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정공(忠靖公) 노포(蘆浦) 안 선생(安先生)에게 어진 아들이 있으니 휘가 순흥안씨(順興安氏)는 고려(高麗) 상호군(上護軍) 휘 자미(子美)에서 계출(係出)되어 이분이 시조이다.
여러 대를 지나 문의공(文懿公) 질재(質齋) 휘 문개(文凱)가 있으니 이분이 고조(高祖)이고, 그 아들 휘 천선(千善)은 문과(文科) 보문각(寶文閣) 대제학(大提學) 순성군(順城君) 시호는 양정(良定) 호 신암(愼庵)이니 이분이 증조부(曾祖父)이고, 그 아들 휘 손주(孫柱)는 문과 찬성사(贊成事) 순양군(順陽君) 시호는 경혜(景惠)니 이분이 조(祖)이고, 그 아들 휘 준(俊)은 곧 노포(蘆浦)선생이니 포은(圃隱) 정선생 문하(門下)에서 유학하며 성리학에 밝고 충의의 행실에 독실하더니 일찍이 문과에 올라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가 되고 경상, 충청, 전라, 삼도의 체찰사(體察使)를 역임하였다.
고려의 운이 다함을 당하여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절개를 지켜서 우현보 등 여러 선비와 더불어 장을 맞고 먼 곳으로 유배되시니, 처음 의령에 유배되었다가 뒤에 예천의 노포촌에 이배됨으로써 인하여 호를 삼고 도롱이를 입고, 삿갓을 쓰고 스스로 생을 마치니, 태종이 그 정절을 아름답게 여겨 시호를 충정(忠靖)으로 내렸고, 기천서원(箕川書院)에 배행되었다. 이분이 곧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자산방씨(慈山邦氏) 따님이다.
공은 효우(孝友)한 성품으로써 충의의 행실이 있더니, 그 선부의 고충과 탁절을 생각하여 때때로 야은(冶隱) 길선생이 노포선생에게 보낸 편지를 외우시니, 그 글귀에 “강산이 예전과 달라졌으니 경치와 물정도 그 모습이 변하였네. 옥인과 더불어 노닐던 일이 다시 한 번 이루어 질 수 있을까.” 하는 구절을 읽고 일찍이 눈물을 흘리면서 한스러움을 머금지 않는 적이 없었다.
또 혹 옛사기를 열람하다가 수양산과 동해의 고사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소리를 높여서 세 번을 반복하니 어찌 충효지심에서 유발함이 아니겠는가 ? 시골 환경에서 덕(德)을 기르시고 이름난 권력 마당에 발을 들여놓으시지 않았더니 세종 정사년(1437) 소헌왕후(昭憲王后)가 들어서 알고 공과 외척의 관계라 하여 여러 번 편지를 보내 출사할 것을 권유하고 황간현감(黃澗縣監)을 제수하므로 부득이 배사(拜謝)하고 돌아와 정침에서 고종(考終)하니 그 해 정월 25일이었다. 예천의 남쪽 건지산(巾芝山) 선조 묘소 아래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례하였다. 배(配)는 안동김씨 판사 돈식(敦式)의 따님으로 연분으로 장례하였다.
3남을 낳았으니 장남은 질(質)이니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大司諫)과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냈고 호가 눌암(訥庵)이다.
그 다음은 민(敏)이니 생원(生員)이요, 그 다음은 의(義)니 사정(司正)이다. 승지가 3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 숭도(崇道)는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수찬을 지냈고, 숭덕(崇德)은 직장(直長)이고, 숭지(崇智)는 훈도(訓導)이고, 딸은 증 영상 김적(金磧)에게 출가하였다.
생원(生員)이 1남 3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수명(守命)이고, 딸은 정맹아(鄭孟雅) · 주맹량(朱孟良)·손계원(孫繼元)에게 출가하였다.
사정이 1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만정(萬正)이고, 딸은 박경문(朴慶文)에게 출가하였다.
숭도 아들은 사직 건(建)과 선(選)·기(起)·규(赳)이다. 딸은 중추 김심(金諶)에게 출가하였다.
숭덕 아들은 충무위(忠武衛) 효조(孝祖)와 승조(承祖)·계조(繼祖)이고, 딸은 찰방(察訪) 김치경(金致涇) · 반종원(潘宗源)에게 출가하였다.
숭지(崇智)의 딸은 박수우(朴守遇)에게 출가하였다.
김적(金磧)의 아들은 수동(壽童)은 영상(領相)이고, 수경(壽卿)은 판서(判書)이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 공의 묘소에 옛날 비석이 있었는데 손 자와 증손자 대로부터 지금에 이미 5백 년의 오랜 세월이 흘렀다. 세월이 많이 흘러 바람과 비에 마멸되어 돌이 이지러지고 이끼가 끼고 뭉그러져서 읽지 못하니 공의 덕행과 문장을 어디에서 상고해 자세히 알겠는가. 자손의 아픈 한을 스스로 억제치 못하므로 종의(宗議)가 크게 발의되어 장차 돌을 고쳐 세우려 함에 어진 손자 승락(承珞)이 왕조실록에서 뽑아 모으고 가승(家乘)에 실린 것을 색출하여 장문 한 통을 지어 효진(孝鎭)·홍식(洪植)과 함께 와서 병규(炳逵)에게 그 명(銘)을 청하였다. 내가 감당하지 못할 일이나 나 또한 이손(離孫)의 반열에 있으니 어찌 감히 거절하겠는가 ? 명을 한다.
거룩하신 노포선생은 憲憲蘆浦
충의가 뛰어났도다. 忠義卓犖
매우 착한 아들을 두었으니 有子克肖
공이 이어서 나왔도다. 公乃繼作
이런 아버지에 이런 아들이 있었으니 是父是子
포은(圃隱) 야은(冶隱)과 덕이 같았도다. 圃治同德
5백여 년 세월이 지나, 五百餘禩
추모함이 더욱 돈독하여 追慕彌篤
반듯한 비석 다시 세우니, 改竪貞珉
길이 천억 년 전해지리라. 永垂千億
인동(仁同) 장병규(張炳達) 삼가 짓고, 광주(廣州) 이채진(李採鎭)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