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우리가 겪은 우리 동네 6.25 전쟁
등선대 김영일
전쟁이란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
우리가 가끔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보기는 하였으나 우리가 어렸을 때 겪은 6.25는 영화보다 더 처참하고 무서운 기억으로 남는 이유는 우리가 그 전쟁으로 당한 괴로움의 당사자이기 때문이리라.
당시에는 6.25 사변으로 불리던 전쟁
멋모르고 당한 그때의 참상들 지금 생각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1950년에 일어났던 6.25는 어떤 전쟁이었을까 그때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자.
오월에 신록이 다시금 그 빛깔을 짙게 물들이는 6월
개울가엔 아카시아 꽃향기가 코를 찌르고 마당 가엔 해당화도 아름답게 피어 보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그 아리따운 자태를 뽐내며 싱그러운 향기를 발산하고 있었는데 들에서는 모내기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큰댁 논에 모내기를 마치고 우리 큰댁 대청마루에 모여 저녁을 맛있게 먹고 난 후 오늘 새벽녘에 멀리서 들리던 포성들이 아직도 끊이지 않고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북쪽을 응시하며 그 포성의 진실이 궁금해졌고 그래서 우리 동네 오직 하나뿐인 큰댁 라디오 앞에서 귀를 기울이며 뉴스를 듣고 있었다.
6.25일 새벽 4시부터 쿵쿵쿵 들려오는 대포 소리
이북 괴뢰군들이 38선을 넘어 탱크와 전쟁 무기를 앞세워 우리 대한민국에 쳐들어왔다는 뉴스는 주민들을 알 수 없는 불안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로부터 사흘 후인 6.28 새벽에 서울은 괴뢰군에 의해 함락되고 우리 군대도 서울 한강 다리를 조기에 폭파해 버린 후 이승만 대통령을 위시한 정부는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는 사실이 입소문 뉴스로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6.25의 잔혹한 참상은 시작되었다.
그 후 3개월도 안 되어 대구와 경북 일부 부산을 남겨둔 우리나라 전역이 적의 손에 들어가고 이후로도 뺐고 빼앗기는 비참한 전쟁은 그칠 줄 모르고 진행되고 있었다.
그 후 괴뢰군이 우리 고을을 점령했다는 소식
괴뢰군들은 코빼기도 못 보았지마는 고개 너머 배다리 남로당 진홍(眞紅)의 빨갱이들이 발호하며 날뛰는 세상이 시작되면서 공산 치하에서의 나날은 아무것도 아는바 없는 불안과 공포 속에 동네 사람들을 몰아넣고 있었다.
그동안 중단되었던 학교를 다시 나오라고 인편으로 통지가 오고 불안한 발걸음으로 등교하는 심정은 우리 학교가 아닌 남의 학교를 등교하는 기분이랄까 학교 교실도 본관이 아닌 별관으로 무언가 소외된 느낌이었다.
교장은 바뀌어 낯모르는 교장이 와 있었고 아름답던 음악 선생님의 밝은 미소도 사라지고 화단에 피어있는 꽃들도 억지 춘향같이 피어나 햇빛 아래 졸고 있었다.
속칭 좌파와 우파로 갈라진 선생님들 간에 피 터지는 싸움도 볼거리였고(?)
국기 게양대에는 인공기가 교실 벽면에는 살찐 젊은 청년 사진이 떡하니 거만스럽게 걸려있는 모습 김일성의 초상화가 섬뜩함을 유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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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잘하시기로 이름난 이희섭 음악 선생님이 어느 날 동네에 나오셨다.
시원한 느티나무 밑에 우리를 모아놓고 경쾌한 우리나라 동요 대신 행진곡 풍의 김일성 노래를 가르쳐 주었고 우리는 뭔지도 모르고 신나게 불러주는 웃기지도 않는 촌극을 벌였다.
낮에는 마을 청년들이 학교 운동장에 모여 전쟁 참여에 따른 훈련을 남로당원들이 반강제로 시켜댔고 밤에도 야간 훈련을 하는 구령 소리가 밤공기를 가르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허울 좋은 의용군 자원입대라는 허울 좋은 명목아래 전쟁 도발을 더한층 부추기고 있었다.
아버지는 연령 때문에 괜찮았지마는 막내 삼촌은 콩과 냉수를 마시고 설사를 유발시켜 체중을 뺀 뒤 의용군 자원입대 권유를 피해 가셨다.
점령군보다 더 날뛰는 남로당 빨갱이들 군인 가족 경찰 가족 등을 처단하는 일에 앞장섰고 그 도를 넘어선 행동들은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날뛰는 사람 중에 우리 집안 먼 할아버지 벌 되는 자인네 아버지도 끼어 있었는데 그래도 우리 동네 집안사람들에게는 큰 피해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남로당원들과 내무서원들이 그리고 여맹 회원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다니며 전쟁 준비에 따른 도로 복구 전쟁물자 및 군수품 운반 등 각종 부역을 충동질했으며 농사일은 아랑곳없이 그들은 전쟁 후속 관리에 열을 올렸다.
동네 구장 및 반장들을 들들 볶아 동네 사람들 부역 동원에 열을 올렸고 만일 부역 동원에 안 나오면 총살 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으며 혈안이 되어 괴뢰정부에 충성을 다하기를 열을 내며 독촉했다.
동네 구장이신 김만철 할아버지도 이들 앞에 서서 동네 논밭에 작황 조사를 하며 벼 이삭 수수 이삭 하물며 조 이삭까지 꺾어서 세며 그들의 어쩔 수 없는 앞잡이가 되어 열을 올렸다.
부역 및 노력 동원 및 소 돼지 등을 각출하는 과정에서 윗마을 주민들과 구장은 자주 충돌했고 반강제로 구장을 앞세운 남로당 앞잡이들의 횡포는 허구많은 민원과 불평불만을 자아냈지만 이런 반발을 겉으로 표출했다가는 남로당 청년 당원들에게 찍히면 좋지 않을 것 같아 윗마을 사람들은 속으로 꾹 참으며 이를 갈며 벼르고 있었다.
특히 구장 할아버지는 제일 차로 윗말 사람들로부터 강한 반발과 원망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럭저럭 여름이 가고 9.28 직전 우리 집안에 자인 아버지는 월북하는 남노당원들을 따라 북으로 갔고 수복 직후 자인 어머니는 남한 쪽 열성 청년 당원에게 끌려가 남편의 소재를 추궁하는 심문 및 고문을 받았으나 자인 아버지가 월북한 것을 알고 석방시켜 주었다.
그 후 1.4 후퇴 시에 그 할아버지는 다시 월남하여 자기 가족들이 무사한 것을 알고 큰 행패는 없었다.
9.28 수복 후에 상황은 역전되었고 그 반대편에 있던 피해자들은 자기들이 당한 것보다 더 치열하게 복수하는 양상은 전쟁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얼마 후에 아버님은 그때 나라에 부름을 받고 징집으로 그리고 작은 아버님도 군에 입대하셨다 압록강까지 진격하여 통일을 바라본다던 연합군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역전되었다.
그리고 1.4 후퇴를 전후하여 우리 동네 박재궁 마을에는 집집이 중공군들이 불시에 들이닥쳐 중공군의 아지트가 되었다.
마을에 들어온 그들은 각각 집들을 점령하고 한 집에 방 한 개씩만을 남겨서 피란 못 간 민간인들에게 살게 하니 한 지붕 두 가족이 동거하는 꼴이 되었다.
일설에는 중공군이 내려오면 민간인들을 대창으로 찔러 죽이고 우물에도 독약을 푼다는 둥 별별 소문이 유포되기 시작했다.
1.4 후퇴 이후 반격에 나선 우리 연합군은 중공군과 괴뢰군을 수색 화전 전투에 대승을 거두었고 주둔병 전부를 투입하여 참전했던 중공군이 거의 전멸하다시피 패하고 패잔병을 이끌고 퇴각하게 되었을 때 전쟁의 참담함은 어린 내가 생각해도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이때 자인 아버지도 3녀 1남 중 아들을 업힌 큰딸과 그리고 마누라를 대동하고 네 식구가 월북하였고 딸 둘은 큰댁에 맡겨놓고 북쪽으로 갔다.
구장 할아버지는 1.4후퇴 이후 다시 우리 국군과 연합군이 우리 동네를 탈환하여 조금은 조용하던 시절에 윗말 사람들의 질시와 규탄에 대상이 되어 있었고 궁지에 몰린 구장 할아버지는 드디어 어느 봄날 새벽 집 뒤에 파 놓은 방공호 받힘 목에 목을 매 자살하셨다.
며칠 후 밀리고 밀리던 적군들이 쫓겨 가던 날 동네 전체가 적군의 아지트로 낙인찍힌 우리 동네를 미군 무스탕 폭격기가 하늘 위에서 굉음을 내며 폭탄을 쏟아부었고 휘발유 드럼통을 수없이 투하해 댔다.
마을에 있는 집들이 온통 불에 타버리는 것 같았고 폭격기 위에서 쏘아대는 총알을 맞고 도망가던 괴뢰군들이 죽어 나가 자빠지는 광경을 직접 방공호에서 내다보던 우리는 아연실색했고 한 편에 전쟁영화보다 더 처절하게 느껴졌다 불타는 우리 동네가 너무 불쌍했다.
방공호에 있던 동네 사람들 모두가 울고 있었다.
공포에 질려서 그리고 우리 집들이 다 타버리는 것 같아서...
20여 호의 온 동네가 절반 이상이 잿더미가 되었고 우리 집은 불이 난 후 폭격기가 사라지자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 불을 잡았다.
이틀 후 2차 폭격 시에는 온 동네 집이 거의 다 타버렸다 한두 집만 남기고....
음력 3월 25일 우리 집이 불타던 날은 우리 할아버님 기제사 날이었다.
목을 매 자살하신 구장 댁도 폭격으로 다 타 없어졌고 시력이 안 좋았던 구장 댁 할머니와 그 댁 며느리도 시어머니와 함께 불에 타 돌아가시는 둥 실감이 나지 않는 일들이 속출했고 마을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한 집안이 쑥대밭이 된 구장 댁
부모님 장례를 모시고 간 도래울마을 큰딸이 마을에서 방공호가 무너져 어린 딸과 함께 또 사망했다는 소식이 우리 가슴을 슬프게 했다.
그 후 불탄 자리에 다시 집을 짓고 여러 식구가 거처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까지는 오랜 시일이 흐른 뒤였다.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우리는 다시 학교에 나가게 되었고 불타버린 학교터엔 불탄 잔재들만 어지러이 남아 있고 그래서 우리 5학년들은 10리도 더 되는 숲이 너무 우거져 무섭게 느껴지는 서삼릉 재실에 가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 후 운동장에 천막을 치고 공부하였고 지금도 초등학교 졸업사진에는 천막 학교 사진만 을씨년스럽게 찍혀져 있다.
며칠 있으면 다가오는 6.25 전쟁 기념일
아직도 눈에 선한 그 날의 기억들과 참상들은 우리와 우리들의 대대손손 또한 우리 역사 속에서도 잊지 않도록 영원히 기억 해야 하리라 믿고 다시는 6.25와 같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모두 재발 방지에 더욱더 노력 합시다.
6.25 전쟁 그 전쟁을 잊지 않도록 더욱 더 .....(끝)
첫댓글 6.25. 정말 생각하기도 싫은 내용이지요
4살때 부모 손잡고 피난시절이 생각나네요.
나는 지금도 생각합니다
전쟁은 싫다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