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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말씀을 항상 전파에 힘쓰라 / 6~8바울의 마지막 신앙고백 / 9~13 디모데에게 속히 방문을 부탁 /14~16대적자를 주의 하라. /17~18이방인들에게 전파된 복음/19~22 문안인사 |
제4장 대사도의 마지막 고백
Ⅰ . 마지막 엄명 1~5
A . 엄숙한 명령(1)
<1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마지막"이라고 하는 단어는 시제로 "시간상으로나 , 순서상으로 맨 끝"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들은 신학적으로 종말론적인 단어입니다.
종말이란 세상의 종말이 있고 , 개인의 종말이 있습니다.
이 단어에서 여러분들은 무엇을 어렴푸시나마 느낄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맞이하는 개인의 종말이 얼마 남지 않음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종말을 예측 하면서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생애 마지막 엄숙한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또한 세상 종말에 대해서도 말하면서 닦아올 세상종말은 산자와 죽은 자의 심판이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1절에서 닦아올 심판자의 주체 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그때에 예수 그리스도 앞에 결산보고를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확실성과 재림의 임박 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확실성과 임박 설에 대해서는 본문 외에 다른 성경책에도 많은 기록 들이 있습니다. 재림의 확실성에 대해서는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행1:10~11]에 <10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11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 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기록 하고 있습니다. 그
그리고 [막13:26] 에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그리고 [계1:7]에서는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아멘>은 진실성 , 확실성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만히 오시는 것이 아니라 공개적 재림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고 없이 갑자기 오신다는 것입니다.
[살전5:2]에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고 하였고 [마24:27]에서는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히10:37]에는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고 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벧후3:8~9] 에서 <8....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9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B .전도에 대한 엄명(2)
<2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사도바울의 엄명은 첫째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재림이 가깝기 때문입니다.
[마24:14]에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씀을 받아들이든지 거부하든지 기회가 오든지 아니 오든지, 때이든 때가 아니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해야 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 전파는 성도들의 절대적 사명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전도하러 오셨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막1:38] 에 <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그리고 [막1:39] 에<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전도의 필요성에 대해 [고전1:21] 에서 <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 사도바울의 엄명은 범사에 오래 참으라고 하였습니다.
전도의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암시해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서<범사>라고 하는 의미는 "모든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란 전도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마귀는 쉽사리 자기 권세 아래 있는 죄인들을 내어 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도하는 자에게 때때로 핍박과 고난이 있습니다.
또한, 전도의 결실이 금방 보이지 않거나 때로 전도 할 때 예수 믿은 자들이 연약한 모습들을 들어내 보이게 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전도자들을 낙망케 하는 요인이 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하는 이들은 범사에 혹은 온전히 오래 참음으로 이 일을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사도바울의 엄명은 성도들을 경책하라고 하였습니다.
<경책>이라고 하는 단어는 원어로 [헬.ἅλεξον 엘렌코]라고 하는 단어인데 그 뜻은 "사람의 실수와 허물을 깨닫게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 바로 목회자의 사역중 하나입니다. 말씀을 통해 성도들의 실수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성도들이 죄를 지었을 때 마음속 깊이 사무치도록 자각시키는 일을 하십니다. [요16:8] 에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들이 죄를 깨닫고도 회개하지 않는 것은 성령을 거역하는 것이 됩니다.[살전5:19 , 갈5:17]
네 번째 사도바울의 엄명은 성도들을 <경계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경계라고 하는 단어는 원어[헬.ἐπιτίμαο에 피티마오]라고 하는 단어로 그 뜻은 "비난하다. , 벌을 주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지은 죄를 지적하고 죄를 깨닫게 하는 과정에서 죄에 대하여 호되게 책망하여야 하며 , 죄를 덮어 주어서는 안 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는 성도들을 죄에서 돌아서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약5:20]에서 야고보 저자는 <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죄인이 책망을 듣고 회개하면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경계하는 것 주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사도바울의 엄명은 성도에 <권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권하다.>라고 하는 단어는 [헬.παρακλεο 파라카레오] 라고 하는 단어로 그 뜻은 "용기를 복 돋두다. 위로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를 경계하는 과정에서 사람에 대해 미운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격려하고 위로하여 용기를 복도두어
우리나라 속담에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라고 하는 속담이 있습니다.
죄를 책망함과 동시에 죄를 회개한 사람에게는 새로운 출발을 위해 위로와 함께 용기를 복돋두어
죄에서 떠나도록 도와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C.전도자의 고충(3~4)
<3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4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여기서 때라고 하는 것은 2절과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여기 <바른 교훈>이란 복음을 말하는 것이며 3절~4절은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받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 바른 교훈을 받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교회가 곳곳에 우후죽순처럼 많이 세워졌다고 해서 세상의 미래가 밝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두운 날 , 어려운 날이 있을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교회들이 양적으로 한창 부흥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합니까? 교회가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 원인 말한다면 교회가 교회로서 역할을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하는데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에 그로인해 영적인 침체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들이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둔다고 하였습니다.
<귀가 가렵다>는 말은 귀를 긁어주는 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귀가 가려울 때 귀를 긁어 주면 어떠합니까?
시원하지 않습니까?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둔다고 하는 말은 자기사욕을 채워줄 정보를 제공할 사람을 많이 둔다는 말인 것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복음보다 자기의 사욕을 좇는 다는 것을 말합니다.
세 번째 사람들은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진리란 복음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진리를 듣기를 싫어합니다. 허탄한 이야기들을 좇기를 좋아 한다는 것이다. <허탄한 이야기>라는 원어는 "신화들"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닌 지어낸 이야기들을 말합니다. 소설 같은 이야기들을 말합니다. 이것들은 재미있을 수는 있으나 인생에 있어서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이야기들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즐겨 듣기를 좋아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어떠해야 합니까? 진리를 좋아 해야 하고 진리를 좇아야 합니다.
Ⅱ. 목회자의 바란 삶의 자세 5
<5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그러나 이악한 시대에도 복음 사역자는 자기 직무에 충실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네 마디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라. 고난을 받으라. 전도인의 일을 하라. 네 직무를 다하라." 다 명령어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명령어는<모든 일에 근신하라>는 것입니다.
범사에 깨어 있고 조심하지 않으면 시대의 풍조에 물들기 쉽고 시대의 풍조에 영향을 받아 타협하고 변질되기 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 째 명령어는 <고난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고난을 각오하는 것 어려운 시대에 부름을 받은 주의 종들의 마음가짐을 말합니다. 마귀의 종들이 세력을 얻고 악한 자들이 앞장서서 분주히 왕래하며 무지한 군중들이 그들을 지지하는 시대가 올 것이기 때문에, 그런 시대에는 주의 참된 종들은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직무를 다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라는 것을 말합니다.
Ⅲ . 사명자의 길 6~8
A . 순교의 죽음을 예고(6)
<6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 왔도다>
바울은 자신의 죽음을 관제에 비유하면서 내가 부음이 되고 떠날 기약이 가까웠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나이 많은 노 사도는 옥에 갇혀서 이 마지막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자신의 순교의 시간이 가까움을 영적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이 서신은 이러한 상황 하 에서 쓴 유언적인 의미를 지닌 서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관제(灌祭) drink offering>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관제(灌祭)는 제단 위에 올려 진 제물에 포도주를 붓는 일종의 전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2:17]에서도 사도바울은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순교의 죽음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 순교를 예고 한 내용일 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 복음을 위해 ,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해 순교를 예고 한 내용인 것입니다.
[골1:24] 에서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하였습니다.
기독교에서 전파하는 복음은 순교자들의 피로 인 쳐 진 복음인 것입니다.
다음은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라고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내용은 개인의 종말이 가까웠다는 뜻인 것입니다. 개인의 종말이란 죽음을 뜻합니다.
죽음은 개인이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 즉 낙원으로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는 그곳에서 임시로 거처하다가 주 예수께서 오실 때 함께 강림하여 육체와 다시 결합하여 영광스러운 몸을 입고 부활하여 우리가 영원히 거 할 새 하늘과 새 땅에 하나님과 함께 영원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B. 노 사도의 마지막 신앙고백(7)
<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죽음이 가까움을 느낀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세 마디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웠다> <달려갈 길을 마쳤다.> <나는 믿음을 지켰다.>이 세 마디 인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지나온 삶을 십자가의 군사의 삶으로 묘사하면서 최선을 다해 살아온 것에 대해 승리감과 만족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달려갈 길을 마쳤다.>라고 하는 내용에서 <달려갈 길>은 바울에 맡겨진 사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전도자의 길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쳤다.>라고 하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을 하나라도 남김없이 수행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행20:24]에서 그는 고백하기를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사명의 길에는 많은 고난이 있었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면서 그의 일을 완수 했던 것입니다. 우리들 각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의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각자 개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일을 깨닫고 그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믿음을 지켰다.>라고 하는 것은 바울이 확신하고 있었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등 기독교신앙의 근본이 되는 것을 의미하며 믿음의 귀중함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지킬 것 중에 가장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지킬 것 중에 가장 귀한 믿음인 입니다.
주 예수께 대한 믿음은 생명이며 , 보화이며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으면 죄 씻음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으면 아무 것도 얻지 못합니다.
참된 믿음이 파선되고 변질되는 것은 가장 슬픈 일이며 불행한 일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온갖 고난 중에서도 이 믿음을 굳게 지켰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바른 지식과 그에 대한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하고 이 믿음을 끝까지 변질 되지 않고 잘 지켜 나가야 합니다.
C . 의의 면류관 (8)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 에게니라. >
[약1:12 , 계2:10]]에는 “생명의 면류관 ”이 기록 되어 있고 , [벧전5:4]에는 “영광의 면류관” 이 기록 되어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의의 면류관>이 나오고 있는데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선한 행위로 일관했던 바울에게 주어지는 보답으로서 주는 보상을 가리키고 있는데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 에게>라고 하였습니다.
<의의 면류관>은 하나님의 뜻대로 생활하며 사명을 충실히 감당한 성도에게도 주어지는 상급인 것입니다. [고후5:10]에 보게 되면 <10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서 <그 날에>이라고 하는 시제는 주님의 재림의 때 , 마지막 심판의 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주께서 재림 하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실 그 때 바울에게 의의 면류관을 주신다는 것은 바울을 의롭게 여기신다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또한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 에게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최종적으로 한번 더 의롭다. 함이 선언될 것으로 보면 될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에 대해 [마25:33~34]에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오른 편의 양은 성도들을 가리키며 염소는 불신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Ⅳ . 디모데의 방문을 요청 9~13
A . 내게 속히 오라(9)
<9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로마감옥에 투옥되어 죽음을 기다리는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자기에게 속히 오도록 요청하였는데 그 이유는 첫째 죽기 전에 사랑하는 동역자인 디모데를 한번 더 만나 위로와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 위해 디모데를 속히 자기에게 오도록 요청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디모데에게 복음 사역의 중요성과 바울 자신의 사역을 계속 이어갈 디모데에게 필요한 부탁과 교훈과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B . 바울 곁을 떠난 사람 (10)
<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바울은 로마감옥에 두 번째 투옥되었다.
첫 번째 투옥은 A.D 61~63년 경이였으며 , 두 번째 투옥은 A.D 66~67년 경이였는데 로마정부의 기독교 박해 말기인 67년 네로 황제에 의해 바울 사도는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바울은 죽음을 앞에 두고 본서를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고통스러운 감옥 생활에서 노 사도를 수종들 던 사람들도 하나 둘씩 떠나가고 누가만 홀로 남아 그의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떠난 사람들 가운데는 타지로 선교여행을 떠난 사람도 있으나 믿음을 배신하고 세상으로 돌아간 사람들도 있는데 그 사람들 가운데 데마 라고 하는 사람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데마는 [골4:14]에서도 나오는데 데마는 바울의 동역자로서 골로새 교인들에 소개된 바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이 확고한 자가 아니 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교회는 다니지 만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의 쾌락에 마음이 흔들림으로 결국은 바울과 하나님을 배반하고 세상으로 돌아갔습니다.
[눅16:13] 에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약4:4] 에는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 온전한 성도가 될 수 없기에 온전히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을 사랑하면 영적으로 간음한 여인과 같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를 영접하고 여러 가지 영적인 체험을 한 성도가 타락하여 세상으로 돌아간다면 그 결과가 어떠한가에 대해 답을 주고 있습니다.
[히6:4~6]에 <4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5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6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에게 부탁드립니다. 데마와 같이 세상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저버리지 마시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C . 바울의 처지와 부탁 (11~13)
<11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12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13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바울 곁을 끝까지 지킨 사람은 누구인가?
누가라고 하는 사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직업이 의사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골4:14]
그리고 그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저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사도바울을 통해 전도를 받고 제2차전도 여행 때부터 바울을 도왔습니다. [행16:10]
아시아 [행20:6]에도 예루살렘[행21:25] 등지에서도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로서 함께 복음을 전파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바울이 가이사랴 및 로마 옥중생활 하고 있을 때 바울의 조력자로 , 위안자로 , 편지대필자로 많은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는 홀로 믿음을 지켜 가며 , 늙은 노사도의 곁을 굳건히 지킨 것을 볼 때에 아름답게 보이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속히 자기에게 올 것을 요청하면서 자기에게 올 때 온자 오지 말고 마가를 데리고 올 것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마가라고 하는 인물은 [행15장]에서 바울의 처음 전도 여행 시에 바울과 함께 있었으나 밤빌리아의 버가에서 바울 곁을 떠나갔기 때문에 사도 바울의 2차전도 여행 시에 사도 바울로 부터 함께 일하기를 강력하게 거절당했던 사람입니다.
이런 확고한 신념 때문에 바울은 심지어 가장 절친했던 동역 자 바나바와 심히 다투었고 마침내 서로 헤어지기까지 하였습니다.[행15:36-41]
그러나 이제 바울은 마가가 그의 일에 유익하므로 데려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믿음이 연약했던 마가가 이제는 바울에게 유익한 일군으로 성장 했다는 것입니다.
복음 사역에는 충성된 일군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교인들은 많으나 참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충성된 일군은 많지 않습니다.
대 사도 바울에게 동역자가 부족했지만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아직 디모데와 누가와 같은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또 한때는 바울을 섭섭하게 했지만 믿음으로 성장한 마가도 이제 그에게 유익한 동역자의 한 사람이 되어 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참 필요한 하나님의 일꾼 이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독초와 같이 남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 아니면 남에게 걸림돌이 되는 사람 아닌 교회 안에서나 타인에게나 꼭 필요하고 유익이 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바울 지금 로마의 깊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춥고 배고프며 기타 육신적 고통이 말로 다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겨울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21절]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라>는 말 속에서 우리는 감옥에 갇혀 있는 노(老) 사도가 밤에 추위에 떠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고통은 복음 사역의 어려움의 한 단면인 것입니다.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고 한 것은 성경 말씀을 읽는 일에 얼마나 힘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Ⅴ . 대적자에 대한 경계 14~16
A. 알렉산더에 대한 주의 상기시킴(14~15)
<14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15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말을 심히 대적 하였느니라>
<경계>라고 하는 말의 뜻은 “뜻밖의 사고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여 단속한다”라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알렉산더라고 하는 한 인물을 상기 시키고 있습니다.
[상기 시키다.]라고 하는 말은 “지난 일을 떠올리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14절에서 사도바울은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매 15저가 우리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라고 알렉산더가 사도바울을 얼마나 힘들게 하였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구리 장색 알렉산더 라고 하는 인물이 [행19:33]에 처음 등장하고 있는데 이 사람은 [딤전1:20]에서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 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글를 <사단에게 내어 줬다.>말을 하였는데이는 출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예수를 잘 믿다가 배교한 자로 로마 법정에서 사도 바울에게 불리한 판결하도록 일조를 한 사람입니다.
복음 사역의 어려움은 언제나 반대하는 자들의 방해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도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후 고라라고 하는 인물이 군중을 선동하여 모세를 대적했던 것 처럼[민16:18~19] 또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하나이었던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하여 은 십에 예수님을 대제사장에게 판 것처럼 [요13:2,18:3] 그들은 하나님과 진리를 배반한 자들입니다. 알렉산더라고 하는 인물도 바울에게 해를 많이 보인자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해를 많이 보였다”라고 하는 말은 “악한 일을 많이 행했다.”는 뜻입니다. “악한 일을 많이 행했다.”는 것은 바울에게 입힌 개인적인 해뿐만 아니라 복음 전체의 손실까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너도 저를 주의하라>고 경계하고 있는데 그 것은 알렉산더가 바울에게 피해를 많이 입힌 것처럼 제자인 디모데에게도 해를 끼치려 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주의를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B . 대적자에 대한 태도
<14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바울은 자기를 대적한 자를 직접 보복하지 아니하고 그 보복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하나님께서 알렉산더가 행한 악행을 잊지 않고 대신 갚아 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를 대적하는 적들에게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간단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주께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신32:35]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보수는 내 것이라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시140:12] 에는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당하는 자를 신원하시며 궁핍한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원수를 직접 갚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에 맡기는 것입니다.
C . 변명 할 때의 처지(16)
<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변명> 이란 단어는 [헬ἀπολογία 아폴로기아]라고 하는 단어로 고소를 당하여 법정에서 변호할 때 쓰는 법적 용어인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바울은 자기의 쓸쓸한 처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다>라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자기가 처지가 어려움에 처할 때 다른 사람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세상인심은 어떻습니까?
세상인심이란 정 반대입니다.
내가 좋은 처지에 있을 때에는 무엇인가 자기에게 도움이 될까 사람들이 벌떼 같이 모여 들다가도 내 처지가 어렵게 되면 벌떼 같이 금방 사라져 버리는 것이 세상인심입니다.
바울의 처지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바울이 수감되기 전에는 많은 동역자들이 함께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로마감옥에 투옥되자 자기들에게 해가 미칠까봐 하나 둘씩 떠나고 사도 바울은 지금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다.>라고 자기의 처지를 디모데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그러데 바울은 자기를 떠난 자에 대해 어떤 감정의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까?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비굴하고 몰인정한 태도에 대해 그들의 태도를 원망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자기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다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까요?
[히12:2] 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같은 처지를 당하게 되면 사도 바울 처럼 실망하기 보다는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앙망하며 하나님 맡기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Ⅵ .이방인에게 전파된 복음 17~18
A . 건강을 붙들어 주시는 이유 (17)
<17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
원문에는 본 절의 초두에 앞문장과 이어지는 결론 어구인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나오고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 사역 현장에는 사단의 앞잡이인 알렉산더와 같은 대적자가 있었고 , 또 사람들로부터 지지나 격려보다는 오히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버림으로 홀로 외로이 하나님만 의지하고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과 싸워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함께 하셨고 자신을 건강케 하였다는 것입니다.
복음 사역자의 용기와 힘이 바로 주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며 주께서 함께 하신다는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사역자들에게 충분한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 바울을 강건케 하신 그 목적은 그를 통해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들이 듣고 구원을 받게 하는데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원문에는 <이방인> 앞에 "모든"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롬1:16]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은 뭇 영혼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주께서 전도자나 설교자들을 강건케 하시는 이유는 복음이 전파되어 택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구원 얻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극심한 반대와 비난, 그리고 위협과 고난이 바울에게 있었지만은 그는 <사자의 입>에서 하나님께로부터 건지 웠졌습니다.
여기서 <사자의 입>이라고 하는 말은 그를 죽이려는 사탄의 무서운 세력을 상징적인 비유로 표현한 것입니다.
B . 모든 악에서 건져 내셨다.(18)
<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18절 초두에는 주기도문의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내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의 박해에서 건지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에게는 어떤 박해가 있었습니까?
첫째 바울을 위기에서 구원한 사건은 2차전도 여행 중에 고린도에 들려 회당에서 복음을 전할때 많은 결실이 있었으나 그로인해 유대인들이 이를 시기하여 바울을 그 성중에서 끌어 내려하여 그는 그곳에 떠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밤에 환상 중에 주께서 바울에게 나타 나셔서 안심하고 복음을 전하라고 격려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약 1년6개월을 전도하며 고린도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행18:9~11]
두 번째 바울을 위기에서 구원한 사건은 예루살렘의 로마 병영에서의 사건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돌로 쳐 죽이려 하여 로마 천 부장 루시아가 자기 병영에 바울을 보호하고 있을 때 주께서 밤에 환상 중에 나타나 바울을 위로하시고 로마 황제 앞에서 복음을 증거 하라고 명하셨던 것이 두 번째의 위기에서 주께서 바울을 구한 사건인 것입니다. [행23:11]
세 번째 바울을 위기에서 구원한 사건은 바울을 로마로 호송하던 배가 파선할 위기를 맞았을 때 환상으로 주의 사자가 바울 곁에 나타나 위로하시고 그를 격려 해 주었던 사건입니다. 그 배에 선원들과 상인들과 로마군인들은 바울의 말을 듣고 모두 생명을 건졌던 사건이 [행27:23~24]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바울을 위기에서 구원한 사건은 두 번째 바울이 로마옥중에 투옥 되어 공판을 받을 때의 일로서 주께서 바울 곁에 나타나 강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 하라고 격려한 사건입니 다. 여기서 우리는 주의 뜻을 따라 사는 자는 하나님께서 끝까지 함께하신 다는 사실을 확인 할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