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징(安徵)
2派13世안원군파
의병장 증 호조참의(戶曹參義)
미상∼미상.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중훈(仲勳), 호는 반매당(伴梅堂).
1592년 임진왜란 때 백의로 의병을 일으켜서 군수 정담(鄭湛)과 웅치(熊峙) 전투에서 달아는 적병을 막아 물리쳤다.
이미 적병이 저물녘에 기습하여 전력을 다해 싸우다 정담과 함께 전사하였다.
아들 안충용(安忠勇)이 시신을 수습해 돌아가 장사를 지냈다.
선조 조에 호조참의(戶曹參議)로 증직되었고
김제(金堤) 학당사(學堂司)에 제향(祭享)되었다.
김제군 (애국지사)
안징(安徵) 순흥인
안징의 자는 중훈(仲勳)이며 호는 반매당(伴梅堂)이다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순흥부원군(順興府院君) 문의공(文懿公) 안문개(安文凱)의 후손이요 안원군(安原君) 안처(安處)의 5세손이며
1558년(명종 13)에 김제군 백산명 생건리(현 하정리)에서 참봉(參奉) 안경례(安敬禮)의 아들로 태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백의창의(白衣倡義)로 의병을 모집하여 김제군수 정담과 더불어 웅치(熊峙) 싸움에 참가하여 적병을 물리쳤으나
적병이 우리 측에 화살이 다한 것을 알아 차리고 야음(夜陰)을 타서 습격해 오므로 역전하였으나 화살이 다하고 힘이 다하여
정담과 함께 적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하였다.
그는 처음 출전하려 할 때에 배에 성명을 적어 허리 띠 속에 넣으므로써 필사의 각오를 하였던 것이다.
아들 충남이 이로서 중험삼아 시신을 거두어 돌아와 장사지냈다.
선조(宣朝)조 때에 호조참의(戶曹參義)의 중직이 내렸으며
김제 학당사(學堂司)에 향사(享社)되었다.
안징(安徵) 13세
공(公)의 휘는 징(徵)이요 자는 중훈(仲勳)이시다. 그 전조(前祖)는 고려(高麗)의 광정대부(匡靖大夫)로 첨의참리(僉議參理)와 예문관(藝文館)의 대제학(大提學)과 춘추관(春秋館)의 영사(領事)와 순흥부원군(順興府院君)이셨으며 시호가 문의공(文懿公)이신 휘 문개(文凱)는 즉 공(公)의 8대조이시다.
5대조의 휘는 처(處)니 우리의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서 벼슬은 한성윤(漢城尹)이셨고, 증조(曾祖)의 휘는 극성(克誠)이니 통예문(通禮門)의 통찬(通贊)이 셨다가 좌통례(左通禮)에 이르렀으며, 조(祖)의 휘는 수억(壽億)이니 분순부위(奮順副尉)이셨고, 부친의 휘는 경례(敬禮)니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정릉참봉(定陵參奉)이셨으며, 모친은 보성오씨(寶城吳氏)이시다.
무오년(1558) 7월 12일에 공(公)이 태어나셨으며 옛날 어린 나이로부터 효도하는 성품이 천성에서 나와 8,9세에 능히 어버이를 섬기는 도(道)를 알았으며 기거함과 응대함이 그때마다 매사에 예의가 있었다.
임진왜변(壬辰倭亂)에 임금님의 수레가 피난을 떠나고 팔로(八路)가 유린(蹂躪)되었다. 이러한 때를 만나 김제(金堤)의 유사(儒士)이셨던 안공(安公)은 백의(白衣)로서 군수인 정담(鄭湛) 공을 따라 웅치(熊峙)를 파수(把守)하며 기이한 공적(功績)이 많이 있었으나 마침내 정공(鄭公)과 더불어 하루에 같이 순절(殉節)하니 왜구(倭寇)들도 또한 충의에 감동하여 충간의담(忠肝義膽)이라는 네 글자를 비석에 새겼다.
공의 묘소는 군(郡)의 북쪽 생건동(生巾洞) 해좌(亥坐) 언덕에 있으며, 완산(完山) 창원(昌原) 유신노(柳莘老)께서 비기(碑記)를 지으셨고 같은 군의 사람인 봉사(奉事) 송일중(宋日中)께서 유사(遺事)를 기록하였다. 공의 전배(前配)는 여산송씨(礪山宋氏)이신데 이남(二男)을 낳았으니 장남은 충남(忠男)인데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추증되었고 차남은 덕남(德南)이다. 후배(後配)는 진주소씨(晋州蘇氏)이신데 딸 하나를 낳았으니 진사(進士)인 박충일(朴忠一)이고 덕남(德男)은 아들이 없다.
학당서원(學堂書院)
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 하정리 학당마을에 있는 서원.
1654년(효종 5)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안처(安處)·정담(鄭湛)·안경지(安敬之)·안징(安徵)·안위(安衛)·안철(安徹)·나팔기(羅八紀)·나신도(羅伸道)·
안국용(安國用)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백산면 학당리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971년 후손과 유림에 의하여 현재의 위치로 이전,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앙심문(仰心門), 4칸의 강당, 대문 등이 있다.
안처(安處)이조판서 청백리(淸白吏)ㅡㅡ> 안보(安堡)ㅡㅡ>안극명(安克明),안극수(安克修),안극성(安克誠)
10世 조부 통례(通禮)안극성(安克誠)ㅡㅡ>부친 분순부위(奮順副尉)안수억(安壽億)ㅡㅡ>安敬仁,安敬義,安敬禮,安敬智,安敬信
11世
奮順副尉 안수억(安壽億)
贈工曹參議 안수천(安壽千)
12世 13世 14世
안경인(安敬仁)參奉ㅡㅡ>안득(安得)內禁衛ㅡㅡ>안대룡(安大龍)奉事
안경의(安敬義)ㅡㅡ>안행(安行)ㅡㅡ>안영일(安永一)
안경예(安敬禮)參奉ㅡㅡ>안징(安徵)號伴梅堂。當壬辰亂倡義殉節。有俎豆之享ㅡㅡ>안충용(安忠勇)안충남(安忠男)階嘉善。在童時獨往伴梅堂殉節之所。尋屍負歸。
안경지(安敬智)參奉號松菴ㅡㅡ>영릉참봉(英陵參奉)안철(安徹)參奉號竹軒ㅡㅡ>안정길(安貞吉),안영길(安永吉)將仕郞,안유길(安惟吉),안연길(安逢吉)ㅡㅡ>승지 안대규(安大規)ㅡㅡ>증손 안눌(安訥)
안경신(安敬信)參奉贈戶曹參判ㅡㅡ>안㣧(安㣧)通德郞。안위(安衛)全羅兵使。有功於李忠武公露梁之戰。後建祠以享안위(安衛)
안㣧(安㣧)通德郞ㅡㅡ>안처선(安處善)通德郞。안취선(安就善)通德郞。以孝㫌閭。안보선(安晉善),안락선(安樂善)俱通德郞。
안위(安衛)全羅兵使ㅡㅡ>안여선(安與善)持平。안흥선(安興善)僉使。載甲子勳錄一等。안무선(安務善)訓鍊主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