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 : 2008-9-12 (금)
방문지 : 호치민 (Ho Chi Min)
날씨 : 31도, 맑음
우리는 남부 베트남의 수도였던 호치민으로 가기 위해 Vung Tau (붕타우)항에 도착했다. 아버님이 베트남 참전용사였기 때문에 어렸을 때 슬라이드로 사이공 (Saigong, 현 호치민)을 많이 보아 온 터라, 기대도 컸으며, 현재는 미국발 신용위기 및 베트남의 IMF 구제 금융설로 원금을 까먹고 있지만, 우리가족이 가지고 있는 베트남 주식 펀드 및 인프라스트럭쳐 펀드(Infrastructure fund, 도로, 통신, 전기 등 사회간접자본에 그 개발 수익을 배당받는 펀드)를 미래 가치를 점쳐보기 위한 특별한 기회이기도 했다.
항구에서 시내까지는 버스로 2시간여를 이동하는데, 호치민과 베트남의 참모습을 직접 볼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이었다.
우리는 도로가에서 3평 내외의 초가집들 군락을 많이 볼 수 있었고, 쓰러져가는 초라한 집들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 산다. 그런 곳이 가게이며 식당이다. 또한 우리가 한국에서 보는 가장 화려한 자동차 매장들도 이러한 초라한 가옥이고, 이곳에 BMW등 차를 몇대 전시해 두고 팔고 있다. 충격적이다.
베트남의 개발을 반영하듯이 많은 중장비를 팔고/빌려주는 매장도 넓은 땅에 그저 펜스를 쳐놓고 팔고 있다.
나트랑에서도 그랬듯이 운행중인 버스는 현대/기아 등 국산 중고차가 많다. 심지어 한글표지를 그대로 붙여 놓고 운행한다. 한국차가 유명하기 때문에 한글이 붙어 있어야 더 가지가 높단다.
사회주의의 도미노(Domino, 베트남은 중국,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등과 연결되어 있다) 를 우려한 미국의 참전으로 확전된 베트남의 10년간의 남북전쟁은 호치민이 이끄는 북군의 승리로 끝나고, 한국군까지 동원된 전쟁에서 미군이 유일하게 패한 전쟁이다.
한국은 덕분에 M16소총, 토우미사일 등으로 군사력이 현대화되고 또한 젊은이들의 목숨을 대가로 보상받은 경제력과 이어진 중동 건설 특수로 아시아의 젊은 용이되는 초석이 되기도 하는 등 베트남은 한국과 인연이 깊다. 공산주의인 북과 민주주의인 남이 자웅을 겨루는 우리나라와 상황과도 비슷하여, 남부 베트남의 패망은 본인의 중고등학교 도덕시간에 방공교육이 강화된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나무뿌리만 먹으면서도 민간인 복장으로 전투를 벌여온 베트공(북부군)들은 식별하기도 여려웠을 뿐만 아니라, 작은 체구를 이용하여 지하땅굴에 은신하고, 밤에만 이동하는 등 허리가 기름진 미군으로서는 도저히 소탕할 수 없는 적이었고, 최대 격전지였던 메공강 주변에서는 미해군이 함대, 항공기와 헬기 등을 이용한 형식적인 공격이 많아 진작 보병들간의 전쟁을 포기한 상태였다 한다.
패전 후 미국은 엠바고(EMBARGO, 무역제한 조치)를 선언하여, 사회주의로 통일된 베트남은들은 94년에 엠바고가 해제될 때까지 경제적 고통을 받았으며, 남부인들은 호치민을 여전히 사이공이라고 부르며 옛 영예를 생각하고 있다.
외국인에 대한 주식투자 허용 등 개방을 선언한 베트남에서는 같은 사회주의국가라 해도 호치민에서 북경과 상해의 웅장함과 빌딩숲을 구경할 수 없다. 미국의 패전지역에 대한 보복이었다고나 할까?.
우리는 과거 사이공의 대통령궁이자 지금은 통일기념관을 방문해서, 당시 대통령이 전시에 사용하던 집무실, 식당 등을 구경하고 전쟁에 대해서 좀 더 배울 수 있었으며, 현재는 사용되지 않고 있지만(통합 수도인 하노이로 이전해서), Good Morning Vietnam인가하는 영화에서 마지막으로 미국사람들을 구출했던 장소인 미국대사관 건물, 프랑스인들이 지어놓은 노틀담 사원을 구경하고, 5층 건물인 오래된 REX Hotel 옥상에서 호치민 시내를 관망할 수 있었다. 랙스호텔은 매주 미군의 전쟁과정을 중계했던 장소로 유명하다 한다.
그리고 중앙우체국에 가서 우표집을 샀다. 어릴 때 베트남에서 아버지가 보내 온 편지에 붙어 있던 우표가 생각나서 였다. 흑백수준이었던 우리나라의 60년대말 우표와는 달리, 재질이 좋은 종이에 칼러풀했고 크기도 더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중앙우체국 옆에는 HSBC 호치민 건물이 보인다.
점심은 인근의 호텔에서 부페로 했다. 나는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음식에 길들여져 있어 이것 저것 잘 먹었는데, 아이들은 잘 먹지도 못하고 벌써 김치를 찾는다. 아이들에게는 시드니에 도착하는 날 간장 떡복기를 사주던지 해준다고 약속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자개공장을 방문했다. 우리 집에는 아직도 아버지가 베트남에 계실 때 사오신 자개로 만든 사슴풍경화가 있는데, 베트남인들의 자개제작 수준은 대단하다. 우리나라의 것이 검정색으로 옻칠된 바탕에 조개껍질을 이용한 꽃무니등 장식이라하면, 베트남은 다양한 색상과 음각을 이용한 더 화려한 작품들이 많다.
자개장만이 아니고, 컵받침, 풍경화 등 정말 사고 싶은 품목들이 많았지만, 크루즈 여행을 하고 있어 운송문제 관계로 포기했다. 배달을 해준다고는 하는데, 현재는 호주도 베트남도 잘 모르는 상황이라서 그냥 눈 동냥만으로도 만족했다.
아직은 베트남에 투자의 비젼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가족의 베트남에 대한 투자는 5년 이라는 장기적 안목에서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이른 감이 있다.
시내 어디를 봐도 높은 건물은 없고, 한국 건설사들이 짖고 있는 아파트들이 보인다. 호치민의 경제단계는 70년 년 초 우리나라의 여의도를 짖고 있는 정도가 아닐까 싶다.
놀란 사실이지만 베트남은 현재 세계2위의 수준의 쌀과 커피 수출국이라 한다. 주요 교통수단은 아직도 자동차가 아니고 오토바이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이유로 일본이나 한국의 중고 오토바이를 산다 한다. 신호등이 바뀔 마다 넘치는 오토바이 물결은 호치민의 현주소이다.
돌아오는 오는 길에 베트남인들이 자랑하는 333맥주를 또 많이 샀다. 베트남인들은 3이라는 숫자를 좋아한다. 삼자가 무려 3개이니 이 맥주가 정말 베트남인들에게는 기쁨을 주고 있으리라 생각해 본다.
베트남 동화(VND)로 환전하지도 못하고 달러로 1불짜리가 없어 몰려다니는 아이들의 기념품을 하나도 사주지 못한 것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