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통보감>
본래 이름은 난강망欄江網, 작자와 성립연대 모두 미상이다.
명대 유명 인사들의 명조가 다수 실려 있어 명대 말기에 저술된 것으로 추정한다.
(원본 난강망에는 명조사례가 일체 없다 나중에 청대 일관이 삽입한 것으로 추정 될뿐이다)
난강망은 개인의 비망록의 성격을 갖는 필사본이다. ‘강호’에서 유전되었다.
-청대 초기 강희년간에 일관(日官)의 손에 들어가 <조화원약>으로 이름이 바뀜
(일관이 이름인지 아니면 천문관의 관직명인지 불확실함)
-광서 연간에 여춘대(余春台)가 이를(조화원약 추정) 얻어 편집, 수정하여 <궁통보감>이라는 책을 간행하였다.
-서락오가 주석을 붙여 <궁통보감>을 출간(1937)(대만의 무릉출판사에서 출판, 일반적으로 이 책을 많이 본다.)
-서락오가 진주오씨유복독서당 소장본을 입수, 기존 필사본(여춘대의 궁통보감)가 대조하여 교감, 주석, 근대인들의 명조를 추가하여 조화원약평주(造化元鑰評注) 라는 이름으로 출판(1841)
진주오씨유복독서당 소장본은 청대 일관이 증보한 조화원약 같고 이것을 근거로 조화원약평주를 출간함
궁통보감 강해는 여춘대의 궁토보감을 근거로 만든 서락오가 출간한 궁통보감 강해같음
고로 조화원약본(일관증보)과 궁통보감본(여춘대)은 판본 저자가 다르다고 봐야 함
*여춘대의 서문
“나는 시문을 수집하다 남는 시간에 여러 명리학 서적을 많이 섭렵하기도 하였다. 이에 한 친구가 <난강망欄江網> 선본善本을 가지고 와 내게 ”누군가 간이하고 명확한 학설을 저술해 후학들에게 전범典範을 만들어 주려 했던 것 같다. 이 책은 비전되며 오랫동안 책상자 속에 잠들어 있었다.
자네가 이 책을 판각하여 자평서에 하나의 작음 보탬이 되면 좋지 않겠는가? 라 하였다. 내가 그 책을 펴서 한번 살펴보니 그 논의가 매우 정밀하고 상세하며 취사 선택이 매우 들어맞아 실로 오행의 생극과 팔괘 착종의 묘리를 얻음이 있었다.(명리학 이론적인 의미가 있었다_
이에 나는 미천한 재능으로 꼼꼼히 편집 작업을 하여 번잡한 부분은 걸러내고 소략한 부분은 덧붙이고, 글자의 오류들을 바로잡아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으로 손바닥을 가르키는 것처럼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책은 진정 명리학의 지침서이며 자평학의 모범이다. 이에 궁통보감窮通寶鑑 이라는 서명을 붙이고 책을 편찬하게 된 일의 전말을 서문으로 적어 판목에 붙이는 바이다.“
*서락오의 조화원약 서문
“<난강망>이라는 책은 십간을 열두달에 배당하여 그 생왕유수를 살펴 용신을 취하는 준칙을 정하였다. 하나의 이름으로 만가지 변화를 제어하여 정연한 질서를 갖추고 있으니, 명리서 가운데 이에 필적할만한 것이 거의 없다.
그러나 돌아보면 이 책은 술사의 손에서 나와 뜻이 정미하고 이치가 깊지만 그 문장이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있고, 여러번 필사를 거치면서 글자의 오류들이 생겨나 마침내 읽을 수 없게 되어 거의 오백년간 묻혀 세상에서 중시받지 못하였다.
내가 <궁통보감>에 평주를 붙일 때 책이 기이하여 그 의미를 전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여춘대의 궁통보감을 얻은 것임)
선본을 백방으로 구했지만 얻을수 없어, 잘못된 곳이라 의심되는 부분이 있어도 감히 내 뜻대로 고치지 않았다.
그후 친구의 소개로 고서점에서 <진주오씨유복독서당> 진장 정사본을 구입하였다. 두 책을 대조해 보니 서로 교정이 되었고, 한글자의 출입에 따라 뜻이 달라지기도 하였다.(독서당이 조화원약같음)
예시로 든 명조도 수백개가 있었는데, 청나라때의 일관(천문관)이 증보해 놓은 것이었다.(이로 미루어 조화원약평주는<진주오씨유복독서당>이 원본같음) 나는 다시 여러해 연구를 거듭하여 예전에 보아서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을 밝게 깨우칠 수 있었다. 대체로 숙달할 정도로 익히자 비로소 내용이 서로 통하였고, 실제 사례를 통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출처] 궁통보감窮通寶鑑|작성자 하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