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 법무장관의 첫 해외 나들이 진실을 보고 오기를 바란다 서애 류성룡 선생이 쓴 [징비록]에 의하면, 1591년 (신묘년 선조 24년) 봄 일본에 통신사로 갔던 첨지 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황윤길을 상사(上使)로 하고 사성(司成) 김성일을 부사로 한 일행이 돌아왔다. 그들은 1590년 3월에 평의지 등 일본인의 안내를 받으며 떠나 1년 만에 돌아온 것이었다. 그들은 일 년간 온갖 고초와 수모를 겪으면서 일본의 정국 사정을 두루 살피고 돌아와 복명(復命)하였다. 이때 황윤길이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보고했지만, 김성일은 “신(臣)은 그러한 정세가 있는 것을 보지 못했나이다.”라고 보고했다. 어전회의가 끝나고 서애 류성룡 선생은 김성일에게 물었다. “그대의 말은 황사(황윤길)의 말과 같지 않은데 만일에 병화가 발생하면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하고 물었다. 이에 김성일은 “나 역시 어찌 왜적이 끝내 동병(動兵)치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겠는가마는, 다만 황윤길의 말이 너무 지나쳐 중앙과 지방의 인심이 놀라 당황할 것이므로 이를 해명했을 뿐입니다.”라고 했다 임진왜란이 있기 전 조선은 치열한 당쟁 속에서 진실과 정의보다는 당리당략에 의해 국론이 좌우되는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 결과는 왜란으로 전국이 순식간에 초토화되는 비극을 겪게 되었다. 사실 당시 조선은 치열한 당쟁으로 곪을 대로 곪은 상처투성이의 나라였기 때문에 김성일의 허위보고가 아니었더라도 달리 수습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진실한 보고가 있었다면 대비를 조금이라도 더 했을 것이라는 가정이 성립한다. 여기서 허위보고로 역사의 죄인 취급을 받아 온 김성일의 언행에 주목해 보자. 당시 황윤길은 서인에 김성일은 남인이었다. 김성일의 허위보고는 치열한 당쟁에 의한 정치적 이해관계가 진실과 정의를 팽개쳐 버리게 한 것이었다. 인간이 세상과 사물을 보는 눈은 각자 다르다지만 어떤 일이든 어떤 상황이건 정치적 이해관계와 목적이 지나치면 자기 편의대로 해석하고 바라보게 되어 있다. 만약 정치적으로 중요한 결정을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그렇게 보고 말한다면 역사에 큰 죄를 저지르게 되어 있다. 김성일의 허위보고는 전실과 정의의 눈과 입을 동원하지 않은 결과는 역사에 큰 오점을 남길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미국으로 첫 해외 출장에 나섰다고 한다. 특히 미국 FBI 국장을 만나 수사 공조를 논의하고 공직자 인사 검증기구 운용 등 브리핑을 받을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더불어민주당이 ‘검수완박’관련법을 강력하게 밀어붙이며 내세웠던 중대범죄수사청을 만들어 ‘한국형 FBI’로 자리매김하도록 하겠다는 것에 대한 현실성 있는 대항 논리를 찾아오기 위함이라고 한다. 또 7월 초까지 유엔본부, 미국연방 검찰청, 법무부, 교정기관 등을 두루 방문한 뒤 귀국하여 한국의 법무행정 개혁에도 참고할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한 장관의 행보가 주목된다. 다만 한 장관이 미국의 여러 법무 기관을 보면서 정치적 목적과 이해관계가 아니라 정의와 진실의 눈으로 보고 한국의 법무행정 개혁에도 사심 없이 적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특히, 미국의 여러 법무행정과 FBI에 대하여 편의대로 보고 오지 말고 실질적인 운영 방식을 보고 오길 바란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FBI는 독립적인 수사기관이라고 한다. 만약 진실과 정의보다 정권의 구미에 맞게,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서만 보고 해석한다면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정치인이 진실과 정의의 눈과 입을 버리면 역사에 죄를 짓는다. 통신사 김성일의 어전 보고가 떠올라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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