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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마음은 새 몸 입고 쓰던 몸은 재활용>의 줄거리 :
사도 바울의 서신들에서 '새사람'은 언제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음으로써 내 마음에서 육체를 잘라 버리는 그리스도의 할례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은 그동안 입고 있던 육체의 몸을 벗어 버리고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내 몸으로 입게 됩니다. 그러면 나타나는 일이 내 육체의 몸이 재활용되는 일입니다.
마음은 새 몸 입고 쓰던 몸은 재활용
(골로새서 3:5~11)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10.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쓰던 몸은 재활용으로 들어가고 우리의 마음은 새 몸을 입어야 한다는 의미의 제목입니다. 본문에서 중심이 되는 말씀은 9~10절입니다. 사도 바울은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라고 옛사람과 새사람을 비교합니다. 새사람을 입는다는 표현은 낯설지 않습니다. 우리는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등에서 이와 비슷한 표현을 접해왔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7~28절을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내용을 복사한 것처럼 거의 일치합니다. 다만 10절의 “새사람을 입었으니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라는 부분이 골로새서 1장 15절의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이시니”라는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름이란 곧 그리스도로 옷 입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에 새사람을 입는다는 표현과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표현은 같은 뜻에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앞서 3장 1~2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 본문에서는 땅에서 절대로 일어나면 안 되는 모습이 언급됩니다. 5절을 보면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고 하였고 또 8~9절에서는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라고 하였습니다.
위의 것을 찾는 것은 새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언급된 행위들은 옛사람의 모습이 유지될 때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이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이 겹쳐질 수 없는 특징입니다. 새사람은 위의 것을 찾기 때문에 땅의 것을 찾을 때 일어나는 행위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정욕과 탐심과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부끄러운 말과 거짓말과 같은 행위는 땅의 것을 찾는 옛사람에게서만 나타납니다.
다음 시간에 살펴볼 12절부터는 새사람의 모습이 적극적으로 언급됩니다. 이러한 내용이 담겨있는 3장은 전체적으로 새사람이 누구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새사람에게서는 나타나지 않는 모습이 언급되는데, 그중에서도 특징적으로 거짓말에 대한 언급이 강조됩니다. 그 이유는 골로새 교회가 처해있던 사이비와 이단과 신앙적 오류는 모두 말에서 비롯되고 말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거짓말을 옛사람의 특징으로 언급하며 새사람에게서는 그러한 모습이 나타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새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새사람이 무엇인가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 23절에서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심령은 ‘이해의 영(The spirit of your understanding)’이라고 말씀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한편 앞선 2장과 연결시켜 본문에서 언급되는 새사람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몸을 새 몸으로 바꿔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2장에서 그리스도의 할례를 언급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는 마음에서 육체를 잘라내는 일입니다. 마음이 육체에 붙어있는 한 육체로 만나는 대상들에게서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럴 때 거짓말을 특징으로 하는 옛사람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옛사람의 상태에서 예수님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이단과 사이비와 신앙적 오류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사람을 입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이는 곧 마음이 기존의 육체의 몸을 잘라내고 새 몸을 입어야 함을 가리킵니다. 마음과 몸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몸이 없으면 마음의 작용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음에서는 언제나 있음을 의식해서 존재감을 느끼는 작용과 비어있기 때문에 채우기 위하여 좋음을 욕구하는 작용이 일어납니다.
사람은 스스로 있는 존재가 아니기에 다른 존재의 있음을 의식함으로써만 나의 있음의 근거를 확보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있음을 느끼는 의식 작용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무한히 두려움에 휩싸이게 됩니다. 좋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채워져야만 하는 욕구를 갖고 있기에 좋음의 대상을 찾고자 합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무한히 공허함을 느끼게 됩니다. 인간의 모든 두려움과 불안과 공허함의 원인은 바로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인 성 과부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나인 성 과부에게는 외아들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래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만을 있음으로 느껴야 하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마음에서 일어나는 있음을 의식하는 작용과 좋음을 욕구하는 작용은 몸을 기반으로 합니다. 몸으로 만나는 대상들 중에서 있음을 의식하고 좋음을 욕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는 그리스도의 할례를 통해 육신을 잘라내게 되면 기반으로 삼을 대상이 없어지게 됩니다. 마음에서 의식 작용과 욕구 작용이 일어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나와 동일시할 때 내 마음은 그리스도의 몸을 입게 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이 내 마음이 입을 새 몸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승천하셨습니다.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만나게 되는 대상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위의 것을 찾으라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몸을 새 몸으로 입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이 만나는 하나님을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으로 욕구하게 됩니다.
이처럼 골로새서의 맥락에서 언급되는 새사람이란 그리스도를 새 몸으로 입은 사람입니다. 사람은 새 옷을 입는다고 새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새 차를 사고 새 집에 산다고 해서 새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결혼해서 새신랑 새색시가 되었다고 해서 새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새 직장에 출근한다고 해서 새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건을 새것으로 바꾸듯이 몸을 새것으로 바꿀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마음에서 옛 몸을 잘라내고 그리스도의 몸을 새 몸으로 입을 때에만 나의 인격은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새사람이 되는 일은 이제까지 육체의 몸과 마음이 달라붙은 상태에서 어떤 삶을 살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설령 전과 8범으로 감옥에 갇힌 상태일지라도 새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마음에서 감옥에 갇힌 몸을 그리스도의 할례로 잘라내고 그리스도의 몸을 옷 입으면 새사람이 됩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지 않고는 새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어떤 영화에서 다른 사람과 영혼이 바뀌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여자의 몸을 입고 살던 사람이 남자의 몸에 들어가고, 남자의 몸을 입고 살던 사람은 여자의 몸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 안에서만 일어나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내가 죽은 것이라고 인정할 때 마음에서 기존의 몸은 없어지고 그리스도의 몸을 새 몸으로 입게 됩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나의 몸이 버려지고 방치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마음과 분리된 몸에서는 특별한 일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재활용이 됩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장갑으로써의 새 인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나의 몸을 장갑으로 끼시는 손은 성령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시는 성령님께서 나를 장갑으로 끼시는 재활용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새사람의 모습입니다. 마음은 그리스도를 새 몸으로 바꾸어 입고, 쓰던 몸은 성령님이 장갑으로 끼심으로써 비로소 새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반드시 새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새사람과 옛사람은 그리스도의 몸을 새 몸으로 입었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그리스도의 몸을 입을 수 없다면 옛사람의 모습을 벗어버릴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옛사람의 모습을 5절에서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라고 하였고, 8절에는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고 하였습니다. 분함이 속에 담고 있는 화라면, 노여움은 밖으로 표출되는 화입니다. 악의와 비방과 입에 부끄러운 말은 타인을 헐뜯는 것입니다. 그리고 9절에서는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다양한 형태의 옛사람의 특징이 거짓말로 정리됩니다. 아무리 예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여전히 옛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새사람에게서는 이런 거짓말이 나올 수 없습니다. 새사람이 되었을 때 몸은 성령님에 의해 재활용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장갑으로 끼시고 움직이시기에 그 입과 행동에서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을 내재한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 부끄러운 말로 대표되는 거짓말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새사람이 되기는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11절을 보면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국가나 민족이나 신분에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새사람이 되기는 이제까지 어떤 사람으로 살아왔느냐에 대해서는 차별도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는 동일시의 믿음을 항상 지니고 있을 때 마음은 그리스도의 몸을 새 몸으로 입게 됩니다. 그리고 몸은 자연히 성령님에 의해 재활용이 됩니다.
본문에서 특별히 거짓말이 강조되는 이유는 옛사람의 가장 보편적인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거짓말은 온 인류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신앙적 관점에서 거짓말을 분석해보자면 엄연한 사실을 외면한 상태에서 나타나는 말과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엄연한 사실이 무엇이냐가 문제가 됩니다. 모든 인류의 마음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사실은 바로 하나님의 있음이고 하나님의 좋음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이라는 사실은 기독교인에게만 의미 있는 것은 아닙니다. 티베트 불교의 스님조차도 이 사실과 무관할 수 없습니다. 그 스님의 세포 하나하나까지도 하나님 아버지가 관장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하나님을 불러 본 적도 없고 믿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며, 더군다나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는 들어는 봤지만 언급해본 적도 없는 스님조차도 실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생사의 주관자라는 사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스님들이 거짓을 말할 의도가 없을지라도 마음에서 가장 가까이 계신 창조주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이라는 사실을 모르기에 모든 말과 행동은 거짓이 되어 버립니다. 이단이나 사이비 혹은 신앙적 오류가 모두 이로부터 비롯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의식은 결코 하나님을 빗겨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있음이시고 모든 만물은 있게 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사람이 의식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하나님뿐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의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빗겨 가게 되었습니다. 또한 본래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 크기로 지음 받았기에 마음을 채울 수 있는 분도 하나님뿐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빗겨 가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 세상의 유일한 주체이십니다. 그런데 사람의 주체성은 하나님으로부터 빗겨 가 스스로의 주체성을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 사실만을 이야기하고 거짓을 말할 의도가 없을지라도 이러한 상태에서는 모든 말과 행동이 거짓이 되어 버립니다.
이와 관련하여 10절을 보면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 새사람을 입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창조하신 이의 형상이란 바로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형상을 따랐음이란 그리스도로 옷 입은 새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럴 때 지식에까지 새롭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마음이 그리스도로 옷 입으면 쓰던 몸 대신에 십자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입게 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새사람이 될 때 하나님의 있음을 의식하고 좋음을 욕구할 대상으로 하나님을 직면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만나는 대상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하나님은 사물이 아닌 살아계신 인격체이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생각이 그리스도로 옷 입은 나의 의식으로 전달되어 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내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통해 나타남이 바로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는 것입니다.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의 특징은 거짓말과 반대되는 진리가 나타납니다. 마음이 옷 입은 그리스도는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렇기에 마음은 하늘에 올라가신 그리스도가 만나고 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만을 유일한 있음으로 의식하고, 유일한 좋음으로 욕구하게 됩니다. 그러는 중에 이 세상에 남아있는 몸은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서만 말하고 움직이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거짓말이 나올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어떤 일이나 누군가를 만날 때도 창조주 하나님의 생각은 존재합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생각이 미치지 않는 장소와 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사람과 만나서 하게 되는 이야기에도 하나님의 뜻은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이야기를 한다면 그것은 모두 거짓말이 됩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행동을 한다면 그 또한 모두 거짓 행동이 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자면 인생을 어떻게 그렇게 빡빡하게 살아갈 수 있느냐고 반문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세계에서 하나님의 생각이 닿지 않는 장소나 시간은 없으며,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생각이 닿지 않는 대상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서 말하고 행동하지 않는 모든 일은 하나님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회피하고 비껴가거나 제쳐놓은 거짓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은 우리에게서 가장 가까이 존재하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신 인격체이시기에 생각을 갖고 계십니다. 나의 마음이 그리스도로 옷 입을 때 필연적으로 하나님만이 대상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있음이고 좋음이고 주체이시라는 사실에 빗겨 가지 않고 닿게 됩니다.
살아계신 인격이신 하나님께서는 내게 주어진 모든 시간과 장소와 대상에 대한 생각을 갖고 계십니다. 그 결과 이 땅에 남아 있는 나의 몸은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서만 말하고 움직이는 재활용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새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으로써의 지식에까지 새롭게 됨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구체적으로 어떠한 행동이 나오느냐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살펴볼 12절 이후에 자세히 언급됩니다.
사도 바울은 5절에서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명령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 능력으로는 음란하지 않고, 더럽지 않고, 사욕을 부리지 않고, 악한 정욕을 갖지 않고, 탐심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를 삭힐 수도 없으며, 비방과 부끄러운 말을 참을 수도 없고,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명령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이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인정합니다. 그동안 쓰고 있던 육체를 통해 만나온 세상에 대해 내가 죽은 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를 쉬지 않는 것뿐입니다. 그럴 때 내 마음은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되고 그 증거가 나타나게 됩니다. 마음은 몸이 만나는 대상에서 있음을 의식하고 좋음을 욕구합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의 있음을 의식하여 마주하는 사람들의 존재감보다 하나님의 존재감을 먼저 느끼게 되었다면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증거입니다. 또한 내가 마주하는 문제들의 해결보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게 되었다면 그리스도로 옷 입은 새사람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있음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좋음을 욕구하며, 하나님의 주체성을 인정함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중에 내 몸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에서 자연스럽게 옛사람의 모습이 사라지게 됩니다. 음란과 더러움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 끊어지고,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가 없어지고 비방과 부끄러운 말을 입에 담지 않고, 거짓말도 하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는 결코 이상적인 일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서 일어나야만 하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종교적 천재들을 대상으로 이러한 말씀을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처럼 일반인들이 해나가야 하고 해나갈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11절에서 언급하였듯이 새사람 되기는 국가도 민족도 신분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제까지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더라도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다면 마음은 그리스도의 몸을 새 몸으로 입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그리스도의 몸으로 만나는 하나님만을 의식하고 욕구하게 되고 하나님의 주체성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렇게 위의 것을 찾을 때 이 세상에 남겨진 몸은 성령님에 의해 완전히 재활용이 됩니다. 이제까지 내 마음이 몸에 붙은 채로 살아왔던 시대와는 구별되는 거짓 없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이러한 재활용의 시대를 맞이하지 못한 채 거짓말을 특징으로 하는 옛사람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면, 그리스도의 할례가 이루어지는 십자가로 마음을 돌려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라는 표현에는 간단하면서도 명확한 진리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육신을 따라가는 옛사람은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마음이 옛사람과 분리될 때 그리스도의 몸을 새 몸으로 입게 됩니다. 그럴 때 내 몸은 버려지지 않고 성령님에 의해 재활용이 됩니다. 이렇게 기적 같은 새사람 됨은 그 누구도 아닌 우리 각자의 일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십자가 생활화를 어제보다 더 철저히 해나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내 마음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새 몸으로 옷 입게 하시고, 그동안 사용해온 몸은 성령님에 의해 재활용되어 새 시대를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