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성여고 학생
창성동 골목, 전 국민대학 건물이 새로 들어서기 전 그 골목은 비스듬하게 굽어져 큰길과 잇닿아 있었지. 골목을 따라 올라가면 한식과 일식집 건물들이 무질서하게 교차되면서 죽 들어선 길, 그 길로 등교를 하지 않아 잘 몰랐던 길이 어느 날부터 눈길이 가는 길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등교는 을지로 입구를 떠나 시청 앞 광화문 그리고 경복궁 앞부터는 지금의 높은 담이 아니라 큰 기둥 사이에 작은 사각 돌기둥이 5개씩인가 있는 길이었지. 전면을 지나면 다시 지금의 높은 담이 있었다. 하여간 중앙청 담을 따라서 걸으면 거의 만나는 덕성여고 학생, 나도 키가 작았지만 거의 내 키만 한 여학생, 뛰어난 미녀는 결코 아니었지만 순수해 보이고 차분한 성격일 것만 같아 눈을 크게 뜨고 열심히 걸어올라 갔지. 내가 등교할 때 그 담을 지나는 시간이 10분이라면 마주 보면서 걸으니 5분이 늦으면 못 볼 것 같았지만 그래도 자주 만났었다. 그때는 손목시계도 없던 시절이고 교제도 금지하던 시대이니 언감생심 말을 걸기도 엄청 용기를 내지 않으면 못 붙여볼 때였지. 하여간 등굣길엔 더 어려울 것 같아 은근히 만나기를 바라며 혼자 하굣길로 골목을 자주 내려오곤 했었단다.
덕성여고하면 그 당시에는 그렇게 평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가 마주치는 그녀는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밝고 명랑한 편은 아닐 지라도 깊고 그윽한 멋이 있을 것만 같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를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하지만 생각만큼 자주 만나지지는 않았다. 어느 날 드디어 기회가 왔지, 골목으로 내려오는데 그녀가 올라오지 않는가. 그래서 가는 앞길을 막고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한 번 만나자고 하였던 것이다. 돌아온 대답은 공자님 말씀처럼 ‘공부나 하라’는 말에 제대로 대답도 못하고 길을 내어주고는 돌아서고 말았지.
하지만 한 번의 실패를 거울삼아 요번에는 연애편지를 써서 쉽게 꺼낼 수 있도록 앞가슴 주머니에 넣고 다녔지. 몇날 며칠을 기다리며 지내던 중 어느 친구가 그 편지를 번개같이 꺼내서 도망가기에 얼마나 쫓아가 결국 뺏기는 했지만 못 뺏으면 심히 자존심을 다칠 것 같았다. 다시 곱게 써서 속주머니에 넣고 다녀도 다시는 만나서 편지를 전해줄 수가 없었다. 드디어 2월 덕성여고 졸업식이 있던 날 혹시나 나보다 학년이 높아서 나를 퇴짜 놓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 추운 겨울날 경복궁 앞에서 졸업식장으로 갈 그녀를 한 시간 가량 기다리며 지나가기를 기다렸지만 그녀는 학교를 가지 않았다.
다시 3월이 되어 학교를 가는데 다시 만났다. 그래서 그녀도 나와 같은 학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는 더 이상 미련을 버리고 말았다. 지금도 아쉬운 것은 어떻게 이름이라도 알아냈어야 하는 것인데 알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었다. 지금도 창성동 골목만 생각하면 그녀의 얼굴만 희미하게 생각날 뿐이다. 마주칠 때마다 언제나 혼자서 등교하고 하교하였는데 인연의 끈은 결코 왜 나에게는 오지 않았을까? 만약 왔다면 ---.
몸매가 잘 드러나는 덕성여고 교복, 흰 칼라가 언제나 깨끗했던 그 단정함, 고전적인 풍모의 얼굴, 공자님 말씀을 하시던 그녀를 이제는 만나도 몰라볼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왜 나는 아직도 하고 있는 것일까?
첫댓글 어린 시절 멋있는 스토리.....
그런 기역을 아직도 같고 있는 정민이 ........
멋있다
진형, 오랜만이야. 누구나 다 한두 번씩은 점찍어둔 사람이 있었지만 실행을 다들 못하고 말았겠지. 이성교제 금지도 있었지만 데이트 비용도 없었을테니까. 그런 저런 이유로 어린 불타는 가슴에 추억만 쌓여갔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사춘기 소년의 사랑이 못내 이뤄지지 못해 이 나이까지도 아쉬운 모양이구나. "공부나 하라"는 한번 튕겨보는 말에 용기를 잃은 순진한 소년이여!
그래 맞아, 나는 아직도 꿈 같은 요지경 속에 사는가보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