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하늘에 상서로운 별과 구름이 없던 적은 없으나 그것이 항상 출현하는 것은 아니어서 천백 세대의 간격으로 어쩌다 한 번 나오는데, 그럴 때면 사람들은 어깨를 포개고 눈을 비비면서 행여 놓칠 것처럼 그 광경을 보고자 원한다. 그러다 홀연 그 모습이 감추어지면 하계(下界) 사람들의 탄식과 앙모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그칠 줄 모르는바, 이는 인정상 누구나 자연스레 공유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하늘이 지극한 보배를 사랑하고 아낀 나머지 사람들에게 오래 보여 주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어쩌겠는가. 내가 한림(翰林) 이공(李公)의 행장 앞에서 그 남겨진 빛을 우러르고 지나간 행적을 슬퍼하니, 그 탄식과 앙모는 별과 구름을 향하는 데 그칠 뿐만이 아니건만, 반딧불처럼 미약한 글을 가지고 홀연 감추어진 그 빛을 모사해 내는 것 역시 허망한 짓이 될 터이다. 비록 그렇다 해도 하늘이 지극한 보배를 가지고 하계 사람들의 우러르는 시선을 희롱하는 듯한 이 현실에 실로 유감이 없을 수 없으므로, 비록 200년이 지난 후라지만 그 전후의 사적을 찬술함으로써 굴자(屈子)의 〈천문(天問)〉의 뜻을 부치노라.
공의 휘는 구(久), 자는 정견(庭堅), 호는 후곡(後谷)이다. 그 선조는 한산(韓山) 사람으로, 문효공(文孝公) 가정(稼亭) 휘 곡(穀)과 문정공(文靖公) 목은(牧隱) 휘 색(穡)의 후예이다. 목은은 휘 종선(種善)을 낳았는데, 우리 조정에 들어와 지중추부사를 지냈고 시호는 양경공(良景公)이다. 이때부터 대대로 벼슬을 하였는데, 휘 지번(之蕃)은 호가 성암(省菴)으로, 김안로(金安老)를 논척하여 평해(平海)로 유배되었고, 사면되어 돌아오자 조정의 논의에 의해 백의재상(白衣宰相)으로 의망되었으나 마침 인종(仁宗)이 승하하는 바람에 실행되지 못하였다. 관직은 시정(寺正)에 그치고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한천부원군(韓川府院君)에 봉해졌는데 이분이 바로 공의 증조부이다. 조부의 휘는 산해(山海)로, 영의정을 지내고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호는 아계(鵝溪)이다. 황고(皇考)의 휘는 경전(慶全)으로 좌참찬을 지내고 한평군(韓平君)에 봉해졌으며 호는 석루(石樓)이다. 선비(先妣)는 안동 김씨(安東金氏)로 홍문관 교리 김첨(金瞻)의 따님이다. 의정공(議政公)이 성암공(省菴公)의 몸조리를 위해 종남산(終南山) 기슭에 작은 집을 지었는데, 그곳이 오송정(五松亭)이다. 토정(土亭) 문강공(文康公)은 곧 성암의 아우인데, 그 터를 보고는 말하기를 “도봉산(道峯山)의 문필봉(文筆峯)이 똑바로 와 비추니, 유년(酉年)과 술년(戌年)의 해에 자손 중 반드시 기재(奇才)가 태어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을유년(1585, 선조18)에 공의 형인 이랑공(吏郞公) 후(厚)가 태어났고 공이 또 만력(萬曆) 병술년(1586)에 태어났다. 날 때부터 남다른 자질을 타고나, 겨우 말을 하자마자 절로 문자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의정공이 일찍이 노량강(鷺梁江) 가의 집에 머물 적에 공을 무릎 위에 앉혀 놓은 채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마침 오리가 강물에서 자맥질하는 것이 보이자 공에게 시를 지으라고 명하니, 공이 즉시 “누가 흰 빛깔의 붓을 가지고, 물결 가운데 ‘을’ 자를 그려 놓았나.[誰持粉綵筆 乙字寫波心]”라고 응대하였는데, 이때의 나이가 5세이다.
또 포구에 물이 몹시 불어난 광경이 보이자 ‘내(來)’ 자를 골라 시를 지으라고 명하니, 즉시 “어젯밤 해문에 용들의 싸움 끝나자 옥비늘과 은갑옷이 조수 몰고 오네.[昨夜海門龍戰罷 玉鱗銀甲捲潮來]”라고 응대하였다. 이에 의정공이 기특하게 여기고는 거듭 탄식하기를 “그래도 싸움이 끝나지 않은 용이라고 하는 것만은 못하구나.”라고 하니, 온 세상에서 이 일화를 떠들썩하게 전하면서 다들 “아계 상공(相公)의 문하에서 신동이 또다시 태어났다.”라고 하였다.
참찬공은 공의 허약한 체질을 염려하여 교육과 독책을 무리하게 하지 않았으나, 공은 마치 주리고 목마른 사람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밤이고 낮이고 책을 마주하였다. 그런데 마음으로만 이해하고 입으로 읽지 않았기에 비록 집안사람조차 책 읽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고, 새벽에 문안하고 저녁에 잠자리를 챙겨 드리는 일이 아니면 서실을 나가지 않았기에 바로 옆방에 있는 자도 그 얼굴을 보는 일이 드물었다. 시를 지을 때에는 사람을 놀라게 하고 귀신을 울리는 시어를 만들었고, 문장을 지을 때에는 옛 작자(作者)를 힘써 추구하여 붓 들고 종이를 마주할 때면 그 문장이 마치 강하(江河)의 물결이 터져 바다로 흘러가는 듯하였다. 이랑공은 공과 1년의 차이를 두고 태어났는데 총명과 재능으로 보면 세상 사람들이 이난(二難)이라 칭하였다. 이랑공이 늘 말하기를 “나의 문장은 내 아우와 비교할 때 정밀하고 순수한 점에서는 엇비슷하나, 높고 심원한 점에서는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공은 16세에 별시(別試) 초시(初試)에서 장원을 차지하였다. 그런데 의정공은 장남인 정자공(正字公)이 빨리 현달하여 일찍 생을 마감한 것에 놀란 나머지 전시(殿試)에 응시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17세에 사마(司馬) 초시에 장원을 차지하고 이듬해 또 회시(會試)에서 장원을 차지하였다. 20세에 증광(增廣) 초시에서 장원을 차지하고 또 회시에서 장원을 차지하였다. 공이 과장에 들어설 때 제생은 빽빽이 둘러선 채로 공이 글 쓰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것을 장관으로 여겼고, 합격자 방(榜)이 나붙기도 전에 다투어 “이모(李某)가 분명 장원일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방이 나붙자 그 말이 과연 현실이 되었다.
이에 앞서 이랑공이 대과(大科)에 합격하자 참찬공이 의정공을 위하여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하려 하였다. 그때 의정공이 공의 이름을 부르고는 “모(某)가 반드시 이 경사를 이을 것이니, 동시에 함께 경축해도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는데, 이듬해 공이 정말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이때는 흉년으로 인해 공사(公私) 간에 잔치 모임을 열지 못하도록 금지령이 내려진 상황이었다. 그러나 선조는 공의 형제로 인하여 특별히 서울 집에 잔치를 하사하는 한편,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또 묘소에도 잔치를 하사하도록 하니, 이는 실로 세상에 드문 성대한 은전이었다. 전시에서 탐화랑(探花郎)으로 급제하여 장악원 직장(掌樂院直長)에 부직되고 괴원(槐院)을 거쳐 한림에 제수되는 한편 시강원 설서를 겸관하였다. 이후 휴가를 하사받아 호당(湖堂)에서 독서를 하였는데, 이는 당대의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선발이었다. 이때 이에 선발된 자 아홉 사람 가운데 공의 형제가 그 둘에 해당하였는데, 세상에서 그에 대해 딴말로 시비하는 이가 없었다.
병오년(1606)에 대부인이 세상을 떠났는데, 공은 마마를 앓아 목숨이 위태로웠던 관계로 세 달이 지나서야 그 소식을 듣게 되었고, 이에 공은 이것을 필생의 지극한 한으로 여겨 재기(再朞)가 지났는데도 세 달이 더 지난 뒤에 복제(服制)를 마쳤다. 그러는 동안 지극한 슬픔으로 몸이 상하여 앙상하게 뼈만 남은 상태에서도 소식(疏食)이 아니면 먹지 않았으니, 대개 죽을 때까지 공을 괴롭혔던 질병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하여 복(服)을 벗은 이듬해인 기유년(1609, 광해군1) 2월 26일에 서울 집에서 졸하였는데, 이 당시 나이가 겨우 24세였다. 임종할 무렵 시 한 편이 병상 자리 밑에 있었는데, 그 시에,
훌훌 나는 한 쌍의 학 봉래산에 내리니 / 翩躚雙鶴下蓬萊
일찍이 요지 향해 억겁 세월 지냈노라 / 曾向瑤池度劫灰
십 년을 강호에서 한만히 노닐고 / 十載江湖遊汗漫
한 가을을 성시에서 맘대로 배회했네 / 一秋城市任徘徊
하늘에 오랫동안 높이 날려고 했고 / 雲霄久欲高飛去
티끌세상 인연 없어 머리 숙여 먹이 쪼았네 / 塵土非緣俛啄來
돌아보매 세상엔 썩은 냄새 많으니 / 回首世間多腐臭
올빼미 부엉이 들은 서로 미워하지 말거라 / 鴟群鴞隊莫相猜
하였다. 참찬공이 그 시를 손에 쥐고서 눈물을 흘리며 “너는 어찌하여 혼자만 돌아가지 않느냐?”라고 하였다. 4년이 지나 이랑공 역시 세상을 떠났다. 이에 벼슬하는 선배들은 “모(某)의 형제는 지상에 유배되어 내려온 천상의 선인들이니, 티끌세상에 어찌 오래 머무를 수 있었겠는가.”라고 한목소리로 말하는 한편, 상서로운 세상의 난새와 봉황이 때마침 왔다가 때마침 떠난 것은 시운(時運)에 중대한 관련이 있는 일이라고 하면서 누구 하나 나라를 위한 탄식과 안타까움을 표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공은 행동은 단정하고 진중하며 의론은 정대하였다. 범속한 사람이 가까이 앉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비천한 말은 마치 제 몸을 더럽힐 오물처럼 여겼다. 고금 일의 득실(得失)이나 의심나는 부분을 만나면 언제나 의정공에게 질문을 드렸고, 의정공 또한 서로 논란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또 약관의 나이에 5번 과거에 장원함으로써 명성이 당대를 진동하여, 중외(中外)의 선비들이 찾아와 한번 뵙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형제가 때로 혹 성시(城市)를 지날 때면 온갖 기생집에서 일시에 주렴을 걷고서 먼저 보겠다고 다투었는데, 사람들은 혹 이를 두번천(杜樊川)이 양주(楊州)를 지났던 일에 비교하기도 하였다. 오봉(五峯) 이공(李公)은 의정공의 자리에 있을 때 칭찬하기를 “내한(內翰)의 문장은 흡사 대도시에 시장이 열렸는데 주옥과 비단과 화폐 등이 그 속에 가득 차 있어서 아무리 가져도 없어지지 않고 아무리 써도 바닥나지 않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한음공(漢陰公) 역시 “내한의 문사(文詞)는 물이 용솟음치고 산이 솟아 있는 격이다.”라고 하였다. 관해(觀海) 이공(李公)은 사람들에게 “만약 이 내한(李內翰) 형제가 만약 있었다면, 우리가 감히 문장을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공의 아우인 주봉공(酒峯公)과 예조 판서 과암공(果菴公) 또한 모두 문장으로 명성이 있었는데, 주봉공은 젊은 시절부터 노년까지 공의 문장을 마치 고문(古文)처럼 송독하였고, 과암공은 “우리 형님의 문장은 마치 동정호(洞庭湖)나 운몽택(雲夢澤)과 같아 그 끝을 볼 수 없다.”라고 하고 또 “우리 형님은 성리서(性理書)에서 터득한 경지가 심오하였기 때문에 문장에 발휘된 것이 넓고 컸다. 〈궁양달시책(窮養達施策)〉을 보면 가히 그 지닌 포부를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공은 비록 일찍 세상을 떠났으나 저술을 매우 많이 남겼다. 한원(翰苑)과 호당에서 지은 응제문(應製文) 및 남의 부탁을 받고 지은 것은 특히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는데, 그 모두 병자년(1636, 인조14)의 난리 때 소실되어 버려, 남은 246편만이 집안에 소장되어 있다.
아아, 공이 세상에 산 기간은 부딪치는 돌에 일어난 불꽃처럼 찰나에 지나지 않고 그 기간 중 또 3년은 상중(喪中)에 있었으니, 명리(名利)를 다투는 마당에서 노닐었던 세월 또한 얼마나 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명성이 혁혁하게 남아 전해져서 지금까지도 인구에 회자되니, 근원이 심원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런 대단한 일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배위는 완산 이씨(完山李氏)로 순녕군(順寧君) 이경검(李景儉)의 따님이다. 규방에서의 법도가 엄준하고 단정하였고, 시부모를 모시고 아버지 없는 어린 자식을 기를 때 지극한 사랑과 엄격한 가르침을 행하였다. 병자년에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난리를 겪은 뒤에는 노비들을 불러 모아 농사와 양잠에 무진 애를 씀으로써 집안 살림을 제대로 다시 일으켰다. 이에 시댁 친족이 모두 현부인(賢夫人)이라고 칭송하였다. 공보다 60년 뒤인 무신년(1668, 현종9)에 생을 마감하니 향년 81세이다. 공은 처음에 예산(禮山) 다지동(多枝洞)에 있는 의정공 무덤 왼편에 장사 지내고 뒤에는 단양(丹陽) 구담(龜潭) 묘좌(卯坐)의 언덕으로 천장되었다. 이 부인이 그 무덤에 함께 묻혔다.
공은 1남을 두었는데, 상빈(尙賓)이며 호는 항재(恒齋)이다. 문장으로 집안의 명성을 이었고 25세에 사마시에 입격하였으며, 또 대과에 장원 급제하였으나 참찬공이 고관(考官)으로서 그 이름을 합격 명단에서 삭제하였다.
상빈은 2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중 첫째는 창근(昌根), 둘째는 현감을 지낸 운근(雲根)이며, 딸 중 첫째는 성첨(成燂)에게 출가하고 둘째는 현감을 지내고 좌찬성에 증직된 조경창(趙景昌)에게 출가하였다. 좌찬성의 장녀가 경은부부인(慶恩府夫人)으로 바로 우리 인원왕후(仁元王后)를 낳으신 분이다. 측실에게서 1녀를 두었는데, 수사(水使) 이형진(李衡鎭)의 첩이 되었다.
창근은 부사 김수인(金壽仁)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바로 선원(仙源) 상공 김상용(金尙容)의 손녀이다.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 후사가 없다. 운근은 5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중 첫째는 덕운(德運)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과 주서에 천망되었으며 관직은 병조 정랑에 그쳤다. 둘째는 복운(復運)으로 성균관 생원이며 문장에 능하였고 호는 구주(龜洲)이다. 셋째는 득운(得運), 넷째는 명운(明運), 다섯째는 익운(翼運)이다. 딸 중 첫째는 사간 권호(權頀)에게 출가하고 둘째는 장령 박이문(朴履文)에게 출가하였다. 현손 이하는 많아 다 기록하지 못한다.
지금 조정에서 현달한 자는 5대손 중에는 전 좌윤(左尹) 수하(秀夏)가 있고 6대손 중에는 전 승지 경명(景溟)이 있다. 경명의 아우 전 도사(都事) 주명(柱溟)이 가첩(家牒)을 가지고 나에게 명(銘)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공에 대해 탄식과 앙모를 하던 자이므로 이에 명을 짓는 바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공이 한원으로 왔을 땐 / 公之來翰苑
호당의 신선이었고 / 湖堂之仙
공이 십주로 떠났을 땐 / 公之去十洲
삼산의 신선이었네 / 三山之仙
와서도 신선이고 떠나서도 신선이니 / 來而仙去而仙
그 무슨 원망할 게 있으랴마는 / 抑何怨乎
저 푸른 하늘이여 / 彼蒼者天
한스러운 건 하계의 쓸쓸함이니 / 所恨者下界寥落
누가 문단의 깃발과 북을 주관하랴 / 孰主張文苑旗鼓
비범함은 한 시대에 전해졌으나 / 奇傳一代
한은 천고에 남았구나 / 恨留千古
[주-D001] 굴자(屈子)의 천문(天問) : 굴자는 전국 시대 초(楚)나라 문장가 굴원(屈原)이며, 〈천문〉은 굴원이 조정에서 쫓겨나 산택을 방황할 때 우주의 모든 일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하늘에 묻는 내용으로 지은 작품으로 《초사(楚辭)》의 편명이다. 모두 180여 구이다.[주-D002] 아계 …… 태어났다 : 이구(李久)의 조부인 아계 이산해(李山海) 역시 신동으로 유명한 인물이므로 한 말이다. 이산해는 2세에 이미 물명을 한자로 부를 줄 알았고, 5세에는 지나친 공부를 염려한 숙부 이지함(李之菡)의 만류에 시로 응수하는가 하면, 11세에는 처음 과장(科場)에 나가 장원에 뽑힐 정도로 조숙한 천재였다. 《鵝溪李相國年譜》[주-D003] 이난(二難) : 난형난제(難兄難弟)를 이르는 말로, 형제가 모두 훌륭하여 서로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는 뜻이다.[주-D004] 정자공(正字公)이 …… 것 : 정자공은 이산해의 장남 이경백(李慶伯)을 가리키는바, 이경백이 1579년 19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시에 입격하고 1580년에는 문과에 합격하여 바로 홍문관 정자에 임용되었으나 그해 돌연 요절해 버린 것을 가리킨다. 《鵝溪李相國年譜》[주-D005] 탐화랑(探花郎) : 탐화사(探花使)라고도 하는데, 과거의 갑과(甲科)에서 3등으로 급제한 사람을 가리킨다. 1등은 장원(壯元), 2등은 방안(榜眼)이라고 한다. 《續通典 選舉3》[주-D006] 재기(再朞) : 상기(喪期)로 만 2년이 되는 때를 가리키며, 이는 곧 삼년상을 지냈음을 의미한다. 《예기》 〈상복소기(喪服小記)〉에 “재기의 상은 3년이다.”라고 하였다.[주-D007] 상서로운 …… 것 : 난새와 봉황처럼 어진 덕을 지닌 이후(李厚)와 이구(李久) 형제가 자연의 순환적 이치에 순응하고 생사의 지극한 도를 체득하여 아무런 망설임 없이 생애를 마쳤다는 뜻이다.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에 “때마침 온 것은 선생께서 올 때여서 온 것이고, 때마침 간 것은 선생께서 자연의 이치를 따른 것이다. 때를 편안히 여기고 순리에 따라 처신하면 슬픔이나 즐거움이 끼어들지 못한다. 옛날에 이것을 일러 상제가 매달려 있는 것을 풀어 주었다고 하였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08] 두번천(杜樊川)이 …… 일 : 두번천은 당(唐)나라 시인 두목(杜牧)으로, 두목이 강남의 번화한 도시인 양주에서 회남 절도사(淮南節度使) 우승유(牛僧孺)의 막료(幕僚)로 있을 적에 홍등가에서 마음껏 풍류를 즐기며 방탕하게 산 것을 말한다. 그는 풍채가 뛰어나고 문장이 훌륭하여 술에 취해 양주의 저자를 지나갈 때면 길가 청루(靑樓)의 기생들이 다투어 귤을 던져 그가 타고 가던 수레에 귤이 가득했다고 한다. 《詩林廣記 卷6 杜牧之 遣懷》[주-D009] 오봉(五峯) 이공(李公) : 이호민(李好閔, 1553~1634)으로,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효언(孝彦), 호는 오봉이다.[주-D010] 한음공(漢陰公) : 이덕형(李德馨, 1561~1613)으로,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ㆍ쌍송(雙松), 시호는 문익(文翼)이다.[주-D011] 관해(觀海) 이공(李公) : 이민구(李敏求, 1589~1670)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시(子時), 호는 관해ㆍ동주(東州)이다.[주-D012] 주봉공(酒峯公) : 이구의 첫째 아우인 이부(李阜, 1588~?)로,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춘대(春臺), 호는 주봉이다.[주-D013] 과암공(果菴公) : 이구의 둘째 아우인 이무(李袤, 1600~1684)로, 본관은 한산, 자는 연지(延之), 호는 과암이다.[주-D014] 동정호(洞庭湖)나 운몽택(雲夢澤) : 모두 거대하기로 이름난 중국 호남 지방의 호수이다.[주-D015] 명리(名利)를 다투는 마당 : 과거 시험장을 가리킨다.[주-D016] 공이 …… 신선이었고 : 이구가 과거에 합격하여 예문관에 봉직하고 사가독서를 하사받아 호당(湖堂)에서 독서한 것을 말한다.[주-D017] 공이 …… 신선이었네 : 이구의 죽음을 묘사한 것인데, 이구가 신선이 되어 선경으로 떠났다는 말이다. 삼산(三山)은 봉래(蓬萊), 영주(瀛洲), 방장(方丈)의 이른바 삼신산(三神山)이고, 십주(十洲)는 선인(仙人)이 거주한다는 10곳의 섬, 즉 조주(祖洲), 영주(瀛洲), 현주(玄洲), 염주(炎洲), 장주(長洲), 원주(元洲), 유주(流洲), 생주(生洲), 봉린주(鳳麟洲), 취굴주(聚窟洲)를 말한다. 《海內十洲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