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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 도움은 내 삶의 천연자원>의 줄거리 :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그러면 사무엘의 선민 이스라엘 통치 방식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에벤에셀 통치 방식이었습니다. 선민 이스라엘 사람들이 각자 자기 삶에서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나를 도우셨다”라고 고백하게 하는 다스림이었습니다. 사무엘은 본 것입니다. 선민 이스라엘 사람들은 각자 자기 삶에서 천연자원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이 천연자원을 잘 개발하여 삶을 살도록 다스렸습니다. 이 천연자원이 바로 창조주요 주권자요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도움입니다.
하나님 도움은 내 삶의 천연자원
(사무엘상 7:1~17)
3.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4.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5. 사무엘이 이르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6.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7.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그들의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온지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듣고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8. 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하니
9.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10.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11.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벧갈 아래에 이르기까지 쳤더라
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본문 중심으로 <하나님 도움은 내 삶의 천연자원>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에벤에셀은 ‘도움의 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내리셔서 혼비백산하여 패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을 뒤쫓으며 승리를 줍다시피 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미스바와 센 사이에 승전 기념석을 세우고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라고 고백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였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고백이 우리의 삶에서도 매일 나와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까지란 공간적으로는 이 장소까지이고 시간적으로는 지금까지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을 보시면서 지금까지 도우셨다’라는 고백을 반복할 수 있는 마음이 우리 속에 생기는지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가 깊이 들여다봐야 할 내용은 하나님이 나를 도우신다는 말의 의미가 실제 내 삶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해 크게 착각합니다. 세상에서 도움이라는 말은 내가 하는 일을 돕고, 내가 당한 난관을 극복하도록 돕고, 내가 주체가 되어 삶을 이끌어 갈 때 돕는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아무리 도움을 많이 받아도 결국 세상에서 말하는 도움이란 내가 삶의 주체가 되어 있을 때 가능한 말인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내가 살고, 내가 붙잡고, 내가 난관을 만나고, 내가 과제 앞에 서고, 내가 잘 해야 할 때의 도움을 말합니다. 그런데 신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도우심이란 세상에서 말하는 도움의 의미와는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고, 생사화복의 주권자이시고,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모든 도움은 돕는 자의 능력 이상으로 나올 수는 없습니다. 능력과 사랑의 정도에 따라서 돕는 방식도 다르게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저의 어머니는 95세로 건강하십니다. 어머니와 전화 통화를 하면 늘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얘야! 나는 기도하는 것 말고 너를 도울 다른 길은 없다. 그래서 새벽마다 너희 가정을 위해서 기도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저희 어머니가 능력의 한계 안에서 저를 돕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재벌들은 자녀들에게 수십조 수백조의 기업을 물려줍니다. 이미 소천하신 저의 아버지도 저를 돕는 길은 기도하시는 것밖에는 없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저를 위해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마다 마음이 뭉클하고 너무나 감사합니다. 이미 소천하신 아버지를 천국에서 뵙게 될 것을 굉장히 기대합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저의 부모님처럼 능력이 없는 분들이 기도로만 돕는 것과 능력 있는 재벌 부모가 자녀들에게 수십조 수백조 기업을 물려주는 식으로 돕는 것과 어느 것이 더 낫다 못하다는 방식의 우열을 분별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이러한 예를 말씀드린 요지는 능력에 따라 돕는 방식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경우는 어떨까요? 말씀드렸듯이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있게 하신 창조주이시고, 당신이 있게 하신 우주 만물을 한순간도 잊지 않으시고 보시고 아시면서 계획하여 이끌어가시는 주권자이십니다. 그리고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에 내어주실 만큼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의 도움은 이처럼 창조주의 도움이고, 주권자의 도움이며, 독생자를 내어주시는 아버지의 도움입니다. 이 세상 아버지들은 자기 일이 바쁘면 자녀를 돌아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주요 주권자이시고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침 삼킬 동안도 나를 잊지 않으시며 나를 돕지 못해 안달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다른 대상들을 비교하자면 능력의 차이가 있고, 사랑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만큼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 안에서는 아무리 나를 사랑하는 자가 있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돕는 방식으로는 도울 수가 없습니다. 배우자, 부모, 형제자매, 친구, 직장 상사가 줄 수 있는 도움과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 아버지가 주실 수 있는 도움은 같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움을 세상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은 난센스이고, 한 번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실제로 마주하여 관계해 본 적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크게 오해합니다. 내가 주체가 되어서 삶을 이끌어 가다가 어려움이 생기면 하나님이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건강 문제, 재정 문제, 자녀 문제, 직장 문제, 입시 문제 등 삶의 난관이나 통과의례에서 중대한 어려움을 맞이합니다. 그럴 때 어려움을 잘 극복하는 것을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다 통과하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삶의 어려움이 해결되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주요 주권자이시고 나의 아버지이신 도움을 받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저 내 삶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이 창조주의 도움일 수 없고, 주권자의 도움일 수 없고, 독생자를 내어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아버지의 도움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런 식으로 돕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차원이 다른 능력과 사랑과 전지하심 때문에라도 우리가 세상적으로 생각하는 도움을 주실 수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이미 나를 없음에서 있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나의 목숨을 지탱하고 계십니다. 내가 스스로 주체가 되어서 살다가 어려움을 만났을 때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도움에서 시작되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방식이 아담과 하와에게서 잘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없음에서 있음으로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이라는 삶의 판을 깔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세워두시고 판단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판단할 수 없으면 스스로 살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판단하시고 하나님이 생각하시기에 좋은 대로 삶을 이끄십니다. 이것이 아담과 하와에 대한 하나님의 도움이었습니다.
내가 주체가 되어 사는 동안 어려움을 만날 때 극복하게 하시는 것이 도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예 삶의 판을 깔아놓으시고, 좋음과 나쁨을 판단하지 못하게 하심으로써 주체가 될 수 없게 하시며, 내 삶의 주체가 되셔서 이끌어가십니다. 그리고 내 몸과 지정의언행의 기능을 당신 뜻의 장갑으로 삼으십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라는 고백을 하고 사십니까?
하나님의 도움은 누구에게는 있고 누구에게는 없는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조차 이미 그들이 있게 된 것조차 하나님의 도움이고, 그들의 목숨이 지탱되는 것조차 하나님의 도움 위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않는 자는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은 돕지 못해 안달하실 정도로 준비해 놓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도움은 마치 천연자원과도 같습니다. 중동 사람들이 아무것도 안 했는데 땅 밑에 엄청난 석유가 매장되어 있어서 돈이 저절로 땅에서 솟아납니다. 과거 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는 곳에서 아이들이 원석을 가지고 놀았던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아는 사람은 ‘내 삶에는 금광이 있다!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다!’라는 심정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산 땅이 금광의 핵심 지역이라도 된 것처럼, 내 집 마당 아래에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는 것처럼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본래 나의 생애란 하나님의 도움을 천연자원으로 깔고 있는 것입니다. 금광을 발견하고 다이아몬드 광산을 발견한 사람처럼 쾌재를 불러도 됩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기뻐하면서 살지 못합니다. 오히려 삶이 후줄근하게만 느껴집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에벤에셀은 승전 기념석입니다. 도움의 돌이라는 뜻으로써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라는 의미입니다. 금이 묻어 있는 돌, 다이아몬드가 섞여 있는 돌, 희토류가 섞인 돌이 자원이듯이, 하나님의 도움은 우리 인생의 기본 판에 깔린 자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이유는 이 자원을 캐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도움을 주지 못해서 안달하십니다. 도움을 금광처럼 다이아몬드 광산처럼 준비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캐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도움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에, 도움을 주시려 해도 주실 수가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6절을 보면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을 통치한 방식이란 삶의 기본 바탕인 하나님의 도움이라는 천연자원을 캐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천연자원은 땅 밑에 광석으로 존재하지만, 하나님의 도움은 하늘에 있습니다. 사무엘은 하늘의 천연자원을 어떻게 캐낼 것인지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쳐주었던 것입니다.
사무엘의 통치는 세상 지도자들의 통치와 같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 백성을 잘 살게 만들기 위해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워야겠다.’라는 식으로 통치했던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도움이 하늘에 가득 쌓였음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필요한 창조주의 도움, 주권자의 도움, 아버지의 도움이 마치 금광이나 다이아몬드 광산이나 희토류 광산처럼 하늘에 가득 쌓여있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무엘은 이스라엘이 어떻게 해야 에벤에셀이라는 하나님 도움의 돌을 캐내며 삶을 살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준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기까지 하나님이 도우셨어!’라는 고백이 온 나라에 가득 차게 하려고 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을 전하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경내에서 ‘내가 잘해야 돼. 내가 성공해야 돼. 내가 번영해야 돼. 내가 난관을 극복해야 돼. 내가 아이를 잘 키워야 돼. 내가 사업을 잘해야 돼.’라고 하는 내가 주체가 되는 말이 없어지게 만들려고 작정했습니다. 이것이 사무엘의 통치 의도였습니다. 사무엘이 중시한 것은 ‘천연자원처럼 이미 하늘에 매장되어 있는 하나님의 도움을 어떻게 캐내서 살아갈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세 가지 단계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무엘의 통치에서 첫 번째 단계는 전심으로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3절을 보면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은 풍요와 다산과 번영의 신으로 여겨진 바알과 아스다롯을 제거하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너희가 하나님의 도움이라는 천연자원을 캐서 살고 싶으냐? 너희 삶의 모든 순간을 하나님이 여기까지 나를 도우셨다는 고백으로 가득 차게 하고 싶으냐? 그러면 너희가 세상에서 내가 성공해야지, 부자 돼야지, 성과를 내야지, 이러한 바람을 싹 제거하라.’라고 말한 셈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소원과 바람과 희망과 열정과 열망을 다해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선민이자 믿는 사람들의 문제는 마음이 하나님과 붙어 있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잘 됐으면 좋겠다, 성공하면 좋겠다, 합격하면 좋겠다, 승진하면 좋겠다, 건강하면 좋겠다.’라는 소원에 마음을 다 씁니다. 마음이 세상 쪽으로 달려가기에 하나님께 붙어 있지 못합니다. 세상에 대해 소원하고, 바람을 갖고, 기대했다면 이미 마음을 쓴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한참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원하는 일이 잘 되게 해달라고 도움을 바랍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도움은 금광이나 다이아몬드 광산처럼 이미 하늘에 지천으로 깔려있어서 캐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려면 하나님이 있는 자리로 가야만 합니다. 내가 나서서 ‘이 사업은 성공해야 돼. 이것은 이루어져야 돼.’라고 소원하고 기대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간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하나님을 오게 하려고 하지 말고,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게 하는 것이 사무엘의 요청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려면 이 세상에 대해 ‘잘 됐으면 좋겠다. 성과가 많았으면 좋겠다. 성공했으면 좋겠다. 합격했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죽여야만 합니다. 바알과 아스다롯을 제거하라는 것에는 세상에 대한 바람을 죽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삶 전체를 통째로 창조주의 전능하심과 주권자의 권세와 아버지의 사랑으로 도우실 수 있는 자리에 계십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떠난다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일 수 없고 하나님도 나의 아버지이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도 믿지 않고 주권자라도 믿지 않는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무엘은 전심을 다해 돌아올 것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려면 자그마한 일이라도 무엇이 잘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큰 바람이든 작은 바람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기대, 바람, 열망, 희망 이러한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음으로 끝내야 합니다.
사무엘의 통치의 첫 번째 단계는 바로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나의 삶은 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 삶을 잘 살고 싶으셔서 지금도 안달하고 계십니다. 내가 잘 살려고 하면 하나님을 등지는 것입니다. 내가 할 일은 아버지를 바라는 것입니다. 전심을 다해 아버지를 기대하고, 아버지를 바라고, 아버지를 소원하고, 아버지를 열망하고, 아버지께 모든 정열을 다 쏟으면 됩니다. 6절을 보면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라고 했습니다. 항아리의 물을 부으면 한 방울도 남지 않고 다 떨어지는 것처럼, 내 마음을 세상을 향한 바람과 기대에 쓰지 말고 아버지께 다 쏟아부으라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통치에서 두 번째 단계는 어린양의 죽음을 붙잡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통치를 따르는 이스라엘은 마음은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블레셋이 쳐들어옵니다. 이스라엘이 미스바에 모인 것을 본 블레셋은 이스라엘이 저항한다고 여겨서 이스라엘을 치고자 합니다. 이때 이스라엘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원칙대로라면 하나님께 돌아왔다면 블레셋의 존재감보다 하나님의 존재감이 커야 했습니다. 여리고 성 전투에서 여리고 성보다 하나님의 존재감이 더 컸던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이 가장 큰 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지으신 창조주요 주권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존재감이 일개 블레셋 군대의 존재감보다 작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오자마자 이러한 일이 벌어졌고, 하나님의 존재감을 지구보다도 더 크게 여겨야 마땅함에도 미처 하나님께 마음이 도달하지 못한 이스라엘은 블레셋 때문에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여리고 성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일주일간 여리고 성을 돌며 하나님의 존재감을 크게 가지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만약 그 시간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견고한 여리고 성의 존재감을 하나님의 존재감보다 크게 느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들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일주일 기간을 갖게 하셨고 하나님의 존재감이 여리고 성의 존재감보다 크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은 이러한 준비의 시간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하나님께만 마음을 드리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 맞아. 하나님께만 마음을 다 드려야지. 하나님은 창조주요 주권자이시고 나의 아버지이시다. 그리고 나를 돕지 못해 안달하신다. 그러니 내가 왜 세상의 일을 붙잡겠는가? 기껏해야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식으로 살 필요가 없다. 나는 아버지께 마음을 다 드리면 된다. 아버지께로 돌아가자.’라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회사에 나가니 눈앞에서 사장님이 야단을 칩니다. 그러자 내 마음속에는 어느덧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보다는 사장님 있음의 존재감이 훨씬 크고 사장님을 두려워합니다.
이스라엘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 대해 사무엘은 나무라지 않았고 하나님도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께 마음을 다 드려야 된다는 의지를 갖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으로 달려가면서 건강한 것이 좋고, 돈 버는 것이 좋고, 형통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서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등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못돼 먹은 방식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약함을 나무라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하나님께 다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지고, 코로 냄새 맡고, 입으로 맛보는 대상들을 앞에 두었을 때 내 마음을 뺏기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으로 인해 마음에 두려움을 느꼈던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세상 것을 마주할 때 마음을 뺏기는 것을 보고 한탄하고, 안타까워하고, 아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직 예수님처럼, 스데반 집사님처럼, 사도 바울처럼, 사도 베드로처럼 어떤 상황을 만나도 하나님의 존재감을 더 크게 느낄 수 있는 상태는 아닙니다. 그러나 내 마음을 하나님께 다 드리고 싶다는 간절함이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스데반 집사님처럼, 변화산의 베드로처럼 하나님께 마음을 다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도 눈에 보이는 것들 때문에 내 마음을 뺏기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뺏기는 나 자신을 한탄하고, 미워하고, 혐오스러운 존재로 느낄 수 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으라는 겁니다.
사무엘은 블레셋 때문에 두려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번제를 드립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하나님은 너희를 사랑하신다.’라고 말했던 것이 아닙니다. 젖 먹는 어린양을 가져다가 번제로 드립니다. 이것이 대제사장 엘리와 구분되는 사무엘의 특별함입니다. 엘리는 전쟁에 나가는 자들을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리고 법궤를 가져다 쓰는 것도 용인했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단순히 법궤를 가져오고자 했던 것이 아닙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이름을 상징합니다.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하나님에 대해 마음을 다 쏟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두려워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음을 블레셋에게 빼앗긴 것이 문제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돌이키기 위해서 번제를 드려야 했던 것입니다. 사무엘이 정확하게 맥을 짚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마음을 다 드리고 싶은 진정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이 앞에 나타나자 마음을 뺏기고 말았습니다. 이때 사무엘은 이들을 나무라지 않고 번제를 드립니다. ‘너희가 마음을 다 드리고 싶었지만 블레셋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이러한 너희의 모습을 스스로 한탄할 수 있고 나무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위해 너희를 대신해서 어린양이 죽는 것이다. 하나님께 마음을 뺏긴 너희는 죽는 것이다.’라고 말했던 셈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일입니다.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매사에 생활화해야 합니다.
사무엘의 통치 방식은 천연자원인 하나님의 도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라. 세상에 대한 소원을 죽여라. 이렇게 하나님께 다 드리고 싶지만 당장의 오감을 통해 만나는 대상들에게 너희 마음을 뺏길 수 있다. 그럴 때 너희 자신을 한탄하고 너희 자신을 미워하면서 어린양의 죽음과 연합하라.’라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통치에서 세 번째 단계는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라고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어린양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죽었으면 삶은 당연히 하나님의 주권이 이끌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 볼 때는 비참하고 부족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십자가에서 죽자마자 나타나는 일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삶이 끌려가게 됩니다. 지금의 형편은 하나님의 주권이 여기까지 끌어오신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나를 도우셨다는 그 말을 바꾸면 ‘세상에 마음을 뺏기던 내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더니 하나님의 주권이 내려오셔서 내 삶을 여기까지 이끄셨다’라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서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짐으로써 주권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져 내려올 수 있도록 통로를 열어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감사에 대한 오해가 많습니다. 어려움을 당해도 무조건 감사를 강요합니다. 그러면 심리적으로도 안정이 되고 또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합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할 때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덧붙였습니다. 감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 밖에서 하는 감사도 있다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내가 죄와 저주에 찌든 상태에서 멋대로 삶을 살다가 낭패를 당했습니다. 그렇다면 내 죄의 결과 때문에 하나님이 막으신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대로 감사했습니다. 죄와 저주에 찌든 상태에서 한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는 걸 모른 채 일의 결과에 대해 감사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감사일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야 실제로 내 삶을 도우시는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 있지 않고 마음대로 떠나가 있으면서 감사를 기능적으로 이용하려 합니다. 물론 감사하면 마음이 가벼워지는 심리적 작용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감사가 아닙니다. 죄와 저주로 말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는 처지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서 죽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버지를 마주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땅의 일은 전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일임을 알게 되기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주권은 온 천지에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독생자를 내어주실 정도로 나를 사랑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세상의 기준과 판단을 붙잡고 호불호를 따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지금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사무엘의 통치에서 두 번째 단계가 의미하는 대로 십자가 죽음이 충실하게 이루어진다면, 하나님의 주권이 내려오는 상황을 잘못이라 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사랑하심을 믿는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 같은 처지에서 살게 하실 수도 있지만, 예수님처럼 머리 둘 곳 없이 살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내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 없이 사셨지만, 당신을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들의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지금도 하나님의 주권이 흘러오는 중입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은 자이고, 마음은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께 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이 세상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주권이 흐르고 있음을 알기에 여기까지 도우셨음을 알게 됩니다.
혹시 밥을 먹는 도중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잠깐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내가 밥 먹고 나서 물을 마시고 숟가락을 놓는데도 주권이 계속 흐르고 있습니다. 주권이 흘러서 먹게도 하시고 소화도 되게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인 것이 저절로 마음에 느껴지게 됩니다. 내가 하려고 해서 감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여기까지 도우셨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서 ‘아버지가 여기까지 나를 도우시는구나! 여기까지 나를 이끌어 가시는구나!’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이 고백으로 하루 종일을 살 수 있습니다.
사무엘은 영적으로 여우처럼 지혜로운 통치자였습니다. ‘천연자원인 하나님의 도움을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캐낼 수 있을까?’라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내가 성공해야 돼, 내가 과제를 해결해야 돼, 내가 성과를 내야 돼, 내가 잘해야 돼.’라는 말 자체가 싹 없어지기를 바랐습니다. 그 대신 날마다 에벤에셀이 의미하는 대로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고백이 온 나라에 가득 차는 것을 목적하고 다스렸던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에벤에셀은 도움의 돌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천연자원인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금광이나 다이아몬드 광산을 개발할 줄 모르는 것처럼, 하나님의 도움을 하나도 받지 못하고 내가 삶을 붙잡고 끙끙대며 살았습니다. 이제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전심으로 아버지를 좋아하게 하시며, 이 세상 삶은 아버지 주권의 도움이 마음대로 활로를 찾게 해드림으로써 범사에 감사하며 살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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