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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갈라디아서 2장 6-10절
복음의 진리-친교의 악수
갈라디아서 2장에서 바울은 회심을 기점으로 하면 14년 후에, 첫 번째 예루살렘을 방문한 기점으로 하면 대략 17년 후에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된 일에 대하여 말합니다. 특히 이 일은 계시를 따라 올라간 것임을 밝히는데, 자신의 사도직과 사도로서 받은 계시가 결코 거짓되지 않다는 사실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왜 계시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는가? 자신이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에게 제시하기 위해서입니다. 제시하여 복음 안에서 교제하기 위함이요, 지난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더불어 바울은 자신이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함임도 밝히는데, 간단히 말하면 주의 몸 된 교회와 성도를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를 향하여 편지를 쓸 때만 하더라도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의심과 그로 말미암아 그가 전한 복음에 대한 의심이 있었는데, 편지를 쓰는 시점에서 자신의 과거를 말한다고 할 때 과거에 이런 일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회심하고 난 뒤 3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도 바울의 회심에 대하여 의심하기도 했는데, 이런 의심에서 벗어나 자신의 복음을 교회와 성도들이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갈라디아서의 표현대로 하자면 자신의 달음질이 헛되지 않았고 또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복음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오늘 본문에서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볼 수 있는데, 이렇게 14년 후 예루살렘으로 다시금 올라갔다고 할 때 할례와 관련된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함께 동행했던 헬라인 디도에 대하여 억지로 할례를 받도록 요구하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할례를 받느냐, 받지 않느냐의 문제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덕의 원리를 따라 믿음이 연약한 유대인들을 생각해서 할례를 받는 것은 결코 죄를 짓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은 같은 이유로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디모데 사건보다 앞서 있었던 디도 사건과 관련해서는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않았다고 전하는데, 왜냐하면 이 문제는 덕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할례를 받게 하느냐, 받게 하지 않느냐에 따라 복음이 참이 될 수도 있고 거짓이 될 수도 있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입장의 사람들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한 마디로 거짓 형제라고 말합니다. 형제라고 부르고 있지만 ‘거짓’ 형제입니다. 그들은 어떤 자들이냐? 가만히, 은밀하게 교회 안으로 들어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가진 자유를 버리고 다시금 율법의 종으로 만들고자 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가진 복음은 은혜와 함께 율법의 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바른 복음이 아닌 거짓 복음이기에 한시도 복종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할례를 요구하는 저들에게 덕의 원리를 따라서는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지만, 할례를 행할 때 거기에 거짓 복음이 자리한다는 이유에서 결코 복종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2절에서 계시를 따라 올라가 이방 가운데 전파한 복음을 유력한 자들에게 제시한 것과 관련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먼저 6절입니다.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갈라디아서 1장에서부터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의 사도 됨이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사도 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1). 복음 역시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님을 강조하는데(11),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12). 그래서 자신의 회심 전과 회심할 때에 대해서 말했던 것입니다. 회심하기 전에는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열심히 있었지만, 그래서 누구보다도 앞장 서서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고 멸하는 자이었지만(13-14), 그는 이미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사도로 정하시고 때가 되어 은혜로 불러주셨다는 것입니다(15). 유대교에 있는 나를 왜 부르셔서 사도로 세우셨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에 전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때도 강조한 것은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16). 또 자신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17).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후 삼 년만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사도들과 교제하고, 또 이제 ‘십사 년 후에’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사도들과 교제하는 것은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무엇보다 복음 안에서의 교제와 일치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요, 나아가 교회와 성도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즉 갈라디아서의 배경이 되고 있는 것처럼 바울의 사도직에 대하여 의심하는 일이 있었고, 사도직에 대한 의심은 복음에 대한 의심으로까지 확장되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사도들과 복음 안에서 교제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사실은 전자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2절에 의하면 분명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였지만, 다시 말해 사도들에게 자신의 이방 복음 사역에 대하여 보고하였지만, 그런 보고가 내게 어떤 의무를 더하는 성격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고한다고 해서 먼저 사도 된 자들보다 아래에 있는 것은 아니며, 보고한다고 해서 먼저 사도 된 자들의 승인 없이는 다시금 복음 사역을 할 수 없는 것도 아니란 것입니다. 물론 교회 안에도 질서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정치가 있는 것이고, 치리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사도 위에 사도가 있는 게 아니며, 사도 아래 사도가 있는 게 아닙니다. 보고한다고 해서 보고하는 사람은 아래에 있는 사람이고, 보고를 받는 사람은 위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유일한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외 모든 택자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신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지상 교회 가운데 직분자를 두셨습니다. 목사와 장로와 집사가 그들입니다. 이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목사 위에 목사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목사는 머리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평등할 뿐입니다. 그럼 목사와 장로, 혹은 집사 사이에는 어떠한가? 마찬가지입니다. 직분의 역할이 다를 뿐, 머리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는 평등합니다. 목사 아래 장로가 있고, 그 아래 집사가 있는 게 아닙니다. 사역의 성격이 다를 뿐입니다. 직분자와 직분자가 아닌 성도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직분자로 세워졌다고 해서 직분자로 세워지지 않은 성도보다 높은 자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직분자는 모든 성도와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도록 하기 위해, 섬기도록 하기 위해 세워진 사람들입니다.
다만 이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목사를 예로 든다면 그들은 말씀으로 섬기기 위해 세워진 자들이지만 동시에 그 말씀으로 교회를 다스리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도 있지 말아야 합니다. 이 다스림은 결코 목사 개인에게서 나온 권위가 아닙니다. 그에게 맡기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성도 위에 군림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도들이 진리 안에서 바로 서도록 인도하는 섬김의 방식입니다. 이런 직분자에 대하여 성경은 존중하고 순종해야 한다고 가르치기도 하는데, 이것은 직분자의 개인적 판단에 대한 맹목적 복종이 아니라 직분자가 주의 말씀을 바르게 전한다는 전제 아래 그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이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질서 아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오면, 사도 바울은 유력하다고 하는 이들이 자신에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전혀 없다고 말합니다. 2절에서 계시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다고 말하는 것처럼 다른 사도들에 의해 복음 사역을 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친히 이끄시는 대로 복음 사역을 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도가 자신에게 의무를 주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친히 의무를 주셔서 주의 뜻을 따라 사역한 것인데 그 사역이 이방인을 위한 사역이라고 보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력하다는 이들’은 특별히 사도들을 의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만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지도자들, 장로들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으나,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사도들을 의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도들 스스로가 자신들을 유력하다고 말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 제자들끼리 누가 크냐로 다투기도 했지만,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그런 자세는 찾아볼 수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복음을 가르친다고 할 때 참된 복음을 안다는 것은 철저히 주의 은혜만을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들 스스로가 유력하다고 말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튜 풀 주석에서는 거짓 교사(선생)들이 지나치게 부풀려서 과장한 사도들의 모습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유력하다는 이들’의 원문 직역은 ‘무엇이라고 생각되는 이들’ 혹은 ‘무엇이라고 여겨지는 이들’이란 뜻입니다. 누군가 그렇게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사도직에 대하여 의심하도록 만든 거짓 선생들이 지나치게 부풀려서 과장한 것이기도 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런 말로 어느 정도 사도들에 대한 존중을 표현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1장 17절에서는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오늘 본문 9절에서는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5절에서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이라고도 표현합니다. 단지 거짓 선생들의 말 때문이 아니라, 이런 말로 다른 사도들에 대한 존중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지금 6절의 말씀은 한편으로는 유력한 이들이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하여 인정하고 존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런 말 사이에 바울은 괄호 안에 있는 말을 덧붙이고 있는데,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는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풀어 설명하자면, 유력하다고 하는 이들, 그들이 본래 어떤 사람이든지 내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유력한 자들이 바울보다 먼저 사도가 된 자요, 또한 기둥 같이 여길 수밖에 없는 사람들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 자신도 갈라디아서 1장에서, 또한 오늘 본문에서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바울 자신은 그들이 사도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때 유대교에 있었고, 또한 유대교에서 조상에 전통에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회심하기 전에는 그 열심 때문에 그리스도교를 박해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사도가 된 자가 항상 먼저인 자로만 있는가?
육체와 관련해 먼저 된 자는 나중에 된 자와 비교해서 항상 먼저 된 자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변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기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9장 30절입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마태복음 20장 16절에서도 동일하게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즉 하나님 나라는 먼저 된 자가 항상 먼저 된 자로 있는 게 아니란 것입니다. 먼저 된 자로 있지만 나중 될 수 있고, 나중 된 자로 있지만 먼저 될 수 있습니다.
분명 사도 바울보다 다른 사도들이 먼저 사도로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먼저 된 자로 있기 때문에 나중 된 자는 먼저 된 자의 말만 들어야 하는가? 먼저 된 자에게 속해서만 일을 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다윗과 관련해 하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16:7) 그러므로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중심을 보신다는 것인가? 물론 외모를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중심을 보신다는 말과 연결되지만, 중심을 보신다는 게 외적인 것보다는 우리의 마음, 우리의 어떤 열심을 보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윗과 관련해서 중심을 보신다는 것은 분명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지만, 외모를 취하지 않는다고 할 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사람에게 원인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어떤 것으로부터 자유롭고, 자유롭기 때문에 그의 뜻과 의지대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중심을 보신다고 할 때 그런 중심을 갖게 하신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다윗 스스로 하나님을 경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그렇게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할 때 분명 저들을 먼저 사도로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은 그런 외적인 조건에 따라 일하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존중의 의미를 담아서 유력하다고 말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먼저 된 자로 하여금 나중 되게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논리로 사도의 권위를 결정하거나 복음의 순서를 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 유력한 이들이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이런 측면에서 하는 말입니다.
결국 본문 6절에 나오는 바울의 자세는 하나님의 질서를 존중하면서도 자신의 사도직과 복음이 그들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독자적으로 세워 사역하게 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내용이 9절에서 친교의 악수를 하였다는 것인데, 친교의 악수를 하게 된 데는 사도들이 보았던 것이 있고(7절) 그렇게 보았던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사도로 삼으셨던 것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8절). 그래서 9절에서는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다시 말해 알았다는 표현까지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일단 7절과 8절을 보시면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그러니까 유력한 이들이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은 전혀 없고,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유력하다는 이들이 보았다고 말하면서 확신한 것은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로 세워졌다면, 바울은 무할례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로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이때 보았다는 것은 눈으로 보았다는 측면보다는 바울의 사역을 본 것처럼 분명하게 들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도들이 사도 바울의 사역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는 성경의 기록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지금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사역의 대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베드로의 경우는 할례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로 세워졌다는 것이고, 바울은 무할례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로 세워졌다는 것인데, 이것을 사도들이 보았다, 본 것처럼 분명하게 들었다, 그리고 확신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것처럼 바울 자신 역시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역사하사 자신을 무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보았다는 것은 그들 역시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사도로 삼으신 것처럼 나 또한 사도로 삼으신 것을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질문할 수 있는 것은 베드로가 할례자(유대인)의 사도로, 바울은 무할례자(이방인)의 사도로 세웠다는 것이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과 상충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런 말씀에 근거하면 사도 베드로가 어떻게 할례자의 사도로만 있었다고 할 수 있는가? 혹 할례자의 사도로만 있었다면 그것은 직무유기가 아닌가?
여기에 대해 칼빈은 “예수님의 이 명령은 제자 각 개인에게 대하여 말씀한 것이 아니고, 저들의 임무의 목표가 일반적으로 말씀 된 것이다. 즉 구원이 복음의 교훈에 의하여 모든 나라, 모든 사람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사도들의 발자취를 보면 어느 누구도 땅 끝까지 돌아다녔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당연히 사도들이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다른 나라로 갔다 하더라도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모든 나라에 복음을 전한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바울이 사도로 활동하면서 소위 로마가 땅 끝이라고 해석하면서 로마까지 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모든 나라에 복음을 전했다고 말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닙니다.
따라서 사도행전 1장 8절은 사도들에게 말씀하신 것이지만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이 일을 이루시겠다고 하시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오고 가는 모든 세상에 있는 자신의 택자를 반드시 불러 모아 자신의 몸 된 교회로 삼겠다는 뜻을 내비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를 통해 시작하신 일을 오늘날 교회를 통해 계속해서 그 일을 이루어 가고 계신 것입니다.
덧붙여 질문하자면, 본문은 베드로가 할례자(유대인)의 사도로, 바울은 무할례자(이방인)의 사도로 세워졌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할례자 혹은 무할례자에게로만 갔는가? 우리는 성경을 통해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의 경우는 이방인 백부장인 고넬료에게 갔던 일이 있었습니다. 바울 역시 전도 여행을 하면서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을 위해 항상 수고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행전과 지금 갈라디아서의 내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는가?
일단 본문을 기준으로 생각해 본다고 할 때 베드로는 할례자의 사도이기 때문에 무할례자에게 복음을 전해서는 안 되고, 또 바울은 무할례자의 사도이기 때문에 할례자에게 복음을 전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방금도 말했지만 그 사실은 사도행전을 통해서 분명히 반박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행전과 갈라디아서의 내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게도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 갈라디아서의 내용은 베드로와 바울의 주된 사역의 대상을 소개하면서 대상은 다를지라도 복음의 내용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때문에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에게 갔던 사건이 있지만 그의 주된 사역은 할례자의 사도로 세워졌다는 것이고, 바울 자신 역시 전도 여행을 하면서 가는 곳마다 먼저 유대인을 위해 수고하는 일이 있지만 그의 주된 사역이 할례자보다는 무할례자의 사도로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된 사역의 대상은 다르지만, 그리고 그렇게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각각 할례자의 사도로, 무할례자의 사도로 세우신 만큼 베드로의 복음이나 바울 자신의 복음이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7절과 8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복음 전함을 맡은 것’과 누구에게 ‘역사하사... 사도로 삼으신 이’에게 있습니다. 복음 전함을 맡았다는 것은 복음을 전하도록 맡기신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하사 사도로 삼으신 것인데, 그가 누구냐? 하나님이라고 전제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하나님의 역사를 지금 사도들이 보았고, 보았기 때문에 이제 9절에서는 알았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성령이 임하셔야 한다는 것과, 그렇게 성령이 임하실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내가 증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증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증인이 주체가 아니라 증인으로 세우시는 하나님이 주체인 것입니다.
왜 사도 바울이 먼저 사도 된 자들에 대하여 유력하다고 하면서도 그들이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도로 삼으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사실을 다른 사도들이 보았다는 말로 하고 있는가? 단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함으로 자신이 전하고 있는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의 복음이 거짓 형제들의 주장처럼 거짓이 아니라 진리임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복음이 먼저 사도 된 자들과 전혀 다른 복음이 아니란 것을 본문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먼저 사도 된 자들과 다른 복음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 본문 9절에서는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고 전하는 것입니다. 핵심은 다른 사도들, 특별히 대표적인 인물로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을 언급하면서 그들에 대하여 기둥 같이 여기는 자들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들이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야고보는 갈라디아서 1장 19절에 나오는 ‘주의 형제 야고보’인데, 지난 번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주의 형제’라는 말 때문에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 야고보라고 생각해선는 안 됩니다. 육신의 형제가 아닌데도 ‘친구’(요15:14) 혹은 ‘형제’(히2:11)라 부르십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라고 할 때 기둥 같다고 할 수 있는 대상은 사도 외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엡2:20)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야고보는 사도 야고보이고, 사도로서 야고보는 두 명이지만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일찍이 순교를 했기 때문에(행12:1-2) 또 다른 야고보인 알패오의 아들로 이해하는 것이 정당할 것입니다. 게바는 베드로이고, 요한은 일찍이 순교한 야고보의 육신의 형제입니다. 그들이 사도 바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7절에서는 먼저 사도로 세워진 자들과 같음을 보았고, 그래서 8절에서는 사도로 삼으셨다는 것을 확신했고, 그 결과 9절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다르지 않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친교의 악수를 한 것입니다. 사도 가운데 누구도 그가 전하는 복음에 대하여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만난 적은 없지만, 3년 만에 만날 때도 두 사람 외에는 없었지만, 또 14년 후에 만났다고 하는 여기서도 모든 사도와 다 만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렇게 사도들과 만나고 예루살렘의 장로들과도 만나면서 복음의 교제를 할 때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교제의 악수란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갈라디아서를 살피면서 계속해서 말씀드리고 있지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자들과 그런 은혜에 인간의 공로를 조금이라고 섞는 자들이 교제의 악수를 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할 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은혜는 인간의 공로를 철저히 거절합니다. 거절해야지만 은혜가 은혜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인간의 공로를 섞는, 그러면서도 은혜를 말하는 자들과 어떻게 교제의 악수를 할 수 있겠습니까? 신학으로 말하자면 개혁신학을 가르치는 자들과 그렇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교제의 악수를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개혁신학을 표방하는 교단 안에 개혁신학과 다른 신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어서 노회 때 만나기도 하고 그 안에서 교제하는 일이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교제의 악수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복음의 일치는 중요합니다. 단순히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말로 복음을 다 말한 것이라고 할 수 없고, 그것으로 일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펠라기안주의를 거절할 수밖에 없는가? 또한 반펠라기안주의를 거절할 수밖에 없는가? 복음의 진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교회 역사 안에서는 개혁주의와 루터주의가 갈라지게 되는데, 다른 문제가 아닙니다. 성찬에 있어 일치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529년 루터 측과 쯔빙글리 측이 마부르크(Marburg) 회담을 통해 15가지 조항을 내놓으면서 14가지는 일치를 보았지만, 마지막 성찬에 있어 일치를 보지 못함으로 결국 다른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문제, 인간의 타락과 죄,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 성령의 사역, 선행과 은혜, 말씀의 권위 등 대부분의 교리에서는 일치를 보았지만, 성찬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빵과 포도주이 실제로 임재하는가, 하지 않는가의 차이로 함께 길을 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면 “이게 뭐라고!”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진리의 문제이기 때문에 함께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성경 진리에 대하여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변경하는 일들이 있는데, 주의해야 합니다. 저희 교단에서 매년 11월에 신학강좌가 열리는데 올해 주제가 “여성 안수,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저희 교단의 입장은 성경이 여성 안수에 대하여 허락하지 않는다는 쪽입니다. 그러나 많은 교단들이 여성 안수에 대하여 허락하는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특히 저들의 입장은 성경에 기록된 부분에 대하여 특정 교회에 대한 것이지 오늘날 교회로까지 적용할 수 없다고 해석합니다. 즉 바울의 가르침은 보편적이기보다는 어떤 특수한 상황 속에서 명령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갈라디아서 3장 28절의 말씀과 같이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는 말씀 등을 보편적 원리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얼마나 성경 해석이 중요한지를 알려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는데, 예수님의 말씀으로 하자면 조상의 전통이요, 사람의 교훈일 뿐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아무렇게나 교제의 악수를 할 수 없습니다. 다른 복음인데도 교제의 악수를 할 수 있느냐? 진리에 있어 다른데도 교제를 악수를 할 수 있느냐? 결코 없습니다. 그러나 먼저 사도로 부름 받은 자들과 뒤에 부름 받은 바울이 교제의 악수를 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복음이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전하는 진리의 내용이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의 서신에서 어떤 말까지 하느냐? 베드로후서 3장 15절과 16절입니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15절 말씀처럼 그가 전한 것과 베드로 자신이 전한 것에 차이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16절에서는 사도 바울의 편지 내용 중 더러 알기 어려운 것도 있다고 말합니다. 알기 어렵다고 해서 다른 복음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표현한 말로 하자면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일 뿐입니다(고전3:5).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다른 분량으로 주셨을 뿐이지, 다른 분량으로 주신 것이 다른 복음은 아니란 것입니다. 베드로를 유대인의 사도로,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신 것도 다른 복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같은 복음을 다른 대상을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일 뿐입니다. 공통점은 뭐냐? 같은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왜 같은 복음이냐? 복음의 주체가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10절에서는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고 전하는데, 저들이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은 없고 도리어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교제의 악수를 하였다고 하면서 다만 이렇게 부탁했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하라. 그런데 이것도 본래부터 힘써 행해 왔던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들이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다고 할 때 복음만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의 마땅한 실천까지 더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먼저 사도로 부름 받은 자들과 독립적으로 바울은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3년 동안 예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가룟 유다가 빠짐으로 맛디아가 들어왔지만, 그가 사도로 세워진 조건은 이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행1:21-22) 열두 제자만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것이 아니라 그 외에도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세워진 것입니다.
반면 바울은 이런 조건과 거리가 멉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에 유대인들을 위한 사도들 외에 특별히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세우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열 두 사도에게 가르친 바와 동일한 가르침을 계시로서 알려주셨고, 또한 구약 성경을 통해 깨닫게 하시면서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복음만이 아니라 지금 10절에 의하면 복음에 합당한 열매가 무엇인지까지 동일한 내용으로 알게 하셔서 실천하게 하셨던 겁니다.
다른 사도들과 비교해 사도 바울의 독립성은 결코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성이 아닙니다. 다른 사도들이 철저히 하나님께 매여 있었던 만큼 그도 하나님께 매여 있는 자로서 독립되게 세우신 것입니다. 거짓 선생들은 이런 바울에 대하여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마치 그들은 먼저 사도 된 자들 편에 서 있는 것처럼, 반면 바울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다른 사도들과의 교제의 악수를 통해 확증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저들의 복음의 진리와 내가 전하고 있는 복음의 진리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 수밖에 없는가? 복음의 진리를 저들과 나에게 주신 하나님이 같은 하나님이고, 그런 진리를 저들과 나에게 주시기 위해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도 같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 그들은 철저히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 안에서 하나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의 교제, 교회의 교제는 하나님이 기준이 되고 있는가? 하나님의 진리가 중심이 되고 있는가? 그리고 오늘 본문 10절에서처럼 그런 진리를 따라 실천함에 있어서도도 하나 됨이 나타나고 있는가? 이런 기준에 비추어 보면, 특히 개혁신앙을 가진 교회가 그렇지 않은 교회와 교제하기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철저한 은혜보다는 그런 은혜와 함께 인간의 공로를 여전히 열어두는 가르침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개혁신앙을 선물로 받은 자들은 엘리야와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길을 걸어갈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회심 후 3년 동안 사도들과 교제한 적이 없었습니다. 3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지만 두 명의 사도와만 교제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14년 혹은 17년 만에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꽤 오랜 세월 동안 사도들과 눈에 보이는 교제 없이 사역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일을 멈추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직접적인 교제는 14년 혹은 17절 만에 다시금 일어났지만, 동일한 복음이라는 측면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교제가 그들 가운데는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누구도 예외 없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복음, 같은 진리라면 직접적인 교제가 없을지라도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교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19:18) 우리는 다 알 수 없지만, 과거에도 우리와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서로 얼굴을 보며 교제하지 못하더라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서 진리 안에서는 이미 교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와 진리 안에서 교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우리는 이 길을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물론 내 힘과 능력으로 가는 것은 아닙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진리를 따라 그가 우리와 동행하심으로 그렇게 갈 수가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의 남은 생은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 안에서만 걸어가도록 묵묵히 기도하면서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고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가 늘 주체로 계심을 알고 그분의 영광에 합당한 것만을 내놓겠다는 마음으로, 그리고 그분의 뜻이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있다고 할 때 교회의 유익을 위해 걸어가야 합니다. 거기에 바울이 말하고 있는 은혜와 평강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