武屹夜詠(무흘야영)
鄭逑
峯頭殘月點寒溪(봉두잔월점한계)
獨坐無人夜氣凄(독좌무인야기처)
爲謝親朋休理屐(위사친붕휴리극)
亂雲層雪逕全迷(난설층층경전미)
산봉우리로 지는 달이 차가운 시냇가에 어리는데,
다른 이 없이 홀로 앉았으니, 밤기운 서늘하네.
친한 벗들 나막신 끌고 찾아오는 건 사양하노니,
비구름과 쌓인 눈에 오솔길이 완전히 묻혔다네.
屹 : 산우뚝할 흘. 屐 : 나막신 극.
정구(鄭逑, 1543~1620)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1543∼1620).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시호는 문목(文穆). 종이모부 오건(吳健)에게 수학하였고, 이황과 조식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1573년(선조 6)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예빈시(禮賓寺) 참봉이 되고, 1578년 사포서(司圃署)주부를 거쳐 삼가(三嘉)·의흥(義興)·지례(知禮) 등지의 현감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관직에 나가지 않다가 1580년 창녕현감(昌寧縣監)으로 임명되었다. 현감으로 선정을 펼쳤으며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졌다. 1581년에 지평이 되고 1585년 교정랑(校正郞)이 되어 《경서훈해(經書訓解)》 간행에 참여하고 그후 통천군수(通川郡守)·우승지·강원도관찰사·성천부사(成川府使)·충주(忠州)목사·공조참판 등을 지냈다. 1608년(광해군 즉위) 대사헌이 되었으나 임해군(臨海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관련자를 모두 용서하자는 상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613년 계축화옥(癸丑禍獄)가 일어나자 다시 상소를 올려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하려 하였고, 향리에 백매원(百梅園)을 만들어 유생들을 가르쳤다.
그의 학맥은 남명 조식의 문하로 분류되나 정치적 입장에서는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분류된다. 특히 남명집(南冥集)의 발간을 앞두고 정인홍(鄭仁弘)이 발문을 작성하는 것에 반대하여 그와 절교하였으며 이로인해 남명학파 문인들과는 더욱 멀어지게 된다.
성주의 회연(檜淵)·천곡(川谷)서원, 충주의 운곡(雲谷)서원, 창녕의 관산(冠山)서원 등과 통천(通川)의 경덕사(景德祠)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한강문집(寒岡文集)》이 있고, 편저로 《성현풍(聖賢風)》《태극문변(太極問辨)》《와룡지(臥龍誌)》《역대기년(歷代紀年)》《관의(冠儀)》《혼의(婚儀)》《장의(葬儀)》《계의(稧 儀)》《갱장록(羹墻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