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운동의 문을 열다
민 병 욱(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
우리나라의 독서 출판계와 도서관들, 아니 전 국민은 한 위대한 선각자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한국전쟁의 와중에도 탄환상자에 총알 대신 책을 담아 시골마을로 돌려 주민들이 읽게 만든 엄대섭 (嚴大燮)선생이 바로 그다. 엄 선생은 한반도 전역에 총알이 날고 포탄이 터지던 1951년 6월 자신의 책 3천권으로 경남 울산에 사립 무료 도서관을 세웠다. 그리고 탄환상자 50개에 각각 10여권씩 책을 담아 시골마을마다 돌려보게 하는 순회문고 활동을 시작했다. 이것을 불씨로 10년 후 ‘농어촌 마을문고 보급회’가 창설됐고 ‘민중 대학’이라는 마을문고 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는 계기가 되었다.
가난에 찌들려 문맹률이 높은데다 제대로 된 책조차 변변히 없어 문화와는 담 쌓고 살던 시골사람들에게 마을문고는 그 자체가 ‘학교요, 인생수련장이며 즐거운 여가’였다. 방방곡곡이 책 읽는 마을이 되어감에 따라 국민의식과 취학률이 눈에 띄게 높아졌다. 국민들의 지적 수준이 한 단계, 한 단계씩 향상되면서 민주주의 인본주의에 대한 열망도 함께 올라갔다. 마을문고가 오늘의 번영 한국, 지식 강국 한국, 교육열 최고의 한국을 있게 만든 한 동력이 된 셈이다. 엄 선생이 50개의 탄환상자로 시작한 그 문고가 바로 지금 새마을문고의 전신(前身)이다.
엄 선생이 책과 인연을 맺은 사연도 남다르다.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8살 때 부모를 따라 일본으로 이주했다. 10대 소년시절 아버지가 근로재해 불구자가 되자 소년가장이 돼 두부장수, 세탁소 점원, 방직공장 직공 등 온갖 잡일을 다해가며 가족의 생계를 도맡았다. 그러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 시절 그는 우연히 마주친 한 책에서 “남의 흉내만 내선 성공하지 못한다. 같은 일이라도 남이 안하는 방법을 찾아라.”는 글을 읽었다. 그리고 정말로 ‘남이 생각하지 않던’, 요즘 말로는 의류 재활용 사업을 시작해 돈을 벌었다.
해방과 함께 귀국한 뒤 그는 돈버는 길은 외면한 채 오히려 번 돈을 쓰기만 하는 독서사업에 진력했다. 다른 나라의 ‘도서관 운영’에 관한 책을 읽고 가난과 무지에 빠진 백성을 건지는 가장 빠른 길이 독서라고 생각해 그들을 위한 마을문고운동에 뛰어든 것이다. 자신 역시 책 한 권을 통해 가난에서 벗어났으므로 다른 사람에게도 그 방법을 알려주자는 의도였다. 그러나 아무 이해상관도 없는 시골사람들에게 그냥 책을 안기는 행동이 수상해 경찰이 뒷조사를 벌인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오로지 책을 길라잡이로 자신과 남의 인생을 바꾸는 일에 정진한 그는 30년 후 막사이사이상을 탐으로서 이런 의심, 의혹을 일거에 날려버렸다.
(새마을문고운동 40년사• 네이버 책 카페)
책과 독서의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다. 한 시인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책 한 권을 읽음으로서 인생에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던가.”고 노래했는가 하면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책 없는 방은 영혼이 없는 육체와 같다.”고까지 단언했다. 안병욱은 “책 읽는 민족은 번영하고 책 읽는 국민은 발전한다.”고 했으며 숱한 현인들이 더 많은 책을 읽지 못한 채 맞는 죽음이야말로 인간이 겪는 가장 큰 비극이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런 이야기를 누구나 알고 “책을 읽어야 사람이 된다.”고 강조하면서도 정작 책을 멀리하고 도서관에서 발길을 끊는다는 데 있다.
찾아가 책을 전하고 읽게 하는 마을문고나 이동도서관의 역할은 그래서 중요하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5백64개 공공도서관이 있지만 대부분 도시지역에 편중해 있다. 새마을문고는 시군은 물론 2천3백여 읍면동 분회, 1천7백41곳에 문고를 설치했고 48대의 차량으로 문화소외지역을 돌며 독서봉사활동을 벌이고 있다. 22만여 명의 자원봉사자가 말 그대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엄 선생의 큰 뜻을 펼치려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좋은 책 좋은 글, 좋은 생각 좋은 나라’라는 모토 아래 열악한 환경에 처한 국민들의 책 읽기 도우미 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 간행물윤리위원회의 정신과도 상통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