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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김부식 지음, 이강래 옮김(한길그레이트북스)
삼국사기.. 이제야 읽어보는군요 ^.^;;
삼국 이야기야 사실 대하드라마나 사극으로도 많이 접하다 보니.. 읽기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마치 처음부터 끝을 잊는듯한.. 편안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만..
그런데 이 책이 말이죠~ 좀 말이 많더군요.
먼저 김부식의 삼국에 대한 논평을 먼저 읽어 보시는 것이 낳을 듯 합니다. 조금 요약을 했습니다.
자 그럼 신라부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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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늘 중국조정에 자재들을 보내 성현의 교화를 이어받아 미개하고 거친 풍속을 고쳐서 예의 있는 나
라가 되었다. 또한 중국 군사의 신령한 위 강에 힘입어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였다. 그러나 불가의 교법을
받아들이고 그 폐해를 알지 못해 승려가 되고 군사와 농사가 위축됨에 나라가 쇠미해 졌다.”
마지막 경순 왕이 태조에게 귀의함을 가상히 여겼으며.. 만약 그가 죽기를 각오하고 고려에 맞섰다면 그 종
족이 멸하고 무고한 백성에게 해가 되었을 것이다.
“고구려는 진. 한 시대 이후로 중국의 동북방에 끼어있어 그 북쪽 인접 지대는 모두 천자의 관할이었거니와
난세에는 영웅들이 우뚝 일어나 참람 되이 명호와 지위를 도적질 하는지라 두려움이 많은 땅에 자리했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겸손한 생각이 없이 그 봉토의 지경을 넘어 침구해 원수를 삼고 중국의 군현에
들어와 사니 이 때문에 전쟁이 이어지고 화근이 생겨나 거의 평안한 해가 없었다.
그들이 동쪽으로 도읍을 옮겼을 때는 수와 당이 통일을 이룬 시기였는데도 여전히 조서와 칙서를 거역해 순
종하지 않고 천자의 사신을 토실 속에 가두었으니.. 그 완악하고 두려워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여러 차례 문죄의 군사를 불러들였던 것이니 비록 간혹 기발한 계책으로 대군을 함몰시킨 때도 있
었지만 끝내는 왕이 항복하고 나라가 멸망되고야 말았던 것이다.”
“백제는 말기에 이르러 행동하는 바가 많이 도리에 어긋나고 또 대대로 신라와 원수가 되어 고구려와 함께
화통 해 침공하였으며 유리한 기회만 있으면 신라의 중요한 성과 큰 진들을 베어가고 빼앗아가기를 마지 안
았으니 이른 바 어진이와 친하고 이웃나라와 잘 지내는 것이 나라의 보배란 말과는 달랐다.
이에 당의 천자가 거듭 조서를 내려 그 원한을 풀도록 했으나 겉으로는 따르는 체 하면서도 속으로는 어겨
대국에 죄를 지었던 것이니 그들의 패망 역시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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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이 읽어 보시기에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사실 이 삼국사기의 주요 비판 대상은 사대주의 와 신라의 편향된 사료 라는 주장 입니다.
이 책의 서두에 역시 “사대주의”를 화두로 어떻게 삼국사기를 바라보고 평가 할 것인가를 독자의 몫으로 남
겨 놓습니다.
일단 다 젖혀두고.. 삼국을 통틀어 가장 많이 쓰여진 단어가 제가 보기에는 [조공]입니다.. ㅎ
‘조공’이란 단어… 이건 뭐.. 무슨 왕 무슨 년에 조공했다.. 가 책에 널려 있습니다. 역사의 사실이니 무어라
할 말은 없습니다만.. 항상 중국이라는 나라가 상국이자.. 천자가 계신 나라라는.. 그저 우리나라는 약소국이
라는 느낌은.. 지울 수 없는 사실 이었던 것 같습니다.. 중국은 완전 형님입니다.. 흐미..
이거 참.. 난감해 졌습니다..
삼국사기를 읽는 것보다 정말 옮긴이의 [삼국사기의 정당한 이해를 위하여]와 [옮긴이의 말]을 몇 번 더 읽
어보게 만들더군요…… 더하여 그 진위를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만약 이 사료가 진정 사대주의의 극치라는
평을 받아야 했다면.. 어떻게 우리나라 보물이 되었겠는가.. 라는 반증을 찾고도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일단.. 만사 제쳐놓고.. 여러 가지 그?? 사대주의와 신라중심의 사료에 대한 반증을 찾았습니다……
그 첫째가. 편찬 배경입니다.
삼국사기의 완성. 인종에게 올린 이 책에 진삼국사기표< 進三國史記表 >에 쓰여진 내용입니다.
그 내용은 고려의 지식인들이 중국사에 대해서 잘 알면서 자국의 일에 대해서는 그 시말을 모르고 있고 중국사서에 기록된 삼국의 사실이 소략하며 당시 현존한 ‘고기(古記)’들이 거칠고 비속하여 새로운 사서를 통해 국왕과 신하의 잘잘못을 가려 후세의 교훈으로 삼고자 편찬했다고 써 있습니다.
즉.. 사대주의가 아닌 자주적인 역사서를 만들려 한 점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책이 있어야 한다” 입니다.
둘째. 삼국을 본기(本紀)로 다루었습니다.
본기(本紀)란 바로 황제(黃帝)의 역사입니다. 왕이나 제후의 역사는 세가(世家)로 기록합니다..
고구려, 신라, 백제 모두를 본기로 다룸으로서 중국과 똑 같은 당당한 왕국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사대주의자라면 감히 어깨를 겨루려 하지 않습니다..
되려 조선왕조실록은 세가라고 표현합니다. 이에 대한 문제제기는 없고 삼국사기만을 욕하는 사람을 이해
못한다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고구려를 왕조로 올림으로서 중국의 역사가 아님을 분명히 해두고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중국은 고구려를 자신들의 역사에 포함시키려 별 짖을 다하고 있습니다……
셋째. 중국의 태도에 욕할 것은 했습니다.
예를 들면. 김유신이 당에 한 말. “먼저 唐軍(당군)과 싸워 결판을 낸 다음 백제를 부수겠다” 라든가..
소정방이 신라를 공격하려 하자.. 이 참에 맞짱뜨자는 내용이나..ㅋ 소정방이 당고종에게 보고할 때..
“신라는 임금이 어질고 백성을 사랑하며 그 신하가 충성으로 나라를 섬기고, 아랫사람은 윗사람 섬기기를 父兄과 같이 하니 비록 나라는 작지만 함부로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 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사대주의에 입각한다면 이런말을 쓸수는 없습니다. 또한 조선사관들에 의해 이 삼국사기는 되려 모화사상이
결여 되었다는 이유로 욕을 먹었다고 합니다… 이건 무슨 짜장면인지..
넷째. 신라만을 위한 사료가 아닙니다.
고구려나, 백제의 기록이 적었습니다. 김부식이 비록 신라왕실의 후예이지만.. 고려 중기 최고의 권력을 가진 신하였고, 신라는 무력으로 고려에 평정된 것이 아닌 경순왕이 자진해서 나라를 바쳤기에..
모든 신하귀족들은 고려귀족으로 그 삶을 영위하였습니다.
전쟁으로 빼앗은 나라가 아니기에 그 자료의 차이는 엄청났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나 고구려의 자료를 늘리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입니다.
특히 열전부분에 들어가면 고구려나 백제의 양을 늘리기 위해서 본기의 내용을 그대로 베껴 온 흔적도 있습
니다..
다섯째. 묘 청의 난을 진압한 것이 사대주의에서 비롯된 것은 아닙니다.
12세기 당대 최고의 권력가였던 그는 일찍이 북송의 새로운 황제 즉위식에 참석했다가 북송이 금나라에
멸망 당하는 광경을 보게 되고, 황제가 금나라로 압송되는 것을 생생히 목격합니다..
당시 묘청은 기존 유교적 정치이념과 현실주의에 대립하여 풍수리지와 도교를 접목시켜 서경천도를 주
장. 천도를 하게 되면 나라가 부강해지고, 주위나라의 전투에 승리할 것이니.. 금나라 정벌을 주장합니다..
묘청의 기개는 먼저 규원사화에서도 높게 평가하는 면이 있습니다. 국왕을 황제라 칭하고 옛 선조의
땅을 되 찾아야 한다는 기상.. 그러나 이자겸의 난과 문벌귀족의 다툼으로 인한 내부분열과 국력이 소비된 상태에서. 막강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중원을 장악한 당의 엄청난 군세를 그는 알고 있었던 그가...
게임이 안 되는 현실을 직시한 그가.. 모두를 전쟁의 소용돌이에 몰아넣고 싶지 않았다 할 것입니다.
더구나 정책적인 전략이 아닌 도교 신비주의 사상에서 나오는 이 정책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굵직하게 다섯까지 정도로 요약은 했습니다만……
사실.. 이 반대되는 사대주의 사상이 깔려 있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습니다..
근대 민족주의 역사학자 단재'신채호' 선생님은 1천년 동안의 최대 운동임을 들어 묘청을 떠받들고 있
습니다. 그리고 이 난을 김부식이 제압함으로써 나라에 사대주의가 뿌리내리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또한 김부식은 신라의 전통을 계승한 자로서 신라의 멸망을 나쁘게 판단할 수 없었으며 고구려를 계승하려 한 묘청의 제거는 정치적으로 필수 조건이었다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어떠한 관점으로 삼국사기를 대하시겠습니까?
오늘날 많은 역사학자들은 김부식은 사대주의자가 아닌 현실주의자라고 합니다. 또한 그들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자주적인 것과 사대적인 것으로만 구별하지만 삼국유사의 저자들은 삼국사기를 엄연히 본사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가 근본줄기라면 삼국유사는 가지와 잎인 것입니다.
무엇이 되었던 간에..
우리 민족사 1,000년의 역사를 이야기 하는 현존 가장 오래된 역사책이며, 만약 이 책이 없었다면 어찌 했겠습니까? 아마도 중국이나 일본문헌이 맞는 이야기가 되었겠죠…. 생각만 해도…ㅋ
자~ 일단 사대주의니 뭐 그런 것은.. 논외로 치더라도
삼국사기를 읽으면서.. 신라가 당을 끌어들여 삼국을 통일한 것이 잘한 것이냐.. 나라를 팔아먹은 것이냐..
아니면 연개소문이 강경도로만 수나 당을 몰지만 않았어도 망하지 않았느니.. 어떠했느니를 떠나서..
싸움에는 응당 그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그만큼 3국이 서로 피를 봤기 때문에 피를 부른 역사라는 점 입
니다.. 중국에게 잘 보이려 한 나라는 단지 신라뿐이 아니었습니다.. 백제나 고구려도 마찬가지 입니다..
가장 아쉬운 건.. 왜 서로 싸웠어야 했는가 입니다.. 삼국에 좀 훌륭한 분들이 많았습니까??
뛰어난 장군들은 또 어떻고요.. 이들이 하나만 되었어도.. 정말 중국 별거 아니었을 겁니다..
하나로 뭉친 자들이 가장 두렵습니다…… 이게 삼국사기를 읽어야 하는 이유 아닐까요??
개인적으로 삼국의 형성과 그 들의 싸움에 대하여 크게 뭐라 할 생각은 없습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 그리스 인들이 하나로 뭉쳐 페르시아를 대하였느냐..?? 천만에 입니다..
끝까지 스파르테인들과 아테나이 인들이 싸웠죠…? 페르시아를 무찌르고 나서도 지들끼리 또 싸웁니다…
이것이 역사라면 인정 해야겠지요……
그러나 아쉬운 것은 그리스 인들은 서로 으르렁거리고 자기들끼리 싸웠어도 공동의 적을 같이 처단하는
기지를 발휘하긴 했습니다.. 그래서 250만 대군을 물리쳤죠……
그러나 우리는 어떠했습니까?? 중국이 쳐들어오면 그때를 노려 우리끼리 침범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공동의 적을 향하여 표면적으로나마 뭉쳐줬더라면 삼국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갔을까요??
생각할수록 궁금하기도하고 아쉽기도 합니다……
요즘은 어떤가요? 대한민국은 단일민족으로 잘 해 나가고 있나요? 일단 남과 북으로 나뉘어 이념싸움
을 하고 있으니.. 벌써 하나는 아닙니다.. 내부적으로도 똑 같은 이념싸움, 지역싸움을 하고 있기에 역시 하나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반쪽 짜리로 세계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고 있습니다만…… 이 역시 후대에 하나되지 못했음을 질타 받지 않을까요?? 제가 지금 언급하는 것처럼.. 말이죠.. ㅋ
언젠가.. 통일이 되고 한국을 이끌 최고의 지도자가 나올 수 있다라고 바랍니다…
중원이 아닌 지구를 호령하는 그날이 오기를 삼국사기도 바라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어느 칼럼이 삼국사기를 평하는 글로 마감합니다..
비록 군대군대 중국에 대한 칭찬? 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중국은 우리와는 상대가 안될 정
도로 강국이었고 강국입니다.. 인정 안 한다고 현실을 피해갈수 없듯이.. 김부식 역시 같은 생각을 갖고 있
지 않았을까.. 라는 마음을 바라면서 어떤 평이 맞든지 간에 저는 분명 삼국사기가 훌륭한 우리 보물임에 한 표를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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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삼국사기표< 進三國史記表 > 김부식이 쓴 초문. 삼국사기를 폐하께 올리면서..
“성상폐하 신이 엎드려 청 컨데 명산에 간직할 보물은 되지 못할지언정 간장종지 마개로 사용만은 마옵소서
죽은 마음 이나마 천 년을 두고 비추어 보겠습니다”
머리말에 해당하는 진삼국사기표 마지막에 김부식이 남긴 글이다.
조선시대 성리학자들로부터는 모화사상이 부족하다 비난 받고,
단재 신채호 선생에게서는 묘청 의 난을 진압 하였다 하여 사대주의자로 비난 받고
일본학자들은 일본서기에 없는 내용이 너무 많다 하여 조작된 사서라 비난 받고,
환단고기 및 삼국유사를 지극히 사랑하는 독자들로부터는 고조선이 빠졌다 하여 사대주의자로
비난 하고 있다.
더욱이 우리나라 대표적 식민사학자로 일컬어 지는 이병도 선생이 을유문화사에서 출간한 삼국사기
번역본 머리말 에는 고려 왕의 명을 받아 지었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자신이 모시는 군주를 "황제폐하"라고 사기에 분명히 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대 사람들은 고려 군주를 왕이라 칭하며 김부식을 사대주의자라 말한다.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다. 김부식은 죽기 전 이런 일이 일어날것을 미리 예견하고
천 년을 두고 비추어 본다고 했을까.. 그리고 정말 우리는 그를 간장종지 마개로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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