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동네가옥들
수도국산달동네에는 1960년대 후반까지도 초가가 많았다. 지붕재료인 짚(이엉)을 파는 장사들이 배를 타고 수문통 일대까지 들어와 장사진을 이루었다. 1971년부터 지붕개량사업이 시작되면서 초가지붕은 시멘트 슬레이트지붕이나 기와지붕으로 바뀌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지붕개량을 할 형 편이 되지 않아 ‘루핑집’에서 살았다. ‘루핑’이란 두꺼운 종이 같은 섬유제품에 아스팔트를 먹인 지붕 방수재료이다. 루핑은 태풍은 물론 바람이 조금만 세게 불어도 이내 날아가 버려 사람들을 애타게 만들었다.
달동네가옥은 대개 다가구형식으로 1 ~ 2개방과 1개의 부엌을 단위로 구성된다. 한 가구당 평균 면적은 3.5평 내외이며 대부분 5 ~ 10평인데 한 가구당 2세대가 생활한다. 15 ~ 20평에 이르는 규모도 있다. 가옥의 절반가량이 2개 이상의 부엌을 가지는데, 이것은 세입자를 받기 위한 것이 다.
“미로와 같은 좁은 골목길, 다닥다닥 머리를 맞대고 이어지는 나지막한 지붕들, 부서질 듯 낡은창 네것 내것이 따로 없는 한 뼘의 앞마당 ... 좋은 이웃이 늘 가까이 있어서 그 시절이 참으로 행복했습니다.“방흥식(수도국산 주민)
출처 :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전시도록(2006)
수도국산달동네는 90년대에 들어서 일대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인천시에서는 항상 화재 ․ 재난에 취약한 실정, 열악한 주거환경을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것과 시세확장에 따른 구도심지역의 도시경관을 일신한다는 차원에서 수도국산일대에 대한 전면적인 주거환경개선사업을 착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곳에 거주하는 인구는 약 3,000여 세대로 전국최대규모의 달동네였다. 이 엄청난 규모의 사업이 성사된 배경에는, ‘박연수’ 구청장님(1990, 1년간 재직)과 이 지역 출신의 서정화 전국회의원(제 12,13,14,15대)이 손잡고 ‘주거환경개선특별법’라는 것을 만들어 정부지원을 이끌어낸 공로가 컸었다.
필자가 기획팀장으로 재직시(1999~2000) 공무원의 창의적인 시책개발과 실력배양을 위한 ‘동구발전포럼’이란 연구모임을 만들고 주관하였다. 연구토론이 활발하게 벌어졌고 실제적인 시책반영된 성과도 적지 아니하였다. 한편 동구관내 ‘해반문화사랑회’에서 ‘지역문화의 활성화‘란 주제로 당시 김창수 구청장님을 모시고 토론회를 개최한 바 있었는데, 그 때 한 참석자가 다음과 같은 취지의 제안으로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인천시민의 고향마을이기도 한 이곳을 대규모 재개발 바람에 그대로 소멸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것이 아니라 문화유적으로 그 흔적을 보존해야 한다.」
토론회에서 나온 잡다한 얘기들은 토론회가 끝나고 나면 그저 그만인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 아이디어가 파묻히지 아니하고 불씨를 살리게 된 것은 실력과 열정을 겸비한 한 직원의 덕분이었다. 당시 그 자리에 참석하였던 문화공보실의 ‘허준희’라는 직원이 동구발전포럼에서 그에 대한 당위성을 논문으로 작성하여 발표하게된 것이다.
필자는 아주 좋은 시책이라고 판단하고 재빨리 실행에 옮겨야 한다고 생각하여 당시 김창수 구청장님(1995 ~ 2002, 민선 초대, 2대)에게 ‘박물관건립안‘을 보고하였다. 수도국산에 대한 전면적인 주거환경개선사업은 애당초 박연수 구청장님이 벌여놓은 사업이었다. 그러나 이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마무리한 것은 김창수 구청장님이었다. 워낙 대규모 재개발사업이었다. 주거보상, 철거, 이주문제 등과 관련된 크고작은 집단민원이 끊이지를 아니하였다. 이 분의 재임중 내내 온갖 고초를 몸으로 받아내었다. 김창수 구청장님은 이 계획을 보고받으면서 한참동안 서류를 응시하였다.
그래서 필자는 강한 소신으로「송현 ․ 송림동 지역은 인천시민의 고향마을이나 다름없는데, 이곳이 재개발되어 사라진다는 소식에 많은 주민들이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또한 산업화과정에서 열심히 살았던 어버이세대의 모습을 후세에 전한다면 산교육이 될 것 같습니다. 예산은 국고 및 시비 지원을 대부분 받도록 하겠습니다」라는 의견을 진달하였다. 「우리나라 최초로 재개발지역을 테마로 한 특색있는 박물관이 될 것이며, 구청장님의 크나큰 업적으로 길이 남을 것입니다」
김창수 구청장님의 결재가 나자마자 소관부서인 문화공보실에 구체적인 실행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하라는 지시사항이 전달되었다. 한편 시책개발을 주관하는 기획팀장이 아무리 좋은 시책을 개발하여 구청장의 결재를 득하여 소관부서에 시달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소관부서에서 안좋게 보거나 소극적이면 무산되는 경우가 많았다. 다시말해 소관부서장의 의지와 능력이 중요한 변수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 당시 문화공보실장은 ‘강석무’라는 분이었다.
강석무 실장님은 ‘박물관건립안’에 대하여 동구실정에 딱 맞고 꼭 필요한 사업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사명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강석무 실장님이 재직하는 동안 전담직원을 배치하고 구체적인 기본계획안을 수립하였다. 그 분이 문화관광부를 오가면서 국비보조금을 흭득하는데 성공하였다. 출발이 좋았다. 시작이 반이 아니던가. 그 때 그 자리에, 그 분이 있었던 것이다. 박물관건립에 소요되는 기간은 5년간, 사업비는 총 14억원이었는데 국비 440백만원(31%), 시비 870백만원(62%), 구비 100백만원(7%)으로 되었다.
박물관이 들어설 장소는, 달동네지역의산꼭대기에 본래부터 배수지가 있었는데 그 부근에 공원시설(현 송현공원)을 조성하기로 하였으므로, 공원관리동을 겸하여 220여평 남짓한 아담한 규모로 짓되 건물모습은 작품공모를 통해 인천항구를 상징하는 배모양으로 정해졌던 것이다. 그리고 건축공사는 그 당시 솔빛아파트의 건립과 송현공원을 조성하는 사업시행자였던 대한주택공사(현 LH공사)가 대행하였다. 박물관명칭은 공모를 통하여 ‘수도국산달동네박 물관‘으로 정해 졌다.
박물관건립을 위한 준비단계에서 필자는 승진하여 동장으로 나가있었는데, 2002년도에 이화용 구청장님(2002 ~ 2010, 민선3대․4대)으로 바뀌었다. 다행히 새로운 구청장 역시 전임구청장이 추진하였던 박물관건립을 계속하기로 방침을 정하였다. 이화용 구청장님은 어찌보면 고난도사업인 박물관을 어떻게든 성공적으로 개관해야하는 과제에 대하여, 어느 간부가 이 사업을 충실히 잘 추진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고민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결국 필자가 본래 시작부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고, 문화예술분야에서 남다른 역량이 있다고 판단하였는지 문화공보실장으로 발탁되었고, 발령장을 받는 자리에서 이 사업의 성공적인 완수를 간곡히 당부하였던 것이다.
2003년부터 문화공보실장으로서 박물관건립을 주관하게 되었는데 가장 먼저 기본설계를 확정짓는 일부터 하였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박물관의 기본설계를 도출하는 과정에는 현지실정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관여를 해야하는데, 그렇지 아니하면 자칫 뜬구름잡기식이 될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강한 자신감이 있었다. 다름아닌, 이 사업을 주관하는필자는 이미 달동네지역의 동직원(송현1동사무소, 1986 ~ 1989)으로 몇 년간 근무하면서 산비탈과 골목을 헤집고 다녔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 곳의 지리사정, 생활모습을 아주 소상히 파악하고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큰 공사(‘동구청소년수련관’, ‘동구노인복지회관’)를 주관해본 경험이 있었다.
기본설계의 주된 컨셉은, 시기적으로는 60,70년대 중간쯤 1971년 12월, 어느날 저녁 7시로 잡았다. 특정장소는 송현시장 부근의 어느 골목풍경을 상정하여 그 시절 가게(솜틀집, 이발관, 연탄집, 잡화점 등)와 가옥을 배치하였다. 가옥형태는 오래된 항공도면으로 고증하였다. 벽면에는 벽화를 그려넣어서 전체적인 달동네모습을 조망하도록 하였다. 실존인물들을 본뜬 마네킹, 밤과 낮의 조명, 오래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구성진 노래, 빨간 전등이 매달려 있는 공동변소, 컴컴한 골목 어디선가 들리는 아기와 고양이 울음소리, 부잣집 TV화면에서 김일 레슬링경기의 중계, 투박하고 때묻은 생활유물들을 관람동선을 따라 전시연출하였다. 말하자면, 영화세트장같은 느낌이다. 관람객은 잠깐이나마 과거속에서 머므르게 될 것이다. 다른 박물관과 차별화되는 포인트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실시설계과정에서 세밀하게 보완하고 추가하였다.
실존인물들
호랑이눈썹 할아버지 맹태성 맹태성 할아버지는 평안남도 안주에서 출생하여 송현동 56번지에 살면서 인천(조선)기계제작소 (대우중공업 전신)에서 일했다. 퇴직 이후 돌아가시기 전까지, 수문통 일대를 청소하고 송현동 주변 폐지를 주워 어려운 이웃을 돕는 선행을 베푸는 등 많은 사람의 귀감이 되었다.
마지막 연탄장수 유완선 송현1동43-13에 거주하였다. 수도국산 달동네가 사라질때까지 지게로 연탄을 배달한 사람이다. 1990년대 후반까지 달동네 사람들의 절반이 연탄에 의존해 겨울을 나야 했다. 한 장에 4kg가량 인 연탄 25장을 등에 지면 이내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고지대라는 이유로 가게에 연탄을 대주 지 않아 공장까지 찾아가 항의를 하곤 했는데, 재개발 이후 용인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다.
구름다리 솜틀집 박길주 동인천 구름다리는 1960년대 이전부터 솜틀집이 운집하여 있었다. 한국전쟁 후 황해도 피난민으 로 인천에 정착한 박재화씨(작고)는 고향 은율 지방에서 하던 목화업으로 생계를 잇고자 은율면 업사라는 이름으로 솜틀집을 열었다. 전동 7번지 옛 황인의원 근처에서였다. 박재화(1대), 박현석 (2대)를 이어 박길주씨는 이곳에서 3대째 가업을 계승하여 2000년도까지 솜틀집을 운영하였다. 고인의 유언으로 솜틀기를 박물관에 기증하였다.
토박이 이발사 박정양 박정양씨는 1957년(당시 15세)부터 수도국산 달동네 송현동83번지에 있던 대지이발관에서 근무 하였다. 대지이발관은 한국전쟁 직후부터 있었으며, 인근에서 가장 오래된 이발관 이었는데, 흙 벽에 기와집으로 약 5평 정도의 크기였다고 한다. 대지이발관에서 이발기술을 처음 배우게 되는 데, 처음 몇 년간은 수습기간으로 공동수도에 가서 물을 길어다 물통에 채우고 물을 데우고 청소 를 하는 등 고된 일을 했다고 한다. 현재 강화이발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여전히 달동네 단골손 님들의 머리를 단장해 주는 일을 하고 있다.
출처 :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전시도록(2006) |
좋은 목적과 당위성을 제시하였다고 해서 그것이 주변에서 그대로 이해해주고 지원해주리라는 것은 오산이었다. 박물관건립은 어디까지나 꿈과 열정를 품은 관계직원들의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박물관건립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려면, 사업비에 대한 예산반영이 되어야 하고, 존립근거에 관한 조례제정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일부 구의원의 반대가 완강하였고 사업포기를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또한 지방언론 역시 그러한 주장과 논리에 맞장구를 쳐서 수시로 부정적인 기사를 게재하는 바람에 발을 동동굴렀다. 반대하는 이유로는 몇가지 우려내지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박물관건립이 구재정에 과중한 재정부담을 줄 가능성이 크다. 낙후된 동구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 그리고 공사계약에 있어서 비리의혹이 있다는 등이었다.
우선 취약한 구세에서 박물관건립이라는 거창한 사업을 벌여 구재정에 과중한 부담을 줄 우려가 있으므로 승인해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 박물관은 전시공간이 220여평에 불과한 소규모의 테마박물관으로서 총사업비가 14억원 정도에 불과할 뿐이다. 사업비 대부분은 국비, 시비로 충당하고 구비부담은 최소화할 수 있다. 개관후 운영예산 역시 관람을 유료화하면 수익성이 어느 정도는 보장되기 때문에 크게 부담될 것이 없다고 설명하였다.
다음은 「낙후된 달동네를 뭐 볼것이 있다고 굳이 재현하고 박물관으로 만드느냐. 동구의 부끄러운 과거를 전국에 홍보하는 꼴이다. 동구망신이다.」라는 논리로 반대가 심하였다. 여기에 대하여는「박물관은 수도국산에 살았던 주민들의 생활모습을 반영할 뿐아니라 6,70년대 산업화과정에서 열심히 사셨던 어버이세대의 이야기와 교훈을 후세에 전하며, 또한 그 시대의 유물과 자료를 생활사적인 면에서 정리, 보존하면 훗날 훌륭한 문화적 가치로 남는다.」라고 대응해 나갔다. 유물이 부족한 것도 하나의 빌미가 되었다.「박물관에 전시할 것도 별로 없는데 어쩌자는 거냐.」아픈 지적이었다. 사실 수도국산의 현장에서 채집한 유물은 수량이 많지 않았다. 부족한 유물(사진자료 포함)은 나중에 주민홍보를 통해 기증받거나 공개구입하여 채웠다.
「대부분의 박물관들이 개관초기 반짝 인기를 끌다가 텅빈채로 운영되고 있다. 달동네박물관 역시 같은 길을 걸을 것이다. 결국 예산만 잡아먹는 하마가 될 것이다. 지금이라도 사업을 중단시켜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할말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준공된 박물관건물에 누수현상이 발생한 바 있었다. 부실공사가 쟁점화되고 또다른 반대논리가 되어 무진 애를 먹기도 하였다. 차라리 헬스장으로 용도변경하자는 주장도 나왔다. 그 밖에도 이러저러한 이유로 끈질기게 박물관사업의 포기를 종용하고 압박하였다.
여태까지 가보지 않은 길이었다.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사업도 아니었다. 때문에 일부 구의원들의 관점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솔직한 심정으로, 필자 역시 일벌여놓고 강변은 하였지만 성과를 낙관하지는 못했다. 일부 구의원간 공방(攻防)은 많은 시간을 벌게 하였다. 만약 그게없었으면 속전속결로 공사를 밀고나갔을 테고 박물관개관은 2년 정도 빨랐을 것이다. 그러나 작품완성도를 기대하기란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많은 검토와 토론, 자문, 경험을 거치고 시행착오를 수정하는데 행정력을 집중하였다.
공사계약에 있어서 비리의혹은 전혀 터무니 없는 것이었다. 전시구성분야의 시공권을 획득하기 위해 7개 업체가 치열하게 경쟁을 벌였는데, 업체선정은 전국적인 작품공모를 하고 최우수작품을 제안한 업체에다가 설계 및 시공권을 부여하기로 하였다. 소위 ‘협상에 의한 계약방식’으로서 관계법규에 정해진 바에 따라 작품공모를 전국적으로 하였다. 심사위원은 관련분야의 전문가로 하는 등 자격을 엄격히 함과 동시에 철저한 비밀을 유지하였다. 심사과정에는 구의원까지도 참여를 보장하는 등 최대한 객관성 및 공정성을 기하여 응모한 7개 작품중 1개 작품을 최우수작으로 선정하였다.
추측하건대, 이화용 구청장님에게 청탁을 넣은 업체가 한, 두업체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를 봐달라는 언급이 전혀 없었다. 구청장부터 이러한 태도였다. 윗물도 맑았고 아랫물도 맑았다. 공사계약이 끝난후, 공사전에 한번은 전분야(전시구성, 전기, 소방, 음향)의 업체사장들을 불러 모아놓고 점심을 대접하면서「향응, 선물, 돈봉투는 절대로 사양한다. 여러분이 공사를 성심성의껏 수행해주는 것 만큼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없다.」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던 적이 있었다.
경험으로부터 배운 바는, 뭔가를 받으면 나중에 청구서가 꼭 돌아온다. 공사내내 업체에 끌려다니기가 쉽다. 그러나 업체와 소통은 필요하다. 함께 밥먹으면서 난제들이 술술 풀리는 경우가 있다. 전시구성분야의 시공권을 획득한 업체는 ‘보국문화’라는 데였다. 그 사장은 성실하고 겸손할 뿐만 아니라 미술과 출신으로서 감각과 실력이 있었다.
박물관건립이라는 고급문화사업을 동구청에서 콘트롤하기란 역부족이라는 의견이 없지 않았다. 박물관건립과 운영을 위한 ‘박물관팀’이라는 전담조직을 만들었다. 전문인력으로는 학예연구사 1명을 채용하였다. 주민과 전문가가 참여하는 ‘박물관건립 및 자문위원회’를 구성 하였다. 특히 국립민속박물관의 학예연구관 2명(이관호, 기량)을 자문위원으로 초빙하였다. 이 분들이 자기일처럼 자문에 응하고 설계검토를 해주고 유물전시 및 배치에 관여를 해주는 바람에 상당히 수준급으로 개관작업이 진척될 수 있었다. 그 밖에도 60,70년대 현지에 살았던 실존인물들을 발굴하여 마네킹으로 재현하고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채집하여 현실성있는 달동네골목을 재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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