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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31회)
가련과 보내는 밤
"훈장 노릇이
그렇게도 괴로운 일 인가요?"
"안 해본 사람은 모르지.
그러니 훈장님 훈장님 하지 말게."
"그럼 뭐라 부르지요 ?"
"자네 마음대로 .."
"그럼, 서방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그거 좋군! "
두 사람은 여기서 말을 멈췄다.
가까운 곳에서 밤 개가 짖는 소리가 나는 듯 한데,
그 소리가 무엇엔가 파묻혀 아득하게 들린다.
이 순간, 밖에서 눈이 내리는지
방안의 공기는 잠잠하고 촛불은 흔들림 없이
고요한 빛을 내고 있었다.
김삿갓은 갑자기
가련을 안아 보고싶은 충동이 불같이 일어났다.
"서방님!
서방님께서 지으신 시가
웬지 소첩의 신세를 읊픈 것 같아 눈물이 나려하는군요."
"아니 그건 내 신세타령을 한것 인데
자네 처지와 같다니 그건 무슨 말인가?"
김삿갓은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감정이 미묘해졌다.
그것은 가련이 입에서 나온
'서방님'과 '소첩'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권주가를 부르고,
가야금과 장고소리에
저의 꽃다운 시절이 모두 지나가 버릴 것 같아서요."
"허허, 그럴 법도 하군.
허나 사람들의 세상살이가 모두 다 그렇게 지나는 걸 ..."
"그럴까요?"
"그렇다니까,
그러니 자기 생각대로 뜻있게 살아가면 되는 걸세."
"서방님, 소첩도
부모님 덕분에 시문을 좀 배워 알고는 있지만
서방님같은 시제는 만나뵙지 못했습니다.
서방님,
소첩에게는 간절한 소망이 한가지 있는데
들어 주시겠어요?"
"뭔가?
말해보게."
김삿갓은
가련이 기생의 몸이다 보니
말을 함에 있어, 해라를 하여도 될것 이나
혀가 돌아가지 않았다.
따라서 가련과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엉거주춤한 반말이 되었다.
"서방님을 곁에서 모시면서
시문을 배웠으면 해서요."
"이번에는 가련의 훈장 노릇을 하란 말인가?
하하하 ..이러고 보니
다 뜻이 있어 날 불렀군 그래."
"달리 생각지는 마세요.
첫째로는 서방님이 좋으니까 곁에서 모시려고 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시가 좋아 배우려는 것이에요. 들어 주시겠어요?"
가련이는 말을 하며
엉덩이를 방바닥에 끌듯 붙여 삿갓 곁으로 가까이 다가와 앉는다.
"그러다간 이 안변 땅에서 쫒겨나기 십상이지."
"그건 또 왜요?"
"사또 자제의 훈장 노릇을 하는 것도 시기가 나
나를 쫒아 내려는 사람이 많은데
한 발 더 나아가
자네, 가련이와 사귀고 있다는 소문이 나보게.
나를 기둥서방이라고 점찍어
배 아파 할 사람이 한 둘이 아닐걸세."
"서방님,
제가 누구에게 매인 몸이라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
"우선 서진사가 가만히 있지 않을게야."
"서진사가요? 호호호호 ..."
가련이는 간드러지게 웃었다.
"그 영감이 제게 침을 흘리고는 있지요.
하지만 그뿐이에요.
지난 봄에는 제 머리를 얹어 주겠다며
이천 냥을 줄테니
당신 소실로 들어 오라고 며칠을 두고 치근덕 거렸지요."
"그래, 거절했단 말인가?"
"거절 했지요.
누가 그런 영감탱이 한테 순결을 바치겠어요?"
"순결...?"
삿갓은 눈이 크게 떠졌다.
기생이 순결이라니 ..
별스럽게 들리기 까지 했다."
그러자 가련이 눈치를 채고
"서방님은 기생에게는 순결이 없는 줄 아세요?"
"글쎄, 정절이라는 말은 들은바 있으되
순결 이라는 말은 아직 들은바 없네."
가련이는 갑자기 샐쭉해 지더니
한숨을 푸욱 하고 쉬었다.
"기생이 순결을 말하다니
어떻게 생각하면 가당치 않지요.
하지만 소첩은 아직 동기(童妓)예요.
여자는 첫 정을 준 남자를
죽을 때 까지 잊지 못하는 법이에요.
우리같은 기생들도 마찬가지죠.
그동안 머리를 얹어 주겠다는 사내들은 많았지만
어차피 사내들 틈에서 시들어 갈 몸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첫정 만큼은 제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바치고 싶었지요."
김삿갓은 가련의 말을 듣고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면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으면
평생 처녀의 몸으로 늙어 가겠군!"
"호호호 ..
걱정 마세요.
가련이의 처녀성도 이제는 경각에 달렸으니까요."
"경각이라니?"
"아이참, 서방님도 어쩜 그리 둔감하세요.
제 머리는 오늘밤 서방님의 손으로 정히 올려질 거예요."
이 말을 듣자
김삿갓은 가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가련의 첫 정의 상대가 되나?"
김삿갓은 어림없다는 말투로 대꾸했다.
"그건 외람 되오나 제가 결정할 문제여요.
서방님, 부디 제 곁에 오래 있어 주세요.
제가 서방님을 편하게 모실수 있어요.
싫다 하시면 기생질을 못해도 좋아요."
김삿갓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것은 가련이와 정이 들더라도
이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냥 하룻밤 불장난이라면 모르겠지만...
김삿갓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련의 손을 잡았다.
보드랍고 따듯한 손이
그녀의 마음을 손에 쥐어 보는 것 같았다.
"헛참, 이거 정말 큰 일이군 ! "
김삿갓은 이런 마음이 앞섯지만
마음과 달리 몸은 따로 놀았다.
가련의 앵두같은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대 보았다.
가련의 입에서 흥건한 향기가 났다.
아니 그것은 자신이 마신 향기로운 술 냄새였다.
김삿갓은
가련의 목덜미를 자신의 팔로 감아
더욱 자기 쪽으로 끌어 당겼다.
그리고 자신의 혀를 가련의 입 속으로 넣었다.
코 끝에 가련의 깊은 숨이 따듯하게 느껴졌다.
이것은 가련도 마찬가지로
서로의 속 숨을 아낌없이 교환했다.
"아아! 이러면 안되는데..."
김삿갓의 머리속에선
가련을 지켜주고 싶은 생각이 끊임없이 샘 솟았지만
그의 몸은 이미 가련의 몸을 탐하고 있었다.
가련이 삿갓의 손을 살며시 걷어냈다.
"서방님 잠깐만 .."
가련은 김삿갓의 성급함을 말렸다.
난데없는 가련의 제지로 김삿갓은 머쓱해졌다.
"상 좀 물리고 금침을 펼께요."
가련의 의도가 늦게나마 파악된 삿갓은
무안의 웃음을 지었다.
"자네로 향하는 마음이 너무 성급해 미안하네."
김삿갓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자
가련은 눈동자를 위로하고 삿갓을 쳐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무안해진 김삿갓은
빠른 손놀림으로 주안상을 윗목으로 물리는
가련의 모습을 멍하고 보다가
술이 취한척 그자리에 벌렁 누워 버렸다.
"서방님, 서방님...!"
상을 물리고 비단금침을 펴놓은 가련은
술에 취해 잠든 척
누워있는 삿갓의 가슴에 손을 대고
자신의 입을 삿갓의 귀에 대고 소근소근 불렀다.
삿갓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조금전의 성급했던 무안감 때문에
이제는 모든 것을 가련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아이참 .."
가련은 술 취한 척 누워있는 삿갓의 옷을
살금살금 벗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활활 타던 황촛불을 끄고
바스락 소리를 내며 옷을 벗더니 삿갓 곁으로 파고 들었다.
팔팔한 젊은 남녀가 자리를 같이하니
열정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삿갓은 가련의 몸을 애무했다.
마치 비단잉어를 만지듯 가련의 몸은 매끄럽기 그지 없었다.
"내 언문 시조를 한수 읊을까?"
좀 전까지 취한척 했던 삿갓이
속삭이듯 가련에게 말했다.
"그러셔요."
이렇게 말을 한 가련의 입에서는
더운 숨이 뿜어져 나왔다.
"큰 솔밭 밑에 작은 솔밭 ..
작은 솔밭 아래 옹달샘 ..
옹담샘을 돌아가니 여우굴이 나왔다."
"이것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삿갓은 가련에 귀에 대고 소근소근 말을 했다.
"얼굴이지요.
큰 솔밭은 머리털이고
작은 솔밭은 눈썹일 테고,
여우굴은 콧구멍이 아니겠어요?"
"맞았다."
삿갓은 어둠속에서 빙긋이 웃었다.
삿갓이 가련의 얼굴을 매만지고 있다가
살금살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시 한 수 읊으랴?"
"농담하시면 싫어요."
가련은 샐쭉 눈을 흘겼다.
삿갓은
가련의 몸을 어루만지고 쓰다듬으며
나지막히 말을 했다.
"창 밖에는
동지섣달 함박눈이 내리는데
금침 속에서는 봄을 맞아 복숭아 두알이 향기롭게 익었도다.
미끄러지듯 흘러내린 언덕아래 옹달샘은
월궁 선녀가 목욕하는 자리인가?"
김삿갓은 이렇게 읊조리며
가련의 옥문을 더듬었다.
"아이 ... "
가련은 몸을 꼬았다.
쌍심지에 불을 붙인 듯
활활 타오르는 삿갓의 욕정은 더이상 참을수 없었다.
삿갓은 가련의 몸 위에 포개졌다.
가련의 아래에서 비릿한 냄새가 났다.
삿갓은 냄새에 개의치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처(妻)와 첫날 밤을 맞았을 때와
같은 냄새였기 때문이다.
다음날 김삿갓은 느즈막히 눈을 떳다.
어느결에 일어 났는지
가련은 이미 몸단장을 곱게 한 뒤 였다.
"잠도 곤하게 잘 주무시네요"
가련이 이렇게 말하고 얼굴을 붉혔다.
"자네 탓일세....."
잠이 덜 깬 삿갓의 능청스러움에
가련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고
눈은 게 눈 처럼 샐쭉 흘겼다.
"예쁘다....."
누워서 올려다 보니
가련의 모습은 더욱 아름다웠다.
방랑시인 김삿갓. (32회)
가련과의 영원한 이별.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다.
김삿갓은 늘 안변을 떠나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가련과의 사랑에 얽매어 좀체 ,
다시 길을 떠날 용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김삿갓은 가련과 사랑을 나누면서도
늘 걱정이 되는 것은
혹시라도 가련의 몸에 아기라도 생기면
어떡하나 하는 것이었다.
가련과 일생을 같이 한다면 모르겠거니와
김삿갓의 입장에서 본다면
정처없는 방랑길에
한순간 불같은 열정에 사로잡혀 저지르고 있는 일인데,
만일 아기가 생긴다면
자신 보다 가련의 불행이요,
아이의 불행 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여러가지 생각 때문에
김삿갓의 마음이 이곳 안변에 더 머물게 하지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사또에게 자기의 뜻을 말했더니
사또가 펄쩍 뛰었다.
"이왕 방랑길에 나섯음에,
무엇이 그리 바쁘단 말이오.
우리집 아이가 급제 하는 것이나 보고 떠나도록 하시오.
누가 가르친 아이인데
결말을 아니보고 떠난단 말이오?"하며
사또는 김삿갓을 극구 만류하였다.
사람과의 일로,
거만이나 아니꼬운 사태에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지만
인정과 도리에는 약한 김삿갓,
인정에 얽매어 마냥 속절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가을이 되자
사또의 자제가 알성시에 응시하여
장원은 아니었으나 급제를 하여 한양으로 떠났다.
그러자 안변 일대에 돈 깨나 있는 집안에서는
김삿갓을 독선생으로 모셔가려고 난리가났다.
그들은 사또에게 별의별 청을 하는 등
한동안 야단법석을 떨었다.
하지만 사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김삿갓을 편하게 하고 곁에 두고 싶어했다.
그해 가을이 가고 겨울도 가고 봄이오자
김삿갓은 이제는 기필코 떠나리라 결심했다.
지난 일년여 처럼 편히 먹고
계집과 잠자리를 즐기려고
고생하는 아내와 어린자식을 두고 가출한 그가 아니었다.
이곳 저곳을 정처없이 떠돌면서
후한 대접보다는 박대를 받는 것이 오히려 편했고,
또 글로써
그들을 매도하여 질타 하는 것을
보람과 즐거움으로 여기는 김삿갓이 아니던가?
어느덧 사월이 되어
푸른싹이 돋아나기 시작했고
산야는 진달래의 붉은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김삿갓은 새봄 바람에 얹혀
삿갓을 쓰고 훠이훠이 도포자락을 날리며
어디론가 떠나가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
삿갓은 가련이와 술상을 마주한 자리에서
슬며시 말을 꺼냈다.
"임자, 내가 그동안
너무 바깥세상을 외면하고 지냈네.
사또의 은혜와 자네의 따사로운 품속에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있었지.
이제 봄도 되었으니
북쪽으로 두만강까지 두루 유람을 하였으면 하네."
김삿갓이 말을 마치자 가련의 두눈이 크게 떠졌다.
"그럼 제 곁을 떠나시겠다는 말씀이세요 ?"
"잠깐 외지 바람을 쏘이겠다는 것이지.
겨울이 오기 전에 돌아 올 것이니 걱정하지 말게나."
"그렇게나 늦게요? "
김삿갓의 방랑벽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련은
겨울이 오기전 이라는 말에 가슴이 철렁했던 모양이다.
"자고로 시인 묵객은
견문을 넓히기 위해 주유천하(周遊天下)하는 법이네.
그러면서
자신의 시를 살찌울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지.
내 일정 전 이라도 자네품이 그리우면
그대로 돌아 올 것이니 너무 염려는 말게나."
김삿갓은
되도록 가련이를 안심시키려고 이렇게 말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가련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서방님 뜻이 그러하시다면 할수 없는 일이지만
꼭 돌아 오시는거죠?"
몇 번이라도 그녀는
다짐을 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틀림 없대두.
함흥, 북청으로 해서 두만강 까지 갖다 오려면
빨라야 늦가을 쯤 되겠지..."
"꼭 돌아 오셔야 해요.
만약 동짓달까지 서방님이 돌아 오시지 않는다면
가련이는 죽고 말거예요."
"죽어? "
김삿갓은 가슴이 뜨끔했다.
"네, 저를 살리려면
꼭 그때까지 돌아오세요."
"돌아오지"
허나 자신있는 대답은 아니었다.
이별을 앞둔 그날 밤,
여늬날 보다 더 두 사람의 사랑은 불보다 뜨거웠다.
다음날 아침 밥상을 물린 김삿갓은
시를 한 수 지었다.
"막상 길을 떠나려니
나도 왠지 서글프구나. 붓을 주게."
그의 심정은 매우 착찹했다.
오가다 만난 인연이었지만
일 년이라는 시간의 거미줄에
서로의 깊은 정을 얽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먹물을 찍어 화선지에 그림을 그리듯 글을 썼다.
가련문전 별가련 可憐門前 別可憐
가련이 문전에서 가련과 이별하려니
가련행객 우가련 可憐行客 尤可憐
가련한 행객이 더욱 가련 하구나!
가련막석 가련거 可憐莫惜 可憐去
가련아 가련하게 떠남을 슬퍼 말아라.
가련불망 귀가련 可憐不忘 歸可憐
내 너를 잊지 않고 떠난 듯이 다시 오리라.
가련이 시를 읽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두 사람의 절절한 사랑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기에 슬픔은 더욱 북받쳤다.
가련이는 노자돈을 후하게 내 놓았다.
그러나 김삿갓은 한사코 받지 않았다.
"임자, 돈을 쓰면서 유람 하는 것은
내 분수에 맞지 않네.
그냥 두어 두게.
나는 빈 몸이 좋아."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대문에서 눈물을 흘리는 가련의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이를 악 물고 걸음을 재촉했다.
김삿갓이 관아로 돌아와서
사또에게 불문곡직, 하직을 고하니
사또가 매우 섭섭해 만류 하였으나
삿갓의 결심이
너무도 굳건한 것을 알게 된 사또는 체념을 하였다.
그 또한 후하게 돈을 내어 놓았으나
삿갓이 한사코 받지 않으려 하자,
"그래 가련이와는 이야기를 잘 나누었소?"
가련이와의 관계를 잘 알고 있는 사또가 물었다.
"예, 돌아 다니다가 고달프면 돌아 오겠다고 했습니다.
하오나 기약없는 약속이지요."
"관북을 모두 돌아 보려면 이 삼년은 족히 걸릴 것이오.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려주시오.
내 그때까지 이곳에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자리가 바뀌더라도 일러놓고 가리다.
그리고 아들놈 가르친 수고는
권해도 받지 않으려 하니
대신 가련에게 보내도록 하겠소."
"보살펴주신 은혜도 백골난망 이온데,
더 없는 배려를 하심을 어찌 잊겠습니까."
김삿갓은 큰 절로써 사또와 작별을 하였다.
이렇게해서 김삿갓은
일년이 넘도록 정이 들었던 안변을 떠나
다시 정처없는 방랑길에 올랐다.
방랑시인 김삿갓 (33회)
석왕사에 얽힌 내막. "상편"
김삿갓은 마침내 본연의 생활로 돌아갔다.
집을 떠난지 두 해째,
그는 안락한 생활보다
천대를 받으며 찬밥 한술로 끼니를 때우더라도
거기에 술만 한 잔 더해 진다면
바람따라 흘러다니는 지금의 생활이
훨씬 마음이 편하다고 생각했다.
김삿갓이 안변 관아를 떠나
북쪽으로 길을 잡아 발길을 옮긴 지 하루째,
안변 설봉산 석왕사(釋王寺) 앞에 이르렀다.
이곳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건국신화가 서려 있는 곳이다.
김삿갓이 이곳 석왕사에 온 까닭은
금강산 입석암을 떠날 때
"혹시 안변 석왕사에 가게되면
반월 행자를 찾으시오.
그 아이는 나의 제자로
지금은 그곳에 있소이다.
사람이 선량하고 다정하니,
삿갓선생을 정성껏 도울것 이오."라 한
노스님의 당부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설봉산 석왕사는 워낙 크고 웅장해서
금강산의 장안사나 유점사에 견주어도
크기에서 조금도 손색없는 큰 절이었다.
특히 절을 둘러싸고 있는
천년 노송들은 향기짙은 솔내를 풍겨
금강산과는 또 다른 정치가 물씬 풍겼다.
김삿갓이 경내에 들어서자
첫 보이는 것은 사대천왕 이었다.
사대천왕은 무시무시한 덩치에
머리에는 관(冠)을 쓰고
손에는 커다란 창을 꼬나쥐고
앉듯이 서서 두 눈을 성큼 부릅떠
드나드는 죄 많은 중생들을 노려 보고 있다.
김삿갓은 경내 곳곳을 휘둘러보며
입석암 노승이 말한 반월 행자를 찾았다.
나이가 삼십쯤 되어 뵈는 반월 행자는
김삿갓을 만나자 크게 반가워했다.
"삿갓 선생님이시라고요?
나의 스승이신 큰스님의 기별이 있었고,
삿갓 선생님의 말씀도 많이 들었습니다.
이곳에 계시는 동안
잘 도와 드리라는 당부 말씀도 있었습니다."
"내가 이곳에 오래 머물 생각은 없지만,
있는 동안 구경이나 잘 시켜주시오."
"예, 이 석왕사에 대해서는
제가 모르는 것이 없다고 여깁니다.
물으시는 대로 설명을 해올리지요."
반월 행자가 앞장서서
석왕사 경내를 안내하며 하는 말이,
"선생은 이 절이
언제 누구의 손에 창건 되었으며,
절 이름을 석왕사로 부르는지 아십니까 ?"하고 물었다.
"글쎄요,
석왕사는 어떤 유래를 가진 절 입니까 ?"
"그럼 제가 자세한 사연을 설명 드리지요."하며
다음과 같은 유래를 들려 주었다.
고려말 이성계가 영흥에 살고 있을 때의 일로,
청년 이성계는 무예를 닦는라고
전국 각지로 떠돌아 다니다가
어느 날 밤 안변 산속에 있는 작은 암자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그날 밤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에 무너져 가는 집에서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지고 나오는 꿈이었는데
집안에 거울은 깨져 있고
화원에 꽃은 모두 낙화(落花)되어 있었다.
꿈에서 깬 이성계는
마음이 착찹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해서, 암자의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은 혹시 해몽을 할 줄 아시오?"
"저는 꿈을 풀 줄 모릅니다."
"그러면 이 부근에서 혹 해몽을 잘 하는 사람은 없을까요?"
"여기서 저 산속으로 십 리쯤 더 들어가면
토굴에서 수행하고있는 도사 한 분이 계신데,
그분이 파자점(破字占)을 잘 치기로
소문난 분이니 꿈 해몽도 잘 하시리라 생각됩니다."
"그 도사의 이름은 무어라하오 ? "
"무학(無學) 도사라 부르옵니다."
이성계는 즉시 토굴로 무학도사를 찾아 갔다.
무학도사는 육십 쯤 되었을까,
토굴 속에서 혼자 수행하고 있는데
그에게는 파자점을 치러
먼저 찾아온 손님이 한 사람 있었다.
"평생 신수를 보려면
당신이 마음 속에 두고 있는
글자를 한 자를 써 보여 주시오.
그러면 그 글자를 가지고 점을 쳐주겠소."
생긴 것도 준수하고
입은 옷도 말끔해 보이는 앞선 사람이
붓을 들어 문(問)자를 써보인다.
이성계는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었다.
무학도사는 問자를 손에 받아 들고 눈을 감더니
오랫동안 명상에 잠긴다.
그러다가 홀연 눈을 뜨더니,
"問"자를 이리도 놓고 저리도 놓고 바라 보면서
"쩝쩝" 소리를 내어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문득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을 하였다.
"음 ..평생 신수가 아주 고약하군 그래,
당신은 암만해도
거지 신세를 한 평생 면하기가 어렵겠소."
그 소리에 놀란 것은 장본인 뿐만 아니었다.
등 뒤에서 무심히 듣고 있던 이성계도 깜짝 놀랐다.
무학도사가 말한
한 평생 거지꼴을 면할수 없다는 사람은
어디로 보나 거지차림이 아니었다.
그는 옷도 깨끗하게 입었고
생김새도 준수하여 거지 같지 않았다.
"스님! 제가 어째서
거지 팔자를 타고 났다 하십니까?
저는 거지가 아니옵니다."
거지로 단정받은 사나이가 이렇게 항의하자
무학도사는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말을했다.
"바른대로 말하라구!
"問"자는 입구(口)자가 문에 걸렸으니,
그대가 문전 걸식을 하는 거지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당사자는 그 말을 듣고 움찔 하더니,
한동안 아무말 없이 멍하니 앉아 있다가,
"나는 거지 신세를 면해 볼까 하여
옷까지 깨끗하게 갈아 입고 점을 치러 왔건만,
아무래도 팔자 도망은 못 하는 모양이구나!"
혼자 장 탄식을 하며 총총히 달아나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보면
무학도사의 파자점은 족집게 처럼 정확하게 들어 맞았다.
이성계는 놀라면서도 의문이 생겼다.
그것은 무학도사의 이론대로라면
문(問)자를 써 보인 사람은
모두 거지라야 하겠기에....
그래서 이성계는 놀라움과 함께
은근한 실망감도 생겨 멍하게 앉아 있었다.
"그대는 무슨 일로 찾아 왔는고?"
무학도사가 이성계를 바라보며 물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든 이성계가 말했다.
"저도 파자점을 쳐보고 싶어 왔사옵니다."
"올치, 그럼 마음 속에 두고있는 글자를 써 내보이게.
그래야 그 글자를 가지고 점을 칠게 아닌가?"
도도하기 이를 데 없는 말씨였다.
이성계는 도사를 골탕 먹여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
"아무 글자나 써내도 상관 없겠습니까?"하고 물었다.
"물론이지!
무슨 글자라도 좋으니
쓰고 싶은 글자를 써보이게."
이성계는 주저하다가
조금전 거지라고 단정 받았던
그 사내가 썼던 글자와 똑 같은 "問"자를 써보이며
말을 했다. "이 글자로 점을 쳐보아 주십시오."
무학도사는 問자를 받아 들더니
또다시 눈을 감고 오랫동안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런 뒤 눈을 뜨더니
문자를 들고, 조금전 사내 때와 같이
이리저리 돌리며 바라보기만 할뿐,
좀처럼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나 자세를 가다듬더니
앉아있는 이성계에게 합장 배례를 하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이성계가 만류하자 도사는 이렇게 말을했다.
"장차 이 나라에 주인이 되실 귀인께서
왕림해 주셨으니 이런 황공한 일이 없사옵나이다."
하는 것 이었다.
너무나 뜻밖의 말에 이성계는 크게 놀라며 당황했다.
"도사님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게요?
조금전에 다녀간 사람이 問자를 내 놓았을 때는
거지 신세를 한평생 면하지 못하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소?
나도 그사람과 같은 글자를 내 놓았는데
나에게는 어째서 엉뚱한 말씀을 하시오?"
그러자 무학도사는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었다.
"파자점이란 아무리 똑같은 글자를 내놓더라도
그 사람의 심지(心志)와 품성과 기상에 따라
점쾌가 제각기 다르게 나오는 법입니다.
글자가 같다고 점쾌도 같다면
그게 무슨 점이겠나이까?"
조금전 까지도 반말지거리를 하던 도사였지만,
어느새 말투가 존대어로 변했다.
"아무리 그렇기로니,
같은 글자의 해석이 그렇게도 다를수가 있단 말이오?"
무학도사는
다시 경건한 자세로 합장 배례하며 말을했다.
"소승은 다만
점쾌가 나오는 대로 여쭈었을 뿐이옵니다.
거기에는 추호도 거짓이 없사옵니다."
이성계는 기가 막혔다.
이런 그의 모습을 간파한 무학도사가 말을 이었다.
"똑 같은 問자라 하더라도,
조금 전에 거지가 내 놓았던 問자와
귀공이 내 놓으신 問자는
근본이 아주 다른 問자 이옵니다."
"근본이 다르다니 그건 또 무슨소리오?
問자가 똑 같은데..."
"소승이 자세한 설명을 올리겠사옵니다.
아까 그 사람이 써낸 問자는
입(口)이 문(門)에 매달려 있는 問자 였습니다.
허나, 귀공께서 내 놓으신 問자는
입이 문에 매달린 문(問)자가 아니옵고,
좌로 보나 우로 보나 임금군(君)자가 되오니
장차 이 나라에 임금이 되실 분의
글자라 아니하겠습니까?"
이성계는
너무도 기막힌 파자점에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더구나 자신이
장차 이 나라의 임금이 되실 분이라고 까지 하니
가슴이 설레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짐칫 마음을 가라 앉히고
웃으며 말을 하였다.
"실상인즉,
내가 도사를 찾아 온 것은
파자점을 치려는 것이 아니고,
간밤에 꿈을 꾸었는데 하도 이상해
해몽을 해 보고 싶어 찾아 온 것이오.
도사는 물론 해몽도 하시겠지요?"
무학도사는 합장하고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말을 했다.
"파자점이나 해몽이나
모두가 다 같은 원리이옵니다.
어떤 꿈을 꾸셨는지 자세히 말씀해 주시면
해몽해 올리겠습니다."
방랑시인 김삿갓. (34회)
석왕사에 얽힌 내막. "하편"
이성계는 간밤에 꾸었던 꿈 이야기를 하였다.
"내가 어떤 낡은 집에 있노라니
별안간 모든 닭들이 일시에 "꼬끼오!"하고
요란스럽게 울었습니다.
닭의 울음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내가 있던 집이 갑자기 무너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뛰쳐 나오려는데
이미 지게에는 서까래 세개를 얹어 놓았더란 말입니다."
"꿈은 그뿐이었습니까? "
"아니지요.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지고 밖으로 나오니까,
뜰어 피었던 꽃이 별안간 떨어지고,
그와 동시에
난데없이 거울이 깨지면서
요란한 소리가 나는거예요.
아무리 생각 하여도
예사 꿈은 아닌듯 한데 혹 흉몽인지요?"
무학도사는 꿈 이야기를 모두 듣고,
사뭇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숙연히 말을했다.
"네 가지로 나뉘어 꾼 꿈은
더할 나위 없는 길몽입니다."
자신의 느낌과 전혀 다른 무학도사의 해몽에
이성계는 어리둥절 하였다.
"일시에 집이 무너지고,
꽃도 떨어지고
거울이 큰 소리를 내며 깨진 것이
어째서 길몽이라 하시오?"
무학도사는 옷깃을 바로 여미며
경건한 어조로 말을 했다.
"닭은 만인에게
새 아침이 왔음을 알려주는 영물이옵니다.
모든 닭이 일시에 울었다 함은
바야흐로 새 시대, 새 아침이 밝아 올
징조를 알려주는 성스러운 조짐입니다.
더구나 닭이 '꼬끼오"하고 울었다고 말씀 하셨는데,
꼬끼오를 한문자로 바꾸어 쓰면
'高貴位'가 되는 것입니다.
곧, 임금님을 일컫는 말입니다.
더구나 등에
서까래 새 개를 짊어지고 나오셨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임금왕 (王)자가 되는것 입니다.
따라서 귀공께서는
장차 임금님이 되실것이 틀림 없습니다."
듣고보니 이론이 정연한 해몽이어서
이성계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렇다면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큰 소리를 내며 깨진 것은 무슨 뜻이오?"
"그 역시 길몽의 마무리 입니다.
열매가 맺으려면 꽃이 떨어지는 것이 이치이니,
일시에 낙화 한것은
열매도 일순간 맺을 좋은 조짐입니다.
그리고 거울이 요란하게 깨졌다고 말씀하셨는데,
새 나라가 탄생하는데 만 천하가 어찌
크게 떠들썩 하지 않겠습니까? 염려마소서."
"하챦은 꿈을
이처럼 대견하게 풀어 주셔서 고맙소이다."
"빈도의 해몽은 결코 헛된 말이 아니오니
귀인께서는 소승의 해몽을 굳게 믿으시고
앞으로는 만사에 자중자애 하시옵소서."
이성계는
무학 도사의 격려까지 듣고 나자
가슴이 자꾸 두근거렸다.
"고맙소이다.
그러나 나같이 부족한 사람에게
과연 그런 기회가 올 수 있겠습니까 ? "
무학도사는
합장 배례를 세 번씩이나 거푸 하고
나무라듯 말을 했다.
"모든 운수는 하늘에서 정해주는 것이지,
사람의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옵니다.
소승이 지금까지 여쭌 말씀은
모두가 천기에 속하는 기밀이옵니다.
이런 천기를 누설하면
될 일도 틀어지기 마련입니다.
오늘 저와의 있었던 일은
일체 입 밖에 내지 말아주옵소서."
무학 도사로부터
천기를 누설하지 말라는 당부를 받은 이성계는
옷깃를 바로 잡으며 말했다.
"제가 아무리 철이 없기로
이러한 일을 어찌 감히 입밖에 꺼내리까?
도사께서 들려주신 말씀은
가슴에 아로새겨 일거일동에 더욱 신중하겠습니다."
무학도사는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왕후장상 王侯將相의 씨앗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귀인께서는 부디 뜻을 크게 품으셔서
기어이 대업을 성취하도록 하시옵소서."
이성계는
왕후장상의 종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을 듣고 나자,
갑자기 새로운 용기가 북돋아 났다.
"고맙습니다.
저를 격려해 주시고 아껴, 깨우쳐 주신
오늘의 은공은 평생을 두고 잊지 않겠습니다."
이성계가 이같이 말을 하자
무학도사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냈다.
"그날을 위해
소승이 부탁 드릴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들려주시옵소서."
"매우 외람된 부탁이오나,
뒷날 대업을 성취하시거든
중생을 구제하는 도량으로 이 토굴 자리에
불전을 하나를 지어 주시옵소서."
이성계는 이 말을 듣고,
무학도사의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그날이 오기만 하면 어찌 불전 뿐 이겠습니까?
이곳에 절을 지어 드리는 것은 물론이고
도사님을 대궐로 모셔다가 大政을 자문하는
國師로 받들어 모실 것이옵니다."
무학도사는 다시금 합장 배례하며,
"너무도 과분한 말씀이라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오면 이곳에 지을 절 이름은 뭐라 하시겠습니까 ? "
하고 묻는 것이 아닌가 ?
이성계는 그 말을 듣자 어이가 없었다.
"절 이름은 그때 가서 결정해도 될 일이 아니옵니까? "
그러자 무학도사는 고집스럽게 다시 말을 했다.
"옛 글에
一日之計 在於晨 (하루의 계획은 새벽에 세우고)이요,
一年之計 在於春(일년의 계획은 봄에 세운다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일은
목표를 세우고 매진하지 않으면
목적을 이뤄낼 수 없습니다.
절은 나중에 세우시더라도
이름만은 지금 지어 주시옵소서."
"도사님 말씀을 듣고 보니
나의 신념을 굳히기 위해서라도
절 이름을 미리 지어 두는 것이 좋을것 같습니다만,
절 이름을 당장 짓기가 어디 그렇게 쉬운 일 이옵니까?"
무학도사가
즉석에서 나무라듯 말했다.
"무슨 일이나 쉽게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아무리 작은 일 이라도
신명을 다해 애쓰지 않으면
제대로 이루어 지는 일이 없는 법 이옵니다."
이 말도 이성계의 장래를
훈계하는 말임에 틀림없었다.
"도사님의 훈계는 명심하겠습니다.
하오나, 절 이름을 제가 짖기 보다는
도사께서 직접 지어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무학도사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고 한동안 침묵에 잠겨 있었다.
그러더니 붓을 들어 종이에 釋王寺
(왕이라고 풀어낸 곳)라는 세 글짜를 써 보였다.
"석왕사 .. ?
좋습니다! 뒷날 이 자리에
반드시 절을 짖도록 하고,
그 이름은 도사님이
꿈과 글을 풀었다하여
반드시 석왕사로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석왕사라는 절 이름은
태조의 등극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와 같이
석왕사의 유래를 이야기한
반월행자는 이어서 말을 하였다.
"이성계는
변방을 지키는 한낱 장수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나
무학 도사를 이곳에서 만남으로써
하늘의 계시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산을 내려 갈때는
"나는 왕이 될것 이다"라는 결심을 확고히 했으니
조선왕조의 개국에
무학 도사가 미친 영향은 실로 위대하다고 하겠습니다."
"허허 ..영향을 줄 수는 있었겠지요.
허나 국가대사의 도모는 불심의 힘만으로는 가능치 않은 일이지요."
김삿갓은 같은 불제자라고
반월행자가 무학도사만 편드는 것 같아
이쯤으로 말을 했다.
"그런데 삿갓 선생,
이성계가 이곳 설봉산을 내려 갈 때
눈 앞에 전개되는 천산만봉을 굽어보며
읊은 시가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오 호 ..!
이성계가 시를 읊었다니 ...?
그 시가 어떤 시였는지 한번 들어보고 싶구려."
"제가 외어 드리겠습니다."
반월 행자는 이성계의 시를 읊어 보였다.
인수반라 상계봉 引手攀蘿 上碧峰
칡넝쿨 움켜잡고 푸른 봉에 오르니
일암고와 백설중 一庵高臥 白雲中
조그만 암자 하나 구름 속에 있구나!
약장안계 위오토 若將眼界 爲吾土
눈에 보이는 산천이 모두 내 땅이라면
초월강남 기불용 楚越江南 豈不容
초월 강남인들 어찌 수용하지 못하랴!
김삿갓은 그 시를 듣고
이성계의 웅장한 기상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 하더니,
이성계야 말로 선천적으로
대왕의 기질을 타고 난 인물이었음이 들어나 있었다
방랑시인 김삿갓. (35회)
땡중과 마나님의 승부
석왕사에서 반월 행자와 작별을 한 김삿갓은
다시 북쪽으로, 북쪽으로 정처없는 발길을 옮겼다.
그러면서 금강산 입석암 노승을 비롯,
반월 행자까지 불가에 귀이해 수도를 하는 인물은
자신과 다르게 대단한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고생을 스스로 선택한 그들의 삶은
김삿갓으로서는 따라할 수 없는 고행 아니던가?
새삼 그들의 선택에 마음속 깊이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북쪽으로 가는 길은 산길의 연속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김삿갓은 다리도 쉬어갈겸 길가에 앉아
반려 행자가 헤어질 때 싸준 주먹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저만치,
몸에는 장옷을 입고 머리에는 남바위를 쓴
행세 깨나 하는 양반댁 마나님 차림의 여인이
하인도 없이 산길을 바쁜 걸음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
"허, 수행하는 종자도 없이 산길을 가다가
행여 도둑이라도 만나면 어쩔려고 저러실까....?"
김삿갓은 마음 속으로 공연한 걱정을 하며
자리에서 툭툭 털고 일어나 길가로 나섰다.
그런데 여인이 지나간 얼마 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남녀사이에 시비를 가리는 소리가
아득히 바람결에 들려왔다.
거리가 있어 말소리의 내용은 알수 없었지만,
주고 받는 말소리의 억양으로 보아 시비를 하는 게 맞았다.
"저런, 조금 전에 지나간 마나님이
산길에서 도둑이라도 만난 것이 아닐까?"
김삿갓은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어
부랴부랴 소리가 난 곳으로 바쁜 걸음을 옮겼다.
그리하여 얼마를 가다가 앞을 살펴보니,
저만큼 잔디밭에서 아까 지나쳐간 마나님이
오십 쯤 되어 보이는 스님과 말다툼을 하는 것이 보였다.
도둑을 만난 것이 아니기에 천만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젊잖은 댁 마나님이
지나던 스님과 무엇 때문에 싸우는가 싶어
김삿갓은 나무 그늘에 몸을 숨기고
그들을 지켜 보고있었다.
그때, 스님이
마나님의 손목을 움켜잡으려고 팔을 뻣으며 말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이 깊은 산중에서
한번쯤 정을 나누기로 뭐가 나쁘단 말이오 ? "
하고 해괴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 이었다.
"서로 아는 사이인가?"
김삿갓은 이러한 생각도 들었지만
여인의 다음 대답으로 두 사람은 일면식도 없는
우연히 길을 가다 만나게 된 사이인 것을 알게 되었다.
"석존 釋尊의 십계 중에 불사음계 不邪淫戒라는
대목이 뚜렸하거늘,
어찌 대사는 일시적 사념으로 파계 破戒를 하시려 하오?
내, 오늘 일은 못보고 안 들은 것으로 할 것이니
사념을 버리고 수행에 전념 하도록 하십시오."
하며 점잖게 스님을 꾸짖고 있었다.
김삿갓은 그들이 다투는 이유를
그제야 분명히 알게 되었고
"저런 죽일 놈" 하고
자신도 모르게 스님에게 욕이 튀어 나왔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중놈의 부당한 요구에 자신의 입장을 당당히 내놓는
마나님의 태도에 존경심이 일었다.
그러나 욕정의 화신이 되어버린 중놈은
좀처럼 물러서질 않았다.
오히려 여인에게 금방이라도 덤벼들 자세로
꼬임의 말을 더하는 것이었다.
"만물은 인연의 소생이오.
우리가 깊은 산중에서 이렇게 단 둘이 만난 것도
전생부터의 인연일 것이오.
그대는 어찌 전생의 인연을 무시하고,
나의 이 간절한 요구를 거절하려 하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니
두말 말고 나의 소원을 꼭 들어주시오."
그러나 마나님의 태도는 어디까지나 의연하였다.
"대사는 무슨 당치않은 말씀을 자꾸 하시오?
반야경에
색즉시공 色即是空,
공즉시색 空即是色이라는 말씀이 있지 않소이까?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씀인데,
이런 경전을 읽고 수행 하는 대사는
아직도 육근 六根을 떨치지 못하고
탐욕과 진애 瞋恚, 우치 愚痴의
번뇌마에 시달리고 있는 모양이니,
한 시 바삐 자아의 세계에서 벗어나
해탈의 눈을 속히 뜨시오.
그것만이
불제자가 걸어가야 할 정도일 것 이오이다."
마나님은 불교에 대한 소양이 풍부한지,
중놈에게 설법 하듯, 도도하게 꾸짖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애욕의 열정에 갇혀버린
환장한 중놈에게는 그런 말이 귀에 들어 갈리가 없었다.
중놈도 우격다짐으로는
성사가 안 될 것을 깨달았는지.
이번에는 방법을 바꿔,
이렇게 말을 했다.
"나는 그대와 더불어 불경을 토론할 생각이 없소.
나는 이미 그대를 범할 것을 결심했는데
그대는 나의 소원을 끝까지 들어주려고 하지 않으니
그러면 우리는 말재주로써 승부를 가리면 어떠하겠소."
설득으로 성공할 자신이 없었음을 깨닫자,
중놈은 또 다른 방법으로 나왔다.
마나님도
계속 입씨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말재주로 승부를 결정하자는 것은
또 무슨 말씀이오니까?"하고 따져 물었다.
중놈이 대답하는데 ,
"내가 지금부터 1부터 순서대로
그대에게 요구하는 일을 말로 들려 보일 터니,
그대는 나와 같은 방식으로 대답을 해보시오.
만약, 그대가 대답을 끊기지 않고 잘하게 되면
내가 순순히 물러날 것이로되,
만약 대답을 못해 막힘이 있게 되면,
그대가 진 것이 되니 나의 말을 들어 주어야 하오."
김삿갓은 혀를 찼다.
도데체가 중놈의 요구는 부당하기 이를데 없으며,
노상에서 오가다 만난
생면부지의 여인에게 감히 몸을 요구하는가?
그런데도 마나님은
겁내는 기색조차 없이 중놈을 꾸짖었다.
"나는 이미 대사의 부당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기로 마음먹은 사람이니
여러말 말고 물러나시오."
그러나 타이른다고
순순히 물러날 중놈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말재주로 결정하자고
이미 타협안을 내놓았소이다.
그러니 말재주로 승부를 결정 하던가,
나의 요구에 순순히 따라 주거나,
하나를 택하시오."
그늘 속에 숨어서 이같은 광경을 지켜보던 김삿갓은
"저런 죽일놈을 보았나"하며 분노했다.
그리고 불현듯 뛰쳐나가
마나님을 구출하고 싶은 마음이 앞섰으나
상황이 그의 용기를 억누를 만큼 흥미진진한 면도 있었다.
따라서 저 마나님은 이같은 곤경을 어찌 벗어 냐려나 ?
하는 호기심 또한, 발동하여 좀더 지켜 보기로 하였다.
"좋소이다.
그러면 대사가 내기 말을 걸어 오시오.
내가 답하리다."
마나님은
중놈의 고집을 꺾기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중놈의 내기에 응하고 있었다.
그러자 중놈이
이제는 됬다 싶었던지 크게 기뻐하며
바로 내기말을 시작 하였다.
일, 일룡사 一龍寺 사는 중이
이, 이룡사二龍寺가는 길에
삼, 삼로 三路 길에서
사, 사대부인 士大夫人을 만났는데
오, 오음 五陰이 불통하여
육, 육효 六爻로 점을 치니
칠, 칠괘 七卦도 좋다마는
팔, 팔괘 八卦는 더욱 좋다
구, 구부려라
십, 십 † 좀 하게."
중놈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너무도 해괴한 소리였다.
김삿갓은 중놈에 이같은 음담패설에
저 마나님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걱정반 기대반을 가지고 지켜보며
마나님의 대답이 막혀, 땡중 놈에게
봉변을 당할 위기에 처해지면
자신이 나설 때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로 마나님의 태도는 의연해보였다.
그리고 중놈에게 호통을 치는것이었다.
"이 천하의 잡놈아!
내가 다시 한번 훈계를 내릴테니
그대는 똑똑히 내 말을 듣거라."
그리고 그녀는
말재주 내기에 대한 응답을 시작했다.
일, 일편단심 一片丹心 이 내 마음
이, 이심 二心이 있을 손가
삼, 삼강 三鋼이 살아 있고
사, 사리 事理가 분명 하거늘
오, 오할 五割 할 이 잡놈아
육, 육환장 六環杖 둘러 짚고
칠, 칠가사 漆袈裟를 걸쳐 입고
팔, 팔도 八道를 편답 遍踏하며
구, 구하는게 고작
십, 십 † 이더냐 이 잡놈아 !
마나님의 호통은 이렇게 추상같았다.
그리고 이제까지 이 돌중 놈을
"대사님 대사님"으로 깍듯이 예우해 주었으나,
이제와서는
오활을 할 잡놈이라 불호령을 질렀으니
그 위세가 실로 당당하기 이를데 없었다.
"예끼, 천하에 무서운 계집 같으니..."
중놈은 더이상 대꾸하지 못하고
그자리를 박차고 줄행랑을 놨다.
중놈이 도망가 버리자
마나님은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
다시 산 길을 다시 조용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참으로 존경할 만한 부인이었기에
김삿갓은 먼빛으로 나마
사라져가는 마나님 쪽을 보고
몇 번이고 머리를 수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