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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이 붙이신 내 별명, 큰 용사>의 줄거리 :
미디안 사람들이 무서워서 몰래 포도즙 틀에서 곡식을 탈곡하고 있던 기드온을 찾아오신 하나님이 기드온을 향해서 ‘큰 용사’라고 부르십니다. 미디안의 압제에 저항의 기색조차 내비치지도 못하던 기드온을 왜 하나님은 큰 용사라고 부르셨을까요? 혹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 유약하고 비겁함을 비꼬시는 것일까요? 그럼 현재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면 하나님은 나를 향해서는 무엇이라 하실까요? 하나님이 내게 붙이신 별명이 궁금합니다.
하나님이 붙이신 내 별명, 큰 용사
(사사기 6:11~32)
11.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
13.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또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14. 여호와께서 그를 향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시니라
15. 그러나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하니
1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시니라
우리가 읽은 11~16절에는 기드온이 여호와의 부름을 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읽지 않은 17~24절까지는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가 진짜 살아계신 조상들의 하나님의 사자인지를 확신할 수 있는 증거를 간구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드온은 염소 새끼 하나를 잡아 국을 끓이고 23리터에 해당하는 밀가루로 무교병을 만들어서 여호와의 사자의 말대로 바위에 부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사자가 지팡이 끝을 내밀자 불이 바위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병을 살랐고 이에 기드온은 여호와의 사자임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25~32절에는 기드온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아버지가 관리하던 바알 제단을 무너뜨리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 장작을 만듭니다. 이때 특별히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잡아 아세라 목상을 찍은 장작으로 번제를 드립니다. 이러한 사건 뒤에 마을 사람들은 범인을 찾아 죽이려 했고 기드온의 아버지는 기드온을 옹호하며 바알이 살아있다면 제단을 허문 자를 직접 죽일 것이라 말합니다. 이러한 본문 중심으로 <하나님이 붙이신 내 별명, 큰 용사>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는 이름을 부르시고 별명으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13절에서 기드온은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또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라고 대답합니다. 기드온은 미디안의 압제를 당하고 있는 상태에서 어쩔 수 없는 한계에 갇혀 있었음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했습니다. 그렇기에 출애굽의 기적으로부터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신 그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느냐 물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기드온이 평소에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기드온을 큰 용사라고 부르십니다. 그런데 기드온의 상황을 보면 도저히 큰 용사라 불릴만한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들이 무서웠습니다. 그렇기에 넓은 타작마당에서 곡식을 타작했던 것이 아니라, 바위를 움푹 파서 만든 포도주 틀에서 곡식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이 싹 긁고 지나간 뒤에 남은 이삭을 주워 탈곡을 했던 것입니다. 그 양이 워낙 적었기에 타작마당에 내놓을 필요도 없었고, 타작마당에서 탈곡을 했다가는 미디안 사람들에게 조금 남은 것까지 뺏길 것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의 기드온을 큰 용사라고 부르십니다. 이러한 별명은 참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겨집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큰 용사라고 부르시며 미디안을 무찌를 것을 명하십니다. 이에 기드온은 미디안의 압제라는 상황을 맞닥뜨린 형편에서 15절에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서 극히 약하고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고백을 들으시면서도 16절에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라고 우기듯이 밀고 나가십니다. 여기서 큰 용사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깁보르 헤하일(גִּבּ֥וֹר הֶחָֽיִל)로써 능력 있는 자, 힘 있는 용사라는 뜻입니다. 미디안이 무서워서 포도주 틀에서 곡식을 탈곡하던 기드온을 하나님께서는 큰 용사라고 부르시며 미디안을 치라 말씀하신 것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보실 때 선천적 능력이나 후천적으로 습득한 능력의 유무를 보시지 않으십니다. 또한 이러한 능력을 활용해서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로 사람을 규정하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보실 때는 당신이 이루시려는 뜻과 계획 안에 넣고 보십니다. 그가 하나님의 뜻과 계획 안에서 하나님의 의도를 올라탔을 때 수행하게 될 역할을 염두에 두고 별명을 붙이시고 규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선천적인 능력이나 후천적인 능력으로 대통령이나 재벌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재벌이면 아들이 재벌이듯이 선천적인 능력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 상태에서 하나님은 이 세상의 주권자로서 똑같은 별명을 붙이십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 바깥에서 선천적이고 후천적인 능력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붙는 별명은 ‘소모품’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큰 용사’라는 별명을 붙이십니다. 깁보르 헤하일이라는 원문이 의미하는 대로 능력 있는 자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별명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 있는 자라는 별명을 붙이실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별명이 소모품이 되면 안 됩니다. 세상에서의 직분이 장관일지라도 자기 능력으로 장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그를 소모품으로 여기실 것입니다. 이것은 꼭 높은 직분에 있는 경우에만 해당하는 일이 아닙니다. 한 가정의 남편이고 아내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 바깥에서 선천적이고 후천적인 능력을 동원해서 살고 있다면 그의 별명은 소모품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소모품이고 저세상에서는 지옥행 사형수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요? 하나님이 본래 사람을 만드실 때를 생각해 봅니다. 삶에서 어떤 문제를 만난 경우에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문제가 있지만 하나님도 살아계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주권자 되심을 안다면 문제의 좋고 나쁨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좋고 나쁨에 대한 판단이 없기에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어쩔 수 없는 상태에 머물러 있을 때 하나님의 판단이 내려옵니다. 하나님의 판단이 주어지면 드디어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움직이고 말과 행동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지정의언행이 움직이면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어 갈 때 하나님의 판단만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주어집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보실 때는 당신의 뜻과 계획 안에 들어와 있음으로써 당신의 판단에 의해서 지정의언행이 움직이느냐를 보십니다. 그렇다면 능력이 주어진 자입니다. 반대로 당신의 계획 바깥에 머물면서 선천적인 능력과 세상에서 습득한 후천적인 능력으로 자기의 뜻과 계획을 갖고 움직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소모품으로 쓰시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룰 수 있는 힘으로써의 능력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 바깥에서 발휘되는 선천적이거나 후천적인 능력은 인생을 소모하는 능력일 뿐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옥행 사형수라는 별명만 붙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힘 있는 용사여야 합니다. 능력 있는 자라야 합니다. 이때 내가 타고난 능력이 어떤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후천적으로 어떤 능력을 습득했는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능력들을 발휘하면서 살고 있는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앞으로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뜻과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뜻과 계획 안에 들어가 지정의언행이 움직이면서 일을 수행할 때는 하나님의 능력이 내려와서 진행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능력 있는 자라는 별명으로 부르실 수 있어야 합니다. 능력이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룰 수 있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능력이 있습니까? 말씀드렸듯이 이 능력이란 선천적 능력이나 후천적 능력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룰 수 있는 힘이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룰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깁보르 헤하일이 의미하는 큰 용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새 한 마리까지 주장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세상에 AI 시대를 허락하셨는지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하나의 대답을 얻게 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 바깥에서 선천적인 능력과 후천적인 능력으로 우열을 가리기에 몰두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너무나도 한심한 상태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AI를 허락하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AI 시대는 우리가 깜짝 놀랄 정도로 빠르게 찾아올 것입니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AI보다 큰 능력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AI를 사용하게 될수록 어떤 선천적 능력이 있는지, 어떤 후천적 능력을 습득했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AI를 잘 활용하는 사람이 유명 변호사보다도 법률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학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질문할 수 있다면 교수나 전공 학생보다도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타고난 능력이 어느 정도냐 습득한 능력이 어느 정도냐를 가지고 우열을 가리는 것은 무의미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인간스러움의 능력으로 살던 시대가 끝이 나고, 하나님이 본래 계획하셨던 인간다움의 시대가 열린 셈입니다. AI 앞에서는 박사와 중학교 졸업자가 다를 것이 없습니다. AI를 이용할 수 있으면 중학교 졸업자가 박사보다 더 잘할 수도 있습니다. 박사 학위라는 것이 의미가 없어집니다. 이러한 시대에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는 인간다움에 있습니다. 인간스러움의 능력이라는 선천적 능력이나 후천적 능력으로는 ‘어쩔 수 없음’에 자기를 가두어야 합니다.
자기의 능력을 발휘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면, 내 지정의언행을 하나님의 판단과 하나님의 뜻이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인 힘이 내 안에 주어질 수도 없습니다. 인간다움이 사라지고 타락한 인간스러움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AI 시대는 인간스러움의 능력조차도 무의미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인간스러움의 능력으로 우열을 따졌습니다.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 수입의 많고 적음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인간스러움의 능력이 필요 없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다움의 능력은 있어야 합니다. 인간다움의 능력이란 특별히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뜻과 계획 안에 들어왔을 때, 그 뜻과 계획을 이룰 때 필요한 힘이 실제로 순간순간 하나님에 의해서 공급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AI 시대를 가장 잘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된 자들이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여러분들입니다. 꼭 미디안의 압제와 같은 실제상황이 실제로 벌어지지 않더라도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나를 ‘어쩔 수 없음’에 가둘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나의 선천적 능력과 후천적 능력의 삶은 끝납니다. 인간스러움의 능력으로 사는 삶이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어쩔 수 없음’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딱 하나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면서 이 세상 삶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음’의 상태를 유지해 나갈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안으로 옮겨집니다.
기드온은 자기의 할 일을 몰랐습니다. 기드온은 미디안의 압제 아래에서 ‘어쩔 수 없음’의 상태에 갇혀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출애굽 때 선조들을 기적으로 이끄셨던 하나님 한 분의 이름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럴 때 기드온은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뜻과 계획 안으로 옮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 안으로 옮겨져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시고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로부터 나타난 일이 관심의 변화입니다. 기드온은 세상에서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사느냐를 관심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후 이름만 부를 줄 알았던 실제 하나님에게로 관심이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관심이 바뀌었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관심이 죽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기드온은 눈앞에 나타나신 분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하나님의 사자임을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염소 새끼를 잡아 국을 끓이고 23리터나 되는 밀가루로 무교병을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사자는 그 국을 바위에 붓게 했고, 기드온이 그대로 하자 여호와의 사자가 지팡이 끝을 대었고 바위에서 불이 나와 고기와 무교병을 살랐습니다. 이러한 장면은 마치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대결할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번제물과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 장면을 떠오르게 합니다. 기드온은 이러한 사건을 통해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의 사자임을 확인했습니다.
여기서 굉장히 특이한 부분이 염소 새끼와 23리터에 해당하는 밀가루를 예물로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때 기드온의 상황은 미디안의 압제 아래에서 먹고 살 것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기드온의 집안은 바알 제단과 아세라 신상을 관리하던 집안이었기에 종들이 있었습니다. 종들과 함께 먹어야 했기에 밀가루 한 줌이 요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무려 23리터의 밀가루로 무교병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염소 새끼를 잡으면 한 집안이 2~3일은 먹을 텐데 그것을 드렸습니다.
이것은 기드온이 세상에서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사느냐, 어떻게 잘 사느냐, 어떻게 잘 먹느냐는 관심이 완전히 하나님께로 쏠려버리고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마음의 관심이 하나님 한 분에게로 집중되는 현상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룰 수 있는 자로서 준비되는 과정인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어쩔 수 없음’의 상태가 될 때 선천적이고 후천적인 능력은 폐기됩니다. 내 능력이 폐기되고 하나님의 이름만 부를 수 있는 상태가 되었을 때, 그 이름이 가리키는 하나님이 세상을 향해서는 ‘어쩔 수 없음’의 상태에서 내 유일한 관심의 대상이 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관심의 대상인 상태에서 기드온이 한 일이란 바알 제단을 허물고 아세라 목상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장작으로 만들어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번제로 드립니다. 기드온의 집에는 바알 제단과 아세라 목상은 있었으나 바알의 신상은 없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바친 것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미디안의 압제가 이루어진 기간이 칠 년입니다. 이 소는 태어나서 자라는 동안 압제의 기간이었습니다. 한편 바알 신을 상징하는 동물은 황소였습니다. 기드온의 아버지는 따로 아세라 목상처럼 바알 신상을 만들지 않았으나 대신 바알 신을 상징하는 황소 한 마리를 잘 관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드온은 바로 이 소를 잡아서 번제로 드렸던 것입니다.
바알과 아세라는 풍요와 다산을 관장하는 남신과 여신으로 여겨졌습니다. 쉽게 말해 바알을 섬김이란 부자 되기를 추구함이었고, 사업이 부흥하기를 추구함이었습니다. 이러한 바알 제단을 허물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 장작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 바깥에서 나의 선천적인 능력과 후천적인 능력을 동원해서 부자 되기를 추구하고, 하는 모든 일에 결실이 많은 삶을 완전히 끝낸다는 의미입니다. 오직 관심은 하나님 자신에게 쏠립니다. 돈을 벌고 싶다는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서 하나님을 벌고 싶어 합니다. 다산을 원하는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기쁨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뜻하시고 계획하시는 모든 일들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기드온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기드온처럼 하나님만을 관심의 대상으로 관계할 수 있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뜻과 계획 바깥에서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내 능력을 동원하는 삶이 끝나야 합니다. 내 능력으로는 ‘어쩔 수 없음’의 상태에 갇혀야 하나님의 힘으로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나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주시는 능력으로 사는 ‘큰 용사’라는 별명을 붙이실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려면 내 능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갇혀서 하나님만을 관심하는 상태가 유지되어야 합니다.
기드온이 염소 새끼로 국을 끓이고 23리터의 밀가루로 무교병을 만들어 여호와의 사자에게 바친 사건은 하나님에 대한 관심의 정도가 어느 정도까지 올라가야 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먹고살기가 빡빡한 상황에서도 염소 새끼와 23리터의 밀가루로 무교병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사자에게 바쳤듯이 내 마음의 관심 자체가 세상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께 다 쏠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관심이 하나님께로 쏠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내가 먹고 사는 일은 하나님이 관심하고 계십니다. 내가 관심하던 모든 일을 하나님이 관심하십니다. 이것이 내 모든 관심을 모아서 하나님 한 분에게만 집중시킬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유지되고 있는 동안에 나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 바깥으로 나오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나를 큰 용사라고 번역된 능력 있는 자 깁보르 헤하일이라고 부르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룰 수 있는 힘이 있는 자라는 별명을 붙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별명으로 나를 부르실 수 없다면 인간다움이 없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바깥에서 나의 선천적이고 후천적인 능력으로 살아가는 하나님 주권의 소모품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을 향하자 나타난 일은 기드온의 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이 전부 다 꿈에서 깨어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주권자 하나님 앞에서는 스스로 좋고 나쁨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 살아계신 하나님이 의식 속에서 끊어질 때 나타나는 일은 꿈을 꿉니다.
제단을 허물고 아세라 신상을 찍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하자 꿈에서 깨어나듯이 달라진 모습을 보입니다. 31절을 보면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다투는 자는 아침까지 죽임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의 제단을 파괴하였은즉 그가 자신을 위해 다툴 것이니라 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이제까지 바알 제단을 관리해 온 사람이 하는 말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부자가 되어야 한다, 잘 살아야 한다, 부흥해야 한다, 승진해야 한다, 합격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쫓기며 살아갑니다. 기드온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바알 제단을 허물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 장작으로 만들어, 바알을 상징하는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제물로 바치는 사건이 발생하자 비로소 꿈에서 깨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쉽게 말해 ‘내가 이제까지 뭘 하고 살았지? 살아계신 하나님을 외면하고 부자 되겠다고, 성공하겠다고, 부흥하겠다고, 승진하겠다고 살았다.’라고 깜짝 놀라 깨어났던 것입니다.
기드온은 ‘어쩔 수 없음’에 갇혀서 하나님 뜻과 계획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실행되기 위해서 하나님을 관심하는 단계를 거치면서 하나님에 대한 관심 이외에 모든 세상 관심을 다 끊어버렸습니다. 이 기드온에 의해 발생한 파장이 마치 미사일이 폭발하는 것처럼 옆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시작해서 마을 사람 전체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까마득하게 잊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대신 돈을 추구하고 건강을 추구하던 꿈에서 갑자기 깨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기드온을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 안에 모두가 포함돼서 미디안을 물리치는 일에 가담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신 뒤에 꼭 ‘큰 용사야! 힘 있는 자야! 능력 있는 자야!’라고 별명을 붙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디안의 압제와 같은 상황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자발적으로 미디안의 압제와 같은 십자가에 못 박힌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선천적이고 후천적인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님의 이름만 부를 수 있는 상태로 나 스스로를 가둬야 합니다. 그러면 부활과 승천을 통해서 내 마음은 하나님께로 갑니다. 기드온이 먹고 사는 문제를 잊어버리고 오직 여호와의 사자에 대해서만 관심을 보인 것같이 하나님만 관심하게 됩니다. 기드온이 먹고 사는 문제를 잊어버리지 않았다면 염소 새끼와 23리터의 밀가루를 바칠 수는 없었습니다.
세상에 대한 관심이 완전히 사라지고 끊어지고 하나님의 판단이 임할 때 내 지정의언행이 움직입니다. 지정의언행이 움직이면서 이루어야 될 일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힘이 날마다 순간마다 내려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면서 ‘오, 나의 힘이 네 안에 있구나! 능력 있는 자야!’라고 별명으로 부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님 십자가에서 미디안의 압제와 같이 ‘어쩔 수 없음’에 갇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안에서 오직 하나님만 관심함으로써 하나님의 판단과 하나님의 힘이 내려와 큰 용사라는 별명으로 불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