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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월반하는 천재들의 빌라델비아 교회>의 줄거리 :
월반은 정해진 순차적인 단계의 학년을 뛰어넘는 상황을 가리킨다. 공부를 잘하는 정도가 아니라 천재라야 한다. 빌라델비아 교회 교인들이 바로 이런 월반하는 천재들이었다는 것이다. 거룩하시고 진리이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 비교해서 이처럼 영적인 천재들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빌라델비아 교회에 속하였던 영적인 천재들의 월반의 실상을 살펴본다.
월반하는 천재들의 빌라델비아 교회
(요한계시록 3:7~13)
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9.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11.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빌라델비아 교인들은 월반하는 영적인 천재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책망의 말씀이 없고 서머나 교회처럼 칭찬만 있습니다. 내용적으로 보자면 서머나 교회에 대한 칭찬보다 다뤄야 할 내용이 풍부합니다. 정해진 시간 내에 다 다룰 수 없다면 온라인 교회 모임에서 좀 더 보충하도록 하겠습니다.
월반(越班)은 정해져 있는 학년을 뛰어넘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중학교 1학년 학생이 2학년 3학년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2학년 3학년을 뛰어넘어 대학에 진학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학교에서도 조기졸업을 하여 대학원에 진학하기도 합니다.
월반하는 학생들을 보면 단순히 공부를 잘한다고 표현하기에는 좀 부족할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공부를 잘하는 것이 모든 단계를 밟아가면서 매학년마다 손가락에 꼽을 수 있게 등수를 차지하는 것이라면, 월반은 천재들에게 주어진 혜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빌라델비아 교회의 교인들은 영적 월반의 천재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 생활화를 충실하게 해온 분들이 계시다면 빌라델비아 교인들처럼 영적인 천재의 삶을 살고 있는 셈입니다.
빌라델비아 도시는 사데 도시로부터 동남쪽으로 40km 지점에 위치한 고원도시였습니다. 당시 에게해를 지나 지금의 튀르키예 내륙 동쪽으로 진입하기 위한 교통의 요충지로써 동방의 관문으로 일컬어졌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 7~8절에도 ‘문’에 관한 비유가 등장합니다. 또한 빌라델비아 도시는 직물과 피혁 산업이 번성했고 특별히 포도주의 산지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빌라델비아에서 섬기던 우상은 그리스 신화에서 술의 신으로 여겨지던 디오니소스였습니다.
이처럼 빌라델비아는 교통의 요충지이며 농업과 여러 산업이 발달하여 부요함을 누릴 수 있는 환경을 갖춘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빌라델비아에는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지진이 잦아 피해가 컸다는 점입니다. 지진과 연관하여 도시 이름이 자주 바뀌기도 했습니다. 서기 17년에 일어난 지진 이후에는 네오 가이사랴로 바뀌어 불리게 되었고, 70년에 이르러서는 플라비아라고 불렸으며, 황제 숭배가 정착되고 난 후에는 네오 코로스라고 이름이 바뀝니다. 본문에서는 이러한 역사를 염두에 두고 ‘새 이름’에 대한 언급이 이루어집니다. 12절에서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라고 하셨던 바와 같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내진 말씀은 이처럼 환경적 요소와 제반 사항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내용을 보면 7절에서 빌라델비아 교회와 연관하여 예수님의 초상화가 묘사되고 있습니다.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으로 묘사됩니다. 이어서 8절을 보면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와 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이는 곧 예수님만이 다윗의 왕국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고 닫으실 수 있으며, 누구도 예수님이 닫으신 문을 열 수 없고 여신 문을 닫을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이 ‘거룩하고 진실하사’라고 묘사됩니다. 우리가 다윗의 왕국에 들어갔을 때 처하는 상황에 대한 말씀입니다.
거룩함은 궁극적인 좋음입니다. 좋음의 단계로 따지자면 궁극적인 단계에 도달해서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상태가 거룩함입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습니다만 4장 8절을 보면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노래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리고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거룩함을 강조한 구절들은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거룩함은 ‘하나님은 정말 너무 좋다! 이렇게 좋을 수는 없다.’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거룩함에 더해 진실함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진실함은 곧 참되심을 의미합니다. 궁극적 좋음인 거룩함에 거짓이 섞일 수는 없다고 생각되지만 실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로미오와 줄리엣의 관계를 생각해 봅니다. 로미오는 줄리엣이 죽었다고 착각해서 더 이상 살아야 될 이유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줄리엣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서로에게 궁극적인 좋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좋음은 진실함이 포함되지 않은 좋음입니다. 제가 예전에도 농담조로 말씀드렸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이 반대 없이 결혼했다면 이들의 이야기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결혼하고 삼 년이 못 되어 이혼했을지도 모릅니다. 반대가 있었기에 더 뜨거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서로에게 궁극적인 기쁨으로 여겨졌지만 이 기쁨은 가짜였던 것입니다.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로또에 당첨되어 50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순간 로또는 궁극적인 기쁨일 수 있습니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가짜입니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 거룩하시다는 것은 궁극적인 기쁨이시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진실하시다는 것은 그 기쁨이 사그라짐이나 쇠퇴함이 없는 진짜임을 의미합니다. 다윗의 왕국은 이러한 예수님의 나라를 예표 하는 상징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예수님의 나라는 천국과 구분됩니다. 우리는 몸이 살아있을 때 예수님의 나라를 삽니다. 이는 곧 우리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천국에 머물 때, 우리 몸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이 임하여 하나님 나라를 살게 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몸이 살아있는 동안 이루어지는 나라로써 마음은 하늘에 있으면서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기쁨으로 가지게 되고, 몸은 땅에 있으면서 아버지의 주권적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늘과 땅을 아우르는 것이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나라를 살 수 있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열쇠를 쥐고 계신 문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질문해 봅니다. 예수님을 믿고 계신다면 예수님의 나라를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 나라의 문 안으로 들어가셨습니까? 다윗의 왕국 문 안으로 들어가셨습니까? 다윗의 왕국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에게는 동일한 고백이 나타납니다. 시편 23편 1절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윗 왕국 안에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실 때는 내게 부족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다윗 왕국 안에 들어가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고백입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 우리의 상황이 어떠할지라도 그것은 상관없습니다. 돈이 있든 없든 상관없습니다. 몸이 아프든 건강하든 상관없습니다. 마음은 언제나 푸른 풀밭에 누워있고 쉴만한 물가에서 놀고 있는 양과 같은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다윗 왕국을 사는 사람들의 고백이며, 다윗 왕국은 곧 예수님을 믿었을 때 살게 되는 삶의 예표입니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8절 하반절을 보면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다윗 왕국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마음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문이고, 하늘 보좌로 이어지는 길로 들어서는 문이며, 이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교회를 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7절에서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라고 하셨던 바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라는 말씀이 어떠한 의미에서 다윗의 왕국으로 들어가는 문과 연결이 된다는 것일까요?
문은 현재 있는 장소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통로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거실에 있다가 안방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거실과 안방은 벽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구분되어 있는 다른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문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거룩함의 개념은 모르더라도 거룩함에 도달하고자 하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거룩함이란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궁극적인 좋음이며 가짜가 아닌 진짜 좋음입니다. 모든 사람은 바로 이러한 궁극적 기쁨과 만족을 주는 최상의 좋음으로써의 거룩함을 원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 거룩함은 예수님이 열쇠를 갖고 계신 문을 통과해야만 주어질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처한 상황은 궁극적인 좋음으로서의 거룩함의 상태가 아닙니다. 따라서 현재 상황보다 더 나은 상황을 원하게 됩니다. 현재 상황에서 다른 상황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거실에서 안방으로 들어가듯이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런데 궁극적인 기쁨과 만족은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이 문은 통과할 수 없기에 끊임없이 다른 문을 찾게 됩니다. 내 마음이 이 세상 안에 머물면서 기쁨과 만족을 추구하는 한 문을 통과해야 하는 일이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반복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은 현재 상황보다 더 나은 상황을 찾으면서 문을 두드립니다. 현재 상황이 거실이라면 더 나은 안방이라는 상황으로 들어가고자 문을 찾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문을 통과하면 지금보다는 나은 상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나은 상황으로 들어갔는데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기쁨과 만족은 사그라지고 더 나은 상황을 찾게 됩니다. 그렇게 문을 찾고 나가려는 시도가 이 세상 안에서 반복되는 동안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먹고살기가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안정적으로 먹고살기만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외에는 다른 바람을 가질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던 중 탈북하여 남한의 문을 통과함으로써 먹고 살기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바람이 생깁니다. 이제 좀 더 좋은 옷을 입고 싶습니다. 좀 더 좋은 차를 갖고 싶습니다. 좀 더 좋은 집에 살고 싶습니다. 또 다른 문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그 문을 통과해서 원하던 좋은 옷과 좋은 차와 좋은 집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금 지나자 기쁨과 만족은 사그라지고 또 다른 바람이 생겨납니다. 이제는 인기를 얻었으면 좋겠고 명예도 얻고 싶습니다. 비싼 여행을 가고 싶고, 비싼 취미 생활을 하고 싶고, 고급 여가 활동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여전히 좋은 옷, 좋은 차, 좋은 집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생각조차 못하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 한다고 해서 궁극적인 기쁨과 만족을 주는 좋음으로써의 거룩함에는 도달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어긋나기 시작하면 마약이나 갑질 등의 변태적인 행위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빌라델비아 교인들의 특이함이 드러납니다. ‘작은 능력을 가졌다’라는 것은 곧 세상에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치들을 적게 가졌음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이 궁극적인 기쁨과 만족을 찾아가는 단계에서 보자면 초등학생 수준에 불과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제 올라가야 할 학년이 한참 남아있는 상태였습니다. 먹고 살기에도 빠듯한 환경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빌라델비아 교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궁극적 기쁨과 만족을 찾아 떠나는 수많은 과정을 월반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들이 좋음의 단계를 훌쩍 뛰어넘어 문을 두드리고 있는 곳을 보니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예수님이었습니다. 마치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대학교 졸업반으로 월반을 하듯이 뛰어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좋다고 여기는 기쁨과 만족거리들을 뛰어넘어 궁극적 기쁨과 만족이 있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단계를 넘어가며 기쁨과 만족을 추구합니다. 궁극적 기쁨과 만족을 찾기 위한 뻔한 순례의 과정입니다. 그런데 빌라델비아 교인들은 이러한 과정을 다 뛰어넘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곧바로 진짜 궁극적 기쁨과 만족이신 하나님께로 이어지는 문으로 월반하여 문을 두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또한 빌라델비아 교인들에 대해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바꿔 말하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다고 하면서도 몸이 처한 현재 상황보다 더 나은 상황으로 들어가려고 문을 찾는다면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 몸이 처한 삶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세상에서 형편이 나아지는 문을 찾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됨을 의미합니다.
빌라델비아 교인들이 작은 능력을 가졌다는 표현이 의미하는 대로 이들에게는 세상적인 가치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을 믿는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모든 궁극적 기쁨과 만족을 향해가는 단계를 뛰어넘어서, 궁극적 기쁨과 만족이 있는 다윗 왕국의 문이신 십자가 예수님께로 곧바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이 세상 안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상황을 월반하여 곧바로 하늘의 상황으로 진입해 들어갔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예를 들어 재정 형편으로 고민하는 아내는 남편이 지금보다 돈을 더 잘 벌어오기를 바랍니다. 아내는 남편이 돈을 못 버는 상황에서 잘 버는 상황으로 들어가는 문을 찾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아내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현재 상황과는 다른 상황으로 들어가는 문을 찾습니다. 몸이 아픈 사람은 건강해지기를 바랍니다. 부모는 자녀의 형통을 바랍니다. 모든 방면에서 지금 상황과는 다른 상황으로 들어가는 문을 찾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러한 모습을 보인다면 다윗의 왕국으로 들어가기를 원치 않는 상태입니다.
다윗의 왕국은 예수님에 의해서 열립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열리는 나라는 하늘과 땅의 낙차를 포함합니다. 우리 마음이 하늘의 부르심을 받아 이 땅을 빠져나가면 예수님과 함께 보좌 우편에서 궁극적 기쁨과 만족이신 하나님 아버지만을 벌게 됩니다. 그리고 이 땅에 있는 몸은 성령님의 장갑이 되어서 아버지의 주권적 뜻을 이루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다윗 왕국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몸이 처한 상황과는 다른 상황을 이 세상 안에서 찾지 않고 다윗 왕국의 문이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로 곧바로 가는 자들입니다. 월반하는 것입니다.
월반을 하는 단계는 어중간해서는 안 됩니다. 중산층이 되기를 바라거나, 그것을 뛰어넘어 대한민국 5%에 안에 들기를 바라거나, 대한민국 1%의 재벌총수나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대학 총장과 같은 등급에 이르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되어도 궁극적인 기쁨과 만족은 없습니다. 재벌이 되어서 비싼 재료로 만든 음식만 먹는다고 하더라도 기껏해야 세 번 먹으면 질릴 뿐입니다. 재벌이라도 누룽지에 신김치를 찾는 경우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에서는 아무리 상황이 달라져도 궁극적인 기쁨과 만족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보리밥 먹던 사람이 쌀밥에 고깃국 먹기를 바라지만 정작 부자가 되어 다시 보리밥을 찾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이란 이 모든 단계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 단계를 뛰어넘지 못한 채 그 단계를 그대로 밟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는 동안 다윗 왕국을 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하는 자들입니다.
한편 12절을 보면 특이한 내용이 등장합니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앞서 빌라델비아는 지진이 많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진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건물 바깥으로 나갑니다. 건물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기둥만 남게 됩니다.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된다.’는 것은 지진과 상관없는 삶을 살게 됨을 의미합니다.
먹고살기만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먹고살 만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 머물지 못하고 더 나은 상황으로 문을 찾아 들어가고자 합니다.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끊임없이 나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바람이 이루어지더라도 그것은 지진이 일어난 상황과 같아서 한곳에 계속 머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 왕국의 문이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 월반하는 자들은 지진과 무관한 기둥과 같은 상태가 됩니다. 이 세상에서 몸이 있기에 주어지는 상황이 어떠하든지 지진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다른 상황을 찾아서 나가고자 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평강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지금과는 다른 상황을 원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고 궁극적인 기쁨과 만족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 이유가 제시됩니다. 12절 하반절을 보면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다.’는 것은 이 세상의 상황과 관계없는 마음을 갖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서 지진이 일어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이유는 마음에 하나님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새 예루살렘의 이름’이 의미하는 천국을 마음에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새 이름’이란 이 땅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아니라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이러한 예수님을 가졌기 때문에 마음이 다른 상황을 찾아서 나가고자 하는 지진을 경험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믿지 않는 사람이나 믿는 사람이나 상황은 똑같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상황이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밖으로 나가야만 하는 지진이지만, 예수님을 믿어서 다윗 왕국으로 들어간 사람에게는 지진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상황은 각기 다를 수 있습니다. 특히 사데 교회처럼 세상적으로 안정적 상황일 수 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가진 것이 없어서 힘든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것을 가졌다고 해서 가진 것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것이 없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진짜 궁극적인 기쁨과 만족은 몸이 있기에 주어져 있는 이 세상 상황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기쁨과 만족을 찾는 순례의 여정을 살아갑니다. 우리가 그 단계를 답습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월반하는 천재들이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기쁨과 만족을 찾는 모든 자들이 겪는 과정을 월반하여 다윗 왕국으로 들어가는 문인 십자가 예수님 앞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면 진정한 기쁨과 만족은 주어집니다. 위에서 들려오는 부르심을 따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면 땅과 하늘을 아우르는 다윗 왕국은 이루어집니다. 다윗 왕국 안에서 사는 모든 사람은 시편 23편 1절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안에 들어갈 때 여러분의 삶은 다윗 왕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럴 때 세상 가치가 아무것도 없는데도 마음은 전혀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는 이 세상에서 다른 상황을 요구하지 않게 됩니다. 지진이 일어나 도저히 머물 수 없어서 나가야만 하는 상황이 일어나지 않는 견고한 평강 위에 삶이 놓일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현재 상황이 어떻거나 어떤 문제가 주어질지라도 우리는 월반하는 천재들이 되어서 곧바로 궁극적인 기쁨과 만족에 도달하는 다윗 왕국의 문이신 십자가 예수님을 붙잡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