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한산도에 삼도수군통제영이 처음 설치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부산에 주둔한 왜군을 견제하기 위해 이순신은 견내량과 한산도 바다를 방어하는 해상봉쇄작전을 세웠고(임진장초), 선조는 경상/전라/충청 삼도의 수군을 지휘할 수 있는 지휘본부를 한산도에 임시 설치하고 이순신에게 삼도수군통제사를 임명하였다.(교서)
이 사실은 선조가 이순신에게 내린 교서에 언급되어 있다. 다만 전시상태에서 제도가 제대로 정비되지 못했기 때문에 영(營)과 진(陣)을 구분하지 않고 통제영이 운영된 점은 이견이 나올수 있는 오해의 소지가 있으나 그렇다고 그 한산도 삼도수군통제영 자체를 부정하거나 호도해서는 안될 것이다.
특히 전란 중 갑오년(1594) 선조가 이순신에게 내린 호궤교서(신자료)에 "경상도한산도겸삼도통제사(慶尙道閒山島兼三道統制使)"라는 직함이 새롭게 밝혀짐에 따라 그 당시에 한산도의 삼도통제사라는 명칭이 존재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는 경상도한산도의 겸삼도통제사라는 의미다. 이는 문법적으로 보면, 경상도한산도가 겸삼도통제사를 한정해 주는 관계이다. 여기서의 兼字는 각각 다른 두개의 관직을 겸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직 삼도를 겸했다는 의미이므로, A兼B로 해석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 부분이 중요한데, 간혹 이를 오역하여 엉뚱하게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의 인물인 박홍미의 관포집에 있는 두룡포기사비의 "其營始在閒山"글귀도 한산도에 통제영이 최초로 있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이런한 역사사료를 기반으로 서울대 규장각, 문화재청, 한국고전번역원, 한국학중앙연구원 등의 포탈 DB자료에도 임진왜란 당시 한산도는 삼도통제사의 최초 진영, 통제영으로 기록되어 있다. 국내의 고전에 정통한 고전학자들은 대부분 원전을 중시하므로, 한산도최초통제영설에 공감을 하고 있다.
최근 임진왜란기 한산도 통제영에 관한 논문(노승석 저)이 KCI <태동고전연구>학술지에 게재되었다. 수년동안 사료를 수집하고 분석한 결과이다. 역사사료를 기반으로 작성한 학술논문이 교육부에서 인정하는 수준높은 학술지에 실린 것이다. 만약 역사 기록에 "其營始在麗水"라는 글귀가 존재한다면 여수에 최초통제영이 있었다는 해석이 존재하여 이를 중심으로 설명을 헸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록은 임진왜란 당시의 역사사료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어떤 주장과 설이 나오기 위해서는 관련된 원전기록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왜 여수가 최초통제영이라는 설이 존재하는 것일까. 그것은 기존에 원전 고증이 제대로 안된 상태에서 논리에 능한 문장가들에 의해 그러한 입론(立論)과 정설(定說)이 비등재 책자를 통해서 나왔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한다. 어쨌든 이러한 견해에 대해 이견이 있으면 학술지를 통해 얼마든지 반박하면 될 것이다.
그러함에도 자신의 주장과 생각이 다른 점에 대해 학술적인 의견은 내지 않고, 상황적인 담합논리를 전개하여 감정적인 의견 내지 인신공격을 하는 것은 지성인 답지 못한 행동이므로 학문적인 대응보다는 이에 맞는 별도의 대응이 필요하다. 21세기 문명시대에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오히려 그러한 행위는 세인들로부터 더욱 공감을 얻지 못할 것이다.
요컨대 한산도최초통제영과 관련한 기록들이 당대의 1차사료, 후대의 기록 등이 다수 존재하는데, 이를 무시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순신의 사상과 생애는 무엇보다 당대 역사사료의 기록을 중심으로 정확한 고증과 분석으로 바르게 조명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논란이 있는 이순신유적지 내용을 분석해 보면, 대부분 원전 기록이 없거나 상황논리에만 치중한 경우라는 점이 아쉽다.
비단 이 뿐만 아니라, 이순신의 역사 관련해서는 다른 역사 왜곡에 대해서도 원전 중심의 철저한 학술고증을 통해 규명해 나가야 할 것이다.
충무공이 3도 수군 통솔했던 총사령부는…"통영 한산도가 최초" | 연합뉴스 (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