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슨 폴록의 그림 같은 서울
- 김용언 「북악스카이라운지」, 김철교 「목동 무지개」 읽기
서울에는 아마도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삶이 어울려 나름의 아름다움을 지닌, 마치 잭슨 폴록의 추상표현주의 그림 같은 세상이 아닐까 싶다. 열심히 정도(正道)를 따라 사는 사람은 물론, 민주와 국민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민주적이지도 않고 자기 패거리만 국민으로 보이는 일부 정치인들, 색다른 환락만을 좇는 넋 빠진 졸부를 비롯해서, 삶의 의욕을 잃어 그저 세월을 죽이고 있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그리고 있는 추상화다. 서울의 역사도 시민들의 다양한 구성만큼이나 다양하다.
사전을 찾아보면, “서울특별시는 대한민국의 수도이며, 과거 백제, 조선의 수도였다. 시대에 따라 위례성(慰禮城), 한성(漢城), 한산(漢山), 북한산(北漢山), 남평양(南平壤), 한양(漢陽), 양주(楊州), 남경(南京), 경성(京城) 등 여러 명칭으로 불렸다. 서울이라는 이름은 신라의 수도를 가리키던 '서라벌'이 '셔ᄫᅳᆯ'(예. 용비어천가)을 거쳐 '서울'로 변형된 말로 추정되며, 1946년 경성부가 서울시로 개칭되었다.”
1960년대 패티김이 불렀던 ‘서울의 찬가’가 요즘은 어색하게 들리는 것은, 텔레비전을 평정한 우울한 정치뉴스와, 남을 배려하지 않는 각종 사건이 부쩍 늘었기 때문이 아닐까. 게다가 세상에 태어나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사라진 아이들, 골방에 처박혀 있다가 튀어나와 좌충우돌 남의 생명을 휴짓조각처럼 여기는 두더지나 올빼미족들. 온통 우울한 뉴스가 거리를 도배하고 있다.
1. 김용언 「북악스카이라운지」 읽기
구름같이 무너지고 싶은 날
북악에 올라
잠시 머물다 돌아가는 바람도 만나고
힐끗 한눈파는 별빛도 가깝다
스카이라운지 위스키 빛은
언제나 투명하지만
현실을 차단하는 절단기 같은 것
황홀해지고 싶은 날
북악에 올라라
여인이 없어도 숲의 숨결이 곱다
자는 듯 일어나는 머-언 한강도 보인다
불면의 밤이면
북악스카이라운지에서 술잔을 들자
머무를 입술마다 꽃 빛인데
불면인들 꽃 속에 타버리지 않을까
김용언「북악스카이라운지」 『한국문학의 100년을 열다』(시문학사 2021) 전문.
북악산을 휘감도는 북악스카이웨이는 1968년 개통된 종로구의 창의문(자하문)에서부터 성북구 정릉동 입구에 이르는 도로를 말한다. 북악스카이라운지에서는 날씨 좋은 날에는 남산은 물론 한강과 롯데타워를 볼 수 있고, 야경도 아름다운 곳이다. 답답한 서울살이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드라이브 코스로도 알맞춤하다.
이 시는 김용언시인의 첫 시집 『돌과 바람과 故鄕』(한국문학사, 1980)의 맨 처음에 등장하는 시이기도 하다. 박재삼 시인에 의하면 “김용언의 시는 우선 어렵지 않아서 쉬 이해가 가는 그런 작품이다. 현대시라는 허울을 둘러 쓴, 자기도 모를 시가 판을 치고 있는 세상에 마치 우리의 초가집을 보듯 다정하고 그리운 생각이 든다.”
시선집 『사막을 횡단하는 당나귀』(인간과문학사, 2014)에도 맨 처음 등장하는 시이며, 시인의 말에서 “한국 땅에서 혼신을 다해 글을 쓰는 문인들도 터벅터벅 사막을 걷고 있는 당나귀와 다를 바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거의 모든 시인은 사물에서 포착한 자기 나름의 이미지를 독특한 시어로 표현하려 하기 때문에, 쉽게 써도 어지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행간까지 읽기가 어렵다. 그래서 필자는 모든 시를 한 폭의 추상화처럼 읽고 있다. 그러나 시는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독자도 배려해야 한다. 자신만의 구원을 위한 시라면 그저 일기장 속에 넣어두고, 발표하지 말하야 할 것이다. 문화중산층, 소위 고등교육 정도의 교육을 받았고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리 읽어도 이해를 못 하는 시를 쓴다는 것은 무례하다고까지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시각예술에서나 청각 예술에서는, 난해한 작품이 있다고 해도 접하는 사람의 감성에 직접 호소하기 때문에 수용자들은 어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언어예술에서는 일단 머리에서 이해해야 가슴의 현을 튕길 수 있다. 물론 한 편의 시가 다양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좋은 시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아예 이해 불가능한 문장을 시라고 내놓으면 난감할 수밖에 없다.
김용언 시인의 시가 쉽게 쓰였다고 해서 쉽게 읽어버리고 던져 버리는 시가 아니다. 우리 마음 깊이에서 원천적인 공허 혹은 슬픔을 길어 올려 승화시키는 멋과 맛을 읽을 수 있어 좋다.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예술가는 심리치료사처럼, 수용자는 물론 예술가 자신의 무의식 그림자를 작품 속으로 호출하여 정면으로 대면함으로써 치유를 경험할 수 있게 하므로 사회를 맑고 밝게 지키는 파수꾼이 될 수 있다. 사람마다 살아오는 가운데서 겪는 크고 작은 상처가 내면에 축적되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지만, 정신치료에서는 상담으로, 예술에서는 작품을 통해 마음이 정화되는 것, 즉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예술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라 하겠다.
“불면의 밤이면”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 “황홀해지고 싶은 날”, 보다 가까이 “별빛”과 “바람”을 만나고 싶은 날, 북악스카이에 올라 “술잔을 들”면 “머-언 한강도 보인다.” 답답한 현실에 부대끼면서도 유유히 흘러가는 한강을 한 발짝 물러서 멀리 보면서 “사막을 횡단하는 당나귀에게 목을 축일 수 있는 한 모금의 물이 되고자” 시를 쓰고 있는 시인을 만나게 된다.
2. 김철교 「목동 무지개」 읽기
동화책 속에 있던 무지개가
몇 년만에 서울 하늘에 나타났다
가로수는 화사하게 웃는다
이파리에 달린 물방울마다
소년의 꿈이 빛난다
자동차 경적소리에
나무가 푸드득 날개를 턴다
놀란 무지개 매연 속으로 사라진다
하늘 밑으로
도시의 일상(日常)들이
구부정한 어깨로 걸어오고 있다
김철교 「목동 무지개」, 『내가 그리는 그림』(시선사, 2021) 전문.
목동 아파트가 들어서기 이전의 목동은 말 그대로 '木洞', 나무와 논밭이 많은 전형적인 시골이었다. 비가 오면 안양천의 물이 넘치는 상습침수지역이었으며, 안양천변에는 가난한 노동자들이 쪽방촌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들어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은 집권 명분을 내세우기 위해서 당시 심각한 사회 문제였던 도시 내 주택 부족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섰는데 그의 치적 중의 하나가 목동 신시가지 개발이었다. 안양천에 높은 제방을 쌓고 저지대 침수방지를 위한 시설을 갖추어, 이제는 어떤 물 폭탄에도 안전하고 서울에서 가장 녹지대가 많은 주택단지가 되었다.
그러나 대도시의 문제점을 여전히 안고 있어, 많은 차들이 내뿜는 매연을 가로수가 다 받아내고 있고, 그 아래로 귀가하는 고단한 도시 일상이 존재하고 있다. 매연으로 얼룩진 가로수에 비가 내리면, 나무들이 목욕하고 맑은 얼굴로 화사하게 웃는다. 거기에 가끔 무지개가 떴다. 그러나 잠시 후 그 무지개가 사라지고 나면, 도시민들은 다시 구부정한 어깨로 일상을 걷고 있다. 김용언 시인이 말하듯이 ‘터벅터벅 사막을 횡단하는 당나귀’와 같은 삶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