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진관병마절제도위의 품계가 통훈대부인 배경
* 철원진의 개설
철원(鐵原)은 고려 충선왕 때 목(牧)에서 부(府)로 강등되어 조선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경기좌도에 소속되어 계수관(界首官)으로 정해졌다. 조선 태종 때 강무장(講武場)으로 활용되면서 도호부(都護府)로 고쳐졌으며, 그에 따른 부담이 크다는 이유로 세종 때 강원도로 옮겨졌다.
세조 때 양계(兩界)의 군익도(軍翼道)체제를 전국으로 확장하면서 철원도(鐵原道)가 세워졌으나 진관(鎭管)체제로 바뀌면서 회양진(淮陽鎭)에 소속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영장제(營將制) 실시를 계기로 상황이 달라졌다. 철원부사가 영장을 겸하면서 남한산성을 근거로 하는 수어청에 속했다가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제외되었다. 그러나 진관 성립의 발판이 그때 마련되었다. 영조 때 춘천에 있던 방어영(防禦營)이 옮겨 왔으며, 정조 때 회양진이 철원에 이속되면서 비로소 철원진(鐵原鎭)이 세워졌다.
* 설립 경위 및 목적
철원은 1310년(고려 충선왕 2)에 목에서 부로 강등되었고, 조선초기에는 경기좌도(京畿左道)의 계수관(界首官)으로 정해졌다. 1412년(태종 12) 강무장으로 정해지면서 관내에서 사냥이 금지되었다. 1413년(태종 13)에 도호부(都護府)가 되었고, 1419년(세종 1) 군사 훈련지라는 이유로 문관 출신인 수령을 무관으로 교체하였다. 1435년(세종 17)에 왕과 신하가 함께 사냥하며 무예를 닦던 강무지(講武地)로서 역사(役事)가 다른 곳에 비해 배나 많다며 강원도로 이속시켰다.
1455년(세조 1)에 양계 지역에 설치되었던 체제를 전국으로 확장하면서 연해뿐만 아니라 내륙에도 거진(巨鎭)을 두고서 주변 고을을 분속시켰다. 이때 철원도가 설치되면서 그 중익(中翼)을 철원과 안협(安峽)으로 하고, 좌익(左翼)을 이천(伊川)으로, 우익(右翼)을 평강(平康)으로 정하였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다시 1457년에 군익도체제를 진관체제로 개편하면서 제도(諸道)의 중익·좌익·우익을 없애는 대신, 주요 지역을 거진으로 삼고 주변의 제진(諸鎭)을 그 휘하에 소속시켰다. 이때 진관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회양진에 소속되었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이렇게 수록되었다.
철원진이 독립 진관이 된 계기는 임진왜란 이후에 지방 군제를 개편하면서 영장제를 도입한 것이었다. 먼저 군사적 식견이 있는 당상관을 전임 영장으로 파견하여 거진의 수령이 갖고 있던 군사 지휘권을 넘겨받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유지하는 데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1637년에 일단 없애버렸다.
그러나 북쪽 지방을 정벌해야 한다는 북벌론(北伐論)을 내세우며 군비 확장을 추진하던 효종 때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삼남 지방에만 영장을 파견하고, 다른 지역은 수령이 겸하는 겸영장제(兼營將制)를 시행하였다. 여기에 철원도 포함시켰는데, 특히 이는 1665년(현종 6) 김좌명(金佐明)의 건의에 따라 전에 소속되었던 회양 대신 철원의 겸영장으로 남한산성에 속하게 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현종실록』 6년 2월 23일). 그 직전에 역시 김좌명의 주장에 따라 철원의 진병(鎭兵)이 적으므로 이천·춘천·금화(金化)·평강(平康)의 병사를 받아들였다(『현종개수실록』 5년 1월 3일). 이 조치가 진관 형성의 발판이 되었다. 그리고 1673년(현종 14)에 이완(李浣)이 남한산성에 소속된 철원 등의 군사를 본진(本鎭)으로 돌려보내고 영장을 무신으로 임명하여 뒷날 철령(鐵嶺)을 막는 발판으로 삼자고 건의하여 승인을 받았다(『현종실록』 14년 5월 15일).
* 조직 및 역할
1746년(영조 22)에 먼저 춘천에 있던 방어영이 옮겨 왔으며, 정조 때 회양진이 이속되면서 비로소 진관이 세워졌다. 『대전통편』에 따르면 철원도호부사가 종2품의 방어사(防禦使)와 종3품의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를 겸하면서 진관을 통솔하되, 그에 소속된 회양·이천에서는 부사가 종4품의 병마동첨절제사를, 금성(金城)에서는 현령이, 양구(楊口)·낭천(狼川)·평강(平康)·김화(金化)·안협(安峽)에서는 현감이 종6품의 병마절제도위를 겸하여 지휘를 받았다. 대체로 과거 세조 때 군익도체제를 확장했을 때 수립된 철원도와 회양도 등에 소속되었던 제진들이 포함되었다.
현종 때 강원도관찰사였던 이만영(李晩榮)은 강릉 이남은 전영(前營), 양양 이북은 후영(後營)이라 칭하고서, 변장(邊將)이 소관 고을을 순행하며 군병을 조련하게 할 것을 건의한 적이 있다(『현종실록』 6년 1월 10일). 『속대전(續大典)』에 이르러 철원부사로 하여금 좌영장(左營將)을 겸하도록 규정되었다.
* 변천
『대전통편』에 관동(關東) 고갯길의 좁은 교통 요충지[嶺隘]에는 방수 기구를 더 두도록 하였다. 먼저 회양부사가 방수사(防守使)를 겸하고, 이천·평강·통천(通川)·고성(高城)·흡곡(歙谷) 등 5개 고을 수령을 방수장(防守將)으로 삼아 방수사가 통솔하게 하되, 급한 변란 경보가 있을 때에는 속오군(束伍軍)의 마병(馬兵)과 보병(步兵)을 거느리고 지정된 구역[信地]에서 방수하도록 하였다. 다만 평상시에는 철원 방어사영에 속하여 매년 각각 지정된 구역에서 훈련하도록 하였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서는 좌영장을 춘천부사가 겸하는 것으로 고쳤다.<인터넷 위키 백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