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자전적 삶(3)-이라크에서-2 / 박진영 옮김
침구, 매트리스, 베개, 담요, 작업복, 안전모(헬멧) 등을 지급 받아 배치된 숙소에서 짐을 풀었다. 10인용 숙소에 중간 통로를 두고 양쪽에 침상으로 5명씩이었다. 2개의 에어컨은 낮이라서 쿨링이었고 야간 12시경부터는 기온의 급강하로 히타로 돌려야 했다. 이렇게 하여 이라크 1번 고속도로 공사 요시(YOSI:요르단 암만과 시리아 다마스쿠스로 잇는 지점)현장에서의 일상이 시작되었다.
아침 4시면 벌써 훤하다. 한국 시각으로는 시차가 6시간 차이 나므로 현재 밤 10시 정도로 한 밤 중인 것이다. 지평선에서는 해가 올라 건너 지평선으로 지니 얼마나 긴 시간인가. 조식은 까칠까칠한 입맛에 분유를 타서 국 대용으로 나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근무지는 본부에서 30여km 떨어진 AP(아스팔트 플랜트 및 포장 공구), 직책은 노무/총무직, 공사는 사막에 3m여 높이로 기초공사를 하고 다리, 동물 통로 등 토목 공사, 그 다음 포장 공사를 하는 것이다. 석산(돌 깨는 곳)과 아스콘 공장 그리고 각종 중장비와 덤프 트럭이 무려 500여 대를 보유하고 운용하며, 저녁이면은 장관이다. 차들을 사열하듯 모두 덤핑을 하여 주차시켜 놓으면 꼭 미사일 발사대 같다.
요시현장의 인원은 무려 5,000명이나 되었다. 한국인, 방글라데시인(오피스 보이, 측량보조, 식당 취사), 필리핀인(목수 또는 기술 보조직), 인도인 및 태국인(덤프 트럭 운전수)들이 있고 감독인들은 모두 독일 사람들이 하며 특히 아스콘이 포설 전 덤프 트럭 상에서 섭씨 온도로 180도 이상이 되어야 하고 그 이하면 즉시 폐기 처분이 된다.
다행히도 이 곳 요시의 물은 한국 내의 물맛과 같았다. 사람은 환경 변화에 무척 민감한 것이다. 며칠 지나지 않은 새벽에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 숙소 밖을 나가보니 왠지 기분도 좋고 안개가 자욱하여 한껏 들이 마셨다. 시간이 지나자 웬걸 뿌연 것이 안개가 아니고 먼지로서 바람도 한 점 없이 조용하니 적당한 기온으로 지상에 그대로 정체된 상태였던 것이다. 갑자기 목이 컬컬해 오는 것 같았다. 할라스 바람(황사, 적사, 흑사, 백사) -끝장이라는 뜻으로 - 가끔 바람이 몰아칠 때면 4~5m 앞이 안보일 정도로 모래 바람이 앞을 가려 차를 운행할 수 없을 정도이고 기온은 후덥지건 하여 짜증스럽기만 하다.
더군다나 적사일 경우는 온통 붉은 천지 속에 있는 듯 굉장히 기분 나쁠 정도의 환경이다. 소용돌이 반경 밖의 멀리서 보는 할라스 바람은 장관이다. 꼭 기차가 지나가는 듯 모래 바람을 일으키고 광야의 사막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다. 또한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지나가면 마당 설거지를 하는 것 같이 깨끗하다. 밥 먹을 때가 제일 고역이다. 아예 물에 말아서 밥을 살살 건져먹고 나면 그릇의 바닥에는 모래만 남는다. 전자 복사기 같은 장비는 아예 진공 청소를 해야 하고 건축물은 모두 지붕 위에 모래주머니로 눌러 놓았고, 벽면 블록은 8인치 짜리로 지어져 있다. 그리고 덧문이 하나씩 더 있고 실리콘 처리로 빈틈없이 먼지가 못 들어 오겠끔 되어있다.
담석증이 생기지 않게 하는 데는 맥주가 최고이다. 병 맥주는 요시에서 백여 km 떨어진 루트바에서 구할 수가 있는데 매주 수요일 쯤 일찍 가서 기다려야 하고 항상 품귀 현상이다. 중동 지역에서 유일하게 알코올이 든 술을 먹을 수가 있는 곳이다. 현장에서는 술을 못 먹게 해 놓았지만 바스라 등지의 장거리 벌크 트럭 운전수들이 왕래하면서 몰래 반입을 하여 장사를 한다. 보통 조니워카 블랙이 7달러(당시 6,000원 정도)에 사서 13달러에 넘긴다. 회식을 할 땐 으레히 공식적으로 양 한 마리에 양주와 주스로 칵테일해서 즐긴다. 회식 비용은 매일 당직이 정해져 있고 1일에 10디나르(당시 US$10=한국 돈으로 8,500원)로 책정되어 있어 300디나르 같으면 충분하다. 국내에서 누가 사망 소식이 들리면 빈소도 차려주고 공식적인 술좌석이 마련되기도 한다.
우리는 식당을 운영하는 관계로 거의 매일 술 파티가 벌어진다. 안주로 우족, 닭튀김, 특히 닭 날개 튀김은 일품이다. 때론, 술이 없을 때는 밀주<싸디끼>를 만들기도 한다. 만드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캔 과실 음료와 밥으로 발효를 시켜 만드는 것이다. 빵 만들 때 쓰는 이스트 몇 알을 넣고 2~3일 지나면 아주 독주가 만들어진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면 매일 샤워를 해야만 한다. 땀도 많이 나지만 물론 차로 사막을 달리다 보면 흙먼지로 범벅이 된다. 그래야 만이 저녁에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있다. 낮에는 기온이 최고 섭씨43~45도 실제 체감온도는 그렇게 높지 않고 30~35도 정도, 일단 그늘에 들면 시원함을 느낀다. 땀은 손을 움켜쥘 때 생긴다.
한더위의 날씨엔 가끔 간식으로 과일을 제공하기도 한다. 토마토, 오렌지, 수박 등이고 수박은 호박 같은 모양으로 길다랗고 꼭 설탕을 가미 한 듯 매우 달다. 얼음에 긁어 넣어 시원하게 한 그릇씩 배급하면 모두들 즐겨 먹는다. 500여대의 덤프 트럭의 필수품은 3L들이 보온 물통과 에어컨 시트로 개인 별로 지급되어진다.
운동은 가끔 테니스를 하게 되는데 그 곳의 라켓이 옛날 것이어서 후레임 사이즈가 꼭 배드민턴 라켓보다 조금 더 큰 듯 하였으나 감지덕지였다. 현장 소장인 김용재 전무(정주영 회장의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책에서 사우디 아라비아 주베일 공사 현장 소장)로부터 한동안 파트너로 트레이닝을 매일 했었다. 중식 후 무전으로 call이다. 한 시간 정도 스트로크를 하고선 시원한 맥주 1캔을 마시고 샤워를 하고 오침을 1시간 정도 즐긴다. 야간에도 조명이 있어 토요일, 일요일 저녁에는 응당 테니스로 즐긴다. 테니스 코트 바닥은 크레이가 아닌 시멘트에 에폭시 페인트로 도장된 것이다.
당시 운전 면허증도 없이 중학교 때부터 삼촌 댁 차를 타고 다니며 일도 했으므로 운전방식은 익히 알고는 있었고 고 3때 추석 전 사과 운송을 한창 할 때 3륜 차를 몰고 경주 역 앞에서 동천동에 있는 사과밭까지 왕복을 한 경험은 있었다. 사막인지라 처음 포니 픽업으로 달려보니 금방 익숙해졌고 랜드크루샤, GM서버밴, 포터, 타이탄, 복사, 심지어 버스까지도 운전을 했다. 때론 출근길 버스에 현장 근로자들을 가득 싣고 같이 출근하기도 하였다. 걷는다는 것은 별로 없다. 사무실에서 50여m 떨어진 화장실을 갈 때도 차로 가서 에어컨을 켠 상태로 주차시키곤 볼일을 보고 다시 차로 돌아오곤 하는 실정이었으니깐 말이다. 200여km씩 떨어진 wadi 석산이나 1공구, 2공구 사이트로 가자면 국도 아스팔트를 타므로 신난다. 시속 160km~180km로 주행해도 도로 변에 물체가 없으므로 달리는 것 같지가 않다. 지평선 멀리 조그마한 고정 물체를 보고 달려가면 45여km가 소요된다. 버스로 길 없는 사막을 달릴 땐 하얀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는 기분은 그야말로 최고이고 차체 스프링의 힘으로 배를 타는 듯 출렁거림에 오전 10시쯤이면 배가 고파온다. 당시 컵 라면이 개발되어 으레 1컵씩 먹곤 했고 아예 아침 식사는 걸러 버렸다. 오후에는 때론 삼는 라면은 냉면 그릇을 전기 골로 위에 올리고 분유를 넣고 바글바글 끓여 먹는 라면도 일품이었다. 커피도 냉장고의 얼음을 냉면 그릇에 얼려서 칼로 깨고 커피 넣고 설탕 조금 넣고 뜨거운 물 조금 부어서 젓가락으로 휘휘 저어 마시곤 했다. - 지금은 전혀 커피를 먹지 않고 있고 아침식사도 귀국 후 3년 여 동안은 먹지 않았었다. 숙소에서의 라면 조리는 두 개의 숟가락에 전기선을 각각 연결하여 물 속에서 마주치는 스파크 열에 금방 뜨거운 열이 된다.
먹는 얘기 나온 김에 노무 자재 총무 식당관리를 겸하고 있으니 최고이다. 주방장(한식, 양식)도 내 소속이니 먹는 것 걱정 없고 안주는 말 한마디로 오늘 저녁 "쥐약 있다"하면 된다. 한번은 식당 메뉴가 좋지 않다고 근로자들이 불평을 한다고 해서, 그럼 좋다 한 주간을 아예 김치(냉동 페일)를 빼고 고기(닭, 돼지, 소)만 계속 요리해 주기로 하였다. 그랬더니 4일째 되는 날 식단표에 불평하지 않을 테니 김치와 야채도 달라는 것이다.
그 해 10월쯤에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어 갈 즈음 외부로의 여행 기회가 찾아왔다. 국내에서 냉동김치가 제때에 공급되지 않아 양배추로 겉절이 하듯 대용하다가 안 되겠다 싶어 사마라의 북부 철도 부설공사 현장에 지원 요청하러 가게 되었다. 서버-밴 차량에 운전 기사와 직원 2명과 깨소금과 버물린 주먹밥을 준비해서 출발했다.
요시에 오고선 처음이었다. 온지 3일만에 한국으로 돌아갈려는 생각도 있었지만 기왕 고생하려고 나온 것, 3주만 참아 보자가 3개월이 되었고 안정을 찾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3진법이다. 바그다드를 거쳐서 다시 북쪽으로 가다보니 티그리스강을 건너고 유프라티스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유명한 메스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 사마라의 옛 도시 유적지를 지나게 된다. 반듯반듯하게 도시 계획된 벽체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고 폭, 100여m의 길이가 엄청난 인공 운하가 길게 만들어져 있었다. 일명 신에게 도전한 탑인 바벨탑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꼭대기까지 올랐다. 사마라 시내 전체가 한 눈에 보였다. 이라크 북부 지역이라 쿠르드족의 왕래가 많으며 우리 나라의 여성들에 한창 유행되었던 풍덩한 몸빼가 그들의 남자들 전통 의상이었다. 볼일을 보고 바그다드의 사업 본부에 들렀다가 그 곳의 숙소에서 1박하기로 되어있어 시내를 구경할 수 있었다. 확 뚫린 10차선 도로에 육교마다 에스칼레이트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전자 장비가 이 곳의 토질은 염분기가 많으므로 부식하여 운영이 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시장에는 남자들만이 가게를 운영하는 것이 보편적이고, 뒷 골목에는 어지러히 지저분하니 그대로였다. 사회 보장은 사회주의 국가로서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의 미망인들의 아파트를 별도로 지어 공급해주는 것이다. 한 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바그다드 시내의 야경을 구경하면서 캔 맥주를 마실 기회도 주어졌다.
기초 공사가 거의 완료되면서 포장 공구(AP)의 일이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다. 식구도 많이 늘고 본부사이트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것 보다 불편함을 덜기 위해 자체에서 사무실 증축, 숙소(내국인/외국인), 샤워장, 식당, 물 저수조 등을 직접 짓기로 하고 설계 및 총 공사 감독을 하게 되어 진행했었다. 설계는 기존 본부사이트의 건축모양을 그대로 옮겨 자재 소요량을 청구하고 필요한 양을 운반하여 공급하고 일정 내로 마치기로 했다. 야리끼리(돈내기/도급)는 한국사람의 습성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8인치 블록 쌓기를 1일 320장/1인 기준으로 작업량을 주니 오전에 후딱 해버리는 것이었다. 시공은 간단하다. 바닥에 콘크리트 타설-블록 쌓기-목재 트러스 짜서 설치-슬레이트 올리기-내부공사(천장, 식탁, 침상, 사물함), 샤워장에는 전기 온수 공급 장치를 탱크 제작과 전기 공급 장치(히타 설치) 및 물탱크 설치와 배관 공사가 진행되었고 식당에는 중요한 부식 창고 설치였다. 벽면에 스치로폼과 동파이프를 설치하고 아연도 강판 대기와 3개의 에어콘에서 떼어 낸 냉동기를 설치하므로서 멋진 냉동고 및 냉장실이 완료되어 가동하기 시작 하니 무엇 보다 푸짐한 느낌의 포만감을 가질 수가 있었고, 매사 의욕이 솟구쳤다.
(계속 - 공사중)
첫댓글 2공구에서 근무를 했습니다 83년에가서 86년에 왔으니 함께 근무했을 것입니다 토목측량사였으며...새마을위원장도했습니다 원래 측량기사였으니 2공구에 총무가 없어서 총무일을 1년이상 보았으며 새마을 위원이라는 직함으로 일을 하다보니 기존에 총무직으로 들어왔던 사람은 본사의 과장앞에서 거의 비맞은 생쥐였지만 저는 새마을 위원장이라는 선거로 뽑힌 사람이다보니 언제든지총무과장도 제 앞에서는 눈치를 보게 됬지요...총 3년근무중에서 1년을 총무하고 2년간 새마을위원장하고 나머지 1년은 폴란드에서온 감독(노마노프스키)과함께 통역겸 인스펙션을 받고 생활햇습니다 1986년 6월에 귀국햇습니다 언제 경주를 가면 인사드리지요
"나의 자전적 삶 (Ⅱ)-이라크에서-2"
https://cafe.daum.net/kjsojin/Wrpq/8?svc=cafeap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