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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천국 합격 기준은 믿음1, 인내, 믿음2>의 줄거리 :
'공의로운 심판의 표시'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재림 때 있을 심판의 기준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이름을 아예 부르지 않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심판 때 하나님은 예수님 믿는 사람들에게서 박해와 환난 중에서 인내와 믿음을 지켰는가를 보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그 믿음을 지키는 인내와 그 인내 안에서 가지는 하나님 믿음이 천국 합격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천국 합격 기준은 믿음1, 인내, 믿음2
(데살로니가후서 1:1~5)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4.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5.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심판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흰 보좌에 앉으셔서 심판하실 기준은 세 가지입니다. 믿음1이 있는가, 믿음1을 인내로써 잘 지켰는가, 그리고 그렇게 믿음1을 지키는 동안에 믿음2를 수행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믿음1과 인내와 믿음2가 심판의 기준을 통과하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하늘 아버지가 계신 천국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가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쉽게 오해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2장 37절에 신명기 6장 5절을 인용하셔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서 나타나야 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그렇기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천국 합격을 위해 인생을 다 쓸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대신에 이 땅 위의 삶은 거저 살아야 마땅합니다. 이는 곧 땅과의 관계에서는 어찌 되었든지 이 세상을 피하고 나가는 일이 주된 성격이 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이 땅의 삶은 하나님께서 살아가시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이와는 거꾸로 된 삶을 살았습니다. 천국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기만 하면 가는 곳이라고 확정한 상태에서 이 세상에서 치열하게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마귀에게 완전히 속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치열하게 지켜야 할 것은 삶이 아닌 믿음입니다. 이렇게 천국을 갈 수 있는 믿음이 있다면 이 땅의 삶은 완전히 공짜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꼭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 19절에서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로마 시대처럼 십자가 복음을 믿는다고 박해를 받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을 믿는다면 근본적으로 이 세상과 친화적일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분명히 해야 될 믿음의 전제입니다. 세상과 친하고 싶고, 세상에서 잘 나가고 싶고, 세상에서 아쉬움이 많은 상태에서는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예수 믿음은 곧 우리 마음의 세상 탈출 사건입니다. 이웃 사랑조차도 마음이 세상을 떠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세상과 친한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떠난 사람만이 이 세상 이웃에게 진정한 도움과 유익을 줄 수 있습니다. 마음이 세상에 남아있다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이웃이 아닌 원수가 됩니다. 세상이 시끄러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하며 치고받는 전쟁터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싫어하고 하늘을 좋아하는 사람만이 오히려 세상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곧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세상을 떠남이 바로 우리에게서 나타나야 할 믿음1입니다. 그런데 세상 떠남은 만만치 않습니다. 인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내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믿음1을 지켜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는 동안에 유일하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을 확신하는 믿음2를 갖게 됩니다. 이러한 믿음1과 인내와 믿음2가 심판을 통과할 수 있는 기준입니다. 이 기준이 충족될 때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염두에 두고 이제부터 데살로니가후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에는 재림에 관한 내용이 더 강화되어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은 51년경에 데살로니가전서를 기록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중에 제일 먼저 쓰인 서신입니다. 그리고 2~3개월이 지난 후에 데살로니가후서를 쓰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첫 번째 서신을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후에 소식을 듣게 됩니다. 많은 박해와 환난이 여전한 가운데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믿음과 사랑을 잘 지켜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살펴보았던 데살로니가전서 1장에서 이미 믿음과 사랑에 대한 칭찬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믿음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믿음1이 아닙니다. 믿음2를 잘 지켜내면서 그 여파로 이웃 사랑이 잘 이루어지고 있음에 대한 칭찬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모습은 사도 바울이 서신을 보낸 이후에도 박해와 환난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여전한 박해와 환난 속에서도 믿음의 진보를 이루고 있었고 형제들에 대한 사랑의 역사도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를 통해 재림에 대한 이야기를 명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재림에 대한 혼돈은 여전했고 더욱 심해지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에 해당하는 서신을 급하게 작성하여 보내게 되었습니다. 앞서 사도 바울은 재림 전에 죽은 자들이 아무런 문제없음과, 재림의 때와 시기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 수 없으며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다는 내용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이러한 사도 바울의 말씀을 곡해해서 이제 곧 재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여 생업을 포기하거나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데살로니가후서에서는 이들에 대한 질책과 교훈도 나타납니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데살로니가후서를 시작하는 1장에서는 특별히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한 칭찬과 그들이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한 해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여전한 박해와 환난 속에서 믿음과 인내를 잘 지켰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진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기쁘고 장하게 여겼고, 이들의 처한 상황에 담겨있는 의미를 가르쳐줍니다. 많은 박해와 환난 속에서도 믿음과 인내를 지켜냄이야말로 재림 때 있게 될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시라는 것입니다.
한편 우리에게는 신앙적 박해나 환난은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기만 하면 심판을 통과해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을 위하여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상황은 달랐습니다. 박해와 환난이 점점 더 가중되고 있는 치열한 삶의 현장을 살아가면서도 인내와 믿음2를 지켜나가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모습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의 표시를 실행해나가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심판을 통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담긴 의미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4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에게서 똑같은 십자가 복음을 전해 듣고도 곳곳에 흩어져있던 교인들의 반응은 천차만별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중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인내와 믿음을 칭찬하며 다른 교회에도 자랑하였습니다. 다른 교회들이 보이지 못했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교회들이 이러한 인내와 믿음을 보였다면 자랑거리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어서 5절을 보면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라고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보인 인내와 믿음이 공의로운 심판을 통과하는 표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는 그냥 읽고 넘어갈 수 없는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인내와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믿음은 믿음1과 믿음2로 나누어집니다. 믿음1이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주님으로 고백해야 하는 예수님은 기적을 일으키시던 예수님이 아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이러한 고백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과 연합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반복해서 강조한대로 예수님 안으로 우리의 마음이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1은 이처럼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음으로써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의 교인들이라는 사람들을 보면 이러한 믿음1이 쉽게 발견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란 예수님의 십자가 안으로 마음이 들어가서 세상에 대해 죽음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고 실천하는 사람은 찾기 힘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7장 16절에서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 믿음이란 세상에 대한 죽음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머무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요구되는 것이 인내입니다. 이렇게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서 마음이 머물려고 할 때 세상이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며 ‘이 일에 관심을 가져라! 저 일에 신경을 써라!’고 불러냅니다. 당장 아침에 일어나면 마주하게 될 배우자가 십자가 너머로 넘어간 나의 마음을 세상으로 돌아오라며 두드리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또 날마다 마주봐야 하는 자녀가 나의 마음을 세상으로 돌아오라며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십자가 너머에 가 있지 말고 세상으로 돌아와서 관심을 달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가족뿐만 아니라 건강 문제, 재정 문제, 직장을 비롯한 모든 세상의 변수와 문제들이 시시각각 내 마음을 두드립니다. 십자가 너머에서 이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고백하며 머물고 있는 내 마음을 세상 안으로 다시 불러내고자 안달복달합니다. 그렇기에 바로 인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당했던 물리적인 박해나 환난은 없을지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5절 마지막 부분을 보면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고난이 있습니다. 육체를 입고 만나는 모든 사람과 사건과 일들이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자극할 수 있고, 이 세상으로 돌아오라고 유혹합니다. 이러한 호소에 귀 기울인다면 어느덧 세상일을 의식하게 되고, 세상에 있는 사람과 사건의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을 찾고자 하고, 이 세상에서 바람을 갖고 희망하고 소망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애쓰게 됩니다. 이처럼 세상은 우리의 마음을 예수 바깥으로 끄집어내려고 애씁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입니다. 우리는 이 고난을 인내로 끊고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세상에 대해 죽은 자로 머물러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믿음1에 이어지는 인내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인내와 믿음2를 칭찬합니다. 믿음1에 해당하는 예수님에 대한 고백에 대한 이야기는 따로 하지 않습니다. 믿음1을 전제로 삼아 이루어진 인내를 칭찬하고 더욱 그렇게 행할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간 마음을 끝까지 지켜나가는 인내가 없으면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마음은 예수님 바깥으로 튀어 나가서 세상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천국에 합당한 자로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통과할 수도 없습니다.
인내를 지켜낼 때 비로소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2가 온전히 작동될 수 있습니다. 믿음2란 바로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바 있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의 내용과 연관됩니다.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믿음1은 세상에 대해 죽고 예수님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내는 믿음1을 지켜냄으로써 마음이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믿음2가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좋으심으로 항상 기뻐함,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을 확신하며 쉬지 않고 기도함, 하나님의 유일한 주체성에 대한 믿음으로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믿음1로써 세상에 대해 죽고 예수님의 십자가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인내로써 마음이 예수님 바깥으로 나가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고 늘 예수님 안에 머뭅니다. 이로부터 믿음2로써 하나님의 유일한 좋으심을 믿어 항상 기뻐하고,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을 믿어 쉬지 않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유일한 주체성을 믿어 범사에 감사하면서 실제 생활을 해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실제 생활은 우리의 힘으로 해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2를 해나갈 때 실제 생활은 거저 살게 됩니다.
심판을 통과하는 일은 믿음1과 인내와 믿음2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가기 위해 고백하는 믿음1, 그것을 지켜나가는 인내, 하나님의 좋음과 있음과 주체성에 대한 믿음이 항상 기쁨과 쉬지 않는 기도와 범사에 감사로 나타나는 믿음2로써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다시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을 보면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이것을 이루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를 지켜내려면 인내가 있어야만 합니다. 이 인내를 위해서 모든 삶의 현장에서 총력을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직장에서 다른 사람들은 승진이나 성과를 위해 총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1을 가진 사람으로서 직장에서도 그리스도 안에 머물기 위하여 인내하기에 총력을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사장님의 있음보다 하나님의 있음을 크게 느끼고, 승진의 좋음보다 하나님의 좋음을 크게 느끼고, 나의 주체성보다 하나님의 주체성을 우선시함을 실제 생활 속에서 표현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회사 일이 방치되는 것이 아닙니다. 회사 일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설령 승진을 못하더라도 직장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체성을 믿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5절에서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라고 하였습니다. 심판의 표란 천국을 갈 수 있는 심판 통과의 기준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실 때 어떤 점을 보시느냐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믿음1을 가진 자로서 많은 박해와 환난 속에서도 인내하고 있었습니다. 인내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써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에 대한 믿음2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바로 이점을 보신다고 하면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칭찬하였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신경 쓸만한 일들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다 아시고 기억하십니다. 5절 이하를 보면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은 자임을 철저하게 지켜나가는 인내를 가질 때, 세상일에 관심하기보다는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붙잡게 됩니다. 그렇게 오직 하나님만을 상대하고 하나님만을 과제로 여기고, 하나님의 좋음과 있음과 주체성만을 믿으며,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합격점에 도달했다고 여기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서 인내는 확인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자극을 받아서 세상으로 되돌아갈 만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끝내 십자가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인내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예수님 안에서만 만날 수 있는 하나님께 믿음2를 보였기에 천국에 합당한 자라 일컬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렇게 우리가 천국에 합당한 자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 끊임없이 우리 마음에 자극이 될 만한 일들을 세상에서 허락하십니다.
말씀드렸듯이 배우자나 자녀로부터 시작하여 삶에서 마주하게 되는 이런 일, 저런 일들이 마음에 자극이 될 수 있습니다. 뉴스만 봐도 우리 마음이 십자가 바깥으로 튕겨 나가서 세상으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흥분하고, 관여하고, 생각하고, 추구하게 됩니다. 몸으로 살아서 겪는 모든 일들이 고난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서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죽으려는 내 마음을 자극해서 세상에 대해 다시 부활시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 노아 홍수 때를 연상하게 됩니다. 홍수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방주 안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그런데 노아의 가족 외에는 누구도 방주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방주에 들어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누구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공로에 대해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저 ‘예수님이 나의 구원의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면 예수님의 공로가 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공로는 예수님과 연합한 상태에서만 우리에게 효과를 발휘합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마음이 분리되어 있다면 아무리 입으로 예수님의 공로를 고백할지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우리 마음이 머물러 있지 않다면 세상에 대한 죽음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세상에 대한 죽음인 십자가를 거쳐서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 예수님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세상에 대해 완전한 죽은 자의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은 자의 입장으로 예수님 안에 들어가야만 예수님의 공로가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버젓이 세상일에 대해 마음이 살아있는 상태를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세상 것들의 있음을 의식하고, 세상 것이 좋다고 추구하고, 나의 주체성을 따라 세상을 추구하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불러들이고자 했고 예수님과 성령님의 이름도 불렀습니다. 이러한 삶을 살면서도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구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죽기를 각오하고 세상에 대해 죽은 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말은 낭만적으로 생각하며 한번 훑고 지나갈 이야기가 아닙니다. 십자가 죽음에는 혀를 깨무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내가 세상에 대해 다시 살아나서는 안 됩니다. 세상일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주권과 주체성을 믿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참새 한 마리까지 주관하시고, 내 머리털까지 세고 계시며, 내 세포 하나까지 주관하고 계심을 믿고 세상에 대해서는 이를 악물고 죽어야 합니다.
핍박이나 박해를 받든 말든, 건강이 좋든 안 좋든, 돈이 있든 없든, 승진을 하든 말든 십자가만을 붙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강조의 접두사로 ‘개’를 자주 쓴다고 합니다. 무척 멋있다는 말을 ‘개멋있다’라고 합니다. 이 말을 빌려보자면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으로서 세상일은 ‘개무시’해야만 합니다. 세상일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심으로 나는 상관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끊임없이 나의 마음을 자극해서 세상으로 돌아오라고 호소합니다. 세상을 향해 부활하기를 요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있다면 하나님을 향해 부활한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좋으심, 하나님의 있음, 하나님의 주체성을 향한 믿음2를 보이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돌아오라고 호소하더라도 인내하며 그 말을 따라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믿음에 대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할 때, 이 세상의 삶은 하나님께서 거저 살도록 이끌어주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인내로써 세상에 대한 죽음의 상태,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상태를 지켜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향하여 마음이 부활해서는 안 됩니다. 인내를 지킴으로써만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는 하나님과 진짜 관계를 시작하게 되는 믿음2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을 다른 교회들에게 자랑하였습니다. 이들의 믿음의 내용은 바로 인내와 믿음2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내와 믿음2를 보시고 천국에 합당한지 아닌지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인내와 믿음2를 공의로운 심판의 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중점을 두고 보시는 포인트라고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 방송의 식구들이라면 아무쪼록 이 심판에서 천국 합격 기준점을 무사히 통과함으로써 오늘 하루도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믿음1은 당연히 갖게 해주시고, 인내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1의 내용을 지켜내게 하시며, 그럼으로써 관계할 수 있는 하나님께 완전히 빠져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2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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