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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진짜 하나님 사랑하면 삶은 덤이다>의 줄거리 :
나는 절대로 삶을 사는 자가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민이 맞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언약의 당사자이신 하나님을 유일한 상대로 마주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마주하는 동안 우리는 그냥 우두커니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는 하나님 사랑이 진짜잖아요? 그러면 평생 내 삶은 그냥 덤으로 주어지면서 공짜로 살게 됩니다. 삶은 반드시 하나님 사랑에 덤으로 주어지는 공짜여야만 합니다.
진짜 하나님 사랑하면 삶은 덤이다
(신명기 6:10~25)
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11.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12.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13.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14.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르지 말라
15. 너희 중에 계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
본문 중심으로 <진짜 하나님 사랑하면 삶은 덤이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면 삶은 공짜로 주어진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언젠가 집사람과 동해안 경포대 도로를 따라 주문진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해안 길에서 복숭아를 파는 노점상에서 중간 크기의 붉은 빛이 나는 복숭아 8개가 담긴 박스를 샀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한쪽에 상처 난 복숭아를 잔뜩 모아놓은 것을 가리키며 몇 개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소위 덤으로 주는 것입니다. 집에 와서 먹어보니 상처는 났지만 돈 주고 산 복숭아보다 더 크고 더 달았습니다. 이처럼 덤이란 값을 치르고 거래가 다 끝난 뒤에 요구할 권한이 없는 상태에서 더 받는 것입니다. 값을 치른 것은 마땅한 내 것이고 덤은 거저 받은 선물이기에, 돈 내고 사서 손에 쥔 것보다 덤 때문에 기분이 좋아집니다.
우리의 남은 생애를 선물 받은 기분으로 살 수는 없을까요? 내가 치른 노력과 수고의 마땅한 대가로 사는 대신에 선물로 살아간다면 항상 기쁠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드리자면 ‘아무리 그래도 삶 전체를 공짜로 살 수 있겠는가?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하는데 가능한 일인가?’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삶 전체를 덤으로 살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상처 난 복숭아 몇 알을 덤으로 받듯이 사소한 선물을 받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삶 전체를 아예 덤이자 공짜로 살게 하신다는 엄청난 스케일의 이야기입니다.
본문은 앞서 언급한 쉐마의 말씀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4~5절에서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함은 성전이나 예배당에서만 이루어질 일이 아니라 선민의 생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기에 7~9절에서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제일 먼저 유일한 상대자로 삼는 것을 중단하지 말라는 것이 쉐마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어지는 10~11절을 보면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은 “하실 때에”라는 조건을 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상대자가 되실 때 삶 전체가 공짜로 주어지리라는 이야기를 하지만 마치 그것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휙 지나가는 분위기입니다.
모세의 관심은 “하실 때에”라는 표현 뒤에 이어지는 내용에 쏠려 있습니다. 12~13절을 보면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며, 우리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모세는 다양한 예를 들며 삶 전체가 공짜로 주어지리라 이야기를 하지만, 마치 이것이 귀찮기라도 하다는 듯이 “하실 때에”라는 조건을 붙이며 여호와 경외라는 주제로 넘어갑니다. 선민에게 여호와 경외를 이야기하고 싶다는 모세의 심정이 강하게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세의 태도에 주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오늘날의 삶으로 환원해서 생각해 봅니다. 모세가 언급한 다양한 요소는 모두 삶에서 매우 중요한 것들입니다.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라고 했습니다. 성읍이란 삶의 토대이자 테두리입니다. 또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내 집 하나를 얻으려고 평생을 수고하며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합니다. 집은 그 정도로 삶에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또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라고 했습니다. 물은 삶의 필수 조건입니다. 요즘은 먹고 입는 것 외에도 자동차가 꼭 필요하고, 정상적인 삶을 위해서는 가전제품도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의 필수 조건들은 간단하게 말하고 넘어갈 일이 아닌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리고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라고 했습니다. 포도원이나 감람나무를 직장 생활이나 사업이라고 생각해 보면 그 중요성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언급된 내용들에는 무엇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평생 전력 질주를 해야 할 일들입니다. 그런데 정작 모세는 이렇게 중요한 일들을 하나님 경외를 꺼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언급해야 하는 귀찮은 일들처럼 여기며 “하실 때에”라는 표현을 덧붙입니다.
앞서 모세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이야기를 하며 삶에서 하나님을 상대자로 마주 보는 상황을 상실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야기 뒤에 마지못해 삶 전체를 덤으로 살게 되리라는 이야기를 해치우듯 늘어놓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하나님 경외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이러한 본문을 요약해 보자면 ‘삶은 공짜다. 그런데 삶을 공짜로 살 때 정말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 경외다. 배부를 때 하나님 경외를 잊어서는 안 된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모세가 공짜라고 언급한 내용들은 하나 같이 무척 중요한 것들입니다. 삶의 토대, 살아야 할 집, 우물로 비유되는 필수품들, 포도원과 감람나무로 비유되는 직업과 사업들은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것들이 공짜로 주어질 것을 기정사실로 이야기합니다. 그것들을 덤으로 얻는 것은 전혀 대단한 일이 아니고 더 중요한 일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이것들 중 하나라도 얻기 위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평생을 살았던 것을 생각하자면 참 난감한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세상 사람들은 모세가 하나님 경외를 이야기하기 위하여 후딱 넘어간 것들을 얻으려고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전력 질주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모세의 이야기는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집니다.
모세는 마치 삶을 안 살아본 사람 같습니다. ‘삶이 얼마나 어려운데 공짜 취급을 하느냐? 나는 삶에 찌들어 죽을 지경인데 삶을 이렇게 가볍게 대해도 되느냐?’라는 생각이 듭니다. 삶의 문제 때문에 허덕이거나 고통을 당하는 입장에서는 기분 나쁘고 욕이 나올 지경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경 말씀이기에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그렇게 대할 수도 없습니다. 모세가 삶을 덤으로 얻는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항변하기도 어려운 것은 앞에서 등장한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라는 말씀대로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상대자로 마주하는 이유는 우두커니 마주 보고만 있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상대자로 삼았다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을 다함이란 하나님만 좋아하는 것이고, 뜻을 다함이란 하나님만 얻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것이며, 힘을 다함이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만 힘을 쓰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삶에는 신경을 쓸 수 없습니다. 집을 얻겠다고 마음과 뜻과 힘을 쓸 수 없습니다. 우물 파는 데 마음과 뜻과 힘을 쓸 수 없습니다. 포도나무와 감람나무를 키우는 일에 마음과 뜻과 힘을 쓸 수 없습니다. 집보다 하나님이 내 마음에서 더 가깝고, 우물보다 하나님이 내 마음에서 더 가깝고, 포도나무와 감람나무보다 하나님이 내 마음에서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상대자로 붙잡고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해야만 하는 선민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삶에 신경을 쓸 수 없는 것이 정상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을 상대자로 삼는다면 하나님께만 마음과 뜻과 힘을 쓰기에 직장 생활에 쓸 마음과 뜻과 힘이 없습니다. 아이 양육에 쓸 마음과 뜻과 힘이 없습니다. 배우자에게 쓸 마음과 뜻과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삶을 공짜로 제시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논리적으로도 삶은 공짜가 아니면 못 삽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 하나님께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유일한 상대자이신 하나님께 마음과 뜻과 힘을 다 써야 하기에 나는 삶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삶을 공짜로 제시하신 것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거꾸로 하면 ‘네 마음과 뜻과 힘은 단 한 방울이라도 삶 속으로 들어가지 않게 하라.’는 뜻이 됩니다. 삶을 위하여 꼭 필요한 모든 것이 있지만, 그것들에 내 마음과 뜻과 힘이 한 방울이라도 들어가게 되면 다 독약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과 뜻과 힘이 한 방울이라도 삶으로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을 놓치게 됩니다. 하나님을 놓치면 하나님에 의해서 얻게 되는 덤으로서의 삶도 놓칩니다. 그렇기에 삶에 내 마음과 뜻과 힘을 쓰는 것은 무시무시한 독약입니다.
배우자를 마주할 때 배우자에게 마음과 뜻과 힘을 쓰게 되었다면 삶에서 하나님을 놓치는 독약을 풀게 된 것입니다. 자녀나 사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배우자 앞에서, 자녀 앞에서, 사업 앞에서 뭘 해야 할까요? 내 마음과 뜻과 힘은 한 방울도 이들에게 들어가지 않게 해야 합니다. 내 마음과 뜻과 힘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하나님께 다 쏟아야만 합니다. 그럴 때 삶은 공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배우자에 대한 일, 자녀에 대한 일, 직업과 사업에 대한 일을 덤으로 주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세상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육체를 입고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육체의 오감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영이십니다. 이러한 영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육체화된 마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영체화된 마음으로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태어났습니다. 내가 지금 아빠든 엄마든 직업이 무엇이고 신분이 어떻든,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다 덤으로 살아야 될 것이고 내 진짜 정체성은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하여 내 마음이 영이신 하나님에 의하여 영체화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 태어난 것입니다.
사업가라고 해서 사업을 위해 태어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업은 덤으로 얻어야 합니다. 사업장에서 해야 할 일은 사업이 아니라 하나님을 놓치지 않고 유일한 상대자로 삼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 뜻과 힘이 사업에는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게 하는 것이야말로 선민인 사업가의 책임입니다. 자녀 양육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를 잘 키우라고 어머니가 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녀를 앞에 두고 있는 상태에서 마음으로 하나님을 놓치지 않고 하나님을 상대합니다. 내 마음과 뜻과 힘이 한 방울도 자녀에게 가지 않도록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책임입니다. 그러면 자녀는 덤으로 주시는 것이 됩니다. 엄마가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자녀의 인생과 자녀의 삶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덤이 됩니다.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선은 내 마음이 내몸보다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상대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 마음과 뜻과 힘이 한 방울도 내몸을 향해서는 흘러가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내몸과 관련된 모든 것은 하나님이 덤으로 주시고 공짜로 주십니다. 그렇게 해서 삶은 이루어집니다.
삶은 투입할 마음과 뜻과 힘이 한 방울도 없는 상태에서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마음과 뜻과 힘이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내산 언약의 궁극적 내용입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함이란 하나님을 상대자로 보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 것을 상대하는 동안에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 자신을 상대자로서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마음을 쏟고 뜻을 쏟고 힘을 쏟습니다. 그렇게 하면 이 세상 삶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과 힘으로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과 힘으로 사니까 삶은 덤이고 공짜입니다.
여기서 ‘어차피 우리가 움직여야 되지 않느냐?’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본 3장에서 모세는 아모리 남북 왕국을 다 무찔렀던 사건을 언급했습니다.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무찌른 것을 회상하며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위하여 싸우셨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창과 칼을 들고 몸을 움직이며 적군과 싸웠던 것은 이스라엘 군사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싸우셨다는 것은 내몸이 지칠 정도로 싸운 뒤에도 하나님이 하셨다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에 나가서 활동을 합니다. 그런데 열심히 일을 하고도 이것이 공짜고 덤이라는 느낌과 실감이 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삶을 살아보셨습니까? 하나님의 마음과 뜻과 힘이 내려와서 삶이 공짜가 된다는 것은 내가 우두커니 있는데 집도 생기고, 우물도 생기고, 포도나무나 감람나무가 알아서 수확되는 실제 현상이 일어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내 몸을 움직이면서 살 것입니다. 그런데 내 마음에서는 다 공짜이고 다 덤으로 느껴집니다. 이처럼 삶을 덤이자 공짜로 사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는 하나님 실감이 필수적입니다. 하나님을 상대자로 마주하여 실감하고, 그 하나님께 마음과 뜻과 힘을 다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을 다하기 위해서는 바람을 죽여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만 좋다. 하나님 외에 아무것도 좋아하지 않겠다. 마음에서 이랬으면 좋겠다, 저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싹 지워버리겠다.’라는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좋아하고 바라는 마음이 있으면 티끌만 한 것이라도 남기지 않고 십자가에서 죽입니다. ‘머리카락이 좀 더 있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갖다가도 그러한 바람을 가진 나를 십자가에서 죽입니다. 그렇게 해서 마음에서 좋아함의 기능이 하나님 외의 다른 어떤 곳에도 흘러가지 않게 십자가로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뜻을 다함과 힘을 다함도 마찬가지입니다. 뜻이란 목표입니다. 하나님 부자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그 외에 다른 모든 목표에 대해서는 다 십자가에서 죽여버립니다. 하나님 이외의 목표를 갖는 나를 죽은 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힘을 씁니다. 이렇게 해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면 아직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삶이 공짜이고 덤이라는 것이 느껴집니다. 하나님 사랑에 진입해 들어가자마자, 하나님 진짜 사랑하기를 시작하자마자, 완전히 공짜로 주어지는 삶이 느껴집니다.
공짜로 사는 모습을 보면 스스로 수고하고 노력해서 사는 사람보다 훨씬 더 치열하고, 훨씬 더 열정적이고, 훨씬 더 부지런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이자 역설입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열심히 일해 좋은 성과를 얻었습니다. 그 결과 표창장도 받고 고속 승진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열심히 산 결과야. 축하한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회사에서 일한 것이 공짜이자 덤이라는 것을 압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면 삶은 공짜로 주어집니다. 이것이 너무나 분명한 기정사실이기 때문에 모세는 이것에 역점을 두지 않습니다. 그 대신 “하실 때에”라는 조건을 달며 하나님을 잊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여 섬기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살 것을 요청합니다.
경외는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을 표현하는 단어에는 공포와 경외가 있습니다. 공포는 내게 주어지거나 발생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다시 말해 나쁜 일에 대한 두려움이 공포입니다. 한편, 경외는 나에게 있는 좋은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이로부터 하나님 경외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하나님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는 것이 경외입니다. 두려움을 동반하기에 공포와 경외는 동전의 앞뒤와 같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보면 경외입니다. 하나님을 잃는 것이 아깝습니다. 극도로 아까운 것을 잃어버리는 두려워함이 경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상황을 놓고 보자면 공포입니다.
모세는 이러한 하나님 경외를 언급합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때 삶은 거저 주십니다. 그럴 때 아무 문제 없이 삶이 진행된다면 마음은 하나님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하나님 경외입니다. 삶이 공짜로 이루어질 때도 하나님을 상대자로 마주 봐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하는 경외심을 가지라는 것은 다시 말해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상황이 발생할 것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생활화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세상에 대해 죽지 않으면 세상을 상대하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가야만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 보고 상대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중에만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것을 공포로 느끼게 됩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 문제에 온 신경을 쓰는 동안에는 마음이 하나님 대신 자녀를 상대하게 된 것입니다. 이 상황을 공포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다양한 삶의 문제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내몸을 생각하고, 가족을 생각하고, 사업을 생각하고, 노후를 생각하고, 미래를 생각하고, 직업을 생각하고, 취미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전부 대가를 지불합니다. 상대자로서의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대가를 지불해야만 세상 것을 상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마음과 의식에서 공포로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에서 하나님을 상대하지 않고 세상 것을 상대하는 상태를 공포로 느끼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십자가 생활화가 가능합니다. 세상을 상대하면서도 하나님은 내 편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종교적 심리 상태입니다. 이러한 종교적 심리 상태에서는 십자가 생활화는 쓸모없는 일로 여겨집니다.
이와 관련하여 13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을 경외함이란 하나님을 아까워하여 잃는 것을 두려워함이고, 하나님이 없는 상황을 공포로 여긴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습니다. 섬김의 정의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경외가 하나님을 상대자로서 놓치지 않는 것이라면, 섬김이란 하나님만을 좋아하는 마음 상태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재물을 섬기듯이 하나님을 섬기면 됩니다. 사람들이 재물을 섬기는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좋아합니다. 가지고 싶어 합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많이 가지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께 그렇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을 가지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을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많이 가지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나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성경을 하루에 10장씩 읽겠다.’라고 결심했다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언약 속에 들어온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함이란 하나님만을 상대하겠음을 의미합니다. 말씀드렸듯이 ‘내가 3년 뒤에 10억을 벌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다.’라고 결심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상대하는 것이 아닌 돈을 상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돈을 상대함으로써 하나님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마주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함이란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이것이 삶에 대한 이야기에서 등장한 표현임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엄마가 자녀를 앞에 두고 있습니다. 언약에 속한 사람이라면 자녀를 앞둔 상황에서도 마음은 하나님을 마주해야 하고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이때 마음에서는 맹세가 발생합니다. 자녀를 대할 때에도 하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하나님께 마음과 뜻과 힘을 다 드릴 것을 맹세하라는 것입니다. 사업장에 나가는 아빠는 하나님의 이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마음과 뜻과 힘을 다 드릴 것을 맹세하라는 것입니다.
이 맹세는 거울을 보면서도 할 수 있습니다. 내 모습이 어떻든지 내가 상대할 대상은 내 모습이 아닌 하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만을 상대하여 내 마음과 뜻과 힘을 다 드릴 것을 맹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맹세입니다. 거울을 보면서도 주름과 기미가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는 대신 하나님을 더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주름이 펴지기를 기대하는 대신 하나님으로 마음이 펴지기를 기대합니다.
이러한 맹세는 삶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몸으로 무엇을 만나든, 어떤 일을 만나든, 어떤 난관을 통과해야 되든 그 상황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내 마음과 뜻과 힘을 다 드리겠다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맹세는 오직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 안에 내 마음이 들어가야만 가능하고 지켜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우리의 삶은 덤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삶에 대해서는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몸으로 어떤 대상들을 만날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했으니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하나님에게 마음과 뜻과 힘을 다 드릴 것임을 맹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맹세할 일은 쉐마의 말씀이지 세상에 대한 바람이 아닙니다. ‘내가 3년 뒤에 집을 사겠다.’라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집은 우리가 마음으로 상대할 대상조차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상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상대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맹세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겠다는 맹세뿐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세상에서 몸으로 만나는 대상에게 뺏기기 쉽고, 빨려 들어가기 쉽습니다. 그렇기에 모세는 맹세할 것을 요청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함이란 마음을 세상에 뺏기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한다면 그 하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하나님께 마음과 뜻과 힘이 가야 합니다. 그 마음과 뜻과 힘을 내 몸으로 만나는 대상에게 다 뺏기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내 힘으로 안 되기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습니다.
아침에 방을 나서면 아이들과 마주해야 합니다. 그럴 때 기도합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내가 이제부터 안방 문을 열고 나가면 아이들을 등교시켜야 합니다. 아이들과 마주하는 순간에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겠습니다. 그 이름이 가리키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내 마음과 뜻과 힘을 다 드리게 해주시옵소서. 내 마음과 뜻과 힘이 단 한 방울도 자녀들에게 빠져나가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내 일이고, 내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해야 할 일입니다. 이렇게 살 때 일어나는 일이 몸으로 무엇을 만나든지 내 마음으로는 하나님만을 상대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맹세를 지키기 위해 이를 악물고 주님의 십자가를 놓지 않습니다. 이렇게 주님과 함께 달라붙어 있는 일을 할 때 삶은 덤이고 공짜로 주어집니다.
나는 삶을 살려고 태어난 자가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마음과 뜻과 힘을 아버지께 다 드리는 진짜 사랑을 하라고 태어났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어떤 직분이든, 어떤 신분과 지위를 얻든 말든, 집이 전세든 월세든 자가든 상관할 필요가 없습니다. 월세라도 덤이고, 자가라도 덤이고, 다 어차피 덤입니다.
삶은 선물입니다. 내가 수고하고 노력해서 살아야 할 일이 아닙니다. 내가 삶을 대상으로 상대하면서 하나님이 내 편을 들어주셔야 겨우 살아낼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인생의 순간들에 몸이 어떤 대상을 만나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면서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서 마음과 뜻과 힘을 다 하나님께 쏟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는 동안 삶은 덤이자 공짜인 선물로 받아서 기분 좋게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여생이 얼마나 될까요? 내 노력과 수고, 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했던 삶을 이제는 완전히 도끼로 장작 패듯 갈라 끝내 버리게 해주시옵소서. 이제는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마음과 뜻과 힘이 단 한 방울도 내 삶으로 흘러가지 않고 아버지께 다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삶은 오직 덤이자 공짜인 선물로만 받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