댈린 에이치 옥스 회장: 근면과 낙천주의,
신앙의 삶
리차드 이 털리 이세
주님께서는 옥스 회장이 일생 동안 고난과 기회 속에서 교회를 이끌도록 준비시키셨다.
댈린 해리스 옥스는 1932년 8월 12일, 미국 유타주 프로보에서 로이드 이 옥스 박사와 스텔라 해리스 옥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들은 맏아들을 기뻐하며, 솔트레이크 성전 꼭대기에 모로나이 천사를 조각한 예술가 사이러스 댈린의 이름을 따서 아기의 이름을 지었다. 그의 가운데 이름인 해리스는 어머니의 혈통을 반영하는데, 그 혈통은 몰몬경의 증인인 마틴 해리스의 형인 이머 해리스까지 이어진다.
댈린의 조상들은 교회 초기에 교회에 들어와 1847년부터 1862년까지 유타로 이주한 충실한 후기 성도였다. 댈린의 독실한 부모는 그와 두 동생을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섬기도록 키웠다. 그들은 애정 어린 가족 관계를 누리며 서로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졌다. 함께 일하고, 웃고, 놀았다.
로이드 이 옥스, 댈린 에이치 옥스의 아버지
댈린의 아버지 로이드 이 옥스는 댈린이 일곱 살 때 세상을 떠났다.
가족은 1934년에 미국 아이다호주 트윈폴스로 이사했으며, 로이드는 그곳에서 의료 활동을 했다. 댈린이 겨우 일곱 살이던 1940년, 그의 아버지는 환자를 돌보던 중 감염된 것으로 보이는 결핵으로 별세했다. 상심에 빠진 34세의 어머니 스텔라는 홀로 세 어린 자녀를 키우는 처지가 되었다.
댈린은 유타주 페이슨에 있는 외조부모님의 농장에서 지내던 중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충격과 슬픔 속에서 가족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의지했으며, 부활과 궁극적인 재회라는 그분의 약속을 굳게 믿었다.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책임이 홀로 남겨진 스텔라는, 연로한 부모님과 계속 같이 살지, 아니면 혼자 힘으로 어린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교육을 더 받을지 결정해야 했다. 그녀는 미국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 과정을 밟기로 했다.
남편을 잃은 슬픔과 학업에 대한 부담으로 스텔라는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겪었으며, “그녀는 완전한 신경쇠약 증세를 보여 여러 달 동안 가족과 떨어져 의료진의 보살핌을 받아야 했다”고 댈린은 회상했다. 아버지를 여읜 댈린과 두 동생은 이제 어머니와도 잠시 떨어져 지내게 되었다.
마침내 1942년 8월 어머니가 건강을 회복하자, 댈린은 “우리 소가족은 자립할 준비가 되었고, 우리는 어머니가 고등학교 교사 자리를 얻게 된 유타주 버널로 이사했다”라고 기록했다. 그곳에서 가족은 학기 동안 생활했고, 여름에는 페이슨 농장으로 돌아왔다.
어머니 및 동생들과 함께한 댈린 에이치 옥스
동생들인 메릴과 에블린, 그리고 어머니 스텔라와 함께한 댈린(왼쪽).
삶의 시련에 맞서며
어머니가 학업을 마치기 위해 뉴욕으로 떠났던 1944년부터 1946년 사이를 포함해, 청소년기 동안 댈린의 성장에 기복이 있던 때도 있었으나 조부모와 교회 지도자와 교사, 그리고 다른 이들의 영향은 그가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댈린은 열세 살 때 라디오 수리점에서 허드렛일하게 되었다. 라디오는 당시 주류 방송 기술이었으며, 십 대였던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댈린은 공부하고 일하며 라디오를 직접 만들기도 했고, 마침내 연방 2급 자격증 시험에 합격한 데 이어, 단 15세의 나이에 1급 자격증 시험까지 통과했다.
그는 이제 취업에 유리한 기술을 갖추게 되었고, 곧 버널의 한 라디오 방송국에 취직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비록 제 목소리는 가늘고 높았지만, 경험이 쌓이면 아나운서를 할 기회를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제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1948년, 그의 세상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일이 일어났다. 어머니는 학업 덕분에 급여가 대폭 인상되는 유타주 프로보 교육청의 행정직 자격을 얻게 되었다. 이는 댈린이 버널에서 사랑했던 직장과 친구들, 그리고 가족이 그곳에 일궈놓았던 안정된 삶을 떠나야 함을 의미했다.
댈린은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대는 대신, 시련에 맞닥뜨렸을 때 삶이 가르쳐 준 대로 일하러 나갔다. 그는 가족보다 먼저 이삿짐 트럭을 타고 이동했고, 다른 가족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고등학교 남은 기간과 대학교 4년 내내 일할 수 있는 프로보 라디오 방송국의 일자리를 구했다.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하는 댈린 에이치 옥스
미국 유타주 프로보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아나운서로 일하는 댈린.
사진: Deseret News 제공
낙천주의와 근면함으로 삶의 시련에 맞서는 댈린의 능력은 그의 삶을 특징짓는 요소가 되었다. 그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법을 배웠으며, 유머 감각을 키운 덕분에 다른 사람들과 우정을 쌓고 미소를 잃지 않고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댈린은 아버지가 복무했던 부대와 같은 부대인 유타주 방위군에 입대하며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랐다.
그가 졸업한 후, 미국은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 얼마 후 댈린이 속한 주 방위군 부대에 동원령이 내려졌고, 이에 따라 그는 교회 선교사로 봉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입대 소집을 기다리는 동안 브리검 영 대학교에 등록하기로 결심했다.
결혼, 가족, 그리고 직업
1951년 1월, 고등학교 농구 경기를 중계하던 중 댈린은 준 딕슨을 만났고 곧 정기적으로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1952년 6월 24일에 솔트레이크 성전에서 결혼했다.
댈린과 준 옥스 부부
1952년 결혼 당시의 댈린과 준.
이듬해, 옥스 부부는 여섯 자녀 중 첫째인 샤먼을 맞이했다. 결혼과 아버지가 되는 일은 댈린에게 막중한 책임을 안겨 주었지만, 동시에 그의 최선을 이끌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좌우명은 “할 일부터 먼저 하고, 노는 것은 나중에”가 되었으며, 이 습관은 그의 인생 다음 단계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대학교 졸업반 때 그는 법조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고, 로스쿨 입학시험에서 고득점을 받아 미국 최고의 명문 중 하나인 시카고 대학교 로스쿨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
댈린은 준과 샤먼, 그리고 둘째 딸 셰리를 데리고 미국 일리노이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학업을 시작한 그는 지역 주 방위군 부대의 소위로 복무하는 동시에 현지 와드에서 봉사했다.
전국에서 모인 수재들 사이에서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댈린은 일요일에도 공부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 상황에서 부모님의 영향은 그가 영적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댈린은 이렇게 기록했다. “내 인생의 큰 도전이었던 로스쿨 진학을 위해 떠날 때, 어머니는 아버지가 필라델피아 의대에 다니실 때 일요일에는 절대 공부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셨다. 나는 아버지의 모범과 어머니의 온화한 가르침을 따랐고, 그로 인해 축복받았다.”
그는 Law Review의 편집장을 지내고 학과 수석으로 로스쿨을 졸업했는데, 이는 매우 놀라운 성과였다. 그 기간에 댈린은 장로 정원회 그룹 지도자로도 봉사했다. 그곳에서 그는 변호사이자 훗날 선교부 회장, 성전 회장, 십이사도 정원회 지역 대표를 역임한 존 케이 에드먼즈 스테이크 회장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댈린은 자신의 노력 덕분에 미국 법대생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 중 하나인 미국 대법원 대법원장 재판연구원으로 선발되었다. 그 일자리를 위해 댈린과 준, 그리고 새로 태어난 아들 로이드를 포함한 세 자녀는 1957년에 미국 워싱턴 디시로 옮겨가 1년 동안 생활했다.
이 무렵 댈린의 영적 성장을 지켜본 훗날 칠십인으로 봉사한 그의 형 메릴은 이렇게 기록했다. “댈린은 선교사로 봉사할 특권은 얻지 못했지만, … 언젠가 주님께서 그에게 어떤 종류의 사명을 완수하도록 요구하실 것임을 확신한다.”
재판연구원으로 재직 중인 댈린 에이치 옥스
미국 대법원에서 대법원장 얼 워런의 재판연구원으로 재직 중인 댈린.
봉사의 기쁨
대법원 재판연구원직을 마친 뒤, 댈린은 가족과 함께 시카고로 돌아가 그 도시에서 가장 큰 법률 회사에서 근무했다. 그는 일주일에 6일 동안 회사에서 장시간 일하면서도, 일요일에는 교회 모임에 참석하고 부름을 수행했다.
1960년에 준은 넷째 아이인 댈린을 출산했다. 1961년 무렵, 댈린의 회사 수입은 두 배 이상 늘어났고, 그의 앞날은 점점 커지는 책임과 세상적인 부로 가득한 듯 밝아 보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대기업을 위해 일하는 것보다 형편이 어려운 고객들을 돕는 일에서 더 큰 만족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댈린의 가장 큰 기쁨은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교회 부름에서 봉사하는 것이었다. 에드먼즈 회장과의 점심 식사 모임은 댈린의 신앙을 시험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의 삶을 더욱 성취감 있는 방향으로 돌려놓는 데 도움이 되었다.
에드먼즈 회장은 댈린을 스테이크 선교사 및 스테이크 선교 회장단 보좌로 부르며, 이 봉사에는 매주 적어도 서너 번의 저녁 시간에 해당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댈린의 고된 업무 일정을 고려할 때 이는 불가능해 보였다.
댈린은 이렇게 회상했다. “변호사 업무를 계속하면서 이 부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으로부터 온 부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저에게 의로운 원리를 가르치며 그토록 강력한 영향을 주었던 주님의 종을 통해 온 부름이었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저는 모든 신앙을 다 해 그 부름을 받아들였습니다.”
훗날 댈린은 이렇게 결론지었다. “주님을 섬기고자 노력할 때 그분께서 저의 직업적 역량을 키워 주시는 것을 느끼며 주님을 최우선으로 섬기겠다는 결심이 굳건해졌습니다. 주님의 도움 없이 모든 시간을 쓰는 것보다, 그분의 도움을 받으며 시간의 일부를 쓰는 것이 직업적으로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댈린과 준은 미래를 고민한 끝에, 시카고 대학교 로스쿨 학장으로부터 받은 교수직 제의를 수락하기로 했다. 그는 평생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 모든 과정이 제가 완수해야 할 미래의 어떤 일을 위해 저를 준비시키려고 미리 마련된 것 같았다”라고 느꼈다.
1962년 4월, 댈린과 준은 다섯째 아이 트루안을 맞이하며 가족의 기쁨을 더했다. 트루안이 태어날 무렵 댈린의 업무 책임도 커졌고, 그는 로스쿨 부학장으로 임명되었다.
준과 다섯 자녀와 함께한 댈린 에이치 옥스
준과 여섯 자녀 중 다섯 자녀와 함께한 댈린(뒷줄: 셰리, 샤먼, 로이드; 앞줄: 댈린 디, 트루안).
그의 가족은 또한 교회 회장인 데이비드 오 맥케이(1873~1970) 회장이 집행한 일리노이주 윌멧의 새로운 스테이크 센터 헌납식에 참석했다. 댈린은 이렇게 기록했다. “내가 다섯 살도 채 되지 않았을 때 트윈폴스에 오신 히버 제이 그랜트(1856~1945) 회장님을 뵈었던 기억이 생생하기에, 아이들도 꼭 회장님을 보았으면 했다.”
1962년 10월, 시카고 대학교는 댈린을 로스쿨 학장 대리로 임명했으며, 일부 교수진은 그가 정식 학장이 되기를 원했다. 당시 댈린은 겨우 서른 살이었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느꼈기에 수락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1963년 2월, 십이사도 정원회의 리그랜드 리차즈 장로와 하워드 더블유 헌터 장로가 시카고를 방문하여 댈린을 새로운 시카고 남 스테이크 회장단의 제2보좌로 불렀다.
댈린은 이렇게 기록했다. “그 회장단에서 영광스러운 7년 반을 봉사했으며, 그 뒤를 이은 회장단에서도 9개월을 더 봉사했다.” 그 시기에 그는 영감을 구하며 기도하는 법과 말씀할 때 그 영감에 따르는 법을 배웠다. 여러 면에서 이 회장단 봉사 기간은 훗날 그의 교회 봉사를 위한 토대가 되었다.
격동의 시기 속에서의 신앙
곧이어 대학은 1964년 10월부로 그를 종신 재직권이 보장된 법학 교수로 임명했다. 법학 교수, 스테이크 회장단 보좌, 그리고 가정에 충실한 가장으로서 댈린이 맡은 책임은 그가 대학 시절 전공과 직업을 선택하며 가졌던 소망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었다. “저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싶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기를 원했으며, 직업적으로 이를 실천한 한 가지 방법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법적 변호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었다.
1969년은 미국 역사상 격동의 해였으며, 댈린의 직업 생활에서 어려운 시기 중 하나였다. 시카고 대학교를 포함한 많은 대학에서 학생 시위가 일어났고, 시카고 대학 측은 댈린을 학생 징계 처리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그가 이끈 위원회의 공정성은 학생 신문으로부터도 찬사받을 정도였다.
하지만 극단주의자들은 그가 주관하는 청문회를 방해하고 그에게 폭언을 퍼부었으며, 얼굴에 침을 뱉거나 심지어 납치를 시도하기까지 했다. 댈린은 이러한 괴롭힘을 견뎌내며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고, 자신이 맡은 책임을 훌륭하게 완수했다. 한 동료는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 “우리 대학에는 유능한 인재가 많지만, 당신만큼 이 일을 훌륭하게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확신합니다. 당신은 단호하고 올바르며, 매우 공정합니다.”
이 모든 고통스러운 경험 속에서도 댈린은 교회 부름을 완수하며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소홀히 하지 않았다. 1970년 8월 어느 날 늦은 저녁, 댈린과 준은 교회에서 준과 함께 봉사하던 60세 여성을 집에 데려다주기 위해 마을의 위험한 지역을 지나고 있었다. 댈린이 그 여성을 집 앞까지 바래다준 뒤, 차에 있는 준에게 돌아가려 할 때, 한 젊은 불량배가 댈린의 복부에 권총을 들이대며 돈을 요구했다.
댈린이 텅 빈 지갑을 보여주자, 괴한은 준의 소지품을 강탈하기 위해 차 문을 열라고 댈린을 압박했다. 아내를 보호하고 싶었던 댈린은 괴한이 죽이겠다고 위협하는데도 끝까지 거부했다. 결국 그 청년은 달아났다. 댈린은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주님께서 나를 돌봐주셨으며, 성전에서 받은 약속들이 성취되는 것을 경험했다.”
이 경험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댈린은 American Bar Association의 연구 기관인 American Bar Foundation의 집행 이사직을 수락했다. 그는 재단을 운영하면서도 강의 시수를 줄여 법학 교수직을 계속 유지했다. 그는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곳에서의 모든 경험은 추후 강의 역량을 강화해 줄 것이며, 만약 내 관심이 행정이나 학술 분야로 향하게 된다면 그 일을 수행할 준비 과정이 될 거야.”
브리검 영 대학교 총장
1970년 여름 무렵, 댈린은 자신이 브리검 영 대학교의 오랜 총장인 어니스트 엘 윌킨슨의 후임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기 시작했으나, 그러한 예감을 애써 외면했다. 로스쿨을 졸업한 후 몇 년 동안, 댈린은 주님께서 자신을 “어떤 특별한 봉사를 위해” 준비시키고 계신 것 같다는 말을 준에게 하곤 했다. 댈린은 “주님께서 그토록 많은 것을 주신다면 분명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기대하실 것”이라며, “저는 부름이 왔을 때 그 기회를 알아볼 수 있는 지혜와 그것을 받아들일 용기를 갖기를 소망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윌킨슨 총장의 은퇴 소식을 들은 다음 날, 댈린은 교회 교육 기구 총감인 닐 에이 맥스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맥스웰 총감은 신임 BYU 총장 인선 위원회를 대신하여 전화를 건 것이었다. 이 전화는 결국 제일회장단 일원들과의 만남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댈린은 BYU 총장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나이는 겨우 38세였다.
댈린이 총장으로 재임한 기간은 학생들의 영적, 지적 성장을 강조한 시기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학생들이 대학 시절을 최대한 활용하여 미래의 직업뿐만 아니라 교회와 지역 사회에서의 봉사를 준비하도록 독려했다. 고등 교육 덕분에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던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아들로서, 그는 젊은 여성들에게 교육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라고 권장했다. 또한 그는 대학 내 여성들이 동일한 노동에 대해 동일한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대학 내에 새로운 법학 대학원을 설립하는 일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을 뿐만 아니라, 대학 도서관 증축을 계획하고 캠퍼스 건물을 추가했으며 교과 과정을 개선했다. 그는 대학의 표준을 준수하며 솔선수범했고, 계속 글을 쓰고 가르치며 국가 위원회와 지역 사회에서 봉사했으며 가정에도 충실했다. 1975년에 준은 여섯째이자 막내인 제니를 출산했다.
댈린 에이치 옥스와 그의 딸 제니
여섯째 자녀 제니와 함께한 옥스 회장.
BYU 총장으로 재직하던 기간 중 일부 시기에 댈린은 십이사도 정원회 지역 대표로도 봉사했다. 이 부름은 나중에 지역 관리 역원으로 대체되었으며, 현재는 지역 칠십인으로 불린다. 이 역할에서 그는 솔트레이크밸리의 스테이크들을 돌보는 임무를 맡았는데, 이는 대학 총장처럼 바쁜 사람에게는 매우 막중한 교회 책임이었다.
댈린은 다른 책임들 외에도, 안식일 준수, 복장 표준 유지, 남녀 공용 학생 기숙사 반대 등 교회 표준을 타협하고 세속적인 것을 따르라는 외부의 압력에 맞서 법적 대응을 주도했다.
그의 뛰어난 법률적 명성 덕분에 댈린의 이름은 미국 대법관 임명 후보자 명단에 오르기 시작했다. 1980년에 BYU 총장으로서의 임기를 마친 뒤, 댈린은 유타주 대법관직을 수락했으며 그 역할을 매우 즐겁게 수행했다. 그럼에도 그의 이름은 미국 대법관 후보로 계속 거론되었으며, 컬럼비아 특별구 항소 법원의 판사직을 제의받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이 직책을 대법관으로 가는 디딤돌로 여겼다. 하지만 그는 그 제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전문직에 종사하는 내내 댈린은 가족을 삶의 우선순위에 두었다. 그는 매일 저녁 가족과 함께 식사하기 위해 귀가하려 노력했으며, 자녀들의 삶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자녀들에게 책을 읽어 주고 그들의 고민에 귀를 기울였다. 이들 가족은 친척 방문, 역사 유적지 탐방, 캠핑 및 기타 야외 활동을 포함한 휴가를 함께 즐겼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1984년 무렵에도 댈린은 자기 삶에 봉사할 새로운 기회가 다가오고 있음을 여전히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해 4월 6일, 고든 비 힝클리(1910~2008) 회장이 그를 십이사도 정원회 회원으로 부르면서 그 답이 주어졌다.
댈린은 이렇게 대답했다. “제 삶은 주님의 손에 달려 있으며, 제 직업은 그분의 종들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댈린 에이치 옥스의 프로필 사진
제 삶은 주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댈린은 이제 주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게 되었지만, 그것은 그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었다. “남은 삶 동안 나는 사도로 부름받았던 변호사가 될 것인가, 아니면 변호사로 일했던 사도가 될 것인가?”
그는 이렇게 인정했다. “제 부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사실 주님을 섬기는 일에서 정말 독특한 유일한 부분은 제가 전혀 알지 못했던 부분, 즉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부분들이었습니다. 저는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일과 제가 자격이 있다고 느끼는 일에 시간을 집중한다면 절대 사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항상 전직 변호사이자 판사일 것입니다. 그러한 길이 저를 위한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제가 할 자격이 있는 일이 아니라 제가 하도록 부름받은 일에 노력을 집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는 제 자격에 맞춰 부름을 조정하려고 하기보다는 부름에 맞춰 제 자신을 변화시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수년 전 시카고 스테이크 회장단에서 봉사할 때 시작했던 교회 교리에 관한 체계적인 공부에 더 매진하기로 결심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일원으로서 그는 많은 말씀을 전하라는 요청을 받았으며, 이러한 기회를, 교리를 공부하고 선포하는 계기로 삼았다. 예를 들어, 그가 전한 초기 두 번의 연차 대회 말씀 제목은 “왜 우리는 봉사해야 합니까?”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듦”이었으며, 이는 그가 자신의 부름을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십이사도 정원회에서 봉사하는 동안 옥스 장로는 솔트레이크시티의 교회 본부와 전 세계에서 교회가 어떻게 운영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직책을 맡아 부지런히 봉사했다. 그는 주요 위원회에서 봉사하고 전 세계를 누비며 임무를 완수했으며, 전 세계의 회원 및 선교사들과 교류하는 것을 즐거워했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나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명에 대한 증인으로 봉사하여, 모든 이가 그분에 대해 더 많이 배우고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살겠다는 신앙과 결의를 키우도록 돕는 것이다.”
성역 초기에 그가 짊어져야 했던 많은 책임 속에서, 준은 결혼 생활 내내 그러했듯 변함없는 지지를 보내 주었다. 그녀는 훌륭한 조력자이자 다정한 어머니였으며 재능 있는 교사였다. 1998년 아내 준이 암으로 별세하자 그는 홀로 남게 되었고 큰 상심에 빠졌다.
새로운 시작
2년 후, 옥스 장로는 활기차고 교육 수준이 높은 크리스틴 맥메인 자매를 소개받았다. 그녀는 BYU에서 독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일본에서 선교사로 봉사한 경험이 있었고, 직업상 전 세계를 여행하며 활동해 왔다. 그녀는 바쁜 사도에게 이상적인 동반자였다. 두 사람은 곧 결혼했으며, 옥스 장로의 가족들도 그녀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크리스틴 자매는 옥스 장로가 총관리 역원으로 봉사하는 기간 대부분을 그의 곁에서 동반자로 함께했다.
댈린 에이치 옥스 회장과 크리스틴 옥스 자매
2025년 10월,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 상호부조회 건물에서 아내 크리스틴과 함께한 옥스 회장.
2002년, 옥스 장로 부부는 필리핀 지역 회장으로 봉사하라는 임무를 받고 그곳으로 이사했다. 교회 회장인 고든 비 힝클리 회장은 교회의 성장통을 염려하여 옥스 장로를 필리핀으로 보냈다. 옥스 장로는 스테이크 대회 임무를 수행할 때 재능 있는 아내와 자주 동행했는데, 모계 중심의 문화인 그곳에서 옥스 장로가 신권 지도자들을 가르치는 동안 크리스틴 자매는 자매 지도자들을 가르쳤다. 당시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 또한 같은 시기에 칠레로 지명받았다. 두 사람 모두 현지의 어려움들을 면밀히 살피고 해결책을 마련하는 임무를 맡았다.
필리핀에서 보낸 2년은 옥스 장로가 사도로서 수십 년간 전 세계 여러 나라를 방문하며 수행한 전 세계적 성역의 일부분이었다. 법적, 행정적 경험 덕분에 옥스 장로는 십이사도 재임 동안 교회의 『일반 지침서』 개정 작업을 진두지휘해 달라는 요청을 자주 받았다. 필리핀에서의 생활은 교회 행정 업무를 수행할 때 그곳의 따뜻한 회원들과 교류하는 방식에 대해 그에게 새로운 통찰을 주었다.
십이사도 정원회에서 봉사하는 동안, 옥스 장로는 모든 의무를 다하는 동시에 늘어나는 손주들을 돌보는 일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시간을 내어 가족 행사에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손주들은 가족 모임 때 할아버지가 낚시하는 법을 한 명씩 다정하게 가르쳐 주셨던 일을 애정 어린 마음으로 기억한다.
제일회장단
2018년 1월 토마스 에스 몬슨 교회 회장이 별세하자 러셀 엠 넬슨 회장이 그 뒤를 이었으며, 넬슨 회장은 새로운 제일회장단의 제1보좌로 옥스 장로를, 제2보좌로 헨리 비 아이어링 장로를 불렀다. 그 후 7년 반 동안 제일회장단 일원들은 주님의 사업을 진전시키기 위해 함께 일했으며, 그 결과 많은 변화와 발표가 이루어졌다.
러셀 엠 넬슨 회장과 그의 두 보좌인 댈린 에이치 옥스 회장과 헨리 비 아이어링 회장.
2018년 1월, 제일회장단 제1보좌로 성별된 댈린 에이치 옥스 회장. 가운데는 러셀 엠 넬슨 회장, 오른쪽은 제2보좌 헨리 비 아이어링 회장.
그 기간에도 옥스 회장은 체계적인 복음 공부에 근거하여 말씀을 전하는 평소의 방식을 이어가며, 진리를 찾을 때 올바른 출처와 방법, 신권과 열쇠, 구원의 계획, 구주의 사업, 그리고 미국 헌법을 수호함에 관해 중요한 교리적 말씀을 연차 대회에서 전했다. 마지막 주제와 관련하여 그는 버지니아 대학교에서 종교의 자유와 차별 금지에 관해 연설을 하기도 했다.
2025년 9월 27일, 사랑하는 친구 러셀 엠 넬슨 회장이 별세함에 따라, 댈린 에이치 옥스 회장은 십이사도 정원회 회장으로서 지상에서 가장 선임인 교회 지도자가 되었다. 2025년 10월 14일, 옥스 회장은 교회 회장으로 성별되었으며, 이는 주님께 헌신해 온 그의 일생에 걸친 봉사의 정점이 되었다.
교회 회장으로 성별된 이후 몇 달 동안, 그는 주요 지도자들을 불렀고 자매 선교사의 봉사 시작 연령을 18세로 낮추었으며 제일회장단의 중요한 지도력을 계속 발휘하고 있다.
댈린 에이치 옥스 회장
평생에 걸친 근면과 헌신을 바탕으로, 그는 남은 생애 동안에도 계속해서 봉사할 것이다. 그의 아내 크리스틴 자매는 그를 현명하고 친절하며 동정심이 많은, “진심으로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묘사한다. 그의 삶은 봉사의 삶이었으며, 그는 하늘로부터 오는 영감을 구하고 이를 용기와 불굴의 의지로 따랐다. 1984년 사도로 처음 부름받았을 때 그가 힝클리 회장에게 말했듯, “제 삶은 주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리처드 이 털리 이세 형제는 교회 역사부, 가족 역사부, 홍보부, 커뮤니케이션부의 관리 책임자이자 교회 역사가 겸 기록자 보조로 봉사했다.
사진은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www.churchofjesuschrist.org/study/liahona/2026/05-se/01-president-dallin-h-oaks-a-life-of-hard-work?lang=k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