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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 / Air On The G String
/ 바흐의 관현악 모음곡 제3번 D장조 중 제2악장 아리아
/ Bach's Orchestral Suite No.3 In D Major BWV 1068,Ⅱ. Air"
- 편곡: 아우구스트 빌헬름 / August Wilhelmj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Berlin Philharmonic Orchestra
- 지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Herbert Von Karajan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는 독일 태생으로 음악을 하는 부모 밑에서 자랐으며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나 음악 공부에만 전념하였습니다. 바흐의 저서인 '건반악기 연주법에 대한 소고'에 대해서 교황곡의 아버지인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1809)'은 '극찬할 만한 논서'라고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어려서부터 피아노의 전신인 클라비어(Klavier)라는 악기를 배웠고 명 오르간니스트(Organist)가 되었으며 18세기까지의 음악의 모든 경향을 한데 모아 비약적인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오르간 작품으로 '전주곡과 푸가(Prelude And Fugue, BWV-531~552)', '토카타(Toccatas, BWV-910~916)', '46곡의 오르겔 뷔힐라인 코랄 전주곡(Das Orgelbuchlein Chorale Prelude, BWV-599~644)', '6곡의 슈블러 코랄집 코랄 전주곡(Six Schubler Chorales Chorale Preludes, BWV-645~650)', '18곡의 라이프치히 코랄집 코랄 전주곡(Eighteen Leipzig Chorales Chorale Preludes, BWV-651~668)', '17곡의 독일 오르간 미사 코랄 전주곡(Seventeen German Organ Mass Chole Preludes, BWV-669~689)', '키른베르거 코랄집 코랄 전주곡(The Kirnberger Organ Chorales Chorale Preludes, BWV-690~713)', '기타의 코랄 전주곡(Miscellaneous Chorale Preludes, BWV-714~740)', '그 밖의 코랄 전주곡(Other Chorale Preludes, BWV-741~765, BWV-1085)' 등이 중요한 작품으로 알려졌습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오르간을 벗어나 악기와 곡 형식의 전반에 걸친 집대성 작업을 단행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작품은 구조가 복잡하였고 엄격하면서 종교적인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게하는 작품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실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사상 최대의 교회음악가로 평가되었으며 그의 사후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 1813-1883 )' 등에게 독일 음악의 터전을 마련해준 대 음악가이며 학자로도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활약한 쾨텐(Kothen) 시대는 바이마르(Weimar) 궁정의 쾨텐 궁정 악장 시절인 1717년에서 1723년 사이를 말합니다. 그는 이 시기에 세속음악 특히 기악곡에 열정을 보였고 주요 작품으로 3개의 '바이올린 협주곡(Concerto For Violin, BWV-1041~1043)', '브란덴부르크 협주곡(Brandenburg Concerto, BWV-1046~1051)',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The Sonatas And Partitas For Violin Solo, BWV-1001~1006)', '무반주 첼로 모음곡(Suites For Cello Solo, BWV-1007~1012)', '관현악 모음곡(Orchestral Suite, BWV-1066~1071)' 등이 있습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The Sonatas And Partitas For Violin Solo, BWV-1001~1006)' 모음곡은 쾨텐 시대인 1720년경에 작곡되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제1번 G단조(소나타 제1번) BWV-1001 / Unaccompanied Sonata, No.1 In G Minor(Sonata, No.1) BWV-1001', '제2번 B단조(파르티타 제1번) BWV-1002 / Unaccompanied Sonata, No.2 In B Minor(Partita, No1) BWV-1002', '제3번 A단조(소나타 제2번) BWV-1003 / Unaccompanied Sonata, No.3 In A Minor(Sonata, No.2) BWV-1003', '제4번 D단조(파르티타 제2번) BWV-1004 / Unaccompanied Sonata, No.4 In D Minor(Partita, No.2) BWV-1004', '제5번 C장조(소나타 제3번) BWV-1005 / Unaccompanied Sonata, No.5 In C Major(Sonata, No.3) BWV-1005', '제6번 E장조(파르티타 제3번) BWV-1006 / Unaccompanied Sonata, No.6 In E Major(Partita, No.3) BWV-1006'로 구성된 이 작품은 1802년에 출판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기교적인 면이나 악상으로 보아 바이올린의 특성을 잘 살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고한 기풍과 정교한 음악적 기법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경건하고 심오한 예술세계가 하나로 응축된 작품이라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제1번, 제3번, 제5번은 푸가를 포함한 소나타 형식이며 제2번, 제4번, 제6번은 무도 모음곡의 구성으로 이를 따로 파르티타(Partita)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1720년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첫 번째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 바흐(Maria Barbara Bach, 1684-1720)'가 갑작스럽게 죽었고 1721년에 두 번째 아내 '안나 박달레나 바흐(Anna Magdalena Bach, 1701-1760)'와 재혼하였으며 그녀를 위해 '안나 막달레나 바흐를 위한 1725년의 클라비어 뷔힐라인 중 12개의 아리아와 가곡(Arias And Songs From 1725 Klavier buchlein For Anna Magdalena Bach, BWV-508~518)'을 작곡하였습니다. 그의 장남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Wilhelm Friedemann Bach, 1710-1784)'을 위해서는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를 위한 클라비어 뷔힐라인 곡집 중 9개의 작은 전주곡(Little Preludes From The Klavierbuchlein Fur Wilhelm Friedemann Bach, BWV-924~932)'을 작곡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제1권(Das Wohltemperierte Klavier, BWV-846~869)',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제2권(Das Wohltemperierte Klavier, BWV-870~893)', '영국 모음곡(Englishe Suite, BWV-806~811)', 프랑스 모음곡(Franzosische Suite, BWV-812~817)' 등도 정비를 하였습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1723년에 라이프치히(Leipzig)의 성 토마스 교회(St. Thomas Church)의 칸토르(Cantor)에 취임하였고 그가 사망한 1750년까지 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1723년부터 그가 사망한 1750년까지의 27년간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라이프치히 시대라고 말합니다. 이 시기는 그의 창작활동 중에서 가장 활발한 시대였고 '교회 칸타타(Sacred Cantatas, BWV-1~10, BWV-12-200)', '세속 칸타타(Secular Cantatas, BWV-134a, BWV-173a, BWV-198, BWV-201~216)', '위작 칸타타(Spurious Cantatas, BWV-217~224)', '미사, 라틴 교회음악(Masses, Latin Church Music, BWV-232~242, BWV-1081~1083)', '오라토리오(Oratorios, BWV-11, BWV-248~249)', '수난곡(Passion, BWV-244~247, BWV-1088)' 등 성악의 대작과 합창곡 그리고 오르간곡 등을 많이 작곡한 시기였습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1730년경에 '관현악 모음곡 제3번 D장조 중 제2악장 아리아(Bach's Orchestral Suite No.3 In D Major BWV 1068,Ⅱ. Air)'를 작곡하였습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어느 날 산책을 나갔다가 갑자기 내린 소낙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느 가난한 집에 잠시 비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 집에는 자녀들이 많은 대가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에게 그들 집에 있는 바이올린을 건네주며 연주를 부탁하였습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연주를 위해 그들의 바이올린을 받아들었으나 그 바이올린에는 G-D-A-E 4현 중 G선만이 걸려있었고 다른 선들은 모두 끊어지고 없었습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할 수 없이 이들에게 제일 낮은 G선 한 현으로만 연주를 해주었습니다. 이 곡이 바로 유명한 관현학 모음곡 제3번 D장조 중 제2악장 아리아(Air)'의 탄생 일화라고 전합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관현악 모음곡 제3번 D장조는 총 5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1악장 서곡(Overture), 제2악장 아리아(Air), 제3악장 가보테Ⅰ, 가보테Ⅱ(Gavotte|& Gavotte∥), 제4악장 부레(Bourree), 제5악장 지그(Gigue)로 구성되어 있으며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사망한 후 가장 혜택 받은 음악가로 칭송 받는 '멘델스존(Bartholdy Felix Mendelssohn, 1809-1847)'에 의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던 명곡입니다.
전체 모음곡 중에서 제2악장 아리아(Air)는 다음에 이어지는 리드미컬한 곡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고요하고 아름답게 연주되도록 작곡되었습니다.
특히 이 곡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에 작곡된 곡이어서 선율이 매우 부드럽고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현악합주의 반주로도 연주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팝이나 재즈로도 편곡되어 자주 연주되기도 합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1741년 베를린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작센(Sachsen)공으로부터 궁정 음악가의 칭호를 받으려고 했을 때 중간에서 다리 역할을 해준 '헤르만 카를 폰 카이저링크(Hermann Karl Von Keyserlingk, 1696-1764)' 백작의 작곡 의뢰에 따라 '골트베르크 변주곡(Goldberg Variations, BWV-988)'을 작곡하였습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원래 이 곡에 붙인 명칭은 '여러가지 변주를 가진 아리아(Aria Mit Verschiedenen Veranderungen)'였습니다. 사실 헤르만 카를 폰 카이저링크 백작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에게 직접 작곡의뢰를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섬기던 클라비어 연주에 뛰어난 '요한 테오필 골트베르크(Johann Theophil Goldberg, 1727-1756)'를 통해서 작곡을 의뢰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역시 이 변주곡을 요한 테오필 골트베르크가 연주한다는 전제하에 작품을 썼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런 연유로 인해서 이 곡의 명칭이 '골트베르크 변주곡(Goldberg Variations)'으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그의 나이 62세 때인 1747년에 베를린을 다시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Ⅱ, 1712-1786)' 대왕의 궁정에 초대되었던 것입니다. 대왕이 준 주제에 의하여 리체르카레(Ricercare)를 즉흥 연주하게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음악을 좋아하는 대왕으로 하여금 깜짝 놀라게 해줬고 많은 찬사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라이프치히로 돌아온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프리드리히 대왕이 제시했던 테마에 의해 카논 5곡, 카논풍 푸가 1곡을 인쇄하여 헌사와 함께 '음악의 헌정(Musikalisches Opfer, BWV-1079)'을 작곡하여 대왕에게 바쳤습니다. 이 작품은 다양한 대위법 형식의 13개 소품으로 이루어졌으며 프리드리히 대왕이 좋아하는 플루트, 바이올린, 쳄발로를 위한 소나타였습니다. 특히 이 작품은 전 4악장이 지극히 높은 기풍을 지니고 있어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작품 중 '푸가의 기법(Die Kunst Der Fuge, BWV-1080)'과 더불어 만년의 원숙한 기법을 보여준 역작으로 손꼽히고 있는 작품입니다.
바로크 음악(Baroque Music)의 총괄자이기도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담백하고 힘차며 시종일관 변함없이 흘러내리는 선율은 흐트러지려는 인간의 마음을 진정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흔들리기 쉬운 우리들의 마음을 묵묵히 지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의 죽음을 경험했다고 하는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에 대하여 '바흐는 실개천이 아니라 대양이다'라고 평하였다고 합니다. 독일어로 '바흐(Bach)'는 '실개천'이란 뜻이어서 베토벤이 그렇게 표현했지만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대양처럼 지구상에서 위대한 대음악가로 칭송을 받았고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1749년 뇌졸증의 발작과 시력 감퇴로 인해 체력이 두드러지게 저하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수술과 치료의 효과를 보지 못한 채 1750년 7월 28일 그의 나이 65세를 일기로 주옥 같은 불멸의 보물을 남겨두고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아우구스트 빌헬름(August Wilhelmj, 1845-1908)'은 독일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계에 데뷔해 '악재'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천재 소년'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음악성이 매우 뛰어났다고 합니다. 아우구스트 빌헬름이 7세 때인 1852년에 독일의 세계적인 소프라노인 '헨리에테 존타크(Henriette Sontag, 1806-1854)'가 그를 향해 '독일의 니콜로 파가니니가 될 것이다'라고 극찬을 하였습니다. '니콜로 파가니니(Niccolo Paganini, 1782-1840)'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세계적인 작곡가입니다. 그리고 그가 16세 때인 1861년에는 헝가리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 중의 한 사람이자 작곡가인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가 아우구스트 빌헬름이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독일의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인 '페르디난트 다비트(Ferdinand David, 1810-1873)'에게 서신을 통해 '아우구스트 빌헬름을 장래의 니콜로 파가니니로 표기'할 정도로 극찬하기도 하였습니다.
아우구스트 빌헬름은 1871년에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의 관현악 모음곡 제3번 D장조 중 제2악장 아리아(Bach's Orchestral Suite No.3 In D Major BWV 1068,Ⅱ. Air)'를 피아노 반주를 곁들인 바이올린 독주 G선만으로 연주하도록 편곡하였습니다. 이후 이 음악을 피아노 반주를 곁들인 바이올린 독주곡 'G선상의 아리아(Air on The G String)'로 불리어지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아리아'는 오늘날 일반화된 오페라의 '아리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선율로 느슨하게 연주되는 무곡을 뜻합니다.
바이올린의 4개 현 가운데 가장 낮은 현인 G선만으로 연주되는 'G선상의 아리아(Air on The G String)'는 아름다운 선율로 이어지면서 장중한 분위를 흘러 넘치게 해 지구촌 곳곳에서 지금까지도 널리 사랑받고 있는 불멸의 명곡이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선율에 귀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고요와 평화를 느끼게 해주는 감미로운 명곡인 것입니다.
19세기 전 세계 음악계의 시선을 한몸에 안기도 하였던 아우구스트 빌헬름은 세계적인 독일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는 이 곡 외에도 '드보르작(Antonin Dvorak, 1841-1904)'의 '유모레스크(Humoresques Op. 101-7)', '슈베르트(Frannz Peter Schubert, 1797-1828)'의 '아베 마리아(Ave Maria D. 839)', '쇼팽(Fryderyk Chopin, 1810-1849)'의 '녹턴(Nocturn) / 야상곡(夜想曲)' 등의 곡을 바이올린 연주곡으로 편곡하였으며 많은 인기와 함께 사랑을 받았습니다.
아우구스트 빌헬름은 1894년에 영국 런던의 시립 '길드홀 음악 연극학교(Guildhall School Of Music And Drama)'에서 바이올린 교수로 재직하였습니다. 그의 문하에서 미국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나한 프랑코(Nahan Franko, 1861-1930)', 캐나다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도널드 하인즈(Donald Heins, 1878-1949)', 호주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지휘자인 '아일머 부에스트(Aylmer Buesst, 1883-1970)' 등을 배출하기도 하였습니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Berlin Philharmonic Orchestra / Berliner Philharmonisches Orchester)'의 상임 지휘자 및 오케스트라 매니저와 단원들은 모두 단원들의 투표에 의해 선임되는 민주적인 자치제도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선임된 단원은 1년간의 수습기간을 거친 후에 정단원으로 선정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년간 100여 회의 연주회와 많은 외국 투어 연주회를 열고 있으며 연주회 입장권, 음반 제작, 방송 등을 통해 얻은 수입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명칭을 '베를리너 필하모니커(Berliner Philharmoniker)'라고도 하는데 이 명칭은 음반 제작이나 각종 방송에 출연할 때에만 사용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산하에 '필하모닉 옥텟 베를린(Philharmonic Octet Berlin)', '브란디시 스트링 쿼텟(Brandisi String Quartet)', '12 첼리스트(The 12 Cellists)' 등의 악단들이 활동하고 있고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Vienna Philharmonic Orchestra)'의 멤버들과도 정기적으로 앙상블을 이루어 활동하고 있는 등 전 세계 클래식 오케스트라 중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꼽히고 있습니다.
1882년 독일 출신 지휘자 '벤저민 빌제(Benjamin Bilse, 1816-1902)'가 이끄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빌제 관현악단(Bilse's Band / Bilse'sche Kapelle)' 내부에 심각한 내분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내분에 의해 탈퇴한 54명의 단원들이 주축이 되어 새로운 자치단체인 '베를리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Berliner Philharmonisches Orchester)'를 결성하였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인 1882년 10월 17일에 독일 출신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임시 상임 지휘자 '루드비히 폰 브레너(Ludwig Von Brenner, 1833-1902)'의 지휘로 첫 데뷔 연주회를 열었고 발단식도 가졌으며 첫 출범을 하게 되었습니다. 독일의 대표적인 오케스트라이자 전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평가받고 있는 역사적인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Berlin Philharmonic Orchestra)'의 태동을 알리는 첫발을 내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출범 초기에 루드비히 폰 브레너가 음악적인 통합을 이루긴 했지만 지속적인 연주활동을 하기 위한 재정적인 문제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1887년에 탁월한 공연 기획자로 알려진 독일 출신 '헤르만 볼프(Hermann Wolff, 1845-1902)'의 재정지원과 관리하에 운영하도록 합의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악보를 외워서 지휘하는 '암보(暗譜) 지휘'의 전통을 세운 유명 지휘자이자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의 사위이기도 한 '한스 폰 뷜로(Hans Von Bulow, 1830-1894)'를 상임지휘자로 선임하였습니다. 한스 폰 뷜로는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 1813-1883)'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Die Meistersinger Von Nurnberg)' 중 '서곡(Overture)'으로 첫 연주회를 장식하였습니다. 당시 독일에서 가장 혁신적인 '혁명 지휘자'로 불려지기도 한 한스 폰 뷜로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작품을 주로 연주하였고 음악의 수준을 올려놓았습니다. 특히 협주곡을 포함한 달콤한 음악을 배제하였고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와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에서 현대에 이르는 교향곡을 연주하기도 하였습니다. 한스 폰 뷜로는 1892년에 그의 건강 악화로 인해 은퇴하였고 유명 객원 지휘자에 의해 연주회가 열리기도 하였습니다. 한스 폰 뷜로는 1894년 그의 나이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895년에 새로운 상임 지휘자로 헝가리 출신 '아르투르 니키슈(Arthur Nikisch, 1855-1922)'를 선임하였습니다. 아르투르 니키슈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전통을 살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작품들에 주력하였습니다. 그리고 '안톤 요제프 브루크너(Anton Josef Bruckner, 1824-1896)'와 '피터 일리치 차이콥스키(Peter Ilyich Tchaikovsky, 1840-1893)' 등의 교향곡 등을 레퍼토리에 추가시켰고 그가 1922년에 사망할 때까지 27년간 지휘를 맡아 이끌었습니다.
1922년에 아르투르 니키슈의 뒤를 이어 '불 같은 열정의 지휘자'로 불려지기도 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Wilhelm Furtwangler, 1886-1954)'가 상임지휘자로 선임되었습니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전통을 살려 연주 레퍼토리를 그대로 유지하였고 추가 레퍼토리로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1797-1828)'와 '리하르트 스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1949)' 등의 작품들도 연주하였습니다. 특히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의 '교향곡 3번, 영웅(Beethoven, Symphony No.3, Eroica)'의 연주는 열화와 같은 찬사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1929년에는 경제공황(A Finacial Panic)이 세계를 휩쓸었고 베를린 시와 독일 정부 그리고 라디오 방송국의 후원에 힘입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의 나치 당(Nazi Party)이 집권하게 되면서 나치가 개최하는 각종행사나 군수공장의 위문행사를 수행하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1944년 1월 연합군의 폭격으로 연주회장이 파괴되었고 나치의 명령에 따라 다른 장소를 빌려서 연주회는 계속 이어지기도 하였습니다.
1945년 4월 연합군에 의해 베를린이 함락되었고 같은 해 5월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나치 동조죄'로 억류되었습니다. 따라서 1945년 5월 러시아 출신 지휘자 '레오 보르하르트(Leo Borchard, 1899-1945)'를 임시 지휘자로 선임하였고 연주를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23일 레오 보르하르트는 베를린의 한 검문소에서 그의 운전사가 검문 미군 병사의 정지신호를 잘못 인식하고 달리는 바람에 검문병의 총격을 받고 숨진 안타까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레오 보르하르트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뒤 후임 임시 지휘자로 루마니아 출신 '세르주 첼리비다케(Sergiu Celibidache, 1912-1996)'가 직책을 이어받았습니다. 세르주 첼리비다케는 1952년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공식적으로 복귀할 때까지 많은 연주회를 지휘하였고 유태인 혹은 적성국 작곡가 작품들의 부활공연에 크게 이바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완벽주의자로 개성이 지나치게 강했고 가혹한 연습 방식과 악단원을 멸시하는 폭언 등으로 모든 단원들로부터 외면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중요한 수입원이 되고 있는 음반 녹음을 매우 싫어했고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1947년 석방된 뒤 두 사람이 함께 지휘를 하는 동안 상호 의견 충돌이 잦아지는 등 그의 입지가 점차 좁아져 갔던 것입니다. 1952년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다시 공식적인 상임 지휘자로 복귀되었습니다.
1954년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세상을 떠나자 세르주 첼리비다케의 완벽한 지휘능력에도 불구하고 단원 모두가 신임 상임 지휘자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1908-1989)'을 선임하였습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바로 이어진 미국 순회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종신 상임 지휘자로 선임되었습니다. 그는 주로 고전주의 작품과 낭만주의 작품들의 연주에 주력하였습니다. 아울러 시즌별 다섯 번의 콘서트는 20세기의 중요 작품들을 연주하였고 10여 편의 현대 작품들을 초연하기도 하였습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국내외 순회 공연은 물론 음반 녹음에도 철저를 기하였습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명성을 전 세계에 알렸고 그의 명성도 '황제 지휘자'로 불려질 정도로 크게 떨쳤던 것입니다. 그는 1963년에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er Tor) 근처에 새 연주회장인 좌석 2000석에 독일 칼 슈케(Karl Schuke)사의 최대규모 파이프 오르간까지 설치한 '켐퍼플라츠 필하모닉 홀(Philharmonie on Kemperplatz)'을 건축하였습니다. 그리고 1987년에는 챔버 뮤직 홀을 증축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1989년 그의 나이 81세를 일기로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후임으로 이탈리아 출신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크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 1933-2014)'가 선임되었습니다. 크라우디오 아바도는 전통적인 고전주의 작품과 낭만주의 작품은 물론 20세기 주요 작품들을 연주하였고 고대 그리스 드라마와 셰익스피어 등 주제가 있는 작품들도 연주하였습니다. 그리고 오페라를 처음으로 연주 레퍼토리에 포함시키는 등 의욕적인 활동을 펼치기도 하였습니다.
2002년에는 크라우디오 아바도의 후임 상임 지휘자로 영국 출신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인 '사이먼 래틀(Simon Rattle, 1955-)' 경을 선임하였습니다. 사이먼 래틀은 1980년에 버밍엄 시립교향악단(City Of Birmingham Symphony Orchestra)의 음악 감독을 맡았고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여 영국의 대표적인 오케스트라로 발전시킨 영국을 대표하는 지휘자로 그의 명성을 떨치기도 하였습니다. 현대 음악과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1911)'의 교향곡에 대한 독특한 해석으로 유명해진 지휘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1987년에 문화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영제국 3등급 CBE 훈장을 수여받았고 1994년에는 기사작위(Knight Bachelor)를 수여받는 영예를 안기도 하였습니다. 2010년에는 단원들의 투표에 의해 임기가 2018년까지 연장되었습니다.
2013년 12월 31일에는 매년 정기적으로 신년 음악회를 개최하고 있는 2014 신년 음악회(Berlin Philharmonic New Year's Eve Concert 2014)를 개최하였습니다. 중국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인 '랑 랑 / 郞朗(Lang Lang, 1982-)'을 객원 연주자로 초빙하였고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Sergei Prokofiev, 1891-1953)'의 '피아노 협주곡 제3번(Prokofiev Piano Concerto No.3, In C Major, Op.26)'을 협연하였으며 많은 갈체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1908-1989)'은 그리스계로 1908년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Salzburg, Austria)에서 태어난 오스트리아의 지휘자이며 세계적인 지휘자로 전후 시기에 가장 유명한 지휘자 중 손꼽히는 지휘자입니다.
그의 고조부인 '게오르키오스 요하네스 카라야니스(Georgios Joannes Karajanis)는 그리스의 코자니(Kozani)에서 태어나 1767년 오스트리아의 빈(Vienna)으로 이주하여 최종적으로 작센(Saxony) 주의 켐니츠(Chemnitz)에 정착하였습니다. 고조부 게오르키오스 요하네스 카라야니스와 그의 형제는 작센의 의류사업에 종사하였습니다. 그 공로가 인정되어 1792년 프레데리크 아우구스트 3세(Frederick Augustus Ⅲ)에 의해 귀족의 신분이 부여되었으며 카라야니스(Karajannis)라는 성을 카라얀(Karajan)으로 고치고 이름에 귀족을 뜻하는 폰(Von)을 붙이게 된 것입니다.
그는 1929년에 독일 바덴 부르템부르크(Baden Wurttemberg)의 울름 극장(Theater Ulm) 지휘자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에 열린 '막스 라인하르트(Max Reinhardt)'가 주최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Salzburg Festival) 음악제를 지휘하기도 하였습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1933년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의 나치 당(Nazi Party)에 가입하게 되었으며 '프랑스 정복', '오스트리아 합병' 등의 여러 행진곡을 지휘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습니다. 1937년에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Berlin Philharmonic Orchestra)에서 연주활동을 했습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그의 나치 동조행위에 대한 조사에 시달리는 등 많은 수모를 겪었으며 심적 고통을 받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자기관리에 철저하게 되었고 냉철한 마음가짐이 항상 몸에 베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노년에 척추에 이상이 있어 자유로운 보행이 어려웠습니다. 그의 부인과 메니저의 부축으로 보행이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들 둘의 부축 이외에 어느 누구의 부축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자기관리에 철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54년에 복직되었고 1955년에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Berlin Philharmonic Orchestra)의 종신 지휘자로 선임되었으며 35년간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1967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1989년까지 잘츠부르크 음악제 음악감독을 지냈으며 1980년대에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사이가 좋지 않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Vienna Philharmonic Orchestra)와 협연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음악적 특징은 철저한 음향의 직조에 있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모든 연주에 대한 그의 녹음 중심주의적인 면모에서 그의 음악적 특징이 더욱 빛을 발산했다는 평가입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시기에 가장 유명한 지휘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세계에서 가장 음반 녹음을 많이 한 지휘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20세기 음악의 황제라고 불려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1989년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백 선생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건안 건필하시면서 최고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