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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시: 2003. 4. 17(목) 오후 6시 30분
장 소: 대봉교회 선교관
강 사: 임희국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대구·경북기독교역사연구회
(우) 706-847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 송원맨션 3동 602호
☎(053) 764-2236/ FAX(053) 764-2237
■ 제2회 초청강연회 ■
이원영 목사와 신사참배에 관한 연구
- 임희국-
Ⅰ. 시작하는 말
Ⅱ. 이원영의 생애
1. 유생(儒生), 독립운동가
2.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에
3. 그리스도의 양 무리를 치는 목자
4. "산 순교자", 장로교회 총회장(신사참배 취소성명 발표)
Ⅲ. 이원영 목사와 신사참배 문제
1. 일제의 황민화 정책을 거부, 목사직 시무사면, 4차례 예비검속
(1) 예언자적 설교: "요나의 좌경", "요나의 일선생맥", "요나의 견책"
(2) 1938년: 개정된 조선교육령 거부, 목사직 시무사면
(3) 1939년: 제1차 예비검속
(4) 1940년: 창씨개명, 제2차 예비검속
(5) 1941∼1942년: 제3차 예비검속
(6) 1945년: 제4차 예비검속
(7) 황민화정책을 거부한 신학적 근거
(8) 오복사골 가정교회
2. 8·15 광복, 산 순교자로서 교회 복구
3. 장로교회 총회장으로 선출: 〈신사참배 취소성명서〉발표
Ⅳ. 맺는 말
▣ 제2회 초청강연회(2003. 4. 17) ▣
이원영 목사와 신사참배에 관한 연구
임희국 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 교회사 및 역사신학)
Ⅰ. 시작하는 말
이 글은 봉경(鳳卿) 이원영 목사의 생애 가운데서 신사참배문제와 관련된 부분에 관해서
주로 서술하고자 한다. "이원영 연구"는 안동지역교회사의 사료수집을 하던 가운데서 비롯
되었다. 영남지역의 안동은 본디 유림 전통이 깊은 고장이었고 오늘날에도 선비정신과 양
반문화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토양에 개신교회가 뿌리를 내렸고 그리고 교회들의 왕
성한 자람이 지속되었다. "유림전통과 기독교 진리의 만남"이 도대체 어떻게 시작되고 진
행되었는지 파악할 수 있는 길이 이원영 연구를 통해 가능하다고 보았는데, 그는 퇴계 이
황 선생의 14세 손으로서 안동지역 개신교회의 제1세대 목회자였다. 또한, 이원영 연구를
통해 기독교의 세계보편성과 지역특성 곧 세계교회사 안에서 한국 안동지역 장로교회사의
특성이 무엇인지 알아보자는 착상에서 연구가 본격화되었다. "에큐메니즘에 입각한 지역교
회사 연구", 그리고 최근에 역사학계에서 부각되는 미시사적 역사연구방법론을 고려하면
서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원영목사는 제39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1954. 4 - 1955. 4)당시 제27회 총회
(1938. 9. 9)에서 결의한 신사참배를 취소하는 "신사참배 취소성명" 발표를 함으로써 일제
잔재의 청산을 주관했고 또 다른 한편 신사참배문제로 인해 분규와 분열에 휩싸인 교계를
화해케 하는데 앞장섰다.
2001년 늦가을에 단행본《선비목회자 봉경 이원영 연구》(기독교문사, 325쪽)를 비롯해
서 4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이 글은 이 책의 일부분을 가려 뽑아서 조금 손질한 것이며,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지금까지 한국교회사 영역에서 논의된 신사참배문제를 언급하며 정리해 보고자 한다.
Ⅱ. 이원영의 생애
1. 유생(儒生), 독립운동가
이원영(李源永, 1886∼1958)은 1886년 7월 3일에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원촌동에서 태어
났다. 그는 퇴계 이황 선생의 14세 손이며, 퇴계 학맥을 이어가는 집안의 교육 전통에 따
라 네 살부터(1890) 약 16년 동안 한문을 사숙(私塾)했다. 이 동안에 그는 유생으로서 갖
추어야 할 학식을 쌓고 인품을 닦아갔다. 18세기 말엽에 안동의 유림은 천주교회의 소개
를 강하게 거부했고, 약 100년 뒤에 개신교회가 들어오자, 이들은 개신교회 역시 천주교회
와 다를 바 없다고 단정하며 배척했다. 그런데 문호개방(1876)과 함께 시작된 조선의 근대
화 과정에 대해서 안동의 유생들도 다른 지역의 유림처럼 이를 배척하거나(척사유림, 수구
파) 혹은 받아들여야(혁신유림, 개화파) 했다.
이원영은 집안의 혁신유림이 세운 사립학교 "봉성측량강습소" 제1회로 졸업했고(1909),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던 1910년에 "보문의숙"에 진학해서 1912년에 제1회로 졸업
했다. 특별히,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을 위해 설립된 보문의숙에서 그는 한문사숙에
서 배우지 않았던 서양문물을 배웠다.[자연과학(물리학·화학·생물학·위생학 등), 사회
과학(법학·경제학·상업부기학 등), 역사(서양사 등), 어학(영어·일어 등), 수학 등]
신(新)지식인 혁신 유생 이원영은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갔다. 그의 지
식과 사상은 기미년(1919) 3·1독립운동시기까지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도산
지방 예안의 3·1만세시위를 주도하자 비로소 그의 소신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당국에 체포되고 시위주모자로 재판을 받아 서울의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 동안 복역
했다.
2.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에
서대문 형무소 복역기간에 이원영은 - 함께 수감된 유림출신 교회장로 이상동의 전도로 -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복역기간을 채우고 감옥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와서 신앙생
활을 하던 그는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 권찬영(John Y. Crothers)에게 세례를 받았다
(1921. 1).
그의 신앙은 처음부터 성경묵상을 통해 다져지고 성숙해 갔다. 한문사숙 기간 동안에 몸
에 밴 주자학 경전 숙독이 이제는 성경묵상과 연구로 옮아갔다. 그런데 그의 신앙은 밖에
서 오는 연단을 통해서도 여물어 갔다. 아직도 척사유림 전통이 여전한 집안문중의 반대
와 배척, 그리고 박해를 묵묵히 참아 내면서 그의 신앙은 단단해졌다.
이원영은 부지런한 사경회 참석, 성실한 주일학교봉사, 인노절(Roger E. Winn)기념성경학
교(안동) 졸업, 성경통신과정 수료, 그리고 조사로 일하다가, 1926년 봄에 평양의 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1930년 3월에 그는 이 신학교의 제25회 졸업생이 되었다.
3. 그리스도의 양 무리를 치는 목자
1930년 6월부터 이원영은 경상북도 영주의 중앙교회와 이산의 용상교회를 동시에 맡아 강
도사로 일했다. 그 해 12월에 그는 경안노회에서 목사로 장립했다. 2년 후인 1932년 12월
에 그는 안동의 신세교회(현재 동부교회)와 안기교회(현재 서부교회)를 동시에 맡아 목회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34년부터 그는 안기교회만 담임하게 되었다.
목회자 이원영은 담임목회 이외에 인노절기념성경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일했
고, 쉬임 없이 사경회를 인도하며 성경을 강해했고, 담임목회자가 없는 교회를 맡아 문답
(학습, 세례)과 성찬예식 그리고 가끔 예배인도 및 설교를 했다. 특별히, 그는 경제적 궁
핍에 찌들대로 찌든 농촌지역의 목회자로서 장로교회의 총회와 노회가 벌인 농촌운동
(1928-1937)에 동참했다. 이 농촌운동은 교회위기(재정, 교인감소)를 타개하려는 일차적
인 목표를 세우고 농사개량과 농촌 경제살리기에 주력했고, 신앙경건훈련을 겸한 생활개선
도 추진했다.
농촌운동 지도자 이원영 목사는 일제의 의심을 받았다. 일제는 농촌운동지도자들이 암암리
에 독립운동을 꾀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던 차에, 이원영은 일제의 황민화정책(조선교육
령개정, 창씨개명, 신사참배) 강요를 철두철미 거부했다. 이에 대가를 그는 혹독하게 치러
야 했다. 일제 당국의 압력으로 그는 안기교회를 사임해야 했고, 노회에서 면직당했다. 그
와 가족들은 한낮에도 인적이 드문 -지금의 태회동 안동방송국 근처- 산골로 쫓겨갔고, 거
기서 배고픔과 사회적 단절을 감수하며 연명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
님의 사명인 말씀선포를 중단하지 않았다. 거의 날마다 드린 가정 예배 시간에 그는 설교
를 했다.
일제는 이원영 목사를 교회에서 쫓아내고 사회로부터 단절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1939년 5월부터 8·15광복(1945)까지 일제는 그를 "예비검속"이란 형식
으로 수개월씩 4차례나 구금시켰다. 그 때마다 말로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혹독한 고문
들이 그의 몸을 들쑤셔 놓았으므로, 그는 죽음의 문턱을 몇 번이나 넘나들었다.
4. "산 순교자", 장로교회 총회장 :〈신사참배 취소성명〉발표
8·15광복을 경산경찰서 유치장에서 맞이한 이원영, 그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조국광
복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집(교회)"을 가장 먼저 복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일제의 탄압으로 없어져 버린 경안노회를 다시 복구하고, 안기교회를 서부교회로 이름을
바꾸어 복구했다. "산 순교자"로 신뢰와 존경을 받으며 이원영은 하루도 편히 쉴 날이 없
이 이곳 저곳에서 사경회를 인도했다. 그의 나이 60세(회갑)가 지났는데도 마치 피끓은 청
년처럼 교회복구에 열중했다. 그는 상처 입은 그리스도의 양 무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치
유하고 이들의 가슴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의 불을 지폈다. 이러한 가운데서 많은 젊
은이들이 그에게 다가왔다. 이에, 그는 당장의 교회재건을 위해서나 교회의 먼 장래를 위
해서 교회지도자 양성이 시급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1946년 9월에 경안고등성경학교
(현재 경안성서학원)를 설립했다. 또한 그는 사회지도자 양성에도 관심이 높았으므로, 그
는 경안고등학교(안동)와 계명대학교(?諭?)의 설립이사로 일했다.
8·15광복 이후의 장로교회는 새로운 출발을 위해 지나온 과거를 청산해야 했다. 특히, 일
제의 힘에 굴복해서 가결된 신사참배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런데 해결방법을 위한 논의
가 논쟁과 분규로 발전되고, 게다가 교단이 신학논쟁에 휩싸여서 이것이 더욱 복잡한 양상
으로 발전하였다. 1950년대 초반의 장로교회는 화해와 단결 및 평화를 간절히 바라는 상황
이 되었다. 이 상황에서 이원영은 제39회 장로교회총회(1954)의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총회장으로서 그는 과거 신사참배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신앙양심을 바로 세우며 교단
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신사참배 취소성명〉을 발표하는데 주관했다.
1958년 6월 21일에 이원영 목사는 하늘에 있는 영원한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의
생애는 "선비", "독립운동가", "목회자", "산 순교자", "교육자"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의 묘지는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제2묘역(제 798호, 1999. 11. 2. 이장)에 있다.
Ⅲ. 이원영 목사와 신사참배문제
1. 일제의 황민화 정책을 거부, 목사직 시무사면, 4차례 예비검속
일제는 "만주사변"(1931)을 일으켜서 본격적으로 중국대륙을 침략했다. 일제는 또한 "상해
사변"(1932)을 거쳐서 "중일전쟁"(1937)을 일으켰고 마침내 미국 등을 상대로 "태평양전
쟁"(1941)을 일으켰다. 전쟁을 추진하기 위해서 일제는 국가 전체를 전시체제로 바꾸고 국
민을 전쟁으로 몰아 넣었다. 이 시기에 일제는 조선에 대해 두 가지 정책을 동시에 추진했
다. 첫째로, 일제는 조선을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활용하고자 농공병진정책을 추진
하면서 일본-조선-만주의 블록경제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둘째, 일제는 전쟁에 대한 조선
사람들의 협조를 얻어내고 또 조선을 일본에 완전히 동화(同化)시키려는 목적으로 "황국신
민화(皇國臣民化, 이하 황민화) 정책"을 추진했다. 이 동화정책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앞에 내세우며 추진되었는데, 조선인을 황국신민으로 만드는 동시에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시키고 "2등 일본인"으로 만들어서 전쟁에 활용하자는 의도가 들어 있었다. 이와 함
께 일제는 천황과 국가에 헌신적으로 충성하게 하는 국체명징(國體明徵)과 헌신보국의 정
신으로 어떠한 시련에도 인내하고 목적을 관철하는 인고단련(忍苦鍛鍊) 등의 강령을 정해
서 조선인을 완전한 황국신민으로 만들고자 했다. 황국신민화 정책은 "조선교육령개정"(교
육), "신사참배강요"(전체주의 국가이데올로기), 그리고 "창씨개명"(일제의 신민화)이 기
본 골격으로 구성되었다.
이원영은 일제의 황민화정책을 거부했다. 조선교육령개정·신사참배강요·창씨개명을 모
두 거부했다.
(1) 예언자적 설교:"요나의 좌경", "요나의 일선생맥", "요나의 견책"
장로교회의 총회가 일제의 신사참배강요에 직면해 있던 때에, 이원영은 1937년 5월에 열
린 제31회 경안노회 정기노회에서 총대들에게 우려가 섞인 권면을 했다. 5월 28일 오전 경
건회 시간에 그는 구약성경 요나서 1장 1-5절까지 봉독하고 "요나의 좌경"이란 제목으로
설교했다. 이튿날 오후 2시에 모인 속회에서 그는 요나서 2장 전체를 봉독하고 "요나의 일
(一)선생맥"이란 제목으로 설교했고, 그 다음날(30일) 오후 2시에 모인 속회에서 그는 역
시 요나서 4장 전체를 봉독하고 "하나님의 견책"이란 제목으로 설교했다.
이렇게 사흘 동안 매일 한 차례 이원영은 강단에서 구약성경 요나서를 한 장씩 봉독하고
설교했다. 그는 지금의 경안노회와 장로교회가 선지자 요나처럼 될까봐 염려하면서 말씀
을 증거했다. 하나님의 명령을 잘 알면서도 그 뜻을 거슬려 "불순종한" 요나,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 다시스로 도망친 요나,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배가 풍랑
에 휩싸여 부서지기 직전인데도 배 밑바닥에 누워 "달게 잠을 자는" 요나에 관해서 그는
말씀을 선포했다. 이 설교를 통해서 그가 증언하고자 했던 바를 풀이해 보면, 첫째, 신사
참배 강요에 직면해 있는 조선의 교회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잘 살펴야 하고, 둘
째,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닥쳐오는 어려움과 고난은 어떠한 경우에도 그것을 피해 달아나
지 말아야 하고, 셋째, 교회가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침으로 말미암아 이 민족 전체가
큰 풍랑을 만날까 염려된다는 요지였다고 본다. 결코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는 경고였다.
(2) 1938년:개정된 조선교육령 거부, 목사직 시무사면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대한 이원영의 거부와 항거는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38년 3월
에 일제가 조선교육령을 개편하면서 학교교육 내용이 크게 달라지자 이원영은 자녀들을 학
교에 보내지 않았다. 학교수업 대신에 이원영이 학교의 교과과정에 따라 집에서 교육을 시
켰다. 그가 가르친 과목은 성경(암송)·국문·한문·산수·수신·습자 등이었다. 그런데
그는 일본어 교과서를 구해서 자녀들에게 일본말을 가르쳤다. 일본말을 배우고 일본을 알
아야 일제 식민지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같은 해 6월 초순에 이원영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갑자기 안기교회의 목회를 그만
두어야만 했다. 교회 밖에서 밀고 들어오는 "시무 중지"의 압력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
다. 6월 8일의 수요일 저녁기도회에서 그는 마지막으로 설교했다. 강단에 올라선 그는 신
약성경 히브리서 4장 14∼16절을 본문으로 "믿는 도리를 굳게 잡자"는 제목으로 말씀을 선
포했다. 교인들에게 떠난다는 인사말 한마디조차 하지 못한 채 그는 안기교회를 떠나야만
했다.
일제 당국이 느닷없이 갑자기 압력을 행사해 교회시무를 중지하게 한 배경을 파악하기 위
해 안기교회의 일지를 찾아보면, 그 해 6월 3일부터 8일까지 유재기(劉載奇) 목사가 "경안
제직수양회"를 인도한다는 교회알림이 적혀 있다. 예정대로 유재기는 안기교회에서 수양회
를 인도하고 마지막 날인 6월 8일에 "농우회사건"으로 경찰에 체포되어 구속되었다고 추정
한다. 이원영 또한 이날 저녁의 설교를 마지막으로 안기교회를 떠나야만 했다. 이처럼 6
월 8일에 한 사람은 경찰에 체포되고 또 한사람은 마지막으로 강단에 오른 점을 주시하면
서, 이원영의 교회시무 중지는 그가 농우회와 관련이 있다는 일제당국의 혐의로 말미암았
을 것으로 본다. 농우회는 유재기가 의성교회 안에서 만든 농촌연구모임이자 농촌협동과
소비를 위한 조합운동단체였다. 그런데 당국은 이 단체가 기독교 사회주의를 퍼뜨리면
서 "조선독립"을 달성하려 한다고 보고 유재기에게 "조선기독교도의 독립음모"로 뒤집어
씌워 그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했다. 그런데 이원영의 경우는 유재기처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할 만한 단서는 잡히지 않았으나 적어도 독립음모를 위한 모임장소(경안제직
수양회)를 제공한 자라는 빌미에 잡혀 교회의 시무를 중단시켰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원영
은 경안노회 농촌운동의 지도자로서 감시의 대상이었다. 이렇게 일제는 항일 전력이 있는
교회지도자들을 감시해 오다가 앞으로 본격적으로 시행될 황민화정책에 저항할 인물들을
가려내어 미리 차단시켰을 것이다.
1938년 2월에 장로교회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했고 그 해 9월에 열린 총회까지 전국
23개 노회 가운데 17개 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금번 제27회 장로교회 총회는 신사참
배를 가결했다. 경안노회는 이러한 대세에 따르며 노회의 이름을 조선예수교 장노회에
서 "기독교 조선장로회"로 바꾸기로 결의했다.
이번 정기노회는 이원영에 대해 대단히 심각한 결의를 했다. 경안노회는 비록 "당국의 명
령"이라는 단서를 붙였지만 그를 목사직에서 "시무사면"시키도록 결의했다. 이미 교회에
서 쫓겨나고 오복사골로 가서 교회와 교류가 끊긴 채 지내고 있는 그에게 일제는 노회의
손을 빌어 그와 교인들 사이에 있는 마지막 한가닥 남은 연결고리를 끊어버렸다.
(3) 1939년:제1차 예비검속
교회에서 시무사면을 당한 이원영은 광복이 될 때까지 네 차례나 경찰서에 구금되었고, 그
때마다 매번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1939년 5월에 이원영은 "예비검속 형태"로 안동경찰서에서 약 3개월 동안 구금되었다. 그
는 경찰서에서 말로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고문을 당해 초주검이 되어 풀려 나왔다. 제1
차 구금시에 이원영은 순교를 각오했다. 이미 53세의 나이에 초로에 접어든 그의 몸이 이
런 상황에서 극도로 쇠약해졌다. 게다가 고문(특히 구타)을 견디다 못해 그는 늑막염에 걸
렸다. 중병을 앓고 있는 그에게 고문이 멈추지 않았다.
그의 몸은 이제 축 늘어져 버렸다. 경찰은 그가 죽은 줄 알고 그를 유치장 복도에 끌어 내
어놓고 그 위에다 마대기로 덮어놓았다. 그리고 가족에게 시체를 가져가라고 통지했다. 가
족들이 놀라고 당황한 채 경찰서로 달려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성소병원으로 옮겼다. 다행
히도 이원영의 목숨은 아직도 가늘게 붙어 있었다.
성소병원에서 약 20일 동안 입원치료를 하는 동안에 그의 건강이 조금씩 다시 회복되었
다. 그가 병 보석으로 잠시 풀려나 있는 기간도 역시 감금생활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생활
이 낱낱이 감시당했기 때문이다. 그의 행동반경이 거주지에서 5리(2km) 이상 떠나지 못하
도록 굴레를 씌웠던 까닭에 그는 소위 "앉은 징역"을 참아내어야 했다. 게다가 고등계 형
사들이 그 골짜기로 들어가는 길목과 근처 산을 감시하고 있었다.
1939년의 장로교회 제28회 총회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결성하고 일
제의 국책 수행에 협력할 것을 다짐했다. 또한 총회는 각 노회별로 지부연맹을 만들어 일
제의 정책에 협력하도록 했다. 총회의 결의에 따라, 안동의 경안노회도 1939년 12월에 열
린 제34회 정기노회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경안노회 연맹"을 결성했다.
이번 회기의 노회에서 이원영과 가족이 살던 목사 사택(대지 180평)이 경안노회 유지재단
에 기부되었다.
(4) 1940년:창씨개명 거부, 제2차 예비검속
일제는 1940년 2월에 창씨개명을 시행했다. 1940년 12월에 모인 제35회 경안노회 회의 참
석자들은 창씨개명한 이름을 불렀다. 이원영은 창씨개명도 거부했다. 그런데 신사참배를
거부한 기독교인들 가운데서 창씨개명에는 순응한 인물들이 적지 않다. 한상동·주남고·
안이숙 등이 그러한 경우다. 이들은 신사참배를 철저하게 거부했던 반면에 창씨개명에는
순응해서 각각 이름을 서원상동(西原相東)·신무남고(新武南皐)·안천이숙(安川利淑)으로
바꾸었다.
이원영은 1940년 8월 20일에 또다시 제2차 예비검속을 당했다. 일경은 가족과의 면회조차
금지시켰다. 유치장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성경읽기뿐 이어서 그는 성경묵상에 몰두했
다. 그는 지난 번처럼 온갖 종류의 고문과 구타를 당했다, 만년필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
서 비트는 고문, 고춧가루를 코에 집어넣는 고문, 물 고문, 거꾸로 매다는 고문 등 온갖
고통을 견뎌내야 했다. 결국 이러한 고문으로 인해 그는 폐렴에 걸렸다. 그 해의 마지막
날(12월 31일)에 이원영은 병 보석으로 경찰서에서 풀려났다.
이즈음의 장로교회의 총회는 1940년 8월까지 731개의 애국반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서 총
회는 전승축하회·무운장구기도회·전사병 위문금·전상자 위문·유족위문·국방헌금·휼
병금(恤兵金)·유기(鍮器)헌납·시국강연 등의 사업을 벌여서 전시시책에 협력했다. 경안
노회도 그 해 12월 모인 정기노회(제35회)에서 각 교회에 신붕을 봉인하기로 가결하고, 만
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일경과 사전연락을 취하는 것까지 결의했다. 또한 노회는 국방헌금
을 하면서, 일제가 1개 면에 1개의 교회를 두는 정책에 호응하는 차원에서 교회합병도 추
진했다. 노회는 다수의 예배당 건물과 땅을 팔아 이 돈으로 국방헌금을 했다.
(5) 1941∼1942년:제3차 예비검속
1941년 7월 1일에 이원영은 또다시 경찰서에 수감되었다. 이번에는 그가 가족도 모르게 포
항, 영덕, 경산 등 여러 경찰서로 이감되었다. 여러 경찰서를 돌면서 고통과 고문을 받게
함으로써 그를 굴복시키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추운 겨울의 차디찬 유치장 바닥에서 지내
는 그에게 폐렴이 재발되었다. 1942년 3월 21일에 그는 병보석으로 경찰서에서 풀려났다.
안동의 장로교회는 이원영이 여러 경찰서로 돌면서 구금되어 있는 동안에 계속해서 일제
의 황민화정책에 굴욕적으로 굴복했다. 경안노회 제36회 정기노회(1941. 6)는 신사참배로
개회했다. 노회는 소위 "일본적 기독교"를 수립하는 데 발을 맞춰 갔다. 경안노회는 또한
전쟁물자를 지원하기 위해 각 교회들을 통해 유기(놋그릇) 헌납, 애국기 헌납을 했고, 또
한 전승기도회, 징병제실시 축하회를 가졌다.
경안노회가 이렇게 일제의 전쟁수행을 위해 온갖 협력을 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이 노회의 제38회 정기노회(1942. 12. 15-18)를 마지막으로 노회를 폐지시켜서 "경북 교구
단"에 소속시켰다. 경안노회는 이제부터 그 이름마저 사라져 버린 채, 향후 3년 동안(8·
15광복까지) 어떠한 모임도 없었다. 이원영이 담임하던 안기교회는 신세교회와 함께 법상
동교회로 "합동"되었고, 이 두 교회의 건물과 대지를 14,000여 원에 팔아서 이 가운데서
9,000원을 국방헌금으로 바쳤다.
(6) 1945년:제4차 예비검속
1945년 5월 22일에 이원영은 또 다시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번에는 여러 사람들이 같은
방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이들 가운데는 신사참배를 거부한 죄로 들어온 교인들도(주로 장
로와 목회자) 몇몇 있었다. 안동농림고등학교 학생들도 함께 있었다. 여러 사람들 사이에
서 자연스럽게 통성명과 교제가 이루어졌다. 이원영은 자신의 식사를 남겨서 이들에게 나
눠주었다. 유치장에는 빈대가 많아서 사람을 괴롭게 했는데, 그는 빈대가 가장 많이 나오
는 출입구 문지방에 누워서 스스로 자신을 빈대에게 뜯기게 하고 학생들 근처엔 빈대가 가
지 않도록 방패막이가 되었다.
(7) 황민화정책을 거부한 신학적 근거
일반적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한 교회지도자들의 신학적인 근거가 종말사상에 있고 더욱이
전천년종말론(前千年終末論)에 근거해 있는데, 이원영의 종말론(신사참배 거부관련)도 거
의 다르지 않다고 본다. 이와 관련해서, 이원영이 안기교회 목회시절에 사용했던《관주 신
약전서(1930년 간행)》의 뒤쪽 여백에 적어 놓은 도표에서 "종말론 도표"를 찾게 되었다.
이 도표는 천년왕국 곧 세상 마지막에 그리스도가 왕으로 재림하셔서 이 땅을 다스리게
될 왕국에 관해서 설명한 것이다. 이 도표와 거의 동일한 내용이 그가 평양 장로회신학교
재학 시절에 기록한 강의록 "다니엘서 강해"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의 유품장서 가운데
는 블랙스톤이 지은《예수의 재림》, 어도만이 지은《다니엘서(소화 2년 발행)》, 김정현
이 지은《말세론(1928)》, 이명직이 지은《야소재림강화(1927년/1930년 재발행)가 있다.
이렇게 이원영이 그려 놓은 종말론 설명도표와 나머지 모든 자료들은 한결같이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대변하고 있다.
신사참배강요를 거부하며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굳게 붙잡은 교회지도자들은 임박한 예수
의 재림을 기대하고, 재림과 함께 이루어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고대하면서 신사참배처
럼 허망된 것 앞에 머리를 숙임으로써 계명을 어기지 말고 오히려 계명을 끝까지 지켜서
예수의 재림을 맞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컨대, 이기선은 1930년대에 창궐한 전쟁·천재
지변(가뭄, 벌레피해 등)·유행성 질병 등은 모두 말세에 일어나는 현상인데 여기에다 신
사참배강요가 하나 더 보태져서 말세를 재촉한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이제 곧 그리스
도가 재림하셔서 "일본제국을 포함해 현재 존재하고 있는 모든 국가와 조직을 모조리 쓸어
버리고 그 위에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하는 천년왕국을 건설한다"고 굳게 확신했다.
세대주의적 종말사상은 구약 다니엘서를 기반으로 우상숭배거부와 함께 묶여져 있다. 즉,
다니엘서에 기초한 종말론적 역사의식 속에서 신사참배거부와 우상숭배거부를 동일시했던
것이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이들 가운데(채정민, 김경희 등)는 지금 이 시대야말로 구약
의 바벨론시대와 동일한 양상을 띤다고 보았다. 그래서 "일본은 바벨론에 해당되고 조선
은 유대에 해당된다"고 보면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조선사람들을 감옥에 가두고 고문하
는 일은 마치 "바벨론의 우상숭배를 거부한 유대인들을 풀무불에 던져 넣은 것"과 같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들은 신사참배가 국가의식이 아니라 십계명 가운데서 제1계명에 위배되
는 명백한 우상숭배로 판단했다. 이기선은 이 세상에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이 유
일한 절대자이고 그분 외에 어떤 존재도 그분의 자리에 오를 수 없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일본의 천황도 "불완전한 인간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를 봉사하는 일본의 모든 신궁과 신
사는 모두 거짓 신에 봉사하는 것으로 이를 제사 예배하는 행위는 모세의 십계명 가운데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것을 어기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안동의 인노절기념성경학교
를 졸업(소화 13년, 1938)했고 또 이하동교회의 집사로서 교역자의 일을 했던 전계원은 -
아마도 이원영과 사상이 같았을 것으로 추정하면서- 주일학교 공과시간이나 예배시간에 설
교를 통해서 강조하기를, "신사 신궁은 우상에 불과(하며), 신사참배는 우상숭배로서 모세
의 십계명(출 제20장)에 위배되는 일"이라고 선포했다. 이러한 세대주의적 종말사상과 제1
계명을 굳게 지키려는 기독교인들의 신앙의지를, 일제당국은 사회질서를 무너뜨리고 치안
유지에 방해되며 정치적으로도 불순하다고 보았다. 더구나 이들이 "현존 사회제도 및 국가
형태는 악마의 조직이므로 머지 않아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기존 사회제도와 국가가) 붕괴
되고 이를 대신해 그리스도가 왕으로 천년왕국을 건설할 것이라"고 외침은 일제의 보안법
(제7조)을 위반하고 또 불경죄(형법 제74조 제1항 제55조)와 선동죄(형법 제54조 제1항
앞 부분, 제10조에 제74조 1항)에 해당되는 범법행위였다.
(8) 오복사골 가정교회
안기교회에서 쫒겨나 오복사골에서 지내는 이원영은 매일 아침과 저녁에 그는 가정
예배를
인도했다. 물론 수개월 동안 경찰서에 수감되어 있는 기간에는 그가 예배를 인도하지 못했
다.
오복사골 가정교회 시절에 작성된 그의 자필설교목록(1938년 7월부터 1945년 초반까지)에
는 총 324편의 설교제목과 본문이 기록되어 있다. 이 시기의 설교는 이전보다 훨씬 더 신
약성경에 편중해서 선포되었고, 이전 시기보다 더 자주 요한계시록에서 설교본문을 뽑았
다. 이점은 그가 처해 있는 극한적인 종말상황을 대변해 주고 있다. 이원영은 요한계시록
3장 1-6절을 적어도 4회 이상 설교본문으로 선택했다. 그리고 설교제목을 "옷 더럽히지 않
는 자 몇 명인가" 혹은 "사데교회"로 붙였다. 설교제목이 암시하듯이 그의 눈에는 요한계
시록의 사데교회가 지금의 조선교회와 동일하게 비쳐졌을 것이다. 그때의 교회처럼 지금
의 조선교회도 신사참배강요에 굴복한 "행위"로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임을 그는 탄식했을 것이다. 이러한 죽음 상황에 있는 교회에서 "옷이 더럽혀지
지 않은" 깨끗한 성도가 과연 몇 명 정도 남아 있을 것인가 헤아리며 그는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같은 범주에서 그는 누가복음 5장 37-39절을 여러 차례 설교본문으로 선택했다. 그리고 설
교제목을 "새 부대 같은 낡은 부대"로 붙였다. 설교제목이 암시하듯이 지금까지 그에겐 조
선교회가 사람의 나이로 따져서 이제 젊은 청년기의 "새 (가죽)부대"로 보였는데 이제 자
세히 알고 보니 "낡은 (가죽)부대"로 판명되었다. 낡은 가죽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아본들
가죽부대가 터져 버리듯이, 조선의 교회도 그렇게 무너졌다고 그는 파악했을 것이다. 이
런 식으로 교회의 실상을 파악하면서 그 교회에 대해서 실망한 그는 참된 교회를 찾아 나
섰다.
오복사골의 생활은 이원영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빠져 나와 "광야생활"을 한 것
에 비유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 구약성경 출애굽기 16장 11-36절을 설교본문으로 잡았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고기가마 곁에서 배불리 얻어먹으며 만족해하는 노예생활보다는
차라리 거기에서 벗어나 광야생활을 선택했듯이, 이원영과 가족도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벗
어나 오복사골에서, 비록 하늘에서 내리는 양식(맛나)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형편이지
만, 신앙양심을 지키고 마음 편하게 사는 편이 낫다고 보았음이 틀림없다.
2. 8·15광복, "산 순교자"로서 교회복구
8·15 광복을 맞아 이원영은 1945년 8월 17일에 경산경찰서에서 풀려 나왔다. 가족들과 친
지 및 교인들은 -그가 살아서 돌아오기가 어려울 것이라 짐작했는데 이렇게 자기 발로 걸
어서 나오니- 기쁨과 감격을 억제하지 못해 만세삼창을 외쳤다. 그러나 정작 이원영 자신
은, 순교자의 반열에 설 것을 믿고 각오하며 하나님께 늘 기도하여 왔으나, 이렇게 순교하
지 못하고 살아서 돌아온 것에 대하여 몹시 답답해했다.
8·15광복과 함께 사회치안유지와 국가건설을 준비하는 기관인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
준)가 발족되었다. 건준은 이원영에게 여러 경로를 통해 안동지역의 인민위원장직을 맡아
달라고 청원했다. 이원영은 건준의 제의를 딱 잘라서 거절했다. 그의 관심은 일제에 의해
서 강제로 문이 닫혀서 무너져 있는 교회를 복구하는 데 집중되었다. 그런데, 이원영
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이하, 독촉) 안동군위원회의 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건준의 제의
를 뿌리쳤던 이원영은 또다시 반복해서 독촉위원장직을 거부하기가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
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전적으로 교회 복구에 있었다. 이 일에 전념하느라 그는 독촉의
회의주재조차 감당해 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독촉의 운영은 주로 부위원장이 맡아서 진
행했다.
이원영은 1945년 9월 3일부터 주로 경상북도 북부지역에 있는 교회들을 돌면서 사경회를
인도했다. 사경회 기간은 짧으면 2일, 길면 10일이었고, 평균 4-7일이었다. 가는 곳마다
교인들은 그를 "산 순교자"로 존경하면서 환영했다. 사경회가 열리는 교회에서 100리
(40km) 이상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을의 교인들도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걸어와서 사경회에
참석했다.
그의 로마서 강해는 특별히 "죄에 대한 뉘우침과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면서 진행되었
다. 말씀 선포를 통해서 교인들은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신사참배강요에 굴복, 신사우상
설치, 그리고 교회 강제통합 등) 돌이켜 보면서 깊이 뉘우치며 회개하고 또 그리스도 안에
서 그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면서 다시 새롭게 시작하게 되었다. 용서
를 통한 새로운 시작. 이원영의 사경회 인도는 가는 곳마다 성경 강해와 말씀 선포로 영
적 각성을 불러 일으켰다.
그 해 11월 20일에 안동교회에서 "경안노회 제39회 복구회"가 모였다. 참석회원은 목사 19
명, 장로 34명이었다. 이번 노회에서 이원영은 노회장으로 피선되었다. 복구노회의 노회장
으로서 그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는 일제의 탄압으로 무너진 교회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
는 일이었다. 그가 노회장으로 선출된 것은 안동지역의 교회에 지극히 중요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경안노회는 일제시대 말기에 경북교구단으로 합병되기 전에 그를 목사직에서 면
직시켰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원영은 광복 후에 지난 일을 되씹으며 자신을 면직시킨
노회에 대해서 분노를 발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무너져 내린 노회를 다시 일으
켜 세우는 데 앞장을 섰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이 순간에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한 자신
의 의로운 행위를 내세우며 일제에 굴복한 교회지도자들 앞에서 오만한 태도를 취했다면,
지역의 교회는 또다시 새로운 갈등에 휘말릴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
다.
그러나 이원영의 자세와 달리, 다른 "출옥성도"들은 신사참배로 말미암아 더럽혀지고 얼룩
진 교회를 말끔히 청소하는 것을 제일 우선적인 과제로 잡았다. 이를 위해서 부산에서 "경
남재건노회"(1945. 9. 18)가 모였다. 여기에 참석한 자들은 신사참배 죄에 물들지 아니한
깨끗한 신앙인들만의 모임을 추구했다. 이 노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간 한상동이 이원영
을 찾아와 그들과 합류하도록 강하게 권했다. 그러자 이원영은 이 권유를 거절했다. 그러
면서 그는 말하기를, "일제 치하에서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강요당한 목사·장로·집사·
교우들이 마음에도 없는 절을 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받아 큰 괴로움 속에 있었고, 또 신앙
의 지조를 유린당하면서도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했는가? 여기에 비하면 감
옥에 갇힌 성도들은 오히려 신앙양심을 지킬 수 있었고, 감옥생활은 그런 점에서 오히려
피난처가 된 셈이었다. 따라서 출옥성도는 자만하고 남을 정죄할 것이 아니며 오히려 수난
당한 교회와 성도를 위로하고 격려해야 한다." 이 말을 하면서 이원영은 출옥성도는 "유대
교적 율법주의"를 항상 경계해야 한다고 주의했다. 이러한 그의 입장과 태도는 안동지역
의 교회를 불협화음 없이 다시 일어서게 했고 또한 경안노회가 평안한 가운데서 새로 시작
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그의 포용은 결코 타협이 아니었다. 세월이 조금 지나서 국기배례문제가 일어나자
그는 다시 한번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국기배례는 이원영에게 신사참배나 다를 바 없었
다. 그는 국기배례 또한 신사참배처럼 우상숭배라고 보았다. 따라서 우상숭배인 국기배례
는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국기배례가 강요되는 한
그에게는 일제 식민지배의 잔재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으로 비쳐졌으며, 이러한 뜻에서 아
직도 진정한 광복은 오지 않았다고 이해되었다. 국기배례가 강요되자 이원영은 또다시 자
녀들에게 학교에 그만 다니도록 명했다.
이원영이 사경회를 인도하면서 두 가지 목표를 세웠다고 본다. 첫째는 사경회를 통해 무너
진 교회를 당장 일으켜 세우는 일이고, 둘째는 다시 일어선 교회가 계속해서 건강하고 든
든하게 자라나게 하기 위해 지도자, 곧 하나님의 일꾼을 양육하는 일이었다. 이렇게 멀리
내다본 목표 아래 그는 사경회를 인도하는 가운데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성경교육과 체계적
인 신학교육을 시키는 일을 구상했다. 이 일은 1946년 2월에 "단기 성경학교"로 시작되었
고 그 해 9월에 3년 수업과정의 "경안고등성경학교"를 설립하면서 본격화되었다.
3. 장로교회 총회장으로 선출 :〈신사참배 취소성명서〉발표
8·15광복과 함께 장로교회는 교회재건 및 새로운 출발을 위해 지나온 과거를 청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었다. 신사참배문제가 시급한 선결과제였다. 이 과제를 놓고 1945년 9월
에 신사참배로 투옥되었던 20여 명의 교회지도자들을 중심으로 교회개혁을 외치며 "재건총
회"가 창립되었고, 부산에서 "경남재건노회"가 모였다.
일제시대 신사참배 굴복에 대한 해결책과 교회 재건안을 놓고 교회 안에서 상반된 견해가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1946년 6월에 남한 교회만이 모인 "남부총회"에서 신사참배문제
가 거론되었고, 총회는 1938년 총회의 신사참배결의를 "취소"했다. 아울러 신사참배를 결
의했던 날에 해당되는 주일 하루를 "통회자복일"로 정해 이를 시행했다. 그러나 이것은 교
회정화를 외치는 사람들이 보기엔 눈가림에 불과했다. 이들이 "최소한 두 달간의 통회기간
을 갖자"고 요구했는데도, 남부총회는 통회자복일을 겨우 단 하루 동안만으로 정했다. 더
욱이 신사참배에 굴복한 교회지도자들에 대한 징계조치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없었다.
광복 이후 불과 약 10년 동안에 장로교회는 두 차례나 분열되었다. 고신측-장신측, 장신
측-조신측 등. 교회복구의 기쁨은 잠시뿐이었고 교단분쟁과 교회분열로 말미암은 고통이
오랫동안 지루하게 지속되었다. 사분오열된 상황에서 혹시 또다시 분열이 일어날까봐 조바
심하면서 "교회의 단결과 평화"를 이끌어 줄 지도자를 갈망하였다.
1950년대 초반부터 교계의 관심은 이원영에게 쏠렸다. 그는 출옥성도이며 경남노회 육성위
원회의 위원장으로서 고려신학교측이 총회로 다시 돌아오도록 노력했음을 사람들이 주목했
다. 그런데 이에 앞서 그는 신실한 목회자로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기에 총회장으
로 선출되는 데 조금?? 손색이 없다고 다들 의견을 모았다. 1954년에 열린 장로교회 제39
회 총회는 4월 23일에 안동에서 개최되었는데, 이번 총회에서 이원영이 총회장으로 "추
대"되어 선출되었다.
총회에 참석한 대다수 총대들은 교단분열이 신사참배문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었
다. 따라서 이들은 이번 총회기간에 맨 먼저 그 죄를 깊이 뉘우쳐야 한다고 인식했다. 더
구나 이번 총회는 이북에서 온 목회자들도 총대로 참석하게 되어서 남북합동총회의 성격
을 띠고 있으므로 남부총회(1946)와는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신사참배문제를 해소할 수 있
는 기회라는 여론이 돌았다. 더욱이 고려신학교측을 총회로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라
도 신사참배 죄를 통회하며 성명서를 내야 한다는 견해가 대두되었다. 이렇게 신앙양심을
바르게 세우고 교회의 평화통일을 위한 죄의 고백이 필요하다는 중론과 함께 총회가 시작
되었다.
총회는 제27회 총회에서 결의한 신사참배결의를 취소하고 성명서를 발표하기 위해 위원회
(이원영·명신홍·권연호)를 선정하고, 위원회로 하여금 참회에 대한 절차를 마련하게 했
다. 위원회는 5개 항목을 만들어서 총회 3일째에 제출했는데, 1) 신사참배 취소성명을 문
서로 작성해서 전국 교회에 공포하고, 2) 총회 기간에 일정한 기간을 정해 통회자복하고
하나님의 죄 사하심을 위해 기도하고, 3) 위원 5인을 선택해 신사참배 주동자들을 심사한
후, 해당 노회에 통지해 처벌하도록 할 것, 4) 신사참배로 순교한 성도의 유가족을 위해
총회 기간 중에 한 차례 연보(헌금)하고 6월 첫 주일에 전국 각 교회가 연보해 유족에게
위문금을 드릴 것, 5) 6월 첫 주일을 통회주일로 정하고 각 노회를 통해 전국교회가 하루
금식통회하며 속죄를 위해 기도할 것 등이었다. 총회는 이 가운데서 4개 항목을 받아들여
서 실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신사참배 취소성명을 발표했다.
"대한예수교 장노회 제39회 총회는 1938년 9월 9일 평양 서문외교회에서 회집한 제27회 총
회결의인《신사는 종교가 아니요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
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작하며 또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여행하고 추히 국민정신 총동
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하에서 총후 황국신민으로써 적성을 다하기로 기함》의 성명에 대
해 그 결의는 일제의 강압에 못 이긴 결정이었으나 이것이 하나님 앞에 계명을 범한 것임
을 자각하고 남부대회가 신사참배 회개운동을 결의 실행했으되 남북통일 총회가 아니었던
고로 금번 남북이 통일된 본 총회는 이를 취소하고 전국교회 앞에 성명함"
제39회 총회는 예정보다 하루 더 연장하고 마쳤다. 총회 회기의 마지막 날인 제5일째에 회
장 이원영은 사가랴 8장 18-19절을 봉독하고 "금식일이 변하여 기쁘고 즐겁고 희락의 절기
가 되리니 그러므로 진실과 평화를 좋아하라"는 본문의 뜻을 간단하면서도 분명하게 설명
하면서 화해를 선포했다. 교단의 주간신문〈기독공보〉는 이번 총회가 "신사참배거부로 교
회에서 제명을 당한 성도와 목회자에게 복권되는 길을 열어 주었고, 신사참배로 말미암아
갈라섰던 사람들이 교회 정치적으로 화해하게 되어 제33회 총회 이래로 분규와 논쟁으로
반복되었던 총회가 이번에 해소되어서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고 평가했다.
Ⅳ. 맺는 말
이제, 위에서 서술한 내용을 여러 쟁점들과 -지금까지의 신사참배 연구와 관련해서 논의
된 쟁점들 - 연결 지어서 정리 및 제언해 보고자 한다.
1) 이원영은 일제의 신사참배강요를 거부했을 뿐만이 아니라 황민화정책(조선교육령개정,
신사참배, 창씨개명) 전부를 거부하였다. 이 사실은 그 동안의 신사참배 관련 연구에서는
흔하게 드러나지 않았던 매우 드문 경우라고 파악된다. 이원영 연구를 통해서 신사참배연
구의 범주가 일제의 황민화정책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일제는 황민화정책을 통해서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시키고 이 민족을 일본국민으로 동
화시켜서(2등국민) 전쟁에 활용하고자 했고, 이 정책의 하나로 실시된 신사참배강요는 특
별히 장로교회와 큰 마찰을 빚으며 갈등을 일으켰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
에 근거해서, 신사참배 관련 연구는 앞으로 더욱 황민화정책 전반을 살피면서 폭넓게 연구
해야 할 것이다. 일제의 황민화정책에 대하여 교회사연구와 일반 역사연구가 서로 대화하
면서, 두 분야 사이의 학문적 협력이 더욱 중요해졌다고 본다.
신사참배 연구범주가 황민화정책을 살펴보는 것으로 확대되면서, 신사참배를 거부한 인물
들 사이에 실재한 신념 체계의 차이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앞에서 서술한 대로,
신사참배강요를 거부한 인물들 가운데는 창씨개명에 순응한 일이 드물지 않았다. 이들은
아마도 신사참배는 제1계명을 범하는 죄악이라고 생각했던 반면에 창씨개명은 신앙의 차원
이 아니라 개인 양심의 문제로 여겼던 것 같다. 그런데 교회의 사회참여나 정치개입을 삼
가면서 신앙양심에 위배되고 성경의 가르침(제1계명)에 위배되는 신사참배만 거부한 신념
과, 신앙양심과 기독교 진리를 지키는 일이 신사참배강요에 대한 거부뿐만이 아니라 민족
의 씨를 말리는 창씨개명과 민족의식을 말살시키려는 조선교육령 개정에 대한 저항도 포함
시키는 신념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이원영은 후자에 속한다.
2) 황민화정책에 대한 이원영의 전면거부는, 그의 생애 전체를 돌이켜 볼 때, 예안의 기미
년 3·1독립운동 주동과 경안노회(안동지역) 농촌운동지도자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본다.
이와 더불어서 파악되는 점은, 그에게는 구한말 혁신유림의 실력양성론에서 입은 영향이
여전히 살아있었고 또한 3·1운동 이후에 시민 민족주의계열이 내세운 실력양성론에 공감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이원영의 신사참배강요거부 및 황민화정책 거부
는 일차적으로 신앙양심을 지키려는 확고한 의지에서 비롯되었으되 신앙적 민족의식이 여
기에 포함되어 있었음이 분명하다. 물론, 그의 민족의식이 이념적으로 절대화된 적이 전
혀 없었으며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제 1계명준수, 우상숭배배격) 견지하였으되,
이 신앙 안에서 민족의식을 가진 것이 분명했고, 또한 신앙의 영역과 민족의 영역을 양분
시키는 이분법적 신학사고를 그에겐 찾아볼 수가 없다.
이와 함께, 신사참배를 거부한 인물들(주기철 등)에 대한 이분법적인 해석을 심각하게 재
고해야 한다고 본다. 즉, 신사참배거부는 "신앙적 동기였지 민족적 동기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고, 이 투쟁은 결코 민족적 동기나 정치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해석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이러한 해석은 신사참배 거부자를 쉽게 "신앙의 영웅"으로 치켜세우
게 되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으며, 영웅적 신앙은 "하나님 중심"의 신앙과 정면으로 대치
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또한, 신사참배거부에 대한 이분법적 이해는 개혁교회(장
로교회)의 신학전통에 상응하지 않는다고 본다. 16세기 종교개혁자 쯔빙글리와 칼뱅 이래
로 내려오는 개혁교회의 유산은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면서 교회의 사
회적 책임성을 강조해 왔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자 전위대로서 그 나라가 이 땅
에서도 -사회·정치·경제·문화, 그리고 생태계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지도록 애
쓰고 힘써야 하며, 이것은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하나님)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 10)]대로 기도하면서 그대로 실
천하려는 신앙인의 경건이다. 이러한 개혁교회의 유산에 비추어서 신사참배문제가 새롭게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3) 신사참배강요를 거부한 이원영의 저항은 8·15 광복 직후에 그가 보여준 겸손한 신앙자
세를 통해 빛이 나기 시작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그는 스스로 "유대적 율법주의"를 경
계하면서 소극적으로는 소위 "출옥성도"들의(한상동 등) 교단이탈권유를 물리쳤고 적극적
으로는 일제시대 말기에 자신의 목사직을 면직 처리한 노회를 포용해서 이 노회를 다시 일
으켜 세웠다. 이러한 겸손에서 나온 그의 지도력은 1954년에 장로교회 제39회의 총회장으
로 선출되면서 "신사참배 취소성명" 발표를 주관하게 되었다. 이로써, 그는 한편 일제잔재
의 청산을 주관했고 또 다른 한편 신사참배문제로 인해 분규와 분열에 휩싸인 교계를 화해
케 하는데 앞장섰다.
이러한 이원영의 신앙자세는 오늘날 한국장로교회들의 연합과 일치운동(에큐메니칼운동)
을 위하여 커다란 가르침을 줄 것이 분명하다.
4) 이원영의 생애를 연구하면서 느낀 점은, 신사참배 관련 연구가 영남지역에서는 경상남
도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혹시, 이것이 "한 쪽으로 치우친 역사인식" 곧 일제시대의
신사참배거부가 어느 특정 지역에만 국한되어 일어났다는 인식을 심어주지 않는지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경상북도 안동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한 이원영의 생애연구를 계기
로 삼아, 앞으로는 신사참배 관련 연구가 여러 지역을 골고루 찾아다니며 엄격한 교회사
현장학습(field work)을 통해 발전되어야 하리라 본다.
【이 발표논문의 원고는 2002년 3월 "한국기독교역사연구회 제201회 연구모임 주제발표"에서 발표한 것으로써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식 제53호(2002. 4.6)에 전문과 관련 사료를 소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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