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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부 인지혁명
2 지식의 나무(1)
앞 장에서 보았듯이 사피엔스는 15만 년 전부터 동아프리카에 살았지만 이들이 지구의 다른 지역으로 급속히 퍼지면서 다른 인간종들을 멸종시키기 시작한 것은 불과 7만 년 전의 일이었다. 그 사이의 기간 동안 원시 사피엔스의 모습은 우리와 거의 같았고 뇌의 크기도 거의 같았지만, 다른 인간 종들보다 딱히 더 나은 점은 없었고 특별히 복잡한 도구을 만든다거나 다른 특별한 업적을 달성하지도 못했다.
남아 있는 기록을 보면,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이 최초로 마주쳤을 때 승리한 것은 네안데르탈인 쪽이었다. 약 10만 년 전 일부 사피엔스 집단은 네안데르탈인의 영토인 북부의 레반트(지중해 동해안) 지방으로 이주했지만, 그곳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는 데는 실패했다. 이유는 적대적인 원주민 탓일 수도 있고 혹독한 기후 탓일 수도 있다. 어쩌면 낯선 토착 기생충 탓일 수도 있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사피엔스는 결국 후퇴했고, 네안데르탈인은 지중해의 주인으로 남았다.
이렇듯 과거 사피엔스의 성과가 신통찮았던 것을 근거로 일부 학자들은 그들 사피엔스의 뇌 구조가 우리와 달랐던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하게 되었다. 외모는 우리와 비슷했지만 학습,기억, 의사소통을 하는 인지능력은 훨씬 뒤떨어진 게 아니었을까, 한 것이다. 그런 원시 사피엔스에게 영어를 가르친다거나 기독교 교리가 진리임을 설파한다거나 진화이론을 이해하게 만드는 것은 아마도 지극히 가망 없는 시도였을 것이다. 거꾸로 우리도 그의 언어나 사고방식을 배우는데 아주 애를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약 7만 년 전, 호모사피엔스는 매우 특별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무리를 지어 두 번째로 아프리카를 벗어난 것이다. 이번에 이들은 네안데르탈인을 비롯한 인간 종들을 중동에서만이 아니라 지구 전체에서 몰아냈다. 그리고 놀랍도록 짧은 시간 만에 유럽과 동아시아에 이르렀다. 약 45,000년 전 이들은 어떻게 해서인지는 몰라도 대양을 건너 그때까지 인간의 발길이 닿은 적 없는 호주에 상륙했다.
그들은 약 7만 년 전부터 3만 년 전까지 배,기름 등잔, 활과 화살, 바늘(따뜻한 옷을 짓는 데 필수도구)을 발명했다. 예술품이나 장신구라고 분명하게 이름 붙일 만한 최초의 물건들도 이 시기를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45쪽의 '사자-남자'를 보라) 종교와 상업, 사회의 계층화가 일어났다는 최초의 명백한 증거 역시 이 시기의 것이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이런 전례 없는 업적이 사피엔스의 인지능력에 혁명이 일어난 결과라고 믿는다. 네안데르탈인을 멸종시키고 호주에 정착하며 슈타델의 사자인간을 조각한 사람들은 우리 못지 않은 지능과 창의력, 감수성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슈타델 동굴의 예술가를 만난다면, 우리는 그들의 언어를,그들은 우리의 언어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부터 양자역학의 역설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고, 그들도 자신이 세계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우리에게 가르쳐줄 수 있을 것이다.
인지혁명이란 약 7만 년 전부터 3만 년 전 사이에 출현한 새로운 사고방식과 의사소총 방식을 말한다. 무엇이 이것을 촉발했을까? 우리는 잘 모른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믿는 이론은 우연히 일어난 유전자 돌연변이가 사피엔스의 뇌의 내부 배선을 바꿨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전에 없던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으며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언어를 사용해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지식의 나무(창세기에 금단의 열매 즉 선악과가 열리는 에덴동산의 나무- 옮긴이) 돌연변이'라고 부를 수 있다. 왜 하필 그 돌연변이가 네안데르탈인이 아니라 사피엔스의 DNA에 등장했을까? 우리가 아는 한 그것은 순수한 우연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지식의 나무 돌연변이를 일으킨 원인보다는 그 결과를 이해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새로운 사피엔스의 언어에 어떤 특별한 점이 있었기에 사피엔스는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을까.*
* 여기서 말하는 사피엔스의 언어란 우리 종의 기본적 언어 능력을 말하는 것이지 특정한 방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게속 마찬가지다. 영어,힌디어,중국어는 모두 사피엔스 언어가 변형된 것이다. 심지어 인지혁명이 일어나는 시기에도 개별 사피엔스 집단은 각기 다른 방언을 사용한 것이 명백해 보인다.
*독일 슈타델 동굴에서 나온 32,000년 전의 상아 공예품. 사자 -남자(혹은 사자-여자) 몸통은 인간,머리는 사자 모양이다. 종교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이 작품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최초의 예술품이다. 인간이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할 능력을 갖추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것은 최초의 언어는 아니었다. 모든 동물은 언어를 구사한다. 벌이나 개미 같은 곤충도 복잡한 의사소통을 하는 능력을 갖추어 먹을 것이 있는 위치를 서로에게 알려준다. 그것은 목소리를 이용한 최초의 언어도 아니었다. 유인원과 원숭이의 모든 종을 비롯한 수많은 영장류는 목소리를 사용하는 언어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녹색원숭이는 여러 종류의 울음소리로 의사소통을 한다. 동물학자들은 그 중 한 울음소리의 뜻이 "조심해! 독수리야!"라는 것을 밝혀냈다. 조금 다른 경고 소리는 "조심해! 사자야!"라는 뜻이었다. 과학자들이 원숭이들에게 처음의 소리를 녹음해 들려주었더니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공포에 질려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두 번째 소리를 들려주었더니 다들 급히 나무 위로 피신했다.
사피엔스는 녹색원숭이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서로 구별되는 소리를 낼수 있지만, 그 점에서는 고래와 코끼리도 우리 못지않은 능력을 지니고 있다. 앵무새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하는 모든 말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벨소리, 문이 쾅 닫히는 소리, 사이렌 울리는 소리도 흉내 낼 수 있다. 아인슈타인이 앵무새보다 나은 점이 있더라도 그것은 목소리와는 관련이 없다. 그렇다면 대체 우리의 언어는 무엇이 특별할까?
가장 보편적인 대답은 우리의 언어가 놀라울 정도로 유연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제한된 개수의 소리와 기호를 연결해 각기 다른 의미를 지닌 무한한 개수의 문장을 만들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 주위 세계에 대한 막대한 양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저장하며 소통할 수 있다. 녹색원숭이도 동료들에게 "조심해! 사자야!"라고 외칠 수 있지만, 현대 여성은 친구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오늘 아침 강이 굽어지는 곳 부근에서 한 무리의 들소를 쫓는 사자 한 마리를 보았어." 이어서 그녀는 정확한 위치와 그곳까지 가는 여러 길들까지 묘사할 수 있다. 이 정보를 두고 그녀의 무리는 강에 접근해서 사자를 쫓아버리고 들소를 사냥할 것인지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할 수도 있다.
두 번째 이론 또한 우리의 언어가 진화한 것은 세상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수단으로서였다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전달할 가장 중요한 정보가 사자나 들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것이다. 인간의 언어가 진화한 것은 소문을 이야기하고 수다를 떨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호모 사피엔스는 무엇보다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적 협력은 우리의 생존과 번식에 핵심적 역할을 한다. 개별 남성이나 여성이 사자와 들소의 위치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보다는 우리 내의 누가 누구를 미워하는지, 누가 누구와 잠자리를 같이하는지, 누가 정직하고 누가 속이는지를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40~50명 정도의 사람들 사이에서 수시로 변해가는 관계를 저장하고 추적하는 데 필요한 정보의 양은 어마어마하다(50명으로 구성된 무리에는 1,225개의 일대일 관계가 있으며 이보다 복잡한 사회적 조합이 무수히 많이 존재한다). 모든 유인원은 이런 사회적 정보에 예리한 관심을 나타내지만, 이들에게는 호율적으로 소문을 공유할 수단이 부족하다. 네안데르탈인과 원시 호모 사피엔스 역시 소문을 공유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뒷담화는 악의적인 능력이지만, 많은 숫자가 모여 협동을 하려면 사실상 반드시 필요하다. 현대 사피엔스가 약 7만 년 전 획득한 능력은 이들로 하여금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수다를 떨 수 있게 해주었다. 누가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에 대한 믿을 만한 정보가 있으면 작은 무리는 더 큰 무리로 확대될 수 있다. 이는 사피엔스가 더욱 긴밀하고 복잡한 협력 관계를 발달시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뒷담화이론은 농담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 결과가 무수히 많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의사소통의 대다수가 남 얘기다. 이메일이든 전화든 신문 칼럼이든 마찬가지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우리의 언어가 바로 이런 목적으로 진화한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역사학 교수들이 함께 점심을 먹을 때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에 대해 대화할 것 같은가? 핵물리학자들이 휴식시간에 쿼크에 대한 과학적 대화를 나눌 것 같은가? 물론 그럴 때도 있겠지만, 대개는 자기 남편이 바람피우는 것을 적발한 교수, 학과장과 학장 사이의 불화, 동료 중 하나가 연구기금으로 렉서스 자동차를 샀다는 루머 등을 소재로 한 뒷담화를 떠든다. 소문은 주로 나쁜 행동에 초점을 맞춘다. 언론인은 원래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이었고, 언론인들은 누가 사기꾼이고 누가 무임승차자인지를 사회에 알려서 사회를 이들로부터 보호한다.
아마도 뒷담화이론과 '강변에 사자가 있다' 이론은 둘 다 유효할것이다. 하지만 우리 언어의 진정한 특이성은 사람이나 사자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능력에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아는 한, 직접 보거나 만지거나 냄새 맡지 못한 것에 대해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존재는 사피엔스뿐이다.
전설, 신화,신, 종교는 인지혁명과 함께 처음 등장했다. 이전의 많은 동물과 인간 종이 "조심해! 사자야!" 라고 말할 수 있었다면, 인지혁명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사자는 우리 종족의 수호령이다."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사피엔스가 사용하는 언어의 가장 독특한 측면이다.
오직 호모 사피엔스만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고, 아침을 먹기도 전에 불가능한 일을 여섯 가지나 믿어버릴 수 있다는 데는 누구나 쉽게 동의할 것이다. 원숭이를 설득하여 지금 우리에게 바나나 한 개를 준다면 죽은 뒤 원숭이 천국에서 무한히 많은 바나나를 갖게 될 거라고 믿게끔 만드는 일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게 왜 중요한가? 허구는 위험한 오해를 부르거나 주의를 흩뜨릴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 요정이나 유니콘을 찾아 숲 속으로 들어간 사람은 버섯이나 사슴을 찾으러 들어간 사람보다 생존 가능성이 낮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존재하지도 않는 수호정령에게 몇 시간씩 기도를 한다면 시간을 낭비하는 것 아닐까? 그럴 시간에 먹을 것을 찾아다니거나 싸우거나 간통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허구 덕분에 우리는 단순한 상상을 넘어서 집단적으로 상살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성경의 창세기, 호주 원주민의 드림타임(시공간을 초월해 과거, 현재,미래가 하나로 존재하는 장소 - 옮긴이) 신화,현대 국가의 민족주의 신화와 같은 공통의 신화들을 짜낼 수 있다. 그런 신화들 덕분에 사피엔스는 많은 숫자가 모여 유연하게 협력하는 유례없는 능력을 가질 수 있었다.
개미나 벌도 많은 숫자가 모여 함께 일하는 능력이 있지만, 이들의 일하는 방식은 경직되어 있으며 그것도 가까운 친척들하고만 함께한다. 늑대와 침팬지의 협력은 개미보다는 훨씬 더 유연하지만, 협동 상대는 친밀하게 지내는 소수의 개체들뿐이다. 사피엔스는 수없이 많은 이방인들과 매우 유연하게 협력할 수 있다. 개미는 우리가 남긴 것이나 먹고 침팬지는 동물원이나 실험실에 갇혀 있는 데 비해 사피엔스가 세상을 지배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첫댓글 유연하게 협력할 수 있는 점. . .
언어의 창조적 힘, 의사소통을 통한 정보 전달,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 집단적 상상력, 폭넓고 유연한 사회적 협력, ... 사피엔스가 세상을 지배할 수 있게 된 힘이 될 만하네요. 역시 대단한 종이에요 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