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한산도에 삼도수군통제영이 처음 설치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부산에 주둔한 왜군을 견제하기 위해 이순신은 견내량과 한산도 바다를 방어하는 해상봉쇄작전을 세웠고(임진장초), 선조는 경상/전라/충청 삼도의 수군을 지휘할 수 있는 지휘본부를 한산도에 임시 설치하고 이순신에게 삼도수군통제사를 임명하였다.(교서)
이 사실은 선조가 이순신에게 내린 교서에 언급되어 있다. 다만 초기에 제도가 제대로 정비되지 못했기 때문에 영(營)과 진(陣)을 구분하지 않고 통제영이 운영된 점은 이견이 나올수 있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다만 전시상태에서 정비가 미비할수 밖에 없는 상황였음을 감안해야 하고, 그렇다고 여러 사료에 기록되어 있는 한산도 삼도수군통제영 자체를 부정하거나 호도해서는 안될 것이다.
특히 갑오년(1594) 선조가 이순신에게 내린 호궤교서(신자료)에 "경상도한산도겸삼도통제사(慶尙道閒山島兼三道統制使)"라는 직함이 새롭게 밝혀짐에 따라 한산도의 삼도통제사라는 명칭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경상도한산도의 겸삼도통제사라는 의미다. 이는 문법적으로 보면, 경상도한산도가 겸삼도통제사를 한정해 주는 관계이다. 여기서 兼字는 각각 다른 두개의 관직을 겸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직 삼도를 겸했다는 의미이므로, A兼B로 해석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 부분이 중요한데, 간혹 이를 격식에 맞지 않게 달리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또한 그 당시의 인물인 박홍미의 관포집에 있는 두룡포기사비의 "其營始在閒山" 글귀도 한산도에 통제영이 최초로 있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이러한 역사사료 내용을 근거로 서울대 규장각, 문화재청, 한국고전번역원, 한국학중앙연구원 등의 포탈 DB자료에도 임진왜란 당시 한산도는 삼도통제사의 최초 진영, 또는 통제영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전에 정통한 고전학자들은 대부분 원전을 중시하므로, 한산도최초통제영설에 공감하고 있다.
2024년 임진왜란기 한산도 통제영에 관한 논문(노승석 저)이 KCI <태동고전연구>학술지에 게재되었다. 부족하지만 수년동안 사료를 수집하고 분석한 결과이다. 역사사료를 중심으로 작성한 학술논문이 교육부에서 인정하는 학술지에 실린 것이다. 만약 역사 기록에 "其營始在麗水"라는 기록이 존재한다면 여수에 최초통제영이 있었다는 내용으로 서술을 헸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록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여수가 최초통제영이라는 설이 존재하는 것일까. 그것은 원전 고증이 제대로 안된 상태에서 논리에 능한 문장가들에 의해 상황논리로 그러한 입론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한산도 최초통제영과 관련한 기록은 당대의 1차사료와 후대의 문헌에서 다수 존재한다. 한산도가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영이라는 것은 4백 여년 동안 이식, 윤휴, 최유해, 박홍미, 송시열 등 여러 학자들에 의해 하나의 정설이 되어왔다. 이를 기반으로 국가의 기관 자료 및 사전 사이트에 대부분 실려 있다. 이를 반박하려면 국가기관의 자료부터 해결해야는데,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어떤 주장과 반론을 제기하기 위해서는 원전자료의 <저자>와 <책이름>, <원문내용>이 정확히 명시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없다면 학술적으로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여수가 최초삼도수군통제영'이라는 논문이 kci급 학술지에 실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견이 있으면 학술논문을 통해 얼마든지 반박하면 된다. 그러나 반박 논문을 내지 못하고, 지역민과 담합하여 감정 대응하고 인신공격하는 것은 21세기 문명사회에 반하는 지성인 답지 못한 행동이다. 더욱이 교육부 등재지에 실린 학술논문을 인정하지 않고 비난하는 행위, 학술적으로 풀어야할 것을 시민의 서명운동과 정치적으로 해결하려는 행위는 오히려 시대를 역행하여 세인들로부터 공감을 얻지 못할 것이다.
충무공이 3도 수군 통솔했던 총사령부는…"통영 한산도가 최초" | 연합뉴스 (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