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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단밀중77 원문보기 글쓴이: 이화숙
경상북도 중앙에 위치하는 의성군(Uiseong County)은 동쪽으로 청송군, 서쪽으로 상주시, 남쪽으로 군위군과 구미시, 북쪽으로 안동시과 예천군에 접하고 있으며 서울에서 320㎞, 부산에서 216㎞, 대구에서 73.5㎞ 떨어진 거리져 있다. 경·위도상으로는 동경 128˚18´11″~ 128˚53´56″,북위 36˚11´26″~ 36˚31´36″사이에 위치하여 농업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인구 7만의 기초 지방자치 단체이다.
면적 1,175.89㎢로서 경상북도 면적의 6.2%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71.7%는 임야이다. 행정구역은 1읍 17개면 400개리로 구성되어 있다. 대구와 안동을 잇는 국도 5호선의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앙고속도로의 개통에 따라 철도와 함께 교통의 요충지(要衝地)이다.
과거에 내지 깊숙히 자리한 지리적 요인과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개발에 뒤쳐져 있던 의성은 도의 중심지에 위치하여 도내 여타 시·군과의 직선거리가 울진군을 제외하면 모두가 80km 이내 위치하고 있다. 조선시대 역도로 안기도 소속으로 철파역과 청로역이 있었고, 유곡도 소속으로 낙동역, 안계역, 쌍계역이 있었다. 낙동역에는 참(站)이 설치되는 등 최대 교통의 요충지로서 많은 원(院)이 있었으며 낙동강에서 도리원까지는 위천을 거슬로 수운(水運)까지 이용되었다.
현재 남북을 관통하는 중앙선 철도와 중앙고속도로(15.78km)가 봉양면과 안평면을 통과하면서 봉양면에 의성IC가 설치되었다. 대구 - 안동간 5번 국도의 확장과 의성-영천간, 봉양-다인간 28번 국도 총연장이 90km, 지방도가 237km, 군도가 135km에 달하며, 동서6축 고속도로 신설 등 도로망의 발달로 타 시군과의 거리도 점차로 단축되고 있다. top
지형은 대체로 북서부 신평면(新平面)을 제외하고는 그리 험하지 않다. 동서 52km로 길고 남북은 33km로 짧으며 동서 중간지역에 해당하는 부분이 잘룩하여 마치 고치와 같은 모양으로 백두대간과 낙동정맥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낙동정맥에서 갈래친 줄기가 의성군계로 들어서면서 두갈래로 갈라져 서진하면서 매봉을 지나 두마재, 한티재, 선암산, 지경재, 왕재산으로 이어지는 산 줄기는 군위군과 경계하면서 남동부 군계를 이루는 선암지맥이다.
사곡령을 지나 어봉산, 문봉산 갈비봉, 산두봉, 구무산을 지나면서 또다시 두갈래로 갈라져 의성의 심장부로 들어선 하나의 산줄기는 불출산, 의성읍의 천제봉, 안평면의 삼표당, 안사면의 국사봉과 봉암산과 연결되어 안계면의 해망산을 이어진 줄기가 다시 북주 비봉산을 지나 상주시 중동면에서 낙동강으로 사라지니 보현지맥이다.
보현지맥 구무산에서 계속 북주하여 갈래친 줄기는 옥산면의 황학산, 단촌면의 갈라산과 연결되니 의성군의 동쪽과 북쪽을 경계하는 갈라지맥이다.
보현지맥이 노귀재를 지나면서 남하하여 팔공산을 이루고 가산 바위에서 북주하던 줄기가 군위군에서 서쪽으로 꺾여지면서 구천면의 청화산, 단밀면의 장자봉과 만경산을 이루니 의성군의 남서부 경계를 이루는 팔공지맥이다. top
의성군의 서쪽과 북서쪽 일부의 경계는 낙동강이다. 지맥과 지맥 사이에 동서로 길레 의성분지가 형성되어 있다. 금성면의 금성산과 군내에서 가장높은 가음면 선암산은 칼데라 화산으로 옛적 화산활동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당시 융기하여 높게 형성된 동부 산간지대와 퇴적층으로 형성된 낮은 서부 평야지대는 한반도의 전체적 모습을 이 곳에 담고 있다 할 것이다. 또한 당시 백악기시대 활동하던 공룡들의 흔적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제오리 공룡발자국 화석지 등 여러 곳에 남겨진 발자취와 연교가 열리는 의성개나리와 작약, 이른 봄에 가장 먼저 노란 꽃을 피우는 산수유와 산 속의 생강꽃과 더불어 작약, 홍화 등 여러 가지 꽃이 피는 고장으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또한 씨없는 감 사곡시의 원산지이자 의성마늘로 널리 알려진 고장으로 보현지맥 산줄기가 지나고 산지가 중첩하여 고원지대를 이루지만 경사가 완만한 편이어서 개발이 비교적 잘 되어 있다.
주요 산으로는 북부에 비봉산(飛鳳山, 579m)·국사봉(國師峰, 521m)· 해망산(海望山, 400m)·천제봉(天祭峰, 359m)·응봉산(鷹峰山, 386m) 등이, 남부에 금성산(金城山, 530m)·선암산(船巖山, 879m)·비봉산(飛鳳山, 672m) 등이 있다. 서남부의 위천(渭川) 유역에는 경북의 3대평야중의 하나로 비교적 넓은 안계평야(安溪平野)가 발달되어 있으며, 개천지(開川池)·조성지(造成池) 등 대규모의 저수지가 있어 농업용수를 공급한다. 내륙 산간지역이기 때문에 위도에 비해 한서(寒暑)의 차이가 심하고 강수량도 적은 편이다.
의성군내를 흐르는 하천은 모두 낙동강 수계(水系)에 곡한다. 군내 강줄기는 국가하천인 낙동강외 지방1급 하천 위천과 지방 2급하천 24개소 등 총연장 315km로 낙동강 상류로 유입된다. 군내 하천은 발원지가 또한 군내이기 때문에 하천의 길이가 짧고 수량도 풍부하지 못하다. top
외지에서 들어오는 하천으로는 군위군 고로면에서 발원하는 위천으로 하천의 양안으로 넓은 평야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군내를 통과하는 하천의 길이가 가장 긴 것으로는 춘산면 신흥리에서 발원한 쌍계천으로 군내를 통과하는 연장이 38.4km에 이른다. 쌍계천과 남대천, 미천의 양안으로는 넓은 평야지가 형성되어 있으나 신평면의 광산천과 안사면의 신평천은 길면서도 가까운 거리에서 평행하여 양류하기에 평야지는 없고 험한 협곡을 이루고 있으나 이들 하천들은 모두 인근지역 생활용수와 농·공업용수를 공급해 주고 있는 젖줄이라 할 것이다.
한서(寒暑), 청우(淸雨), 조습(燥濕) 등의 기후는 기온, 기압, 일조, 눈, 비, 구름, 바람 등에 따라 변동되며 지방의 위·경도, 해발고도, 지형에 의해서도 많은 영향을 받는다. 의성은 백두 대간과 낙동정맥 사이에 둘러싸여 바람의 영향을 적게 받으며, 내륙의 분지에 위치한 까닭에 대륙성 기후의 영향도 적게받아 한서(寒暑)의 폭이 매우 심하다. 따라서 전국적인 일기예보에 여름에는 가장 덮고 겨울에는 가장 추운 곳이자, 첫서리와 첫 얼음이 얼기 시작하는 시기가 빠르고 추운 현상이 늦게까지 지속되어 겨울이 긴 편인데다, 최근 안개일 수가 늘어나고 여름철 국지적인 우박이 자주 내려서 자주 등장하기도 한다. 또한 기단(氣團)과 전선(前線)의 영향을 받는 강수량의 경우 연강수량 900㎜로서 강수량과 흐린 날이 적고 일조량과 증발량이 상대적으로 많아 한건하기에 소류지가 골골마다 차지하고 있다.
위도상으로 의성과 대전은 비등하나 의성의 온도가 1℃ 낮은 특이한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1월의 평균온도가 가장 낮은 해는 1981년의 -7.8℃이고, 7월의 가장 높은 온도는 1994년의 27.8℃로 그 차이는 35.6℃가 된다. 의성은 이처럼 연평균 기온이 낮고,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워서 년 또는 일교차가 심한 지방이다. top
역사시대 이 전
아직 신석기 시대 유적의 확인은 없으나 금성면, 다인면, 점곡면, 봉양면 일대에서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유적인 지석묘가 다량 분포하고 있어 신석기시대의 유적도 확인될 가능성이 짙다.
역사시대
일찍부터 활발히 사회가 분화되어 소국(小國)이 형성되었는데, 변진 24개국 중 변진미리미동국 (弁辰彌離彌凍國)·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 : 단밀면)· 여담국(如湛國 : 금성면 탑리리) 등이 이곳에 비정되고 있다.
185년 (벌휴이사금 2)
조문국의 존립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벌휴왕 2년(185) 2월에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를 좌우 군주로 삼아 조문국을 벌했다.”는 한 조항뿐이다. 이 벌했다는 말을 지리지, 읍지 등에서 "멸(절)했다", "취했다", "진했다" 등으로 해석하여 마치 이때에 조문국이 멸망한 것으로 표현하여 오고 있다.
삼국사기에서 "벌"자를 어떤 뜻으로 사용했는지 그 쓰임새를 살펴보면,
신라본기에,
나해왕 19년(214) 7월에 백제를 벌했고,
무렬왕 6년(659) 4월에 백제가 자주 국경을 침범하므로 벌했고,
5월에도 백제를 벌했다 하였는데 백제는 문무왕 3년(663)에 멸망했다.
파사왕 29년(108) 5월에 군대를 파견하여 비지국, 다벌국, 초팔국을 벌하고 병합했다.
또 고구려 본기에서, top
대무신왕 27년(44) 9월에 한나라 광무제가 바다를 건너 파병하여 낙양을 벌하고 그 땅을 취하여 군.현으로 만들었다 하여 벌을 멸망시켰다는 뜻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또한 여암전서 강계고에서도“조문국은 삼국사기 한 곳에 벌했다는 글에 불과하므로 언제 신라에 종속되었는지 알 수 없다.”하였다.
조문국이 언제까지 존속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조문국의 도읍지 주변인 금성면과 봉양면 일대에 지석묘와 금성면 탑리, 대리, 학미리에 수 많은 고분군이 산재한다. 삼한시대 부족국가들의 형성시기를 서력 기원전후로 본다면 지석묘는 선주민의 것으로 볼 수 있고, 1960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탑리리 고분을 발굴한 결과 금동관을 비롯하여 많은 토기, 철제 등자 등 유물이 나왔는데, 신라토기 편년 전기(350∼450)의 것으로 보고 있다. (의성군문화유적지표 조사보고, p.79) 이 가운데 금동관은 조문국의 왕관으로 보인다.
또한 6세기에 들어와서 신라 지증왕 13년(512년) 1월에 아시촌(阿尸村) 소경(小京)을 설치하였는데 이 아시촌을 지금의 안계지방으로 추정한다. 이곳이 당시 아시혜현이기 때문이다. 법흥왕 12년(525) 2월에는 지금의 상주시인 사벌주에 군주를 배치하였다. 이즈음 신라가 의성 주변의 통치권을 강화한 것을 보면 이때 조문국은 이미 멸망한 뒤가 된다.
고분의 출토유물의 제작연대와 주변 정세를 감안하면 조문국은 5세기 말경에 멸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이곳에 위치한 조문국(召文國)이 신라에 병합되어 군현으로 편성되었는데, 이와 함께 주위 지역인 비안면과 군위군 의흥면 지역도 신라에 편입되어 비안지역에는 아화옥현(阿火屋縣)과 아시혜현(阿尸兮縣)이 설치되었다. top
525년 (법흥왕 12)
2월에는 지금의 상주시인 사벌주에 군주를 배치하였다. 이즈음 신라가 의성 주변의 통치권을 강화한 것을 보면 이때 조문국(召文國)은 이미 멸망한 뒤가 된다. 고분 출토유물의 제작년대와 주변 정세를 감안하면 조문국(召文國)은 5세기 말경에 멸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신라는 부족국가를 정복하면 나라를 폐하고 주·부·군·현의 행정구역으로 편입시키면서 이름은 그대로 두는 것이 통례였다. 『三國史記』에 ‘231년(助賁王 2) 7월에 감문국을 토파하고 그 땅을 군으로 하였고’, ‘532년(법흥왕 19) 3월에 금관국(金官國)의 왕 김구해(金仇亥)가 항복하므로 그 땅을 금관군으로 하였다.’는 예로 보아 조문국이 멸망하고는 조문군이 되었을 것이다.
673년 (문무왕 13)
9월에 조문성을 쌓았는데 이 이름은 당시 조문군의 명칭에서 붙인 것으로 본다. 서기 700년 경에 축조한 것으로 보는 탑리리의 5층 석탑(국보 제77호)도 처음에 조문탑(詔聞塔)이라 하였으나 조문군이 폐하고는 산운탑(山雲塔)으로 개칭했다. 김정호의 『大東地志』(1864)에 ‘조문국(召文國/韶聞國)이 멸망하고 조문군(詔聞郡)이 되었다.’한 것도 위와 같은 견해일 것이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이 쓴 백장령의 비봉설에 관한 기문(記文)에 ‘조문(詔聞)이 800년간의 긴 복록을 누렸다.’ 라고 한 것은 조문국(召文國)이 기원 전후에 건국하여 조문군(詔聞郡)을 거쳐 경덕왕 16년(717년)에 문소군이 될 때까지의 가리킨 듯 하고,
717년 (경덕왕 16)
문소군(聞韶郡)이 될 때까지의 기간을 가리킨 듯 하고, 전(傳) 소문국(召文國) 경덕왕릉 (景德王陵)에 관한 전설에 오극겸이 꿈에서 얻은 시 ‘천년 지난 오늘에 경덕분(景德墳)만 남았도다. 조문(詔聞)의 거문고 가버린 지금…’이란 구절 등에서 전설의 발상 시기가 현령 이우신(李雨臣)이 경덕왕릉을 증축하였다는 1725년(영조 元年)과 맞물려 나가므로 이 1,000년은 조문군이 폐한 때부터의 기간이 되는 것이다. 그 뒤 이 지역은 크게 의성·비안·의흥의 세 지역으로 나뉘어 군현제 아래에 들어갔는데, 『三國史節要』 제12권 757년(경덕왕 16) 12월에 전국을 9주로 나누고, 군·현의 이름을 고치면서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다. 의성지역에는 문소군(聞韶郡)이, 비안지역에는 비옥현 (比屋縣)·안현현(安賢縣)이 설치되었고 문소군이 이들 3개 현과 진보현을 다스렸다. 이 시기 다인현은 상주의 직할현이 되고, 지금의 옥산지방인 일계현과 단촌지방인 고구현은 안동인 고창군에 영속되었다. top
후삼국의 쟁 패 기
군사상 요지로서 왕건과 견훤의 쟁탈 대상이 되었는데, 이 지역의 호족 홍술(洪述)이 왕건에게 귀부하였으므로 의성부(義城府)가 설치되어 우대받았다. 『高麗史地理志』에 ‘의성현은 본래 소문국(召文國)인데 신라가 취했다. 경덕왕이 문소군(聞韶郡)으로 고쳤고, 고려 초에 의성부(義城府)로 승격하였다.
918년 (태조 원년)
8월 병신(丙申)일에 평양이 옛 고구려의 도읍지인데도 퇴락하고 여진족이 침범하여 어지럽히므로 이곳을 대도호부로 승격시켜 수비하도록 했다.
935년 (태조 18)
12월 임신(壬申)일에 신라국을 폐하고 경주로 하였다.’ 등의 예로 보아 태조가 행정구역 개편에 신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조는 건국 초기에 홍술 장군이 자신에게 귀부(歸附)하여 성을 지키다가 전사함에 “나의 좌우팔을 잃은 것과 같다”하여 슬퍼하였던 사실로 미뤄 고려 건국에 일조한 공을 잊지못하여 940년(태조 23) 행정구역 개편 때 문소군(聞韶郡)을 의성부(義城府)로 개명·승격시켰을 것으로 판단된다. top
1018년 (현종 9년)
문소군(聞韶郡)이 의성부로 승격된 연도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지만 의성부와 관계되는 기록은 다음과 같다.
(1) 『三國史記』 신라 본기(新羅本紀)에 ‘929년(경순왕 3) 7월에 견훤이 의성부를 치니, 고려장군 홍술(洪述)이 나가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고 전사하였다.’
(2) 『三國遺事』 기이(紀異) 후백제 견훤조에 ‘929년 견훤은 전쟁에 이긴 기세를 타서 대목성(大木城), 경산부(京山府)와 강주(康州)를 노략하고 부곡성(缶谷城)을 공격했는데 의성부의 태수 홍술(洪述)은 대항해 싸우다가 죽었다.’
(3) 『三國史記』 지리지(地理志)에 ‘문소군(聞韶郡)은 본래 조문국(召文國)인데 경덕왕이 개명하였고, 지금의 의성부로 영현이 넷이다.’
위 『三國史記』 신라본기 및 『三國遺事』의 문맥을 보면 홍술장군이 전사하기 이전에 이미 의성부가 된 것 같으나 당시의 정황으로 봐서 의성부로 개명·승격될만한 사유를 찾을 수 없으며, 『三國史記』와 『三國遺事』를 편찬할 당시에 의성부로 있었기에 위와 같은 표현이 된 것 같다. top
918년 (태조 원년) 월 무진(戊辰)일에 태조가 다음과 같은 조서(詔書)를 내렸다. “… 이전 임금(弓裔)이 신라의 품계, 관직, 군·현의 명칭 등을 비속하다고하여 새 제도를 만들어 여러 해를 통용했으나 백성들이 잘 알지 못하여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제 이런 것들을 모두 신라의 제도로 다시 고쳐야 한다. 그러나 그 이름 중에서 알기 쉬운 것은 새로 만든 것을 쫓아도 될 것이다.” 하였다. 이렇게 군·현의 이름을 함부로 고치지 못하게 하다가 나라가 완전히 평정되고, 940년(태조 23) 경자(庚子)년 3월에 주·부 군·현의 이름을 고쳤다. 태조가 처음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한 것으로 그의 신중함을 엿볼 수가 있다.
지방제도 개편시에 의성부(義城府)와 의흥군(義興郡)은 안동부에 속하였고, 비옥현(比屋縣)과 이때 이름이 안현현(安賢縣)에서 바뀐 안정현(安定縣)은 상주목(尙州牧)의 속현이 되었다.
1143년 (인종 21)
현으로 개편되어 현령이 파견되어 주현(主縣)이 되었지만, 1199년(신종 2)에 적에게 함락되어 작은 현으로 강등되고 현령이 감무로 교체되었는데 이 때의 적이란 1198년 (신종 元年)에 일어난 만적(萬積)의 난, 1199년(신종 2)에 일어난 명주(溟州)와 동경(東京)의 민란을 꼽을 수 있다. top
고려 충렬왕 (1274∼1308)
대구에 병합되었다가 현령을 다시 찾았다.’ 하였다. 대구는 현(縣)으로서 인종 21년에 의성과 함께 현령(縣令)이 배치된 곳으로 1419년(세종 元年)에 군으로 승격하였다. 현에 병합되었다는 것은 행정구역으로서는 최악의 상태이며 감무(監務)도 배치되지 않고 실질적으로는 대구현의 아전(衙前)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것이다. 필시 의성현(義城縣)에 큰 사건·사고가 발생한 탓인데 그 내막은 알 길이 없다. 그 뒤 ‘현령을 되찾았다.’고 한 것은 대구의 속현에서 해제되고 대현(大縣)으로서 현령이 배치되었다는 것인데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1390년 (공양왕 2)
의흥현과 안정현에 감무가 파견되었는데 의흥현은 선주(善州)에 소속된 부계현(缶溪縣)을 합병하였고, 비옥현(比屋縣)은 안정현 감무의 지배를 받았다.
조선 초
세 지역은 행정구역을 그대로 유지하였으나 의흥현은 1413년(태종 13) 현감이 임명되었고, 비옥현은 1421년(세종 3) 안정현과 합쳐서 안비현(安比縣)이 되었고, 1423년 비안현(比安縣)으로 다시 개명되었다. 당시의 호구수는 『慶尙道地理志』에 의하면 의성현이 637호 4,102인, 의흥현이 424호 3,392인, 비안현이 463호 4,077인이었다. 이 지역에서는 조선 전기 이래 많은 인물이 배출되어 문풍을 떨쳤다. 임진왜란 때 김사원(金士元)·김해(金亥)·김치중(金致中) 등이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였으며, 정묘호란·병자호란 때에는 신적도(申適道)·권수경(權守經) 등이 역시 의병을 일으켜 크게 활약하였다. 행정구역은 도 아래에 부(府)·대도호부(大都護府)·목도호부(牧都護府)·군(郡)·현(縣)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갑오경장 다음해인 1895년(고종 32) 5월 26일에 칙령 98호로 도를 없애고 전국을 23부로 나누고, 종래의 목·부·군·현을 군으로 단일화하여 부(府) 밑에 두는 제도로 개편하였다. 이때 의성과 비안현은 군으로 개편되어 군수를 두게 되었다. 전국을 23부로 분할 할 때 경상도는 진주, 동래, 대구, 안동부로 나뉘었다. 이러한 개편이 뿌리 깊은 8도제를 무시한 것으로 큰 마찰이 일어나 다음해 1896년(建陽 元年) 8월 4일 칙령 36호로 부제를 폐지하고 13도제를 채택하였다. 전국을 13도로 나누고 그 밑에 1목(牧)·9부(府)·329군(郡)을 두었는데 이때 경상도가 남북으로 갈라져서 경상북도가 생기고 의성과 비안군은 경상북도의 관할이 되었다. 목, 부, 군을 5등급으로 나누어 인원·봉급·경비를 달리하였는데 의성은 2등군, 비안은 4등군이 되었다. top
1906년 상주군의 단밀·단동·단북·단남면이 비안군에 편입되었고, 『朝鮮환輿勝覽』(1984) 건치연혁조에 ‘1907년(광무 11) 6월 1일에 비안 일부를 나누어 내속시켰고’는 비안군 외북면이 의성군 안평면에 편입된 것을 말한다.
『義城誌』(1932) 건치연혁에 ‘1907년(광무 11)에 구 비안군과 구 의흥군의 각 1면을 이속하였고’와 『의성승감』(1962) 건치연혁에 ‘1907년(광무 11)에 구 비안군, 구 의흥군에 각 일부를 할하여 이속하였고’는 착오로 보인다. 의성현이 군으로 개편된 직후에 편찬한 『義城郡誌』에 의하면 의성군에 속한 면은 19개로서 남부·북부·단촌·점곡·옥산·사곡·빙산·소야·가음·산운· 억곡·상천·조문·하천·금뢰·석전·안평·우곡면이다.
1907~1914년
부군현(府郡縣)의 통폐합에 따라 비안군·의흥군은 의성군에 병합되었고, 1909년 6월 25일에 의성군의 우곡면이 비안군에 편입되어 18개면이 되었다.
1914년 다인면을 편입하여 오늘날의 의성군으로 발전하였으며, 부령 제111호(1914. 3. 1)에 의거, 부·군·면의 행정구역에 관한 폐합 정리가 추진되어 1914년 4월 1일에는 대대적인 개편이 단행되었다. 부령 제173호(1914. 12. 22)에 의거, 1915년 1월 1일에 조문면 용대동을 군위군에 이양, 비안군이 관할한 현서면을 예천군 풍양면으로 이양하고는 비안군 전부가 의성군에 편입되었다. 의성군 소야면을 군위군에 이양, 다음과 같은 인접지역이 의성군에 편입되었다. 안동군 남선면의 외하, 토지동, 의흥군 내화면 원제동, 용궁군 신하면(막제동 외 12개동), 군위군 화곡면 사지, 율사동이다. 이때 군내의 면을 폐합하였는데, 의성군 관내의 남부·북부면을 의성면, 단촌· 구산면을 단촌면, 빙산면을 춘산면, 산운·억곡면을 산운면, 상천·조문면을 조문면, 하천·금뢰면을 봉양면, 석전·안평면을 안평면, 기타 점곡·옥산·사곡·가음면을 그대로 하여 11개 면이 되고 구 비안군 관할을 전면 재편하여 비안·구천·단밀·단북·안계·다인·신평면의 7개 면이 되어 모두 18개 면이 되었다.
1931년 top
제령(制令) 제12호(1930. 12. 1)에 의거, 읍·면 제도가 4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의성면이 읍으로 승격된 기록은, 『의성승감』 건치연혁에 ‘1935년에 의성면은 읍으로 승격되어’라고 하였고 『한국지방행정사』(내무부, 1988) 상권, 시·도별 행정구역 변천에 ‘1936년 11월 1일에 의성면이 읍으로 승격’으로 되어 있고, 『의성통계연보』에도 ‘1936년에 읍으로 승격’된 것으로 되어 있어 의성읍 승격이 1936년으로 인식되어 왔으며, 읍 승격 당시의 부령(部令)이 공고된 관보가 발견되었다.
1934년
1934년 2월 1일에 산운면과 조문면을 금성면으로 통합하여 17개면으로 되었다.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1973. 3. 12 공포)로 금성면 광현동을 군위군 군위면에 편입하였다.
1974년 10월 22일
군조례 제578호(1974. 10. 22 공포)로 신평면 안사출장소 설치
1983년 2월 15일
대통령령 제11027호(1983. 1. 10 공포)로 비안면 안평동을 봉양면으로 편입하였다.
1987년 1월 1일 top
대통령령 제12007호(1986. 12. 23 공포)로 단밀면 용산동을 선산군 도개면으로, 선산군 도개면 청산동을 구천면으로 편입시켰다.
1990년 4월 1일
군조례 제1411호(1990. 3. 22 공포)로 신평면 안사출장소를 면으로 승격, 1읍 17면 체제가 되었음.
1995년 4월 27일
군조례 제1724호(1995. 4. 27 공포)에 의해 단북면 신하리 일부를 다인면 용무리로 편입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