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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하늘 땅 여행 원문보기 글쓴이: 찰라 최오균
굿바이~ 오바마!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1월 20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에게 편지를 남기고 대통령 집무실을 떠났다. 이날 오전 9시, 오바마 대통령은 자신의 자리를 물려 받을 후임 트럼프를 위해 대통령 책상에 편지를 남기고 트위터를 통해 미국인들에게 대통령으로서 마지막 당부를 남기기도 했다.
"당신들이 나를 더 나은 지도자,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나의 능력이 아니라 당신들의 능력으로 변화가 가능하다는 걸 믿기 바란다. 내가 변화를 믿는 건 당신들을 믿기 때문이다."
백악관을 떠나는 55세의 젊은 오바마 대통령은 8년 전 새까맣던 머리가 흰 눈이 내려 앉은 것처럼 하얗게 변했다. 대통령의 직무가 그만큼 무겁고 막중 한 것이다.
8년의 임기동안 오바마 대통령 만큼 많은 업적을 남긴 미국의 대통령도 드물다. 퇴임하는 그의 지지율은 무려 55%나 된다. 대통령 당선인 트럼프의 지지율을 훌쩍 넘은 지지율이다. 그가 이렇게 높은 지지율은 받고 있는 것은 정직과 헌신, 너르러운 포용, 그리고 남다른 지성을 가진 탁월한 리더십의 결과이다. 지지율 5%인 현직 대통령의 탄액이 초읽기에 들어가고 있는 우리라나와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우리나라도 오바마 대통령처럼 높은 지지율을 받으며, 웃으면서 청화대를 떠나는 대통령을 탄생시킬 수는 없을까? 대통령 탄액시계가 초읽기에 들어가고, 후발 대선 출마자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그 몫은 국민들의 손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지난 가을 나는 오바마 대통령의 정치적인 고향 시카고를 여행하면서 한 나라의 지도자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프리카 케냐 출신의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미국의 최초 흑인 대통령이 되기까지 파란 만장했던 인간 오바마의 일생을 다시 한번 촘촘히 살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오바마의 정치적인 고향 시카고
시카고의 밀레니엄 파크에서 서서 나는 한나라를 통치하는 위대한 대통령들을 생각해 보았다. 우리나라도 링컨대통령이나 오바마 대통령 같은 존경받는 대통령이 탄생할 수는 없을까?해방 이후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모두가 스캔들과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다. 말하자면 정직하고 깨끗한 대통령이 없었다는 것이다. 출발은 그럴 듯 한데 꼭 임기 말에 가서 구설수에 오르는 스캔들이 발생한다.
우리 국민은 지금 정직하고, 도덕적이며, 탁월한 리더십을 가진 대통령을 갈망하고 있다. 그러한 대통령을 뽑는 것은 전적으로 국민의 몫이다. 국민의 뜻을 받들어 국가를 바르게 통치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과 자질을 갖춘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 앞으로 국가의 리더는 자신과 국민을 속이고는 대통령이 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구태의연한 시대는 막을 내리고 있다. 인터넷의 발달과 SNS 등에 리더의 모든 정보와 재산, 과거의 행적이 낱낱이 공개되고, 국민은 그 정보를 곧 파악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55%의 높은 지지율을 받으며 ‘레임덕 없는 대통령’으로 8년간의 백악관 생활을 떠난다. 반면에 우리의 대통령은 최악의 지지율 5% 속에서 탄액 버티기에 안간힘을 쏟아내고 있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 전 지지율은 83%에 달했다. 부시(아들 부시) 전 대통령 61%, 빌 클린턴 전 대통령 68%를 훌쩍 뛰어 넘은 지지율이다. 그런가 하면 트럼프 당선인의 지지율은 37%(1월 20일 폭스뉴스 여론조사)로 백악관을 떠나는 오바마 대통령의 지지율 55%에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다.
오바마의 높은 지지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는 지난 가을 위대한 대통령을 탄생시킨 시카고를 여행하며 오바마 대통령의 일생과 행적을 곰곰이 되새겨 보았다. 우리나라는 임기말 국민으로부터 존경받는 대통령이 존재할 수 없는가?
나는 오바마 대통령이 저술한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과 ‘담대한 희망’을 다시 한 번 탐독을 하며 그가 대통령이 되기까지 파란만장했던 일생을 살펴보았다. 특히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은 어린시절부터 하버드 로스쿨에 진학하기까지 오바마의 일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큰 감동을 주었다. 오바마는 글도 참 재미있게 잘 썼다. 나는 이 책을 손에 들고 시종 놓치 못한채 흥미 진진하게 읽어내려갔다.
대통령이 되기 전 저술한 이 두 저서를 읽으면서 오바마 대통령의 삶을 좀 더 구체적으로 조명해 보기로 했다.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그는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떤 생각들을 가졌는지, 대통령의 자질은 어떤 것인지, 재조명을 해보봄으로로서 대선을 앞 둔 우리 모두에게 많은 도움과 생각을 할 수 있으리라.
내가 오바마 대통령을 존경하는 것은 그의 인간성에 있다. 흑인과 백인의 혼혈아로서 정체성에 방황을 하면서도 절망을 딛고 일어선 그의 성공 스토리는 한마디로 감동적이다. 그는 수많은 좌절과 방황의 시간을 넘어 담대하게 일어섰다.
이번에 오바마의 정치적인 고향인 시카고를 방문하게 된 것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다. 미국 본토 중서부에 중심에 위치한 시카고는 1983년 내가 미국 뉴욕으로 공부를 하러가며 처음으로 밟았던 미국 본토 땅이다. 그 땅을 33년 만에 다시 밟는 감회는 컸다. 일리노이 주에 속하는 시카고는 나로 하여금 어린 시절부터 또 한사람의 존경하는 인물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는 제16대 미국 대통령인 에이브라햄 링컨이다. 켄터키 외딴 오두막에서 태어난 링컨의 어머니는 그가 9세 때에 세상을 떠났다.
링컨 대통령을 닮고 싶어떤 오바마
링컨의 부모는 거의 문맹이었고, 그 자신도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 링컨은 책 한권을 빌리기 위해 수km를 걸어가곤 했다. 나는 특히 소년 링컨이 오두막집에서 엎디어 책을 읽는 모습을 좋아했다. 그의 환경은 어린 시절 내가 겪었던 환경과 매우 유사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시절 나는 책을 읽기 위해 시골 학교의 작은 도서관을 청소하고 당번을 서는 일을 자청했었다. 그 당시 읽은 소년소녀 위인전기 50권과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 50권은 내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가난했던 링컨 가족은 삶의 터전을 찾아 1830년 일리노이 주로 이사를 했다. 일리노이에 도착하여 농부가 될 마음이 없었던 링컨은 여러 가지 일에 손을 댔다. 선원이 되어 배를 타고 미시시피 강을 따라 뉴올리언스까지 항해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결국 법률 공부를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링컨이 태어난 켄터기 오두막
그는 독학으로 법률 책을 파고들어 1836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을 하여 변호사 일을 시작했다. 일리노이 주 스프링필드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일리노이 주 주의원에 당선되어 정치계에 입문을 한 후, 노예해방을 선언하여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업을 남긴 대통령이 되었다.
어쩌면 오바마는 링컨의 일생을 닮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는 어머니와 외할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좋은 학교에서 정규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하버드법대 로스쿨까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좋은 직장을 잡아 출세하는 것을 마다하고 일리노이 주 시카고로 돌아와서 변호사로서 소외받는 계층을 돕는 지역사회 봉사활동을 했다.
그리고 링컨이 그랬던 것처럼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을 시작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하여 흑인 최초로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기적을 일으켰다. 일리노이 주는 링컨과 오바마의 정치적인 고향이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2008년 11월 4일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 수락 연설을 했던 역사적인 장소인 그랜트 파크에 도착했다. 시카고 그랜트 파크는 1901년 미국의 18대 대통령 율리시스 그랜트(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군)의 이름을 딴 시카고 중심가에 있는 공원이다. 시카고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공원 내에는 시카고 미술관을 비롯하여 그 유명한 밀레니엄 파크가 있다. 지하 주차장 위를 공원으로 개조해 9만 9000㎡의 면적에 공공시설과 예술 작품이 들어서 있다.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을 선언한 후 150여 년이 지난 2008년 11월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선 미국 역사상 첫 흑인 대통령을 탄생시켰다. 오바마는 링컨 대통령을 탄생시켰던 일리노이 주에서 인권변호사로 개업하여 주 의회 의원과 연방 상원의원을 거쳐 미국의 제44대 대통령으로 당선 되었다. 어떤 보이지 않는 운명의 끈이 이 두 사람을 연결시켜 이곳 일리노이 주에서 미국에서 가장 존경 받는 대통령으로 탄생시키도록 했을까?
그러나 백인 링컨대통령과는 다르게 흑인출신 오바마가 실제로 경험해 온 역경과 그 역경을 성공으로 이끈 그의 스토리는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드라마틱하다. 절망을 딛고 일궈낸 그의 성공 스토리는 한마디로 감동 그 자체다. 모두가 아는 이야기로 치부를 할 수 있겠지만, 오바마가 살아 온 스토리에 혹시라도 무신경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무감각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또한 그런 사람은 자기 인생을 어떻게 설계하고 살 것인가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미래가 달라진다. 오바마는 정체성에 흔들리는 자신의 비참한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극복을 할 수 있을까? 젊은 나이에 8년간의 대통령 임기를 목전에 두고 있는 그는 이제 겨우 55세다. 그러기에 미국인들은 고별 연설을 하는 그를 바라보며 “4년 더!”하고 환호를 하고 있다.
복잡한 가정에서 태어난 위대한 싹
오바마가 희망이 없어 보이는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일차적인 힘은 그의 생각에 있었다. 그는 흔히 절망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생각의 실현을 위한 선택과 행동으로 그의 미래를 바꿔 나갔다. 우리의 미래, 아니 나의 직은 미래 역시 내가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이 모여 결정된다. 지금 힘들어 보이는 현실이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와야 했다. 그의 름은 버락 후세인 오바마 주니어Barack Hussein Obama, Jr다. 그의 이름 중 Barack은 “신의 축복을 받은(blessed by God)”이란 뜻이고, Hussein은 아랍어 “훌륭한(good, handsome)”란 뜻을 가지고 있다. 이슬람 가정에서 태어난 그의 아버지 버락 오바마 시니어가 지어준 이름이다. 그러나 오바마는 이 이름때문에 나중에 혹독한 비난과 검증을 거쳐야 했다.
오바마의 아버지 버락 후세인 오바마 시니어는 케냐에서 세 번째로 큰 부족인 루오 Luo족 가정에서 1936년에 태어났다. 오바마의 아버지와 그의 아버이의 아버지 온양고 오바마는 케냐에 있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호수인 빅토리아 레이크 부근에서 염소를 치며 살았다. 오바마 시니어는 이슬람교 집안에서 성장을 했지만 그 후 무신교도가 되었다. 그는 아주 가난한 나라의 케냐 사람이었지만 청년시절 장래가 촉망되는 수재요 정의를 사랑하는 야심적인 엘리트였다.
▲오바마의 아버지가 태어난 케냐 코켈로 마을
오바마의 아버지는 미국의 여러 대학에 장학금으로 유학을 요청하여 하와이 대학 역사상 최초의 흑인 학생으로 이 대학 동서문화센터 장학금을 받아 유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하와이에서 운명적으로 오바마의 어머니 던햄 Stanley Ann Dunham을 만난다. 오바마의 어머니는 1942년 캔사스 주의 동북쪽에 위치한 도시 레븐워쓰 Leavenworth에서 평범한 백인 가정의 첫 아이로 태어났다.
오바마의 외할아버지 스탠리 던햄Stanley Dunham은 대공황 중에는 석유 굴착 작업을 하여 생계를 유지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유럽으로 건너가 조지 패튼 장군의 부대 소속 병사로 참전했다. 그 후 1959년 미국의 하와이가 50번째 주로 된 직후인 1960년 새로운 삶을 찾아 하와이로 이주했다.
당시 17세였던 오바마의 어머니는 하와이로 이주한지 얼마 되지 않아 케냐에서 온 유학생 오바마 시니어를 만났다. 어머니는 하와이 대학에서 인류학과 수학을 전공하고 있었다. 그들은 1961년 2월 양가의 부모가 모두 반대하는 결혼을 했다. 당시 미국 본토에서는 인종차별이 심해 거의 절반이나 되는 미국의 주에서는 다른 인종간의 결혼을 중죄로 다스리는 불법이었다. 그러나 결혼식 날 오바마는 이미 어머니 뱃속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는 이슬람 문화의 케냐 태생인 오바마의 아버지는 하와이로 유학을 오기 전에 이미 케냐 여성과 결혼을 하여 2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오바마의 어머니는 결혼을 할 때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오바마의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속아서 결혼을 한 샘이지만 오바마의 아버지는 케냐의 관습대로 아무렇지도 않는 듯이 결혼을 했다. 오바마의 아버지는 케냐로 돌아간 후에도 아내를 2명이나 더 얻었다. 케냐 사회에서는 비록 흔한 일이기는 하지만 오바마 아버지의 이러한 복잡한 결혼배경 때문에 오바마에겐 베다른 형과 누나가 있고, 남동생도 다섯이나 된다.
▲케냐에 있는 오바마의 이복형제들과 가족들
케냐의 수재 오바마의 아버지는 1962년 하와이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하버드대학에 들어가 경제학 박사 과정을 밟기로 결정했다. 대학생 부모에게서 태어난 오바마는 겨우 1살짜리 아기였다. 그 해 가을 부모는 별거를 시작했고, 1964년 이혼을 했다. 아버지는 하버드로 떠날 때 자기가족이나 아내와의 사랑보다는 조국 케냐에서 실현하려는 꿈을 야망에 불타고 있었다. 하버드로 떠날 때 아버지는 공부를 마치고 하와이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지만 그것은 말뿐이었다.
그러나 후일 오바마의 어머니는 이슬람 문화권에서 성장한 아버지가 자신의 출세보다도 조국에 봉사하려는 열정이 강한 점을 이해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어린 오바마에게 아버지를 미워하는 마음이 싹트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이지적었던 어머니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을 좋아했고, 복음의 여왕으로 불리던 흑인 가수 마할리아 잭슨과 칼립소 음악의 왕이라 불리는 해리 벨라폰테을 좋아했다. 케냐 출신 흑인을 사랑했던 그녀는 해리 벨라폰테를 세상에서 가장 잘 생긴 남자라고 생각했다니, 그녀는 백인남자보다 흑인 남자를 더 좋아하는 숙명을 지니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러한 어머니의 숙명은 후일 오바마로 하여금 민권운동가로서 빈곤층과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적극 활동하게 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게 한다.
그런 어머니도 1967년 인도네시아에서 하와이 대학으로 유학을 온 롤로 소에토로 Lolo Soetoro와 재혼을 하여 발리로 떠나고 만다. 당시 6살이었던 오바마는 1967년 의붓아버지의 조국으로 어머니를 따라 이주를 했다. 두 부모 사이에서 오바마는 또 다른 이복동생인 마야 소에토로를 얻게 된다. 군부 지도자인 수하르토 정권하에서 의붓아버지의 생활형편은 어려워, 그의 어머니는 인도네시아 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부업을 하며 생계를 꾸려 나갔다.
▲인도네시아 출신 의붓아버지와 오바마의 어머니와 함께
그런 어려운 실림 속에서도 어머니는 오바마가 10살이 될 때까지 자카르타에서 소수 엘리트만 다니는 가톨릭계 명문 초등학교에 입학을 시켜 공부를 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오바마는 이슬람 문화권인 인도네시아에서 4년 동안 유년시절을 보내며 공부를 한 셈이다.
이렇게 소년 오바마는 어머니를 따라 인도네시아에서 몇 년을 살다가 다시 하와이로 돌아왔다. 허지만 그는 성장을 하면서 극심한 정체성에 시달린다. 피부색이 다른 자신에 대한 사회적 편견때문에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에 그는 한 때 마리화나와 코카인에 손을 대며 술고래로 허송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이러한 오바마의 유년시절 체험에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있었다. 유년기에 미국 이외의 다른 문화들에 대한 이해와 안목을 넓히는 데는 긍정적인 측면에서 큰 도움이 되었지만, 어린 시절 낯선 곳에서 혼란스런 문화를 경험하는 것은 자칫 정서적 혼란으로 사회 적응에 실패하는 문화적 방랑아가 될 수도 있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
그러나 어머니의 재혼 생활도 실패로 끝나고 그녀 역시 난소암과 자궁암으로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고 만다. 오바마의 아버지도 1982년 케냐에서 자동차 사고로 5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오바마의 부모는 공교롭게도 모두 52세를 일기로 생을 마치는 기구한 운명을 갖게 된다.
이렇게 오바마의 부모님들은 첫 만남부터 시련의 연속이었고, 허망하게 그의 곁을 떠나버리자 오바마는 하와이에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을 하게 된다. 1971년 오바마가 11살이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오바마를 케냐로 데려가기 위해 호놀룰루로 와서 한 달을 같이 지냈다. 그러나 아버지는 오바마가 가난한 나라 케냐보다는 선진국인 미국에서 성장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11살 때 하와이에서 만난 오바마의 아버지
하와이에서 아버지와 함께 한 달간을 같이 지내면서 어린 오바마는 아버지로부터 아프리카의 약한 나라 케냐가 영국의 식민 통치에 항거하여 독립투쟁을 한 이야기를 신기하게 들었고, 자기에게 혈통을 이어준 아버지가 따뜻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신의 피부색깔과 비슷한 검은 얼굴의 아버지는 곧 케냐로 돌아가고 만다. 그 후 오바마는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에 빠진다. 대학생이었던 당시 오바마는 이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삶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어머니의 교육열과 사랑-Yes, You Can!
오늘의 오바마를 존재케 한 것은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교육열과 사랑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인도네시아에서 인류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던 오바마의 어머니는 무엇보다도 아들의 교육을 걱정했다. 아들의 교육을 깊이 궁리하던 어머니는 아들을 교육 여건이 좋은 하와이로 보내 그녀의 부모에게 아들의 교육을 맡기기로 했다.
▲오바마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오바마의 외조부모는 딸의 요청을 적극 받아들여 오바마를 호놀룰루에 있는 푸나호우 스쿨 Punahou School에 5학년으로 입학시켰다. 1,200명이 다니는 이 학교는 흑인이 단 3명밖에 없었다. 푸나후오 스쿨은 1841년에 설립된 하와이의 사립명문 중고등학교다.
오바마의 어머니는 소년 오바마에게 항상 “넌 할 수 있어(Yes, You Can!)"는 자신감과 함께 남다른 교육에 정성을 쏟았다. 후일 오바마는 “어머니가 내 인생에 가장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회고 했다. 오바마가 2008년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11월 4일 시카고에서 한 연설 “Yes, We Can!”이란 제목은 바로 그의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남달리 교육열이 강했던 어머니가 훌륭한 아들을 만든 것이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좋은 교육 외에도 좋은 성품을 기르도록 늘 노력했다.
▲하와이 소년 시절의 오바마의 외할아버지와 어머니, 이복동생 마야 소에토르
그러나 오바마는 1,200명이 다니는 엘리트 학교에서 흑인이 단 3명뿐이라는 현실과 싸워야 했다. 흑인이라는 극심한 왕따 속에서 흑인과 혼열아에 대한 사회적인 차별인식에 시달리며 좌절감을 맛보기 시작했다. 소년 오바마는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에 인종차별 속에서 극심한 정체성에 시달리며 방황하기 시작했다.
훗날 사회인으로 성장한 그는 소년시절 한 때 마리화나와 코카인을 하고, 술고래로 허송세월을 보낸 적이 있었다고 털어 놓았다. 2008년 대통령 직무수행에 관한 토론 포럼에서는 이 점이 가장 큰 도덕적인 약점임을 솔직히 시인했다.
그러나 오바마는 곧 냉정과 이성을 되찾았다. 농구를 통해서 괴로움을 달래고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는 ‘폭격기’라고 불릴 정도로 점프슛을 상당히 잘 구사하여 선수의 반열에 올랐다. 당시푸나호우 스쿨은 하와이에서 농구 최강팀이었다. 그의 농구 실력은 하와이 챔피언 팀의 2군에 낄만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이 주된 관심은 농구선수의 길보다는 늘 어머니가 일깨워준 아메리칸 드림의 실현이었다.
▲하와이 푸나우 스쿨 농구팀에 속한 오바마
▲농구로 스트레스를 풀고 있는 오바마 대통령
푸나우호 스쿨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그는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여 2년 간 옥시덴틀 대학 Occidental College에 다녔다. 기초교양학문 중심이 이 작은 사립대학에서 좋은 성적을 받은 오바마는 뉴욕의 명문 대학인 컬럼비아대학Columbia University으로 옮겨 2년 동안 정치학도로 국제관계학을 전공했다.
컬럼비아대학을 마친 후 그는 2년 동안 정치활동을 연구하는 초당적 정치연구단체에서 현실정치를 조사하며 사회적 경험을 쌓았다. 그는 비록 좋은 직장에서 일하며 은행통장 구좌에 저축이 늘어난다고 해도 과연 그런 생활이 자기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인가에 대해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시카고에서 지역사회 조직사업을 위해 일할 사람을 구한다는 교회단체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하게 되었다. 그는 깊은 고뇌 끝에 자기의 인생 목표를 흑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시카고에서 자기의 인생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그는 시카고와 전혀 연고가 없었다. 그가 1985년 시카고에 왔을 때 시카고에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고, 돈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필사적으로 인생의 목표를 시카고에서 찾았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사랑하는 아내 미셀 오바마도 만났다. 그는 시카고에서 주로 흑인들이 거주하는 사우스 사이드 South Side 외곽지역에서 저소득층을 위해 3년 동안 열심히 일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바마는 일반 대중을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적극 나서게 유도 계몽하는 리더로서 많은 업적을 쌓으며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저소득층 지역사회를 위하여 일을 하며 오바마는 두 가지 소중한 체험을 쌓았다. 하나는 시민사회변화를 위한 노력이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기가 힘써 일한 사회운동이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희망과 혜택을 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소중한 무형의 사회적 정치적 자산을 얻었던 것이다.
하버드 법률평론 편집장에 오르다
시카고 빈민가에서 3년 동안 지역사회 일을 어느 정도 성공을 한 오바마는 27세의 청년이 되어 있었다. 그는 무언가 더 획기적으로 발전 할 수 있는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의 뿌리를 찾아 케냐로 여행을 떠났다. 5주일 동안의 케냐 여행에서 그는 많은 아버지의 친척들을 만났다.
케냐 여행 중에 그의 기억에 가장 남은 것은 돌아가신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묘를 찾아보는 일이었다. 할아버지와 나란히 묻힌 아버지의 묘를 보는 순간 그는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묘한 슬픔이 밀려왔다. 그는 아버지의 묘 앞에 엎디어 눈물이 마를 때까지 아주 아주 많이 울었다.
▲케냐의 고향에 있는 오바마 아버지의 무덤
▲1988년 케냐를 방문했을 때 오바마의 할머니와 함께
실컷 울고 난 오바마는 할머니의 방에서 아버지의 유품 중 아버지의 미국유학 추천서를 발견하였다. 그 추천서를 읽어 보면서 오바마는 아버지가 조국 발전의 사명을 띠고 미국 유학 길에 올랐는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까지도 오바마의 가슴엔 어머니와 아들을 버리고 떠난 비정한 아버지로 남아 있었다.
뿌리를 찾아 방문했던 케냐여행에서 오바마는 그런 이미지를 한 순간에 털어버렸다. 또한 대의를 위해 일을 해야겠다는 어떤 사명감을 새롭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자기 인생에 큰 자취를 남겨야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게 갖게 되었다. 뿌리를 찾아 나선 케냐 여행에서 오바마는 가장 값진 선물을 찾아냈다. 그 후 오바마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원칙과 소신의 길을 주저 없이 택했다.
그는 소외계층을 돕기 위해서는 더 많이 배우고 전문지식을 쌓는 일이 중요하다는 점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변호사 같은 법률자문가가 되면 소외계층과 지역사회 발전을 위하여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는 하버드 로스쿨에 진학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하버드를 택했듯 그도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을 했다.
▲하버드 로스쿨 시절
1988년 가을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한 그는 학업에 열중하였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술지인 ‘하버드 법률평론 Harvard Law Review'의 최고 책임자인 편장장의 자리에 올랐다.하버드 법률평론 편집장은 80명의 편집진을 총 지휘하는 주필역할을 수행하는 자원봉사 전임지위자리다. 그는 19명의 쟁쟁한 후보를 물리치고 흑인 최초로 하버드 법률 편집장이 되었다.
오바마가 편집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학업성적이나 전문실력이 남보다 뛰어나서가 아니라 정직하고 공정하며 너그러운 성품 때문이었다. 백인이나 흑인, 기타 유색인종, 그리고 진보나 보수주의자를 불문하고 두루 포용하면서도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오바마를 편집장으로 선출한 동료들은 당시 오바마를 이렇게 평했다.
▲하버드 로스쿨 리뷰 편집장 시절의 오바마
“그는 천부적인 리더였다. 감동을 주는 학생이었고, 좋은 친구였다. 그에겐 으르렁거리며 논쟁하는 학생들을 행복하고 끈끈한 그룹으로 묶어내는 마력 같은 것이 있었다.
또한 오바마는 겸손한 학생이었다. 하버드 로스쿨에서 성적이 최상위 그룹에 속하고, 로스쿨 최고의 명예인 법률 편집장을 맡으면서도 늘 겸손한 태도를 견지했다. 또한 하버드 법률 평론 104년 역사상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편집장으로 선출되면서 일약 미국 전역에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는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니 보니 유명 인이 되어 있었다.
인종관계에 대한 책 출판 계약을 하여 선급 로열티를 받기도 했으며, 시카고대학 로스쿨에서는 그를 교수로 채용하기 위해 그에게 특별연구원 자리와 책을 저술하는데 필요한 사무실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는 마침내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 Dreams from My Father'는 책을 1995년도에 출간하였다.
출세보다는 사회봉사의 길을 택하다
오바마는 1991년 하버드 로스쿨을 아주 우수한 성적인 '매그너 로디 Magna cim Laude'로 졸업하고 법학전무학위 Juries Doctor를 받았다. 더구나 하버드 편집장까지 지낸 그에게 연방대법원 사무관 등 사법부로 가는 영예로운 길이 열렸다. 이 직책은 사회적 신분이나 경제적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탐낼만한 자리였다.
그러나 그는 탄탄한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가 시카고에서 하버드로 떠나면서 함께 사회봉사조직에서 일했던 동료에게 약속을 했던 대로 그는 소외 받는 계층과 사회적 약자들에게 봉사하는 길을 택했다. 그는 시카고로 돌아가 작은 규모의 민권변호사 로펌에서 일하면서 시카고 대학 로스쿨에서 부업으로 헌법학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는 시카고에서 평생 반려자인 미셸 로빈슨 Michelle Robinson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미셸은 오바마보다 먼저 하바드 로스쿨을 졸업하고 시카고에 있는 시들리 & 오스틴 로펌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엘리트였다. 이 로펌에서 오바마는 3개월 동안 일하던 중 오바마는 어느 사교 모임에서 미셸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오바마보다 3년 연하인 미셸은 오바마가 데이트를 처음 신청 했을 때 퇴짜를 놓았다고 한다.
미셸은 복잡한 오바마의 가정과는 달리 공무원인 아버지와 상점 사무원으로 일을 하고 있는 어머니 사이에 남매를 둔 단란하고 탄탄한 가정에서 귀하게 성장을 한 수재였다. 미셸은 명문 프린스턴 대학에서 사회학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하버드 로스쿨을 마친 후 흑인여성으로서는 드문 엘리트 변호사였다.
그러나 미셸도 곧 오바마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처음 데이트는 흑인 배루 스파이크 리 Spike Leer가 제작 감독한 영화 ‘옳은 일 하며 살자 Do the Right Thing'이었다고 한다. 그 후 미셀은 오바마가 지역사회발전 발전을 위한 토론회에서 지역주민들과 대화를 하면서 그들을 논리적으로 설득시키는 것을 보고 오바마에게 반했다고 한다. 그들은 1991년 약혼을 하고 이듬해인 1992년 10월 3일 마침내 결혼에 골인을 했다.
지성과 아름다운 용모를 겸비한 미셸은 법조인으로서, 그리고 지식인으로서 오바마에겐 이상적인 일생의 반려자였다.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에서 연방 상원의원으로
사회봉사 활동을 하면서 오바마는 시카고대학 로스쿨에서 12년 간 헌법을 가르쳤다. 시카고 로스쿨에서도 오바마의 인기는 대단했다. 그는 학생들과 교수들 모두에게서 폭넓은 사랑과 찬사를 받았다. 그리고 민권관련 소송과 지역경제개발을 전문으로 하는 12명의 변호사로 구성된 로펌 데이비스 마이너 반힐 & 갤런드 Davis, Miner, Barnhill & Galland'에서 민권변호사로 활동했다. 그는 보수를 많이 받기 위해서 자신이 개업을 하거나 보수가 좋은 로펌보다는 주로 민권신장에 봉사하는 작은 로펌에서 사회적 약자들을 돕는 길을 택했다.
민초들의 권익증진을 위한 조직과 단체들을 위해 일을 하면서 오바마는 1996년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정치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 지역은 흑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시카고 사우드 사이드 중에서도 가난한 사람들과 범죄가 많은 열악한 지역이었다. 그는 상원의원에 선출된 후에도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단체들을 위하여 힘이 닿는 대로 계속 도왔다. 정치활동을 시작한 후 그는 시종일관 깨끗한 정치와 생활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법을 만드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오바마에게는 일리노이 주 정치무대가 너무 좁게만 느껴졌다. 보다 더 큰 뜻을 실현하기 위해 그리고 서민대중에게 더 많은 봉사를 하기 위해 그는 중앙정치무대로 진출하고 싶었다. 2000년도에 그는 미국 연방하원선거에 민주당 예비선거에 출마를 했으나 4선 현역의원인 바비 러시에게 참패했다.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서 시종일관 정직하게 일해 온 오바마에겐 도덕적 하자란 찾아볼 수 없었고, 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던 러시는 오바마를 미숙하고 바보 같은 사람이라며 신랄한 인신공격을 퍼부었다. 오바마가 하버드대학에서 수준 높은 교육만 받았지 세상물정을 모르는 바로라며 몰아세웠다. 어떻든 젊은 오바마는 그의 노련한 술수에 말려 연방하원으로 진출은 좌절되었으나, 오바마는 결코 낙심하지 않았다.
2003년 일리노이 주 상원 보건후생위원회 의장이 된 오바마는 더욱 성실한 자세로 입법 활동을 하였다. 그는 언제나 초당적 지지를 끌어내려고 힘썼다. 당파적 이익에 얽매이지 않고 국민들을 위한 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의 그의 신념이었다. 그리고 2003년 1월 그는 미국 연방 상원의원에 출사표를 던졌다. 그리고 2004년 3월 1일 실시된 민주당 상원의원 예비선거에서 압도적인 차이로 승리를 했다.
곧이어 그에게 기적 같은 경사가 일어났다. 스타덤에 한 단계 오르면 정상이 눈앞에 보인다고 했던가? 그에게 민주당 전당대회 기조연설을 해달라는 부탁이 온 것이다. 2004년 7월 보스턴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 기조연설은 미국 전역에서 국민들이 TV로 지켜보는 명예로운 일이다.
정치 풋내기의 그에게는 중앙정치무대에 진출하는 큰 영광의 기회가 온 것이다. 그는 기조연설문을 몸소 작성했다. 연설제목은 ‘담대한 희망’이었다. 이는 그의 아버지에게 바치는 책의 제목이기도 했다. 그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존 케리 상원의원을 지지하는 이 연설에서 미국사회의 통합을 역설하며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진보의 미국이나 보수의 미국이란 없다. 미합중국이 있을 뿐이다.”
“흑인의 미국이나 백인의 미국이란 없다. 미합중국이 있을 뿐이다.”
오바마는 그의 혼혈성과 다른 나라에서 성장한 배경을 언급하면서 교육의 힘을 강조했다. 시카고에 살면서 법조계와 정계에서 성공한 경력도 소개했다. 그리고 “이 지구상 어느 나라에서도 나의 성공담은 불가능하다”며 미국이 가장 위대한 나라임을 강조했다. 미국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용감한 성공사례들은 ‘희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모두에게 일깨워주고 있다고 역설했다.
오바마의 연설은 청중을 열광시켰다. CNN, PBS, FOX News, MSNBC, C-SPAN 방송에서 내보낸 오바마의 연설은 910만 명이나 시청했으며 결정타를 날렸다. 그는 이 기조연설 한번으로 중앙정치무대에 혜성처럼 등장했던 것이다. 급기야 ‘오바마 현상’이 급부상하며 장차 그가 대통령 후보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여론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는 이어서 실시된 2004년 11월 총선에서 70%라는 사상 유례없는 표차로 압승을 거두며 미국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 미국만이 가진 특유한 일이다.
흑인 정치 초년생 대통령 후보
2005년 4월 연방 상원의원으로 공식 취임한 오바마는 흑인으로는 미국 역사상 5번째, 일반투표로는 3번째로 선출되었다. 그는 의회흑인간부회의 Congressional Black Caucus의 유일한 상원의원으로서 흑인들의 권익과 기회평등을 위해 의회활동을 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네셔널 저널은 그를 가장 진보적 상원의원으로 분류하였고, 미국의 언론매체들은 그를 10위권 내외의 유력한 상원의원으로 평가하였다. 초선의원으로서는 매우 놀라운 성적이었다.
오바마는 상원에 진출하자말자 두드러진 입법 활동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미국에서의 의회활동은 국민들에게 유익한 입법 활동으로 평가된다. 시카고에서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면서 활발한 입법 활동을 하였던 그는 하버드로스쿨에서 쌓은 법률지식을 바탕으로 합리적이고 유익한 입법주제를 선택하여 발의를 하였다.
그의 입법주제는 일관성 있게 평화롭고 안전한 미국과 세계의 건설, 공직사회의 부패 근절, 민주주의와 민권 신장, 이라크 전쟁종식, 환경문제에 대한 적극적 대응, 그리고 에너지 문제 해결 등으로 요약된다.
대량살상무기를 없애기 위한 오바마-루가 법안, 새로운 에너지 정책 법률과 이민법, 연방정부 지출의 투명성을 높이는 코번-오바마 법안, 빈곤과 독재에 허덕이는 콩고를 구제하고 안보와 민주주의를 촉진하는 법안, 정직한 리더십과 개방적인 정부를 만드는 법, 공직사회 후보자의 회사전용 비행기 사용 금지 규칙 등을 발의하여 연방정부자금과 선거자금 사용에 있어 공직자의 윤리적 책임을 강화하는 법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또한 이라크 전쟁을 조속히 종식시키기 위해 이라크 전쟁 확산 방지 법안을 제출하고, 핵 테러 위험을 감소하기 위한 법안을 공동 발의했다.
초선의원인 오바마는 이렇게 상원에서 다양한 입법 활동과 위원회 활동을 통해 폭넓은 국정 경험을 쌓았다. 그는 유럽문제 소분과위원회 위원장과 외교 분과위원회 위원자격으로 동유럽, 중동,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등지를 방문하며 대외적인 경험을 넓혀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2007년 2월 10일 오바마는 일리노이 주 스프링필드 주 의회 건물 앞에서 미국 대통령 출마를 공식 발표했다. 그는 불과 46세의 초선의원이었다. 역시 미국은 미국이다. 흑인 초선의원이 대통령에 출마를 하다니!
스프링필드는 미국의 16대 대통령인 에이브러햄 링컨이 ‘분열된 일가 House Divided'라는 제목으로 역사적인 연설을 했던 곳이다. 노예제도를 반대하여 미국통합을 역설한 링컨은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인 1858년 6월 16일 일리노이 주 공화당 상원의원 수락 연설에서 ’분열된 일가는 바로 설 수 없다는 취지로 연설을 했던 상징적인 장소였다.
▲일리노이 스프링 필드에거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는 오바마
오바마는 선거유세기간 내내 미국 사회는 변화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 국민통합의 중요성을 호소했다. 그리고 중요한 쟁점이 생길 때마다 솔직하고 담대한 태도로 대응했다. 정치인에게 정직성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변화와 개혁’을 일관성 있게 주장했다.
사상 최대의 정치 후원금 모금
변화와 개혁을 갈망하는 미국인들은 오바마 후보에 대한 지지열기가 급속히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지지도는 후원 모금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2007년 상반기에만 5,800만 달러가 모금되었다. 특히 200달러 미만의 소액기부가 1,640만 달러에 달해 최고의 소액기부를 기록했다. 서민 유권자들이 너도 나도 주머니를 털어 5달러, 10달러, 20달러를 수없이 기부를 했다. 2007년 한해 모금액은 1억 달러가 넘어 선거운동 후원 최고모금기록을 갱신했다.
2008년으로 들어서면서 오바마의 모금에는 더욱 탄력이 생겼다. 1월과 2월 두 달 동안에 무려 9000만 달러 이상이 모금되었다. 이렇게 사상 유례없는 후원금이 모금되자 그는 대통령 선거운동을 위한 공적자금지원을 신청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렇게 혜성처럼 나타난 오바마는 경험과 탄탄한 권력기반을 가진 노련한 힐러리 클린턴과 예비선거에서 기적적으로 승리를 거두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국민은 인신공격에 편승하길 거부한다
오바마는 중간이름이 ‘후세인’이라는 이슬람 이름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후세인’이란 이름은 이슬람교도들이 많이 한다. 또한 2006년 아버지의 조국 케냐를 방문했을 때 소말리 족 복장을 한 사진이 공개되어 말썽이 되었다. 당시 오바마가 방문한 케냐 동북부에 위치한 와지라는 마을에 소말리 부족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그 복장은 소말리 족 유목민 전통을 상징 할뿐 종교적 의미는 없었다. 그러나 이 사진이 유포되면서 ‘오바마는 이슬람교도’라는 정적들의 인신공격에 휩싸이게 되었다.
9.11 테러 이후 미국에선 반 이슬람 정서가 증폭되고 있었다. 따라서 소말리족 복장을 한 오바마의 사진은 크게 상처를 받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오사마 빈라덴의 이미지를 오바마의 사진과 합성한 동영상까지 유포되었다. 오바마는 이러한 터무니없는 인신공격에 억울하고 괴로웠다. 오바마가 어린시절 이슬람 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 살았다는 사실도 그가 이슬람교도라는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오바마의 종교는 시카고 삼위일체 연합교회의 성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러나 오바마가 신앙적으로 20년간 의지해 왔던 시카고 삼위일체 연합교회의 제러마이어 라이트 Jeremiah Wright 목사의 인종갈등과 국민통합을 해칠 가능성이 있는 설교 부분이 ABC 방송전파를 타면서 문제가 탔다.
라이트 목사의 설교에는 “미국은 인종차별로 건국되었으며 아직도 인종차별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다. 우리는 백인은 우월하고 흑인은 열등하다고 믿고 있다. 이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보다 더 강하다.”란 내용이 있었다. 결국 이 설교는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고, 오바마가 오랫동안 다니는 교회에다가 그의 결혼 주례까지 선 목사의 설교를 둘러싼 말썽이 크게 증폭이 되어 말썽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오바마는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오바마가 지칫하면 흑인의 이익만을 강조하는 정치인으로 오해를 받을 소지가 있었다. 또한 같은 흑인 출신인 그의 아내마저도 공화당과 민주당내 반대파의 인신공격으로 고통을 당해야 했다. 오바마는 ‘보다 완벽한 미국 A More Perfect Union'라는 인종문제를 주제로 한 연설에서 라이트 목사의 설교발언을 비판하며 라이트 목사와의 관계를 완전히 청산했다. 그는 여론의 흐름을 신속히 읽고 문제가 터지면 융통성 있게 대처했다.
그러나 이런 터무니없는 인신공격과 악재들이 그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지 않고 수습되는 원천은 국민들의 변함없는 지지였다. 부시 정부의 실정으로 실망에 빠진 대다수의 국민들은 오바마에 대해 정적들이 쏟아내는 종교적, 인종적, 개인적 인신공격에 깊이 신경을 쓰지 않았다. 국민들은 그러한 비열한 인신공격에 편승하기를 거부했다. 그보다는 오바마의 진실한 호소와 비전에 대한 국민적인 공감대가 계속 확산되어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국민들이 대통령 후보를 바라보는 시각이다. 이제 우리나라 국민도 구태의연한 인신공격에는 신물이 났다. 국민은 인신공격보다는 진솔함과 실현 가능한 정책, 그리고 앞으로의 비젼을 더 중시한다. 그것이 젊은 유권자들이 갈망하는 후보다. 우리나라도 오바마 대통령과 같은 진솔한 후보가 나타날 시기가 되지 않았을까?
대선판도를 뒤흔든 청년층의 반란
예비선거에서부터 청년 유권자들의 선거 참여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들은 단순히 유권자로서 참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바마를 위하여 자원봉사 선거운동원으로 활동을 했다. 우리나라도 선거 혁명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미래를 걸머질 청년층의 적극적인 선거 참여가 필요하다.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이 딱 그렇다.
당시 미국은 부시행정부의 묵은 기성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어두운 밀실에 갇혀 습하고 탁한 공기를 신선한 공기로 갈아 통풍시킬 수 있는 새로운 리더십의 출현을 갈망하고 있었다. 통상적으로 선거운동은 계획에 따라 진행된다. 하지만 자연발생적 운동에는 계획과 무관하게 예고 없이 찾아드는 응원부대가 있다. 이런 운동은 급기야 상승작용을 일으켜 기존의 관념과 틀을 깨고 종교 간의 벽도 무너뜨린다. 흑인과 백인의 벽도 허물고 하나로 통합하는 힘을 발휘한다.
오바마 현상은 유권자들 사이에 막혀 있는 여러 가지 벽을 허물고 하나의 국민으로 통합하는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번 선거가 흑인과 백인의 대결도 아니며, 빈곤층과 부유층의 대결도 아니라고 했다. 종교의 선택도, 남녀 성별의 선택도, 아니라고 했다. 이번 선거는 과거와 미래의 대결이며, 변화와 국민통합을 위한 것이라고 호소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오바마의 목소리에 진정성이 실려 있었다는 점이다. 그의 영혼 속에는 흑인이요, 혼혈아로서 하와이, 인도네시아, 미국본토, 케냐 등지에 느낀 정체성에 대해 고뇌한 체험이 깊숙이 배어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사회적 편견, 열등감, 정신적 방황 등 그 모든 시련을 극복해 온 정신력이 살아 넘치고 있었다. 그러한 그의 영혼과 정신력에서 나온 메시지는 진실한 호소력과 생명력이 있었다.
오바마 예비선거 캠프에는 예기치 않았던 젊은 청년들로 북적이며 생기를 더해 갔다. 젊음이 넘친 선거 캠프는 자연발생적으로 새로운 바람이 일어나며 급속히 변화해 갔다. 오바마는 광범위한 지지기반을 구축해 나가고 있었다. 결국 오바마는 힐러리 클린턴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며엥 승리를 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바람은 멈추지 않고 그를 미국 제44대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정치적인 라이벌을 중용시키는 너그러운 성품
내가 시카고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도 바로 오바마가 대통령 당선 수락 연설을 했던 크렌트 파크Grant Park였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나는 오바마가 연설을 했던 밀레니엄 파크에 섰다. 나는 TV에 생중계 된 그날의 감동을 생생히 기억을 하고 있다.
“미국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분들이 있다면, 이 나라를 세운 우리 건국자들의 꿈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분들이 있다면, 그리고 우리 민주주의가 해낼 수 있는 역량에 의문을 품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오늘 밤 제가 이 자리에 설 수 있게 한 여러분들이 바로 그 의문들에 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감격에 겨워 울부짖기까지 하며 환호하는 군중들을 향하여 변화를 강조했다. “오늘의 승리만으로 변화가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오늘 이 승리는 변화를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이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는 과거의 묵은 방식을 과감히 거부해야 합니다. 이러한 거부는 국민의 참여와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는 변화의 완성을 위해 자기를 지지한 사람이나 반대한 사람 모두가 미국 재건에 동참해줄 것을 당부했다. 특히 자기를 반대한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그들의 도움도 받아 그들의 대통령이 될 것이라며 통합된 미국을 건설하자고 호소했다.
실재로 그는 대통령에 취임한 후 자기 사람이 아닌 인재들을 등용하여 전문성과 경험을 중시하는 능력중심의 거국적 정부 팀을 만들었다. 그는 대통령 지명전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정치적 라이벌이자 경쟁자였던 힐러리 클린턴을 각료 중 가장 중요한 국무장관으로 지명했다.
그리고 민주당 대통령 지명전에 출마하여 오바마가 경험이 부족하다고 강력히 비판을 했던 톰 빌색Tom Vilsack을 농부장관으로 지명했다. 오바마는 천부적으로 타고난 통 큰 도량으로 라이벌을 중용하는 큰 포용의 정치를 실현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본 받아야할 덕목이다.
그는 과거의 정적들을 정부요직에 기용하는 한편, 객관적인 능력에 따라 각료들을 기용했다.자기사람이 아닌 수많은 인재들을 범국가적으로 끌어 들여 전문성과 경험을 중시하는 능력중심의 거국적 정부 팀을 만들었다. 이는 국가경영에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해바라기성 인물보다는 자신에게 쓴 소리를 한 사람이 어려울 때 흔들리지 않고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그는 일리노이 출신 상원의원에다 인권변호사라는 이력으로 흑인 인권신장에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켰다는 점에서 종종 에이브러햄 링컨과 비교된다. 링컨 역시 일리노이 상원의원 출신이다. 링컨에 의해 노예해방이 된 후 150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탄생한 미국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 그는 당파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링컨을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여기고 있다.
링컨이 미국 중서부의 관문 일리노이에서 광활한 서부에서 바라보며 흑인 노예해방을 결심했다면, 오바마는 시카고의 어두운 빈민가에서 흑인의 인권과 사회개혁 운동을 하면서 사회정의를 실천하고자 다짐했다. 두 사람 다 시카고가 속해 있는 일리노이 주에서 흑백 갈등과 빈부의 격차, 인권의 평등을 극복하고 더 나은 세상을 이룩하기 위해 공통의 화두로 일생을 바친 사람들이다.
8년 동안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레임덕 없이 백악관을 떠나는 오바마 대통령!
그는 지난 1월 10일, 자신의 정치적인 고향인 시카고에서 고별 연설을 했다. 2008년 1월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외쳤던 “Yes We Can!(우리는 할 수 있다!)"를 외치며 지지자들의 환호 속에 마지막 고별연설을 했다.
오바마는 이제 겨우 55새로 젊다. 그러나 8년의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오바마의 머리는 하얀 눈이 내려 앉았고, 얼굴에 잔주름도 많이 생겼다. 그만큼 미국의 대통령은 세계의 대통령으로서 많은 고뇌와 격무에 시달리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너무도 자랑스럽고 멋지다! 이제 그의 치적은 후일 역사가들에 의해 재 조명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도 다가오는 대선에서는 이처럼 멋진 고별연설을 할 수 있는 자질을 가진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뽑기를 바라며, 말미에 “민주주의는 당신을 요구한다.”는 그의 고별연설 전문을 싣는다.
[오바마 대통령 고별연설 전문]
"민주주의 당신을 요구한다"
안녕하세요, 시카고! (박수)
집에 오니 좋네요. (박수)
여러분!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박수)
정말 고마워요. 고맙습니다.
(함성이 그치지 않자) 여러분, TV 생중계 중이니 진행을 해야 합니다. (박수)
아무도 말을 듣지 않으니 정말 레임덕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웃음)
모두 앉으셔야 해요. (박수갈채)
친애하는 미국인 여러분 (박수) 미셸과 저는 지난 몇 주 동안 우리가 받은 모든 희망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오늘 밤은 제가 감사의 말을 드릴 차례입니다. (박수) 우리가 눈을 마주쳤든 서로에게 전혀 동의하지 않든간에, 거실과 학교에서, 농장과 공장 바닥, 식당과 먼 군사 기지에서 제가 미국인 여러분들과 나눈 대화는 저를 정직하게 했고, 영감을 줬으며, 나를 계속 지켜줬습니다. 매일, 저는 여러분으로부터 배웁니다. 여러분이 저를 더 나은 대통령으로,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박수갈채)
20대 초반에 시카고에 왔습니다. 나는 아직도 내가 누군지 알려고 노력하며 여전히 내 삶의 목적을 찾고 있습니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서, 폐쇄된 제철소의 그늘에서 교회 그룹과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거리에서 신앙의 힘, 투쟁과 상실에 직면한 노동자들의 조용한 존엄성을 목격했습니다.
청중 : 4년 더!(four more years), 4년 더!, 4년 더!
그렇게 할 수는 없어요.
청중 : 4년 더!, 4년 더!, 4년 더!
평범한 사람들이 개입하고, 함께할 때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된 곳입니다. 대통령으로서 8년을 보냈지만 나는 아직도 그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만의 믿음이 아닙니다.그것은 미국적인 생각의 살아뛰는 심장이며, 자치 정부에 있어서의 대담한 실험입니다. 우리 모두는 평등하게 창조됐으며, 창조주에 의해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권리, 삶과 자유, 행복추구와 같은 것들을 부여받았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이러한 권리는 자명한 것이지만 스스로 실행된 적은 없습니다. 우리 민주주의의 도구를 통해 우리 국민은 보다 완벽한 국가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근복적인 아이디어. 건국자들이 우리에게 준 위대한 선물 -우리의 땀과 수고와 상상력을 통해 우리 개개인의 꿈을 좇을 수 있는 자유, 공동의 선과 더 큰 선을 이루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하는 필연성.
240년 동안 우리 국민에 대한 국가의 부름은 새로운 세대마다 일과 목적을 부여해 왔습니다.그것은 애국자들이 폭정에 맞서 공화정을 선택하게 했고, 개척자들이 서부를 개척하게 했고,노예들에게는 그 철로를 자유를 향한 용감한 길로 인도한 이유입니다. 그것은 대양과 리오데그란데를 가로지르는 이민자와 난민을 이끌어낸 것입니다. (박수)
그것이 여성을 투표용지와 만나도록 한 이유입니다. 그것은 힘있는 노동자들이 조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군대가 오마하 해변과 이오지마,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목숨을 바친 이유입니다. 그리고 셀마(흑인 민권운동의 성지)에서 스톤 월(동성애자 운동이 시작된 곳)까지 남성과 여성들이 그들의 목숨을 던질 준비가 됐던 이유입니다. (박수갈채)
이것이 미국이 특별하다 말할 때 우리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우리나라가 처음부터 완벽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변할 수 있는 힘을 보여줬고, 뒤따르는 이들을 위해 삶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어줬습니다. 네, 전진은 고르지 않습니다. 민주주의의 과업은 늘 어려웠습니다.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때로는 피가 흐르기도 했습니다.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갈 때마다, 한 걸음 물러서는 느낌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오랜 세월은 전진 운동으로 정의됐습니다. 일부 운동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위한 창립 신조의 지속적인 확장입니다.(박수갈채)
8년 전 제가, 미국이 불경기를 극복하고, 자동차산업을 재부팅하고, 역사상 가장 높은 일자리 창출을 가능케 할 것이라 얘기했다면 그리고 쿠바인들과 새로운 장을 열게 될 것이며, 이란의 핵무기 프로그램을 총격 없이 중단시킬 것이고, 9·11의 주동자를 사살할 것이라 얘기했다면, 결혼의 평등을 쟁취하고 2000만 시민들에게 건강보험을 가질 권리를 확보해줄 것이라 얘기했다면, 제가 그렇게 얘기했다면, 여러분은 목표를 너무 높게 잡았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한 일입니다. 당신이 한 일입니다. 당신이 바로 변화였습니다. 사람들의 희망에 대한 답과 바로 당신 덕분에, 거의 모든 면에서 미국은 더 낫고 더 강한 곳이 됐습니다.
10일 후 세계는 우리 민주주의의 특징 하나를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청중 야유) 안돼요, 안돼, 안돼, 안됩니다. 자유롭게 선출된 대통령에게 평화로이 권력을 이양하는 것입니다. 저는 부시 대통령이 제게 해준 것처럼, 최선을 다해 대통령 당선자 트럼프에게 순조롭게 권한을 이양할 것임을 약속했습니다.
우리 정부가 우리가 직면한 수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달린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도전에 맞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가장 부유하고, 가장 강하고, 가장 존경받는 국가로 남아있습니다.
우리의 젊음, 우리의 투지, 다양성과 개방성, 위험을 떠안고 재창조를 하려는 우리의 무한한 능력은 미래가 우리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잠재력은 민주주의가 작동할 때만 실현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정치가 우리 국민의 품위를 더 잘 반영할 경우에만 그리고 우리 모두가 정당 가입이나 혹은 특수한 이해와 관계없이 우리가 지금 당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공동의 목표의식을 회복하는 걸 도울 경우에만 실현될 것입니다.
제가 오늘 밤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민주주의 국가에 대한 것이죠. 민주주의는 획일성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십시오. 우리 건국자들은 논쟁을 벌이고 싸웠고 결국 합의점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똑같이 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민주주의가 기본적인 연대감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외견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함께 모여서 하나로 일어나거나 쓰러질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우리 역사를 통해 그 연대를 위협했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금세기는 그 시대의 시작이었습니다. 움츠러드는 세계, 커지는 불평등, 인구 통계학적 변화와 테러의 공포가 그것입니다. 이 힘들은 우리의 안전과 번영을 시험한 것만이 아니라 민주주의도 시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에 어떻게 대처하는지가 우리 아이들을 교육하고 좋은 일자리를 창출하고 조국을 보호하는 능력을 결정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할 것입니다. 우선 모든 사람이 경제적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인식이 없다면 민주주의는 작동하지 않을 것입니다.(박수)
좋은 소식은, 우리 경제가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임금, 소득, 주택의 가치와 퇴직 대비 계좌가 다시 상승하고 있습니다. 빈곤율이 다시 떨어지고 있습니다. (박수)
부자들이 적정한 몫의 세금을 내고 있습니다. 주식시장이 기록을 깨뜨렸고, 실업률은 10년 이래 최저 수준을 기록했습니다. 보험 미가입률이 이토록 낮은 적이 없었습니다.(박수)
건강 관리비용 상승률도 50년새 가장 낮은 수준입니다.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누구든 우리가 건강 보험 체계에서 이룬 진보보다 명백히 더 나은 계획을 세울 수 있다면,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낮은 비용을 부과할 수 있다면, 저는 이를 공개적으로 지원할 것입니다. (박수)
왜냐하면, 결국, 그것이 우리가 봉사하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점수를 얻고 인기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낫게 하는 것 말입니다.(박수)
그러나 우리가 이룬 모든 진보에도 불구하고 그게 충분하지 않다는 걸 우리는 압니다. 소수를 위해 성장하는 중산층과 중산층으로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사다리를 희생시킨다면 우리 경제는 잘되거나 성장할 수 없습니다.(박수)
경제학적으로 논쟁적인 주제입니다. 그러나 명백한 불평등은 우리의 민주주의적인 생각을 좀먹습니다. 상위 1%가 더 많은 부와 소득을 점유하는 동안 도심지와 농촌지역의 너무 많은 가족이 뒤처지고 있습니다.
해고당한 공장 노동자, 웨이트리스, 보건 의료 종사자들은 청구서를 지급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게임이 불공평하게 고착돼 있다는 것, 정부가 강자의 이익만을 위해 봉사한다는 것, 이것은 우리 정치를 더욱 냉소주의에 빠지게 만들고 양극화시키는 방식입니다.
이런 장기적인 추세를 빠르게 교정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동의합니다, 무역은 더 공평해야 하며, 단순히 자유롭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경제적 혼란의 다음 물결은 해외 무역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수많은 중산층의 일자리를 쓸모없는 것으로 만드는, 잔인한 자동화 추세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교육을 보장하는 새로운 사회 계약을 만들어야만 합니다.
(박수)
노동자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
(박수)
더 나은 임금을 위해 노조를 설립할 수 있도록.
(건배)
지금의 삶의 방식을 반영해 사회안전망을 개선하기 위해.
(박수갈채)
그리고 이 새로운 경제에서 가장 많은 이익을 거두는 기업과 개인이 그들의 성공을 가능케 한 국가에 대한 의무를 피하지 않도록 세법을 더 개혁하기 위해서.
(건배)
우리는 이런 목표를 달성할 최선의 방법에 대해 논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목표 그 자체에만 지금 현실에 안주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한 기회를 만들어내지 않는다면, 우리의 진보를 지연시킨 불만과 분열은 다가올 시간 동안 다만 날카로워질 것입니다. 우리 민주주의의 두 번째 위협이 있습니다. 우리의 나라만큼이나 오래된 것입니다. 제 당선 이후 세간에는 인종주의를 탈피한 미국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전망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았습니다. 인종주의는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박수)
그리고 그것은 우리 사회를 분열시키는 힘이 됩니다. 누가 뭐라 하든, 저는 인종간의 관계가 10년, 20년, 혹 30년 전보다 훨씬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오래 살아왔습니다.
(박수)
이건 통계상으로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에 걸쳐 젊은 미국인들의 태도로부터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긴 우리가 원하는 지점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박수)
모든 경제적 문제가 열심히 일하는 백인 중산층과 대접받을 가치가 없는 소수자들 간의 투쟁으로 틀지어진다면, 부유층이 그들만의 영역으로 물러나는 동안 모든 그늘 속의 노동자들은 남은 부스러기를 위해 싸워야 할 것입니다.
(박수)
우리가 단지 우리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이민자 자녀들에게 투자하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 아이들이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줄이게 됩니다. 그 이민자의 아이들이 미국 노동 인구의 점점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박수)
우리는 경제가 반드시 제로섬 게임일 필요가 없음을 보아왔습니다. 지난해에는 모든 인종, 모든 연령층, 남성 및 여성을 불문하고 소득이 올랐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인종 차별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한다면, 고용, 주택, 교육, 형사 사법 체계에 있어 차별을 금지하는 법률을 준수해야 합니다.
(박수)
그것이 헌법과 가장 높은 이상이 요구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법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바뀌어야 합니다. 하룻밤새 바뀔 수는 없는 것이죠. 사회적 태도는 종종 몇 세대가 지나야 변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민주주의가 이처럼 다양성이 증대되는 나라에서 그래야만 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면, 우리 각자가 미국의 위대한 소설에 나오는 애티커스 핀치(앵무새 죽이기에 등장하는 변호사)의 조언에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그의 시점에서 만물을 바라보지 않고서는, 그 피부로 올라가 걸어보지 않고서는, 당신은 어떤 사람을 진실로 이해할 수 없다."
흑인과 다른 소수자 그룹에, 이것이야말로 이 나라의 많은 사람이 직면한, 정의를 위한 우리의 진정한 투쟁을 의미합니다. 난민이나 이민자, 농촌 빈곤층, 트랜스젠더 미국인은 물론, 모든 이점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 그러나 경제적, 문화적, 기술적 변화로 인해 세계가 뒤집혀버린, 외부에서 온 중년의 백인 남성에게도 적용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경청해야 합니다.
(박수)
이것은 백인 미국인들에게는, 노예제와 짐 크로(흑인 차별정책)의 영향력이 60년대에 갑자기 사라져버린 게 아님을 알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소수자 그룹이 불만을 표명할 때, 그들은 다만 정치적 올바름을 행하거나 인종 차별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로운 시위를 벌일 때에도 그들은 특별한 대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건국자들이 약속한 동등한 대우를 요구할 뿐입니다.
(박수)
미국 태생의 국민들에게는, 오늘날 이민자들에 대한 고정관념들이, 과거 아일랜드인, 이탈리아인, 폴란드인들이 미국의 근본적인 특징을 파괴할 것이라고 말했던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는, 미국은 새로운 이주자들에 의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이주자들은 이 나라의 신조를 받아들였으며 나라는 더 강해졌습니다.
(박수)
그러니, 우리가 성취하고 있는 바와 상관없이, 우리는 더욱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 시민들이 우리가 그런 만큼 이 나라를 사랑하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우리처럼 근로와 가족의 가치를 소중히 하며, 그들의 자녀들 또한 호기심 많고 희망차며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 말입니다.
(박수)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이, 이웃, 대학 캠퍼스, 예배당, 소셜 미디어 피드 속에서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 우리와 같은 정치적 관점을 공유하며 서로를 공격하지 않는 사람들 속에 둘러싸여 우리만의 거품 속에 우리가 갖고 있는 가정에 도전하지 않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벌거벗겨진 당파주의, 경제 및 지역적인 계층화의 증가, 입맛에 따라 수많은 채널로 분화된 미디어 환경, 이 모든 것이 이런 거대한 정렬을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것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거품이 점점 더 안전해지면서, 우리는 증거에 기반하는 대신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우리의 의견에 맞는 정보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박수)
이런 추세가 우리 민주주의에 대한 세 번째 위협입니다. 보십시오, 정치는 생각들끼리의 싸움입니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디자인된 방식입니다. 건전한 토론을 통해 우리는 서로 다른 목표와 이를 성취할 방식들에 순위를 정합니다. 그러나 사실관계에 대한 공통된 기준 없이는,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고 상대의 공정한 지적에 납득할 의사 없이는,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태도를 중시하지 않고는, 우리는 서로 과거만을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박수)
우리가 공통점을 찾아내고 타협하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이것이 정치에 무관심하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가 아닙니까. 어떻게 선출직 공무원들이 기업을 위한 세금을 감면할 때가 아니라 유치원에 더 많은 예산을 투입할 때 분노하는 것일까요.
어떻게 우리는 소속 정당의 윤리적 결함에 대해서는 용인하면서, 다른 정당은 같은 이유로 맹비난하게 되는 것일까요. 이건 단순히 부정직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관계를 취사선택하게 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는 자멸하는 길입니다. 어머니가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듯이 말입니다. "결국 현실이 어떤 식으로든 널 덮칠 거란다."
기후 변화의 도전을 받아들이세요. 지난 8년 동안 우리는 외국 석유에 대한 의존도를 반으로 줄였습니다.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2배 늘렸으며, 지구를 지키겠다 약속했던 협정을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박수)
그러나 과감한 조치가 없다면, 우리 아이들은 기후 변화의 존재에 대해 논의할 시간조차 갖지 못할 것입니다. 그 영향을 처리하느라 바쁠 것이니까요. 더 많은 환경 재해, 경제적 혼란, 피난처를 찾는 기후 피난민들의 물결. 오늘날, 우리는 문제를 해결할 최선의 접근법에 대해 논의할 수 있으며, 주장해야만 합니다. 문제를 단순히 부인하는 것은 미래의 세대를 배신하는 일이고, 이 나라의 핵심적인 정신을 배신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건국자들을 인도했던, 혁신과 실용적인 문제 해결이라는 핵심적인 정신 말입니다.
(박수)
그 정신입니다. 우리를 경제 강국으로 만들어준 계몽에서 태어난 정신입니다. 키티 호크(라이트 형제의 비행이 처음 이뤄진 곳)와 케이프 커내버럴(NASA의 우주기지 케네디 우주센터가 있는 곳)에서 날아오른 정신, 질병을 치료하고, 모두의 주머니 속에 컴퓨터를 넣어둔 그 정신입니다. 이성과 기업에 대한 믿음, 힘보다 정의를 우선시하는 태도가 대공황 기간 동안 파시즘과 독재의 유혹에 저항할 수 있도록 했으며, 다른 민주주의 국가들과 함께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질서를 구축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질서란 단지 군사력이나 국가간 협약에 의한 것이 아니라, 원칙과 법의 지배, 인권, 종교의 자유, 언론과 집회의 자유에 기반을 둔 것입니다.
(박수)
그 질서가 지금 도전받고 있습니다. 우선, 이슬람을 대변한다 주장하는 폭력적인 광신자들입니다. 더 최근에는, 개방된 민주 국가의 자유 시장과 시민 사회 그 자체를 그들의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여기는 외국의 독재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우리의 민주주의에 미치는 위협은 자동차 폭탄이나 미사일보다 훨씬 큽니다. 그것은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의미합니다. 다르게 보이고, 말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 지도자들을 책임지우는 법치에 대한 경멸. 반대 의견과 자유로운 생각에 대한 불관용입니다.칼과 총, 폭탄, 악성 선전 기계가 무엇이 옳고 무엇이 사실인가에 대한 궁극적인 중재자라는 믿음입니다.
제복을 입은 우리의 남성과 여성들에 대한 남다른 믿음 때문에, 우리의 정보 당국과 법 집행 기관들과, 우리 군을 지원하는 외교관들 때문에, 그 어떤 외국 테러리스트 조직도 지난 8년간 우리 조국에 대한 공격을 성공적으로 계획하고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박수)
그리고, 보스턴과 올랜도, 샌 버나디노와 포트 후드(자생적 테러가 발생한 곳)는 급진주의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우리에게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우리 법 집행 기관은 그 어느 때보다 효율적으로 경계에 나서고 있습니다. 우리는 빈 라덴을 비롯한 수만 명의 테러리스트를 체포하였습니다.
(박수)
우리가 ISIL을 상대로 이끌고 있는 국제적인 연합은 그들의 지도자와 영토 절반을 빼앗는 데 성공했습니다. ISIL은 파괴될 것입니다. 미국을 위협하는 그 누구도 안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박수)
현역으로 복무하고 계신, 그리고 퇴역하신 여러분, 제가 여러분의 최고통수권자로 있었던 것은 제 생애의 영광이었습니다.
(박수)
우리 모두는 여러분에게 깊은 감사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박수)
그러나, 우리의 삶을 보호하는 것은, 비단 군대만의 과업이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두려움에 빠지면 좌절할 수 있습니다. 시민으로서 외부의 위협을 경계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가치가 약화되는 것으로부터도 경계심을 가져야 합니다.
(박수)
그래서 지난 8년 동안 저는 테러와의 전쟁을 더 확고한 법적 근거 위에 두기 위해 노력한 것입니다. 그래서 고문을 중단했으며, 관타나모를 닫기 위해 노력했고, 사생활과 시민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감시에 관한 법률을 개정했습니다.
(박수)
그래서 제가 우리와 마찬가지로 애국심을 가진 무슬림 미국인들을 차별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박수)
그래서 우리는 민주주의와 인권, 여성의 권리와 LGBT의 권리를 확대하기 위한 거대한, 세게적인 싸움을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박수)
우리의 노력이 설령 불완전하더라도, 이런 가치를 무시하는 것이 편해보일지라도, 그것이 미국을 지키는 한 부분입니다. 극단주의와 불관용, 종파주의와 배타주의에 대한 싸움은 곧 권위주의와 민족주의적 침략에 대한 싸움이기도 합니다. 자유와 법에 의한 지배에 대한 존중의 범위가 세계적으로 축소된다면, 국가간의 전쟁 가능성이 증가할 것이며, 우리의 자유는 극적으로 위협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경계하십시오. 두려워하는 대신 말입니다. ISIL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싸움에서 우리의 헌법과 우리의 가치를 배신하지 않는 한, 그들은 우리를 패배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러시아나 중국과 같은 경쟁자들은 우리와 같은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박수)
우리가 상징하는 가치들을 포기하지 않고, 작은 이웃 나라들에 총구를 돌리는 다른 큰 나라들처럼 우리 자신을 변모시키지 않는 이상 말입니다. 러시아나 중국과 같은 경쟁자들은 전세계에서 우리의 영향력에 맞설 수 없습니다. 마지막 포인트에 다다랐군요. 우리의 민주주의는 위협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를 당연시하고 있는 동안 말입니다.
(박수)
우리 모두는 정당과 관계없이, 민주주의 제도를 재건하는 일에 우리 자신을 바쳐야 합니다.
(박수)
미국의 투표율이 선진 민주국가 중 가장 낮은 수준이라면, 우리는 투표를 더 쉽게 만들어야 합니다. 더 어렵게 만드는 게 아니라요.
(박수)
우리 기관들의 신뢰도가 낮다면, 우리는 정치에서 돈의 부정한 영향력을 줄이고, 공공 서비스의 투명성과 윤리를 지켜나가야 합니다. 의회가 제대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정치인들이 극단주의자들이 아니라 상식에 따르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박수)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이 모든 일이 혼자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참여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권력의 추가 어느 방향으로 흔들리는지와 상관없이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 말입니다.
우리의 헌법은 기념비적이고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건 양피지 조각에 불과하지요. 그 자체로서는 아무 힘도 없습니다. 우리 국민들이 힘을 부여하는 겁니다. 참여, 우리가 만들어가는 선택, 우리가 조직하는 동맹을 통해서 말입니다.
자유의 편에 설 것인가. 법에 의한 지배를 존중할 것인가. 우리에게 달린 일입니다. 미국은 쉽게 깨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유를 향한 긴 여정으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을 것인지는 보장된 것이 아닙니다.
조지 워싱턴 대통령은 작별 연설에서 자치 정부가 우리의 안전, 번영, 자유의 토대라고 했지만, "진리에 대한 당신 마음 속의 확신을 약화시킴으로써, 다른 원인, 다른 측면들에서, 많은 고통을 야기할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실을 이 시기심 많은 불안과 함께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나라의 어떤 부분이든 타국에서 멀어지게 하고, 신성한 동맹을 약화시키는 모든 시도를 처음부터 거부해야 합니다.
(박수)
미국이여, 우리가 신랄한 정치적인 대화로 선한 사람들이 공적 서비스에 뛰어들지 못하게끔 만들 때, 이러한 연대는 약화됩니다. 우리가 동의하지 않는 미국인들을 단지 중심을 잃은 게 아니라 악의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거칠고 악의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중 일부를 다른 사람들보다 더 미국인답다고 정의할 때 이러한 연대는 약화됩니다.
(박수)
우리가 체제 전부를 필연적으로 부패한다고 인식할 때, 물러나 앉아서 우리가 뽑은 지도자들을 비난할 때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선출됐을 때 우리가 했던 역할들은 젖혀놓고 말입니다.
(박수)
이처럼 민주주의가 불안할 때 수호자가 되는 것은 우리 각자에게 달린 일입니다. 이 위대한 나라를 지속적으로 진보시키기 위해 주어진 즐거운 과업을 포용하십시오. 우리의 외견상의 차이에도, 사실 우리는 모두 같은 자랑스러운 부분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부분, 시민들이라는 것입니다.
(박수)
시민들. 여러분이 보셨다시피, 그게 바로 우리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당신을 요구합니다. 선거 때 뿐만이 아니라, 스스로의 좁은 이해관계가 성패의 갈림길에 있을 때 뿐만 아니라, 일생에 걸쳐 그렇습니다.
인터넷의 이방인과 논쟁하는 것에 지쳤다면, 실생활 속에서 누군가와 이야기해 보십시오.
무언가 고쳐야 할 게 있다면, 신발끈을 고쳐 묶고 무언가를 조직해 보십시오.
(박수)
선출직 공직자에게 실망했다면, 클립보드를 들고 서명운동을 하고, 그 공직자들에게 달려가세요.
(박수)
직접 나서서, 뛰어들어서, 거기 머무십시오. 때로는 이기겠지만, 때로는 질 수도 있습니다. 선의로 수위를 측량한다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이 당신을 실망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부가 되고 가까이에서 이를 직접 본다는 것은, 우리에겐 그 자체로 행운입니다. 영감을 주고, 활력을 줄 것입니다. 또한 그렇지 못한 경우보다 더 자주, 미국과 미국인들에 대한 믿음이 공고해질 것입니다. 제 경우엔 분명히 그랬습니다.
(박수)
8년 동안의 여정 동안, 저는 젊은 졸업생들과 신입 군 장병들의 희망찬 얼굴을 보아왔습니다. 찰스턴 교회(주: 대표적인 흑인 교회로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했다)의 슬픔에 잠긴 유가족들이 대답을 구하고 은혜를 찾는 것을 바라보며 애도하였습니다. 마비증에 걸린 사람이 촉감을 되찾을 수 있게 도움을 준 과학자들을 보았습니다. 희망 없는 부상을 입었던 상이용사들이 다시 걷는 것을 보았습니다.
의사들과 자원봉사자들이 지진 발생지를 재건하고 대유행을 막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가장 어린 아이들이 그들의 행동과 관대함을 통해 우리에게 난민을 보살피고 평화를 위해 일하며,무엇보다도 서로를 돌봐야 한다는 직무를 되새겨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수 년 전부터 제가 가져왔던 이와 같은 믿음은, 여기서 머지 않은 곳에서, 변화를 가져다주는 평범한 미국인들의 힘으로, 제가 상상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보상받았습니다.
여러분의 믿음도 그러하기를 바랍니다. 오늘밤 여기 계신 분들, 또는 집에서 보고 계신 분들 중 일부는, 2004년, 2008년, 2012년에 우리와 함께 했습니다. 이 모든 일을 함께 해냈다는 것을 여전히 믿지 못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박수)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사실, 당신만 그러신 것은 아니랍니다.
(웃음)
미셸.
사우스 사이드의 미셸 라본 로빈슨.
(박수)
지난 25년 동안, 당신은 내 아내이자 내 아이들의 어머니였을 뿐만 아니라, 내 최고의 친구였습니다.
(박수)
당신은 당신이 요구하지 않았던 역할을 맡았죠. 그리고 은혜와 투지, 당신만의 방식, 멋진 유머로 그 일을 해냈어요.
(박수)
당신은 백악관을 모두에게 속한 곳으로 만들었습니다.
(박수)
덕분에 새로운 세대는 당신을 역할 모델로 삼아 더 높은 시야를 갖게 되었어요.
(박수)
당신은 나를 자랑스럽게 만들어 주었어요. 이 나라를 자랑스럽게 만들어 주었어요.
(박수갈채)
(오바마의 딸) 말리아, 사샤.
이상한 상황 아래에서도 놀랍도록 멋진 여성이 되었구나.
(박수)
너희들은 영리하고도 아름답단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너희들이 친절하고 사려 깊으며 열정으로 가득하다는 것이지.
(박수)
너희는 몇 년 동안이나 스포트라이트에 둘러싸였지. 내 인생에서 내가 한 모든 일 중, 나는 너희들의 아버지로 있었던 것이 가장 자랑스럽단다.
(박수갈채)
조 바이든.
(박수)
이젠 델라웨어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 된 당신은 제가 대통령 후보가 된 후 가장 처음 했던 선택이었으며, 가장 최고의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박수갈채)
이것은 당신이 위대한 부통령이었기 때문일 뿐 아니라, 내가 덤으로 형제를 얻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당신과 질을 가족처럼 사랑합니다. 당신의 우정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큰 기쁨 중 하나였습니다.
(박수갈채)
훌륭한 직원 여러분, 8년 동안, 몇몇 분들은 더 오랜 기간 동안, 저는 여러분의 기운을 받았습니다. 매일 저는 여러분이 보여준 것을 되돌아보려 노력합니다. 마음과 성격 그리고 이상. 저는 여러분이 성장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여러분만의 놀랍고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힘겹고 좌절스러운 시기조차, 여러분은 워싱턴이 여러분을 지배하도록 놔두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냉소주의를 경계했습니다. 우리가 해낸 이 모든 훌륭한 일보다 절 자랑스럽게 하는 게 있다면, 여기서부터 당신이 성취해나갈 모든 놀라운 일에 대한 생각들이에요.
(박수)
그리고 여기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잘 모르는 마을에 찾아갔던 모든 선거 조직인들, 그들을 환영해준 친절한 가족들, 문을 두드렸던 모든 자원 봉사자들,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한 모든 젊은이들, 변화라는 힘든 과업에 함께 살고 호흡했던 모든 미국인들. 여러분은 누구나 희망하는 최고의 후원자였으며 조직자들이었습니다. 영원히 감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세상을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박수갈채)
여러분이 해냈습니다.
그것이 제가 오늘밤 우리가 처음 시작했을 때보다 이 나라에 대해 더 낙관적으로 생각하며 무대를 떠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작업이 많은 미국인들을 도왔을 뿐 아니라, 많은 미국인들에게, 특히 저기 많은 젊은이들에게 영감을 주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당신의 마차를 더 큰 뭔가에 연결할 수 있다는 영감 말입니다.
이기적이지 않은, 이타적인, 창조적이고 애국적인 세대가 다가오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을 이 나라의 모든 곳에서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공정하고, 정당하며, 관용적인 미국을 믿습니다. 끊임없는 변화가 미국의 특징이었으며, 두려워해야 할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야 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진보시키기 위한 힘든 과업을 기꺼이 수행할 것입니다. 곧 우리 중 누구보다 많아질 것이며, 그 덕에 미래 또한 우리의 수중에 있음을 믿습니다.
(박수갈채)
저와 함께 하는 미국인 여러분, 여러분을 위해 봉사할 수 있었던 건 제 영광이었습니다. 저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시민으로서, 남은 평생동안 늘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당신이 실제로 젊든, 마음이 젊든간에, 저는 대통령으로서 여러분께 마지막 요청을 하나 던지고자 합니다. 8년 전 제가 대통령직에 출마했을 때와 똑같은 요청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믿음을 갖기를 바랍니다.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제 능력이 아니라, 여러분의 능력임을 말입니다.
저는 우리의 건국 헌법에 쓰여진 믿음을 지켜나갈 것을 요청드립니다. 노예들과 노예제 폐지론자들이 속삭였던 생각, 이민자들과 정착민들, 정의를 위해 행진했던 사람들이 노래했던 정신, 해외의 전장부터 달의 표면에 이르기까지 깃발을 세웠던 이들에 의해 다시 확인되었던 신념을요. 아직 쓰여지지 않은 모든 미국인들의 가슴에 새겨진 신조를요.
(박수)
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박수갈채)
네, 우리가 해냈습니다.
(박수갈채)
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박수갈채)
고맙습니다. 여러분에게 신의 축복이 있길. 미국에 신의 축복이 계속되길 바랍니다.
(박수갈채)
첫댓글 긴 글 차분히 끝까지 읽었습니다. 참으로 존경스런 분이고 부러운 미국의 대통령이십니다. 우리도 저런 훌륭한 분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게 되는 날이 오겠지요. 균형잡힌 인물이라는 생각이 끝까지 변하지 않았습니다.
좋은 글 읽을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아~ 이 긴글을 읽어주셨다니 대단한 인내심입니다.
사실 이글을 쓰는데 보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ㅎㅎ
제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인간 오바마의 정치적인 고향 시카고를 여행하며 많은 생각을 하게한 오바마는
우리나라 지도자들이 본 받아야할 위대한 대통령 입니다. 8년 재임 기간 동안 단 한 건의 스캔들이나 잡음 없이, 지지율 55%(트럼프 37%)란 국민들의 갈채 속에 웃으며, 레임덕 없이 백악관을 떠나는 오바마는 참으로 존경 받을 대통령입니다. 우리나라도 오바마 같은 위대한 대통령이 탄생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면서...
세상에나 이렇게 알찬 여행기를~버락 오바마도 훌륭하고 미셸 오바마도 함께 훌륭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국의 첫 여자대통령 감이라는 생각이 자꾸 ...
당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