난 유적들이 많이 있다.
토함산은 동해의 일출을 보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몰려드는 곳이기도 하다. 감포 앞바다를 붉게 적시며 토함산 위로 떠오르는 태양은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일으킬 정도로 벅찬 감동을 자아낸다. 토함산은 자동차로 손쉽게 오를 수 있지만, 불국사 담을 끼고 걸어 올라가 상쾌해진 몸과 마음으로 해를 맞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 특히 매년 12월 31일 밤이면 새해 일출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수만 명이 찾는다. 그들은 경주박물관에서 자정에 에밀레종 타종을 지켜본 후 시내에서부터 석굴암까지 걸어 올라와 한해 시작을 알리는 일출을 지켜보면서 신년을 맞는다.
가수 송창식의 노래 중에 '토함산'이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토함산에 올랐어라, 해를 안고 앉았어라,
가슴속에 품었어라, 세월도 아픔도 품어 버렸어라,
터져 부서질듯 미소짓는 님의 얼굴에도,
천년의 풍파세월 담겼어라.
바람속에 실렸어라, 흙이되어 남았어라,
님들의 하신양 가슴속에 사무쳐서 좋았어라 아 하~.
한발 두발 걸어서 올라라, 맨발로 땀흘려 올라라,
그 몸뚱이 하나 발바닥 둘을 천년의 두께로 떠바쳐라.
산산히 가루져 공중에 흩어진 아침 그 빛을 기다려,
하늘을 우러러 미소로 웃는 돌이 되거라.
힘차게 뻗었어라, 하늘 향해 벌렸어라,
팔을든채 이대로 또 다시 천년을 더 하겠어라.
세월이 흐른뒤 다시 찾는 님 하나 있어,
천년더한 이 가슴을 딛고서게 아 하~~.
한발 두발 걸어서 올라라, 맨발로 땀흘려 올라라,
그 몸뚱이 하나 발바닥 둘을 천년의 두께로 떠바쳐라.
산산히 가루져 공중에 흩어진 아침 그 빛을 기다려,
하늘을 우러러 미소로 웃는 돌이 되거라.
한발 두발 걸어서 올라라, 맨발로 땀흘려 올라라,
그 몸뚱이 하나 발바닥 둘을 천년의 두께로 떠바쳐라.
산산히 가루져 공중에 흩어진 아침 그 빛을 기다려,
하늘을 우러러 미소로 웃는 돌~이 되거라.
토함산 정상에서 동해에서 떠오르는 해를 안을 수는 없었지만,
천년의 세월을 느끼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나 싶다.
북쪽 동대봉산 방향 조망.
토함산 정상 남쪽 아래에 헬기장이 보인다.
2018년 시산제를 거행하기 위해 헬기장으로 내려간다.
천년고도 경주를 품어 안은 토함산 정상에서,
정성껏 준비한 제물을 차려놓고...
2018년도 백두산우회 시산제를 거행한다.
2004년부터 14년 동안 무탈하게 산행을 이어온 것은 신령님의 보살핌 덕분이라 회고하며
앞으로도 잘 봐 달라고 기원드리고,
넙쭉이 큰절을 올린다.
각종 나물은 순영이,
떡은 분덕이,
과일과 김치는 영임이,
전은 찬화,
편육과 곰취나물은 경숙이,
복분자 제주(祭酒)는 보성이가 준비했다고, ~~
내 너희들의 앞길이 순탄하고 자손들도 평안하도록 살펴 주리라!
(신령님 생각)
신령님의 너그러운 은혜로 우리들도 푸짐한 조찬을 즐긴다.
지난해 해남 도솔봉에서의 비바람 몰아치는 시산제를 떠올리며,
금년도 토함산 신령님의 후덕함을 기대해 본다.
시산제를 마치고 음복을 하는 백두들!
2018년 시산제를 마치고, 토함산 인증을 남기려 다시 정상으로 향한다.
토함산 정상 인증.
최신형 스마트폰으로 한번 더!
토함산 정상 서쪽 방향 조망 안내도.
서쪽 경주 남산 방향 조망.
토함산 산불감시탑에 올라서 바라본,
서쪽 불국사역 방향.
서북쪽 보문호 방향.
북서쪽 덕동호 방향.
살짝 당겨본 보문호와 덕동호 조망.
확 당겨본 보문호.
북쪽 동대봉산 방향.
북동쪽 함월산 방향.
동쪽 추령 방향.
산불감시탑을 내려와 백두들이 떠난 토함산 정상을 담고는 함월산을 향해 토함산을 뒤로한다.
추령 갈림길로 돌아나와 좌측 사면길로 들어서며 추령을 향한다.
고창표 복분자 제주를 한잔 걸친 터라 어디 드러눕고 싶은 마음 굴뚝같지만,
신록으로 단장된 편안한 오솔길이 추령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게 한다.
군데군데 숲으로 둘러싸인 쉼터도 지나면,
북쪽 방향으로 조망이 트인 바위 전망대에 도착한다.
백두의 여성회원들!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가야 할 추령과 함월산 방향.
돌아본 토함산 정상 방향.
전망바위를 지나니, 가파른 내림길이 나타나고,
이내 안부를 지난다.
작은 봉우리에 올라서서 좌틀하여 추령 방향으로 들어서면,
데크목 계단길이 이어지고,
다시 능선 안부에 도착하게 되는데,
능선 우측으로 산사태가 있었던지, 계곡 방향으로 수직에 가까운 낭떠러지가 내려다 보인다.
다시 봉우리에 올라서는 우틀하여 내려서면,
추령 직전의 이동통신 중계탑을 지나게 되고,
이내 추령 '백년찻집' 옆으로 이어진 날머리가 나온다.
추령에 도착하는 만식형과 손 점장.
추령 고갯마루에 도착하여 좌측으로 10여 미터 이동하면 추령 들머리가 있다.
추령 백년찻집 앞에는 정원을 예쁘게 꾸며 놓았다.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에 담은 인생의 비밀>
만물이 생성하는 봄. 숲에서 잡은 개구리와 뱀, 물고기에게 돌을 매달아 괴롭히는 짓궂은 장난에 빠져 천진한 웃음을 터트리는 아이.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승은 잠든 아이의 등에 돌을 묶어둔다. 잠에서 깬 아이가 울먹이며 힘들다고 하소연하자, 노승은 잘못을 되돌려놓지 못하면 평생의 업이 될 것이라 이른다.
아이가 자라 17세 소년이 되었을 때, 산사에 동갑내기 소녀가 요양하러 들어온다. 소년의 마음에 소녀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 차오르고, 노승도 그들의 사랑을 감지한다. 소녀가 떠난 후 더욱 깊어가는 사랑의 집착을 떨치지 못한 소년은 산사를 떠나고...
절을 떠난 후 십여 년 만에 배신한 아내를 죽인 살인범이 되어 산사로 도피해 들어온 남자. 단풍만큼이나 붉게 타오르는 분노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불상 앞에서 자살을 시도하자 그를 모질게 매질하는 노승. 남자는 노승이 바닥에 써준 반야심경을 새기며 마음을 다스리고... 남자를 떠나보낸 고요한 산사에서 노승은 다비식을 치른다.
중년의 나이로 폐허가 된 산사로 돌아온 남자. 노승의 사리를 수습해 얼음 불상을 만들고, 겨울 산사에서 심신을 수련하며 내면의 평화를 구하는 나날을 보낸다. 절을 찾아온 이름 모를 여인이 어린아이만을 남겨둔 채 떠나고...
노인이 된 남자는 어느새 자라난 동자승과 함께 산사의 평화로운 봄날을 보내고 있다. 동자승은 그 봄의 아이처럼 개구리와 뱀의 입속에 돌멩이를 집어넣는 장난을 치며 해맑은 웃음을 터트리고 있다.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추령 고갯마루.
<추령(楸嶺, 310m)>
경상북도 경주시 황룡동과 양북면 장항리를 잇는 고개로, 속칭 가내동재라고도 하는데, 순우리말 이름인 가내고개를 '가래나무 추(楸)'와 '고개 령(嶺)' 등 한자의 뜻을 따서 표기한 것이다. 또한 서낭당이 있어 서낭재라고도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경주)에는 동쪽 25리에, 『동경잡기』에는 동쪽 30리에 있다고 나온다. 『해동지도』(경주)에는 경주의 중심지에서 동해안을 연결하는 도로가 추령이 아니라 더 북쪽의 기림사 방향으로 돌아가는 고개로 묘사되어 있었다. 반면에 『대동여지도』에는 경주의 중심지와 동해안을 연결하는 중요 도로가 추령을 통과하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경주시내와 동해안의 양북면·감포읍 지역을 연결하는 최단 코스이자 가장 낮은 곳이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때 4번 국도가 추령을 지나가게 건설되었다. 1998년에 추령터널이 개통되면서, 고개는 별로 이용되지 않게 되었다.
추령 '백년찻집'을 배경으로.
백년찻집에서 앞마당을 예쁘게 장식해 놓았다.
토함산 정상에서 음복례를 하면서 이곳 백년찻집에서 차 한잔하고 가기로 했었는데..,
어느새 다들 함월산 방향 들머리로 들어서고,
나도 숲으로 들어서며 쓸쓸한 추령에는 백년찻집만 홀로 남겨 두고 함월산을 향한다.
추령 절개지 위로 올라서니, 홀로 남겨진 '백년찻집'의 지붕이 쓸쓸해 보인다.
홀로 남는다는 것은 쓸쓸하다.
쓸쓸하게 홀로 남지 않으려면..?
등로 주변에는 쪽동백 꽃이 지천으로 피어나 있다.
작은 봉우리를 지나니 돌무더기가 있는 안부를 지나게 되고,
무명봉 오름길에 암릉을 만나 좌측으로 우회하여 지나고,
암릉 위 조망바위에 올라서면, 지나온 토함산과 추령이 한눈에 들어온다.
토함산을 배경으로.
잠시 후 또 다른 조망바위가 나오는데,
이곳에서는 북서쪽 동대봉산 방향이 시원스레 조망된다.
북쪽 무장봉과 함월산 방향.
무명봉을 지나 안부로 내려서니 앞서가던 백두들이 쉼을 하고 있다.
오래된 묘지를 지나고,
잠시 동안 비교적 평탄한 능선길이 이어진다.
건너편으로 보이는 산에는 층층나무들이 하얀 꽃을 층층이 피어내고 있다.
살짝 당겨본 함월산 서쪽 지능선의 봉우리 모습.
낙엽이 수북이 쌓인 작은 봉우리를 오르고,
안부로 내려섰다가 다시금 제법 높아 보이는 봉우리로 오른다.
봉우리 직전에서 쉬고 있는 회장님 일행을 만나 수렛재에서 함월산을 오르지 않고 기림사로 가는 길을 알려주고,
홀로서 헬기장 봉에 올라, 층층나무 꽃을 배경으로 인증을 남긴다.
급경사 내림길을 내려서는데, 앞쪽으로 꾀나 가팔라 보이는 봉우리가 보인다.
그런데 안부에 내려서니 등로가 봉우리를 오르지 않고 좌측 골짜기 방향으로 이어져 있다.
지도를 확인해 보니 앞쪽 봉우리를 오르지 않는 게 맞다.
봉우리 방향 희미한 등로에 나무로 표시를 해 놓고 좌틀하여 수렛재로 향한다.
안부에서 좌측 골짜기 방향으로 내려서는 등로는 우장풀이 싱그러운 숲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이다.
이내 안부를 지나 494봉 오름길에 들어선다.
494봉 갈림길 도착.
이곳에서 수렛재는 우틀하여 아래로 가야 하고, 좌측 능선 방향은 묘지가 있는 494봉 정상으로 이어진다.
뒤따르는 분들을 위해 나무로 494봉 방향을 막아 놓고 494봉 정상은 어떤 모습인지 확인하러 간다.
494봉 정상에는 오래된 묵묘가 자리하고 있고,
한켠에는 삼각점도 있다.
삼각점 옆 바위에 앉아 목을 축이며 한참의 쉼을 한다.
홀로 494봉 인증을 남기고 갈림길로 돌아 나오니,
직전 봉우리에서 헤어졌던 회장님 일행이 벌써 도착해 있다.
회장님 일행과 함께 수렛재를 향한다.
수렛재 도착.
<수렛재>
경주시 황룡동과 양북면 호암리를 잇는 고개로, 수레가 넘어 다녔던 고개라는 의미로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신문왕이 모차골에서 세수방으로 넘어갔던 고개라고 하며, 이곳에서 좌측은 모차골(추원사) 방향이며, 우측은 불령봉표 방향이다.
<모차골>
마차가 다닌 곳이라 하여 '마차골'이라 불리다가 '모차골'로 변했다고 한다.
<세수방>
신문왕이 긴 여정에 잠시 쉬며 손을 씻었던 곳이라고 한다.
<불령봉표석(佛領封標石)>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 불령고개에 있는 조선시대 봉표석(封標石)으로 가로 1.2m, 세로 1.5m의 화강석 바위 표면에 '연경묘향탄산인계하불령봉표(延慶墓香炭山因啓下佛嶺封標)'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1831년(순조 31) 10월에 새긴 것으로, 순조의 아들 익종(翼宗:1809~1830)을 모신 연경묘의 봉제사와 그에 따른 경비를 조달하는 산이니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불령고개 주변은 조선 후기 고급 숯인 백탄(白炭)의 생산처로 알려져 있는데, 백탄을 만들기 위해선 나무가 많이 필요했으므로 벌채를 막기 위하여 봉표를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펌)
수렛재 이정표.
수렛재 등산 안내도.
회장님은 후미를 기다려 우측 용연폭포 방향의 '왕의길'을 따라 수림사로 향하겠다고 하여,
홀로 함월산 방향으로 들어선다.
함월산 오름길 초입은 완만한 오솔길로 이어지더니,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면, 등로 주변에 커다란 바위들이 나타나고,
잠시 후 산불 흔적이 있는 봉우리에 올라서게 된다.
가야 할 함월산 정상이 우전방으로 보인다.
봉우리 서쪽 아래에 운토종주 코스 중 제법 유명한 형제바위 전망대가 있다.
2천 년쯤 전, 화랑들이 이곳에서 심신을 수련했던 모습을 떠올리며,
몇 차례의 시도 끝에 혼자놀기 모습 한 장을 건진다.
좌측으로 동대봉산이 살짝 보이고,
정면으로는 절골이 내려다 보인다.
널찍한 절골 계곡을 사방으로 산들이 에워싸고 있다.
북쪽으로 다음 구간 가게 될 시루봉과 무장봉이 가늠된다.
북쪽 함월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너머로 다음구간 가게 될 봉우리들을 담고 형제바위 전망대를 뒤로한다.
완만한 안부를 지나면 바위들이 층층이 쌓인 함월산 전위봉을 지나고,
낙엽이 수북이 쌓인 능선 사면길도 지나면,
오래된 묵묘를 지나게 되고,
이내 Y자 갈림길에 서게 되는데, 직진의 좌측 길은 사면 우회길쯤으로 짐작되고,
함월산은 우측 오름길로 이어진다.
텅 빈 함월산 정상 도착.
이름이 예쁜 함월산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지 않을까 기대했었는데,
역시나 특별히 숲으로 둘러진 이름이 특별한 산 정상이다.
<함월산(含月山, 584m)>
경상북도 월성군(月城郡) 양북면(陽北面) 호암리(虎岩里)에 있는 산이다. 신라 때는 남악(南嶽)이라 불렀으며, 선덕여왕(善德女王) 때 창건한 기림사(祇林寺)가 있다. 남쪽은 추령(楸嶺)을 지나 토함산(吐含山), 북쪽은 운제산(雲悌山)으로 이어진다. 정상 부근은 바위가 많아 험준하지만, 대부분 완만한 능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달을 머금은 산'이란 의미의 함월산(含月山)은 참으로 시(詩)적이고 멋진 이름이다. '머금다'는 속으로 삼키지 않고 입 안에 넣어진 상태를 뜻하는 말로, 요즘 말로 번역하면 '달을 품은 산' 쯤으로 비유될 만하다. 하지만 왜 함월산이라 불리어졌는지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홀로서 함월산 정상 인증도 남긴다.
함월산에서 운토종주 능선의 시루봉 방향은 좌틀하여 아래로 이어지고,
오늘의 산행 종착지인 기림사는 직진으로 가야 한다.
바위들이 듬성듬성 있는 제법 가파른 내림길을 내려서면,
정면으로 작은 봉우리가 보이는 안부에 도착하게 되는데,
기림사 방향 등로는 이곳에서 좌틀하여 골짜기로 이어진다.
능선에서 벗어나 골짜기로 들어서니, 넓고 울창한 숲으로 희미한 등로가 이어진다.
마른 골짜기를 건너니, 함월산 정상 방향 골짜기 등로와 만나서, 우틀하여 골짜기 아래로 향한다.
등로는 편평하고 울창한 숲으로 이어진다.
넓고 편평하여 골짜기 같지 않은 골짜기를 따라 내려서면,
작은 물줄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골짜기를 건너 호젓한 등로를 따라 내려가면,
봉분이 두 개인 묘지를 지나게 되고,
이내 기림사 골짜기 임도에 내려서서, 우틀하여 기림사로 향한다.
차량 바퀴 자국이 있는 임도가 주계곡을 따라 이어진다.
수렛재에서 이어오는 '왕의길'과 만나는 갈림길을 지난다.
갈림길 이정표.
임도를 따라 내려가니, 경주국립공원 기림폭포일원 특별보호구역 표지판이 있다.
기림폭포일원 특별보호구역 안내판.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지는데 우측으로 내려다 보이는 계곡에도 제법 많은 물이 흐르고 있다.
잠시 더 진행하니 용연폭포 안내판을 만나게 된다.
용연폭포 입구에서 토함산 정상 이후로는 보지 못했던 선두들을 만나 용연폭포 인증을 남긴다.
<용이 승천하는 용연폭포>
신문왕이 만파식적과 함께 얻은 옥허리띠의 한 조각을 물에 넣자 용이 되어 승천하며 이 폭포가 만들어졌다고 전한다. 폭포는 근처에만 가도 서늘한 기운을 뿜어낸다.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줄기의 위용도 예상보다 대단하다. 굳이 물에 들어가지 않아도 한여름 더위를 씻기에 충분할 것 같다. 손이라도 담그고 싶은 마음 굴뚝같지만, 한두 방울 떨어지는 빗방울로 마음이 급해져서 서둘러 기림사로 향한다.
용연폭포 모습.
용연폭포를 다시한번 담아두고 기림사로 향한다.
용연폭포 앞에는 '왕의길'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왕의길 안내판.
감은사.
대왕암.
신문왕 호국행차길인 '왕의길'에 대한 안내판이 있다.
'왕의 길'이란?
<'달을 품은 산' 경주 함월산 '왕의 길'>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의 장례 행렬이 이어지던 길,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이 아버지의 수중릉으로 행차하던 길, 추령터널 입구와 기림사를 잇는 왕의 길이다. 함월산 아랫자락을 잇는 편도 3.9km의 걷기 좋은 숲길이다. 경주 시내를 벗어나 감포 방향으로 가다 보면, 함월산 자락에 추령터널이 있다. 이 추령터널 옆으로 왕의 길로 가는 진입로가 나 있다. 길은 처음부터 제 모습을 호락호락 보여주지 않는다. 진입로를 따라 2.5km의 시골길을 40~50분은 걸어야 왕의 길 초입인 모차골 입구에 닿는다. 모차골은 마차가 다니던 곳이라 하여 '마차골'로 불리다가 모차골이 되었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왕의 길이 시작된다. 그렇다면 이 길은 왜 이런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을까!
신문왕은 신라 31대 임금으로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의 맏아들이다. 삼국통일 이후, 정세를 안정시키고 강력한 전제왕권을 확립한 왕으로 평가받고 있다. 681년 아버지인 문무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을 당시, 신라는 겉으로는 평온한 듯 보였지만 안으로는 통일 후의 긴장과 귀족들과의 갈등으로 고군분투하던 시절이었다.
《삼국사기》에 전하길 "근자에 와서 도의가 사라진 상태에서 왕위에 있다 보니 정의가 하늘의 뜻과 달라, 천문에 괴변이 나타나고 해와 별은 빛을 잃어가니, 무섭고 두려움이 마치 깊은 못이나 계곡에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신문왕이 종묘에 제사를 지내며 조상들에게 바친 제문의 내용이다. 그만큼 통일 직후였던 당시는 귀족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고, 외부와의 전쟁 위험도 있어 나라를 다스리기에 어려운 시기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문왕은 즉위 다음 해인 682년에 아버지 문무왕의 수중릉이 있는 동해바다에 갔다가 용을 만나 만파식적과 옥으로 만든 허리띠를 얻었다. 대나무로 만든 피리인 만파식적을 불면 적병이 물러나고 병이 나으며, 가품이 들 때에는 비가 오고 비가 올 때는 날이 개는 등 신비한 능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그만큼 나라의 평화와 안녕이 절실했다. 만파식적은 신문왕의 왕권 강화와 정세 안정을 위해 만들어진 설화였을 테다.
그러니까 이 길은 신문왕이 마차를 타고 아버지 문무왕의 묘를 찾아가는 길이자 나라를 구원할 힘을 얻은 길이다. 또 이보다 앞서 문무왕의 장례 행렬이 지나간 길이기도 하다. 처음엔 신문왕길 혹은 신문왕 호국행차길이라 불리다가, 현재는 공식적으로 '왕의 길'로 불리고 있다. 비단 신문왕만 다니지는 않았을 테고, 여러 왕들이 동해로 행차하며 이 길을 지나갔을 것이라는 추측에 따른 것이다.
계곡 입구쯤에 도착하는데 Y자 갈림길이다.
좌측 길은 계곡을 따라 내려가고, 우측 길은 산자락을 따라 기림사 경내로 이어진다.
우측의 산자락 길을 따라 내려가면 기와지붕 정자가 보이고, 정자 뒤편 숲 너머에 기림사가 자리하고 있다.
돌아본 기림사 계곡 방향.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기 시작하는데, 정자에는 중년부부가 앉아서 신록을 감상하며 쉬고 있다.
얼마쯤 후의 내 모습일까?
기림사로 이어지는 숲길을 지나면,
기림사 경내로 들어서게 된다.
기림사 삼천불전.
<기림사(祇林寺)>
경주시 양북면(陽北面) 호암리(虎岩里) 함월산(含月山)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의 본산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643년(선덕여왕 12) 천축국(天竺國) 승려 광유(光有)가 창건, 임정사(林井寺)라고 하다가 원효(元曉)가 확장, 중수하고 기림사로 개칭하였다. 1863년(철종 14) 본사(本寺)와 요사(寮舍) 113칸이 불타 없어졌다. 당시 지방관이던 송정화(宋廷和)의 혜시(惠施)로 중건한 것이 현 건물이다. 다행히 《경상도영주제명기(慶尙道營主題名記)》 《동도역세제자기(東都歷世諸子記)》 《부호장선생안(府戶長先生案)》 등의 중요한 문적(文籍)과 근세조선 역대 왕의 어필(御筆) 등이 병화(兵火)를 입지 않고 보관되어 있다. 이 밖에 목탑지(木塔址), 3층석탑, 오백나한상(지방유형문화재 214) 등이 있고, 보물로 대적광전(大寂光殿:보물 833), 건칠보살좌상(乾漆菩薩坐像:보물 415), 삼신불(三神佛:보물 958), 복장유물(보물 959) 등이 있다.
매월당(김시습) 영당.
잠깐 갰다가 다시 비오고 비오다 다시 갬이여,
하늘의 도(道)도 그러한데 하물며 세상살이야~~~
요즘 우리네 사는 세상과 매월당이 살았던 세상이 어찌 이리 같다는 느낌인지!
매월당 사당.
매월당 영정.
입구까지 왔는데도 대덕광전이 보이지 않아, 다시 기림사 경내로 들어간다.
기림사 대적광전 안내판.
대적광전.
대적광전 내부 모습.
대적광전을 둘러보고 다시 기림사 종루를 지나,
기림사 일주문으로 나간다.
기림사 일주문.
기림사 계곡 전경.
기림사 주차장에 도착하여 산행을 마친다.
기림사 지근거리에 있는 양북대왕 온천에서 온천욕을 즐기고,
경주시내에 있는 풍년참가자미 집으로 이동하여,
2018년도 시산제 산행 뒤풀이를 한다.
고소한 참가자미회.
시산제 준비하고 산행하느라 수고하신 백두들! "사세요 ~"
뒤풀이를 마치고 뒷담화?
기다리던 버스에 올라 서울로 향하는데 버스가 몇차례 알바를 한다.
그래도 비틀거리지는 않으니 지난밤에 설쳤던 잠을 보충하기에는 그런대로..ㅉㅉ
'수인사대천명(修人事待天命)'이라 했다.
오늘 우리는 신령님의 가호를 빌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우리는 늘 조심하고,
최선을 다하는 마음가짐을 잊지 않아야겠다!
첫댓글 마지막에 버스가 알바를 몇차례 했는데 그래도 지난밤처럼 비틀거리지 않으니~~~음. 대장님이 문단에 나가실거 같아요. 존경하는 회장님, 촘무님, 대장님. 늘 감사하고 사랑하는 백두형님,누님들 늘 함께 해요. 화이팅~~!!
탁월하신 선택으로 비를피하고 행복한 시산제 집전해주시며 멋진 작품 산행기 쓰신 대장님,수고 많으셨습니다.감사드립니다.즐감했습니다.올 한해도 신령님의 가호 아래 우리 백두산우회가 안전하고 멋진 산행할 것 같습니다.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