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년(1775, 영조 51)에 천연두가 전역에 퍼졌을 때 고청거사(孤靑居士) 남군 필복(南君必復)이, 이씨 집으로 시집간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친정에 있는 현숙한 딸을 잃었다. 거사는 곡하기를 애통해하고 그 딸의 뜻과 행실이 민멸할까 슬퍼하여 편지를 보내서 나에게 묘지명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거사는 의령의 세족인데, 국초에 휘 재(在)가 있었으니 개국공신 영의정으로 시호가 충경공(忠景公)이다. 8대를 내려와 휘 이웅(以雄)이 인조반정을 도와 진무공신(振武功臣)에 책훈되고 좌의정을 지냈으며 춘성부원군(春城府院君)에 봉해졌으니, 거사는 곧 그 제사를 받드는 이손(耳孫)이다. 전주이씨에게 장가들어 영조 정축년(1757)에 한양에서 딸을 낳고, 뒤에 공주로 이사하였다.
딸은 어려서부터 유순하고 인자하며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였다. 오빠 영(泳)이 병치레를 잘 하여 모친이 늘상 걱정했는데, 오빠가 병이 들면 반드시 좌우에서 보살펴 친히 미음을 끓이고 약을 달였으며 옷에 띠를 풀지 않아 병이 다 나아도 여전히 해이하지 않았다. 제사를 지낼 때는 제기를 잡고 제수를 갖추느라 새벽까지 자지 않고 일을 마쳤다. 종족간에는 촌수가 가깝고 멀다는 이유로 후하거나 박하게 함이 있지 않았다. 경대에는 하나라도 사물(私物)을 간직함이 없었고, 매양 옷을 나누어 줄 때를 당해서는 어른을 대신하여 바느질을 하는데 반드시 남보다 먼저 시작하고 뒤에 그쳤다. 이로써 집안 사람들 상하와 내외의 친척들이 ‘현숙한 딸’이라고 칭찬하지 않음이 없었다.
18세에 칠곡(漆谷)의 이인운(李寅運)에게 시집갔는데, 이씨도 또한 광주(廣州)를 관향으로 하는 드러난 성씨였다. 그 선대에 휘 집(集)이 있었는데 호는 둔촌(遁村)이고 고려말의 명인이다. 석담(石潭) 윤우(潤雨)와 감사(監司) 원록(元祿)은 각기 그 7대조와 5대조이다. 부친은 동수(東洙)이다. 이씨가 중세에 영남으로 이주하여 종족이 커지고 성하게 되었으니, 영남에서 빛나는 종족을 일컬음에 반드시 돌밭[石田]의 이씨를 말하는데, 돌밭은 곧 이씨가 사는 마을 이름이다.
이듬해 10월에 딸이 오빠 영과 함께 동시에 천연두에 전염되었는데 자신은 병들지 않은 것같이 하고 마음을 다하여 보살피고 치료했다. 질병이 심해져서 힘쓰기 어려운 지경이 된 뒤에 비로소 누워 병색을 나타냈으니 이미 어찌 할 수 없었다. 드디어 남편의 집에서 온 서찰을 다 찾아서 일일이 살펴보고 간수하며 말하기를, “이미 남에게 시집간 처지이면서 남편의 집 문정(門庭)을 알지 못하니 이것이 한스러운 일이다.”하고, 또 그 부모에게 말하기를, “딸 하나의 죽음은 문호에 무관하니 원컨대 슬퍼하여 훼상하지 마십시오.”
하고는 곧 숨이 끊어지니, 바로 이 달 23일이고 이 때의 나이는 19살이었다.
예에 ‘여자가 결혼하여 시댁의 사당에 뵙기 전에 죽으면 친정에서 장사지낸다.’는 규정이 있으나 시댁에서 자식도 없이 죽었음을 애처로이 여겨 상여를 맞이해 돌아가 장사지내니 인정에 순하면서 의에 어긋나지 않았은즉 실로 예에 귀한 바인 것이다. 드디어 명을 지어 붙인다.
이씨의 선영인 주봉 산록 / 李氏世葬珠峰麓
건좌의 언덕은 여사의 유택일세 / 負乾之原女士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