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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좌참찬(左參贊) 정세규(鄭世
)씨가 그의 할아버지 우의정(右議政) 나암공(懶菴公)의 행적, 역임한 벼슬, 참소를 당한 전말에 대해 행장(行狀)을 만들어 가지고 눈물을 흘리며 나 한양(漢陽) 조경(趙絅)에게 주고 말하기를, “우리 할아버지가 선조(宣祖)의 인정을 받고 일찍이 일신의 이해를 돌보지 않는 충절을 드러내어 나라의 기둥과 주추 같은 충성스러운 신하가 되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기축년(己丑年, 1589년 선조 22년)에 구무(構誣, 터무니없는 말을 꾸며 속이는 것)를 당하여 북쪽 변방에 유배되었다가 졸하시어 장선(葬鮮, 순명을 완전히 누리지 못한 자의 장례)으로 돌아오게 됨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지금까지도 고급 관리들 사이에 그 일을 들은 사람들은 너나없이 두어 줄의 눈물을 흘리는데, 더구나 그의 자손들의 마음은 오죽하겠는가? 오직 다행히도 선조(宣祖)의 성명(聖明)한 바가 일월(日月)과 같아 어느 으슥한 곳도 통촉하지 않은 바가 없는 바람에 특별히 할아버지의 관작을 회복시켜 준 지 지금 50년이 되었다. 지금 규식으로 보아 묘역에 비(碑)를 세워 그 사실을 자세히 기록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백부(伯父) 참판공(參判公)이 중년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난 바람에 가승(家乘)에 완전하게 기록된 것이 적고 또 나는 늦게 태어나 가정의 가르침을 십분의 일도 들어보지 못하였으므로 지금 작성한 행장이 실은 풍당(馮唐)이 대부(大父) 때의 일을 잘 말1)한 것보다 더 못하였으니, 부끄럽다. 그러나 나의 나이가 이미 많아졌으니, 만약 나의 세대 때 우리 할아버지의 일을 밝혀 드러내지 않는다면 십분의 일마저 인멸되어 어리고 우매한 후손을 경계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이점을 두려워한 나머지 감히 우리 선세(先世)의 신령(神靈)을 빌려 불후(不朽)의 일을 그대에게 부탁하오니, 그대는 애긍하게 여기기 바란다.”고 하였다. 불녕(不佞)이 그 일에 대한 적임자가 아니라고 누차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기에 행장을 살펴보았다.
기축년 봄에 공이 병조 판서(兵曹判書)에서 상국(相國)으로 승진하였는데, 그해 겨울에 재령 군수(載寧郡守) 박충간(朴忠侃)이 고변(告變)하여 정여립(鄭汝立)이 반역을 꾀하였다고 하였다. 그때 세상이 오래도록 태평한데다가 불의에 변고가 생기어 상하가 발칵 뒤집히니, 임금도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이 마음속으로 인심을 진정시키려고 나아가 아뢰기를, “그가 비록 하늘을 무시하고 다니지만 하나의 미친 도적입니다. 당당(堂堂)한 국가가 그들을 섬멸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오히려 공이 외면상 큰소리만 치는 것으로 생각하여 안색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 그때 정철(鄭澈)이 한산한 직책에서 기용되어 조정에서 선언(宣言)하기를, “정 아무개 형제는 역적의 종인(宗人)이므로 옥사의 조사를 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대체로 나라에 큰 옥사가 있을 경우에는 삼정승(三政丞) 가운데 한 명을 명하여 위관(委官)으로 일컫는 것은 고사(故事)였다. 대간(臺諫)이 정철의 지시대로 공을 탄핵하여 공이 위관에서 사임하여 체차되고 공의 형 정언지(鄭彦智)도 의금부 당상(義禁府堂上)에서 체차되었다. 정철이 공을 대신해서 위관이 되자 또 대관(臺官)을 사주하여 공을 탄핵하여 의정(議政)을 파직하였다. 이에 공을 옭아 넣으려는 자들이 벌컥 일어나 참소하는 말이 끝이 없었다.
역적의 조카 정집(鄭緝)이 거짓으로 조정의 인사 수십 명을 끌어들였는데, 공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성균관(成均館) 유생들이 이로 인해 상소를 올려 공을 매우 비방하였다. 처음에 공이 위관을 사양할 적에 상소하여 말하기를, “신은 역적과 취향이 다르고 연배가 같지 않으며 서로 서울과 시골로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평소에 서로 찾아보지 않는다는 것은 온 나라 사람들이 다같이 아는 바입니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뒤에 역적의 집에서 문적(文籍)을 수색할 때 그 가운데 공이 안부를 묻는 조그만 편지 하나가 있었으므로 양사(兩司)가 드디어 공이 임금을 속였다고 탄핵하여 공을 하옥하여 대질심문(對質審問)을 하였다. 이어 처음에는 도성문 밖으로 축출하고 중간에는 부처(付處)하고 결국에는 남해(南海)로 유배하였다. 정집이 형장(刑場)에 임하여 큰 소리로 말하기를, “나에게 ‘사람을 많이 끌어들이면 네가 살수 있다.’고 꾀여놓고 지금 어찌하여 나를 죽인단 말인가?”라고 하니, 이에 사람들이 모두 다 옥사를 주관한 자가 어리석은 자를 꾀여 능란한 솜씨로 사적인 원한을 갚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일찍이 공이 도순찰사(都巡察使)가 되었을 때 정철이 그때 방백으로 있으면서 계집을 끼고 술에 빠져 변방의 두려움을 걱정하지 않고 있었으므로 공이 조금도 용서하지 않고 그 나태한 것을 질책하였다. 대체로 정철이 몰래 비방하고 중상하며 앙심을 품은 것은 이 일로 인해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경인년(庚寅年, 1590년 선조 23년)에 옥사가 다시금 확대되어 이발(李潑) 등 여러 사람이 모두 옥중에서 죽었고, 최영경(崔永慶)은 재차 하옥되어 음식을 먹지 않고 죽었으며, 정개청(鄭介淸)은 전정(殿廷)에서 곤장을 맞고 유배지에서 죽었다. 나주(羅州) 사람 양형(梁泂)과 천경(千頃) 등이 또 상소하여 “정 아무개가 위관(委官)이 되었을 때 고변한 10여 명을 참수하려고 하였다.”고 하니, 정철이 아뢰기를, “고변한 자를 참수하려는 것은 옥사를 번복하려는 수단이므로 그 죄는 용서하기 어렵습니다.”고 하였다. 강해(姜海)가 또 뒤따라 상소하여 “정 아무개가 귀양을 갔을 때 최영경의 문도(門徒)들이 날마다 정 아무개가 있는 곳으로 찾아와 위로하지 않고 축하를 하였으니, 그 뜻을 헤아리기 어렵다.”고 하였다. 이는 대체로 최 수우(崔守愚)가 일찍이 시원스럽게 정철을 소인으로 지목했고 또 공과의 교분이 돌과 같이 견고하였기 때문에 함께 법망(法網)에 밀어 넣으려는 것이었다.
이윽고 또 비밀스럽게 급히 아뢴 것처럼 꾸며 대궐의 문을 잠근 뒤에 문틈을 통해 계사(啓辭)를 올렸는데, 그 계사에 “역적과 짜고 임금을 속였으니, 종사(宗社)를 저버리고 임금을 멸시하였을 뿐만 아닙니다. 최영경과 정언신은 실로 역적의 심복입니다.”고 하였다. 이에 공이 또 의금부에 구금되었다. 아! 전(傳)에 말하기를, “병(兵)은 뜻보다 더 참혹한 것이 없고 칼은 그 다음이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위관의 뜻이 공을 해치려고 하였다면 그의 무리들이 날로 더욱더 아부하고 빌붙어 서로 도와서 선동하였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옛날 강후(絳侯, 한(漢)나라 때 주발(周勃))가 반역으로 고발되어 감옥에 구류되어 있을 적에 종실(宗室)의 여러 사람들은 감히 말하지 못하였으나 원앙(袁盎)이 강후가 죄가 없다는 것을 밝혀주어 강후가 풀려났다. 그러나 강후는 자신이 반역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므로 사람들이 정말로 쉽게 말할 수 없지만, 공의 경우에 있어서는 연좌된 바가 다만 역적과 같은 일가일 뿐이므로 그 일의 억울함이 강후보다 배나 더 된다. 그 당시에 삼공(三公)의 위치에 있는 자들은 평소 글을 읽고 도리를 말할 적에 원 사(袁絲, 원앙(袁盎))의 아래에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는 것은 물어볼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런데 끝내 한 번 입을 열어 공의 무고한 바를 밝혀주지 않았으니, 아! 세도(世道)가 낮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권력을 잡은 간신의 세력이 불꽃처럼 치성하여 뜨거운 불보다 더하여 사람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또한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연평군(延平君) 이귀(李貴)는 그 당시에 일개 포의(布衣)였었지만 ‘정 정승(鄭政丞)이 역적과 서로 안다는 것으로 연좌시킨 것은 매우 억울하다’고 항의하여 자신이 증인이 되는 것을 꺼리지 않았고 심지어는 도보로 파주(坡州)까지 걸어가 성 우계(成牛溪)에게 상소하여 해명해 구해줄 것을 극력 요청하였다. 그 일이 비록 시행되지 않았지만 편당을 짓지 않는 군자(君子)라고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뒤에 길망2)(吉網)으로 재갈을 물리고 남을 무함하여 죄에 얽어매는 참언(讒言)을 끼고서 좌우에서 한창 강대하였는데, 공이 큰 죄를 벗어난 것은 천운이었고 임금의 은혜였다. 삼사(三司)에서 공을 다시 국문할 것을 요청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역적의 공초에 ‘병기(兵器)를 나누어 정언신에게 보냈다.’고 하였는데, 그 수량을 물어보자, 긴 화살 한 부(部)였다고 하니, 정말 일소(一笑)거리도 되지 않는다. 역적의 공초에 먼저 정언신과 신입(申砬)을 죽인 뒤에 군대를 일으킨다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보아 마땅히 정언신의 죄를 용서해야 할 것이다.”고 하는 등의, 연이은 수백 마디의 말씀이 공의 일생 충심을 들추어낸 것으로서 혁혁하게 사람의 이목을 비추었으니, 비록 공으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라고 하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여러 날 동안 그치지 않고 국문할 것을 요청하자 또 비답을 내리기를, “나로 하여금 대신(大臣)을 죽였다는 이름이 없도록 하라. 대신으로 하여금 옥중에서 병들어 죽게 하는 것을 경들이 어찌 차마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등 성상의 하교가 이처럼 정녕하고 통절(痛切)하였으니, 공이 비록 만 번 죽음을 당하더라도 어찌 한이 있겠는가?
신묘년(辛卯年, 1591년 선조 24년)에 이르자 임금의 총명이 시원스럽게 간파하여, 여러 참소하는 입들이 조금도 봐주지 않은 상황 속에서 천경ㆍ강해ㆍ정집 등을 설득하고 협박하는 일을 꼬집어내어 그들의 수족이 전부 다 드러났으니, 공의 억울한 바가 하소연을 하지 않아도 씻어졌다. 기해년(己亥年, 1599년 선조 32년)에 평천 부원군(平川府院君) 신집(申磼)이 임금을 면대했을 때 ‘공이 임금을 속였다’는 것이 매우 억울하다고 두루 개진하였고, 공조 판서(工曹判書) 신점(申點)이 이어서 나아가 아뢰기를, “정언신의 둘째 아들 정율(鄭慄)은 효자입니다. 그의 아버지 문전에 정여립이 찾아간 자취가 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를 대신해 스스로 변명하는 소(疏)를 지었다가 그의 아버지가 도리어 임금을 속인 죄를 당하자 밥을 먹지 않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습니다.”고 하니, 임금이 한참 동안 측은하게 생각하였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공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라는 명이 하달되었다.
공의 휘(諱)는 언신(彦信)이고 자(字)는 입부(立夫)이며 스스로 지은 호는 나암(懶菴)이다. 그의 선조는 동래(東萊) 사람인데, 고려조 좌복야(左僕射) 정목(鄭穆)이 시조이다. 그 뒤에 정가종(鄭可宗)이란 분이 목은(牧隱) 이색(李穡)을 스승으로 섬겼는데, 이색이 자설(字說)을 지어주어 진퇴의 의리를 권면하였고 벼슬이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정수홍(鄭守弘)은 문장을 지을 적에 아버지의 기풍이 있었고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에 그치었는데, 이분이 공의 고조(高祖)이다. 정수홍의 아들 정걸(鄭傑)은 홍주 판관(洪州判官)을 지내고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아들 정홍손(鄭洪孫)은 도총부 경력(都摠府經歷)을 지내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고, 그의 아들 정진(鄭振)은 예조 좌랑(禮曹佐郞)을 지내고 영의정(領議政) 및 그에 따른 겸직을 추증받았는데, 공이 귀하게 되어 3대에 걸쳐 벼슬이 추증된 것이다. 어머니 증 정경 부인(貞敬夫人)은 바로 양천 허씨(陽川許氏)로 부윤(府尹) 허확(許確)의 딸이자 우의정(右議政) 충정공(忠貞公) 허종(許琮)의 손녀이다.
공이 태어나자 풍채와 골상이 빼어나고 시원하여 보통아이들과 달랐다. 15세가 되기 전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 스승에게 나아가 공부할 겨를이 없었고 조금 자라자 스스로 과정을 정해놓고 공부하여 쉬지 않고 글을 읽었다. 가정(嘉靖) 병인년(丙寅年, 1566년 명종 21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승문원(承文院)을 거쳐 사국(史局)에 선발되어 들어가니, 명성이 자자하였다. 상국(相國)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이 사람을 알아보는 식감(識鑑)이 있어 공을 나라의 그릇으로 허여하고 항상 말하기를, “나를 대신할 사람은 정언신뿐이다.” 하고, 통천서대(通天犀帶)를 주며 “이것이 그 뜻이다.”고 하였다.
만력(萬曆) 기묘년(己卯年, 1579년 선조 12년)에 사간(司諫)에서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승진하였다가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전직되었다. 특별히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여 함경도 절도사(咸鏡道節度使)가 되었다. 이는 대체로 공이 문무의 재능을 겸비하여 금중(禁中)에서 장수감으로 비치해 놓은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었다. 공이 부임하자 변방의 업무를 조사하여 열 가지 중에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 변방의 백성들과 가까이 접하여 생활하여 위엄과 은혜가 병행되었으니, 망루(望樓)가 정비되고 군진(軍陣)이 성대한 것은 말할 것조차도 없었다. 또 남은 힘으로 녹둔도(鹿屯島)와 구탈지(甌脫地)에다 둔전(屯田)을 시작하여 해마다 큰 풍년이 들었는데, 군사가 배부르고 말이 살찐 것이 실로 여기에 말미암았다고 한다. 번방에 귀화한 호인(胡人)들이 또한 공의 은혜와 신의를 사모하여 아들을 낳으면 공의 성명으로 이름을 지어 마치 가부3)(賈父)와 같이 하였다. 임기가 차자 조정으로 들어가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옮기었고 다시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자 사임하였다.
계미년(癸未年, 1583년 선조 16년)에 이탕개(泥湯介)가 변새를 몰래 침범하여 보(堡)를 집어삼켰다는 급보가 전해지자 조정의 의논이 모두 공을 추대하였으므로 공을 우참찬(右參贊)으로 발탁하여 함경도 도순찰사(咸鏡道都巡察使)를 겸임시키었다. 공이 곧바로 경기(京畿)의 부절을 풀어놓고 출정하기 전에 하직 인사를 드리니, 임금이 운검(雲劒)을 하사하여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도록 하였다. 공이 도성의 문을 나가기 전에 위엄의 명성이 이미 북변에 퍼졌다. 옛날 허 충정공(許忠貞公, 허종(許琮))이 도순찰사로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였을 때 또한 운검을 하사받았는데, 공은 허씨의 외손이므로 그 일을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탄식하며 기이한 일이라고 하였다. 공이 북관(北關)으로 들어가 여러 장수들을 모아놓고 일을 분담시켜 삼군(三軍) 중에 추위에 떠는 사람은 솜옷을 입히니, 겁쟁이는 용맹스러워지고 교만한 자는 두려워할 줄을 알았다. 이에 호령을 엄숙하게 하고 상벌을 반드시 믿게 하니, 싸우지 않고도 적병의 잔당들이 죽기로 갑자기 멀리 달아나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공이 또 사람을 잘 알아보았는데, 공의 막하에 들어간 이순신(李舜臣)ㆍ신입(申砬)ㆍ김시민(金時敏)ㆍ이억기(李億祺) 같은 사람들은 모두 명장(名將) 중에 으뜸간 장수였다.
변방 일이 끝나갈 무렵에 또 관찰사로 바꾸어 명하고 인해서 북문(北門)을 진정시키도록 하였다. 한참 뒤에 북방에 사신으로 갔던 자가 돌아오자 임금이 공의 기력이 어떤지 물었는데, ‘정언신은 쇠약하여 백발이 되었다.’고 대답하니, 선조가 곧바로 소환하라고 명하여 병조 판서로 임명하였다. 이는 전(傳)에 이른바 ‘신하를 수족처럼 여긴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공이 특별한 예우에 감격한 나머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임금을 받들어, 임금만 위하고 자신은 잊었으며, 나라만 위하고 가정은 잊었으며, 공적인 일만 위하고 사적인 일은 잊었다. 병조 판서로 있을 때 시행하고 조치한 바가 어느 하나도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고 생각을 짜낸 것이 아님이 없었다. 상국(相國)이 되었을 적에도 이러한 도리를 견지하여 한결같이 변하지 않았으니, 치아(齒牙)가 몰래 좌복(左腹)에 파고들어가 자리잡고 있다가 때를 기다렸다가 나와 기어코 사람을 죽이고야 말 줄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러나 공이 세상을 떠난 지 10여 년이 되지 않아 뇌우(雷雨)가 쏟아져 구천의 억울한 원한을 시원스럽게 씻어 주었으니, ‘천도(天道)는 친한 사람이 없고 항상 선인과 함께한다.’는 말이 어찌 거짓이겠는가?
공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바로 신묘년(辛卯年, 1591년 선조 24년) 10월 모일로 태어난 정해년(丁亥年, 1527년 중종 22년)으로부터 계산하면 향년 65세였다. 그 이듬해 봄에 금양(衿陽) 모향(某向)의 묏자리에다 장례를 치렀다.
부인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좌의정(左議政) 문희공(文僖公) 신개(申槩)의 후손이자 사직(司直) 신예(申禮)의 딸로 만력(萬曆) 을미년(乙未年, 1595년 선조 28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태어난 계사년(癸巳年, 1533년 중종 28년)으로부터 계산하면 향년 63세였다. 그해 가을에 공의 묘소 곁에다 부장하였다가 정미년(丁未年, 1607년 선조 40년) 겨울에 장단(長湍) 아무 곳에다 다시 자리를 잡아 합장(合葬)하였다.
공은 피부가 희고 키가 크며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수염이 신(神)과 같아 돌아보면 무리에서 뛰어났다. 가정의 행실이 천성으로 타고나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3년간 시묘(侍墓) 살이를 하면서 조석으로 제전(祭奠)을 드리되, 몸소 밥을 짓고 노복을 시키지 않았다. 귀하게 되어 관사에서 땔나무를 가져온 것을 보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옛날에는 어버이 방에 불을 제대로 때지 못하였는데, 지금 땔나무가 있으니, 어버이가 계시지 않는다.”고 하였다. 종손(宗孫)이 가난하여 가정살림을 꾸리지 못하자, 자신의 녹봉을 떼어주고 사당(祠堂)을 지어주었다. 백형(伯兄)과 중형(仲兄)을 사랑과 공경을 다하여 섬기면서도 과실이 있으면 반드시 규계(規戒)하였으며, 그들의 노복을 한결같이 자신의 노복처럼 거느렸다. 그리고 집에 있을 때 검소한 것을 좋아하여 의복과 거마(車馬) 그리고 차린 음식이 모두 소박하여 화려한 것이었으며, 부인의 예복(禮服)을 지을 적에도 겨우 올이 가는 베만 지급할 뿐이었다. 부인과 공이 백발이 되도록 서로 격려하였고 첩을 대하고 궁한 일가를 도와줄 줄 적에 하나도 공의 뜻에 순종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공이 충성과 능력을 다 쏟아 조석으로 국사를 보느라 가정에서는 문서를 보지 않고 가산을 조금도 불리지 않았는데, 부인의 내조(內助) 또한 많았다고 한다. 그 당시에 공을 비방한 자들이 백 대의 수레에 실을 정도뿐만이 아니었으나 감히 재화를 좋아했다고 덮어씌우지 못하였다. 공이 일생 동안 청렴하게 산 바가 어찌 옛 초(楚)나라 승상 손숙오(孫叔敖)에게 손색이 있겠는가? 이것이 마땅히 명(銘)을 쓸 만하다.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하늘이 선조(宣祖)를 위해 위대한 신하를 내려주니, 위대한 신하는 누구인가 바로 나암(懶菴)이었도다. 비유하자면 예장(豫章, 교목(喬木)의 미재(美材))이 하늘높이 치솟은 것 같으니, 조복에 패옥 차고 조정에 표상이 되었도다. 길보4)(吉甫)처럼 문무(文武)를 넉넉히 소유하니, 성상이 외부에 중용(重用)하여 조정을 떠났도다. 표범 꼬리가 달린 신기(神旗)가 변방에 임하니, 성난 말에 새로 굴레를 짜 결국 잘 탈 수 있었고, 영평(營平, 한 선제(漢宣帝) 때의 조충국(趙充國)을 이룸)처럼 둔전(屯田)을 건의하여 곡식이 남아돌았도다. 계미년(癸未年, 1583년 선조 16년)에 이르러 혜성 빛이 살기를 띠었는데, 거듭 여오(餘吾)를 무력하게 만든 것은 정말로 공의 위엄으로 인한 것이었도다. 변방에 세 번을 나가자 높은 벼슬이 돌아가니, 서대(犀帶)를 주어 사제(沙堤)가 축조될 것을 확신했도다.5) 일심(一心)을 오직 왕실에만 두고 있으니, 직사(職思)를 걱정을 하느라 침식을 잊었도다. 불의에 닥친 무함이 나를 옥사로 끌어들이니, 나의 말이 비록 일리가 있지만 대중이 떠들어대어 어쩔 수 없었도다. 동이를 이고 하늘을 우러러보자 하늘의 해가 밝아지니, 조정에서 입 벌리자 시비가 가려졌도다. 만 번 죽어도 아무런 유감이 없으니, 억울한 원한이 깨끗이 씻겨졌도다. 머리를 돌리는 순간 천리(天理)가 정해져 은혜가 백골에 미치었도다. 여러 손자들이 어질어 축적된 것이 발로될 것이니, 훌륭한 좌참찬이 공의 공렬에 대한 행장을 서술했도다. 화려한 명(銘)을 구하지 않고자 비루한 나에게 명을 부탁하니, 내가 외람스레 명을 쓰느라 긴 밤을 지새웠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