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니! 얼마나 오랜만에 고향 말로 불러보는지 모르겠슴둥. 이런 거이 다 나이 들어 기런 거인가 싶으스리 기분이 우째 싱숭맹숭함매. 뿐인 줄 아십네까? 아바이며 할아바이, 죽은 막내 갓나이 울음까지 들리우다. 기러구 보이 이제 이 땅에 살아남은 오마니의 자식이라고는 지밖에 없구만기래요. 지가 무슨 운명을 타고 났는지 동생들마저 죄다 떠나보내고스리 이렇게 혼자 형제들을 떠올리는 신세가 됐는지, 원. 이게 다 교통사고 탓은 아인지 모르갔소.
이 일을 한 지 벌써 45년째교통사고는 지 나이 쉰 다섯인가 그랬을 때우다. 여느 때처럼 시장에서 일을 마치고스리 버스정류장에서 15번 버스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겠슴둥. 기런데 우이된 거인지 병원에 누워 있는 거이 아이겠소? 내가 와 여기 누워 있나 암만 생각해봐두 그 이유를 모르겠슴둥. 검사 결과 15주 진단이 나왔수다래. 아들 녀석은 그냥 쓰러져선 이리 몸이 상하진 아이한다며 교통사고가 분명하다고 기러더군만요. 기런데 사고를 당한 기억이 나야 말이지비. 장사를 위해 청력만큼은 살릴라구 5년을 고생했지만 도리가 없었수다래. 들리지 않는 귀로 손님을 어떻게 받느냔 말임매? 기거이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손님의 입 모양을 보면 알 수 있지비. 또 필담에, 요즘이야 휴대폰으로도 글자를 보내고 받는 세상이니 어려운 것도 없고 말이우다. 기리구 보이, 지가 이 일을 한 거이 벌써 45년째구만기래요. 큰아들 여섯 살 때 이 일을 했으니 말임매.
어느 날, 아바이가 말했수다래. 형과 단 둘이
피란 온 양반인데 장사를 한다니 굶진 않을 것
같아서 보내기로 맘먹었다고…
기렇게 해서 맺어진 억지부부의 인연.
기런데 아새끼는 와 기리 잘도 들어서던지.오마니, 요즘 들어 부쩍 고향 흥남 부둣가가 눈에 훤하우다. 당장 고향집으로 찾아가라고 해도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이 말이우. 일주일만 피해 있다가 오라는 할아바이의 말을 믿고 온 게 이리 될 줄 누가 알았겠슴둥. 함포사격은 정말 끝이 없었수다. 어쩌면 그거이 제련소와 비료공장 굴뚝이 지천이었으니까네 당연했겠지만서두 말이우. 중공군의 개입으로 흥남철수가 시작되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피란 보따리를 싸야 했지비. 기때 지 나이가 열 다섯, 오마니는 뱃속에 막내를 품고 있었더랬수. 보름달처럼 부푼 배를 안고 우리 가족은 남쪽으로, 남쪽으로 향하지 않았겠슴둥. 밤바다를 가르며 배는 며칠 동안 달리고 또 달렸지비. 그 와중에 오마니의 산통이 시작됐수다. 세상에, 얼마나 수치스러운지. 오마니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이를 낳다니 말이우다. 기땐 낯선 사람들 앞에서 피를 쏟으며 출산하는 오마니가 부끄러워 혼났슴둥. 오데 바다 밑에라도 숨어버리고 싶었슴네다. 갓나이를 낳았지만 물도, 갈아입을 옷도 없는 처지에 거제도에 닿았지 아이했수? 갓나이와 산모를 얼른 편히 쉬게 하고 싶었소만 빨갱이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부두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하이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자지도 못한 상거지로 경찰의 조사를 받아야 했지비.
오마니도 알다시피 바닷가 근처에 겨우 움막을 얻었수다래. 기개서 해초며 생선, 고둥 등을 잡아서 끼니를 연명하지 않았겠슴둥. 기렇게 3년이란 세월을 훌쩍 흘려 보내고 나이 전쟁이 끝났지비. 하지만 고향은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이 되고 말았수다. 아바이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가족을 위해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수다. 기러다가 기장이란 곳에 일자리를 얻어 이삿짐을 쌌수다. 아버지의 일자리는 고작 노무자일 뿐, 전처럼 회사 간부는 아니었슴둥. 기래서 아바이는 식솔을 위해 좀 더 나은 보수를 찾아 또 우암동으로 옮겼지비. 가정은 원상태를 회복하는 듯했수다. 기런데 갑자기 뇌염이 유행하더니 가족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막내가 우리 곁을 떠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지비. 우리는 한동안 멍하게 지내야 했수다. 기러다가 지는 조선방직에 취직을 아이 했슴둥. 기런 후, 몇 년을 방직기계에 둘러싸여 살아야 했지비.
아바이 반대로 못한 결혼 오마니도 알다시피 그때, 그 사람이 나타났수다. 회사 앞에서 기다리고, 집 앞에서 기다리고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싫다고 했지만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보내던 수많은 편지와 정성에 지는 마음이 끌려가고 말았슴네다. 태어나 처음으로 받은 이성의 사랑. 지를 사랑하는 사람이 이 땅에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다른 건 다 버려도 이 사람만큼은 버리지 않을 거라 다짐했더랬슴네다. 헌데 웬일이라우. 정작 부모님께 소개하니 안 된다니 말이우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줄 알았슴네다. 고작 군인이라서 안 된다는 게 말이 됩네까? 기랬으니 곁에서 안 된다고 고함을 지르는 아바이보다는 오마니만 쳐다볼 수밖에 없었지비. 오마니는 끝내 지 마음을 외면했슴네다. 그 사람은 술을 먹고 울고불고 정말 때 아닌 난리를 치지 않았겠슴둥. 그때 차라리 제가 더 독했어야 하는데, 저 또한 그러지 못했수다.
어느 날, 아바이가 말했수다래. 형과 단 둘이 피란을 온 양반인데 지금은 국제시장에서 구제품 옷가게를 한다더라, 장사를 한다니 굶진 않을 것 같아서 보내기로 맘먹었다고 말이우. 기렇게 해서 맺어진 억지부부의 인연. 기런데 아새끼는 와 기리 잘도 들어서던지. 자식이 태어나면 술이라도 좀 줄일 줄 알았는데 남편은 그렇지 않았슴네다. 그런 어느 날 밤에 저는 자다가 놀라지 않았겠슴둥. 남편이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데 그건 분명 지 이름도 아이들 이름도 아니었수다. 헌데 세상에, 그게 바로 북에 두고 온 아내와 아이의 이름이라니우. 땅이 무너져내리는 줄 알았슴둥. 내가 헛살았구나, 허수아비였구나 싶으이, 아내를 속인 사람과 절대루 같이 살고 싶지 않았슴네다…. 기렇지만 아새끼들이 눈에 밟혀스리 어쩔 수 없었지비. 남편의 술버릇과 장사에 대한 무관심은 도를 더해갔슴둥. 종업원마저도 견디지 못해 나가기 일쑤였지비. 이러다간 굶어죽기 딱이다 싶어 가게일을 돕기 시작했우다. 구제품이니 수선은 필수라 어깨 너머로 본 대로 재봉틀을 돌렸슴둥.
허수아비 같은 삶을 산 우리 부부세월은 기렇게 흘러갔슴네다. 결국 남편도 19년 전에 제 곁을 떠났지비. 남편이 죽고 가게를 혼자 꾸려 나갔지만서두 귀가 들리지 않자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수다. 가게를 처분했지만 재봉틀만은 아이들이 말려도 보내고 싶지 않았슴둥. 기렇게 해스리 요 녀석과 지금까지 인연이 맺어진 셈이우다. 혹여 싶어 아이들에게는 미리 말해두었슴둥. 훗날 이북에 있는 아바이의 가족을 만날 기회가 생긴다먼 무조건 만나보라고. 그 양반도 참 한 많은 삶을 살다가 갔으니까네 말이우. 전쟁이 아이었으먼 그 좋은 학벌에, 능란한 영어 실력 뽐내며 세상 휘어잡았을지 누가 암매. 따지고 보먼 그 양반도 나처럼 허수아비로 산 거이니 말이우다.
오늘은, 멀리서 지 막내딸이 온다구 기러는구만요. 지 생일이라고 부부 간에 온다이 아무래도 찬거리라도 장만해야 할 것 같슴둥. 기런 생각을 하이 또 오마이 얼굴이 선합매. 오래만에 오마니 얘기나 실컷 함서 밤이라도 새우고 싶구만요. 기러구 보이 나이가 들어도 자식은 자식인가 봅매다.
lsangsup@hanmail.net
취재 후일담
우리나라 여성의 경우에는 '최하위주체' 이다. 어릴 때는 식견 없는 여식으로, 커서는 남편을 위해 희생하는 아내로, 늙어서는 자식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어머니란 이름으로 장식하며 교묘하게 여성의 삶을 억압했다. 그 탓에 진정한 여성으로서의 삶을 영위할 수 없었다. 더욱이 주어진 시대적 상황마저 어그러지고 우그러지게 만들었으니…. 여기, 눈으로 들어야만 입으로 말할 수 있는 한 여인을 소개한다. 자신의 길을 가지 못한, 그래서 더 가슴 먹먹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