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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철 목사 편 ∙∙∙∙∙∙∙∙∙
● 성결대학교 5회 졸업
● Berean Christian College & Seminary (Th.M)
● 예수교 대한성결교회 총회장 역임
● 법무부 갱생보호회 기독교협회 회장
● 세계한민족복음화협의회 초대 대표회장
● Lighthouse Christian College(D.D)
● 한국기독교보수교단 부흥사협의회 회장 ● 세계성령봉사상 초대이사장
● 사단법인 한국기독교부흥협의회 대표회장 ● 한국기독교복음단체총연합 대표회장
● 現 세계한민족 복음화협의회 총재
● 제일성결교회 당회장
▣ 저서 및 논문 ▣
◉ 놀라운 발견 1, 2, 3권
◉ 흐르는 생명수
◉ 빛을 발하라
◉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 영생으로 가는 길
◉ 웨슬레 신학에 있어 죄와 은총의 개념에 대한 연구
그 외 다수 등.
◈ 귀히 쓰시는 그릇이 되자 (딤후 2:20-21)
◈ 사막에서 생수가 흐르리라 (사 35:1-10)
귀히 쓰시는 그릇이 되자
딤후 2:20-21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본문의 말씀은 사도 바울 선생께서 그의 제자 디모데 목사에게 하나님이 귀히 쓰는 그릇이 되라고 교훈하신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수 천년전부터 그릇을 사용했습니다. 돌로 만든 석기, 나무로 만든 목기, 흙을 사용한 토기, 그것을 구워만든 질그릇은 도자기 그릇이나 유리그릇, 쇠붙이로 만든 철기, 점점 발전하여 금이나 은과 같은 귀금속으로 만든 그릇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20절 말씀에 보면 사도 바울 시대에도 금 그릇, 은 그릇, 나무 그릇, 질그릇도 있다고 했습니다.
큰집이란 넓게는 세계나 국가를 말하는 것이고 좁은 의미로는 우리가 소속하여 있는 집단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금 그릇, 은 그릇, 나무 그릇, 질그릇은 인간의 됨됨이나 신앙의 됨됨이가 여러 모양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 여러 그릇 중에서 귀히 쓰는 그릇도 있고, 천히 쓰는 그릇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여러 사람 중에는 귀히 쓰는 사람도 있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도 있고, 그릇장 뒤편에 쌓아놓은 별로 쓸모 없는 그릇도 있고, 쓰레기를 담아놓은 쓰레기통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아서 크게는 세계적인 인물이 되기도 하고 좁은 의미로는 어디에서나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빈 그릇을 귀히 쓰십니다.
아무리 그릇이 좋아 보여도 비어 있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빈 그릇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1. 마음이 가난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3절 말씀에서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상태는 세상적인 욕망을 다 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겠다는 헌신하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지금 높은 지위를 가졌고 많은 부를 소유하고 큰 권세를 가졌다해도, 이것이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요, 주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버릴 수 있다는 마음이 가난한 마음의 상태인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자를 주님께서 더욱 귀하게 쓰시는 것입니다.
찬송가 173장 3절에 보면,
모든 것 다 바치고 비고 비인 내 맘에
주의 이름 위하여 지금 충만합소서
성신이여 임하사 내 영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합소서 기다리는 우리게
불로 불로 충만하게 합소서
2. 겸손한 마음입니다.
빈 마음은 겸손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4장 6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교만한 자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크게 쓰임 받은 인물들은 겸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는 궁중에서 정치학을 배우고, 경제학을 배우고, 전술학을 터득했습니다. 애굽의 2인자가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자기의 힘으로 히브리인들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교만한 마음으로 자기가 민족을 구하겠다고 나섰을 때는 살인하고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실패하고 광야에서 40년간의 연단을 받은 후에는 겸손하여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능력의 지팡이를 주시고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요 구원자로 삼아 주셨습니다.
사사기 6장 15절 말씀에 보면 기드온은,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서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이니이다” 라고 하자 하나님께서는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 하고 능력을 주어서 미디안을 격파했습니다.
사무엘상 9장 21절 말씀에 보면 사울이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오며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나이까”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쓰셨습니다.
이와 같이 여호와의 쓰임에 앞서 우리는 겸허한 마음으로 빈 그릇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값있는 그릇을 귀히 쓰십니다.
값있는 그릇은 질적으로 우수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금그릇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그릇보다는 금그릇 하나가 더 값이 나갈 것입니다. 질그릇 10,000개보다도 금사발 하나가 더 귀한 것입니다.
여러분! 금그릇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 아무개 장로님은 다른 사람 몇만 명하고도 바꿀 수 없어 할 정도의 귀한 그릇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금그릇이 어떻게 만들어집니까?
신앙의 연단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2,000℃이상 되는 불가마니속에 24번 들어갔다 나와야 24k 99.9%순금이 됩니다.
질그릇은 1,000℃ 이상에 한 번 들어갔다 나왔으니 비교도 안됩니다. 지금 어려움을 겪는 성도님이 계시면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큰그릇 만드는 과정입니다. 금 같은 믿음의 사람 하나 있으면, 시시한 옹기 그릇 만개보다 더 나은 것입니다. 모쪼록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디에서나 금 그릇 같이 귀히 쓰임 받는 그릇이 되어,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쓰기 편한 그릇을 쓰십니다.
아무리 값이 있고 비어 있어도 쓰기 불편하면 사용하지 않습니다.
1.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비결은
A. 보이는 말씀을 가까이 해야합니다(요 1:1).
B. 보이는 교회를 가까이 해야합니다(엡 1:23 ; 마 21:13).
C. 보이는 교역자와 가까이 해야합니다(마 10:40 ; 살전 5:12).
2.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쓰기가 불편하기 때문에 좀처럼 쓸 마음이 내키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면 사용하시고 불순종하면 버리십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즐겨 쓰시는 귀한 그릇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충성스런 그릇입니다.
다윗 왕은 어린 시절 목동으로 이새의 막내 아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22절 말씀에 보면,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들어 이스라엘의 왕을 세웠습니다. 그가 이렇게 귀히 쓰임 받은 것은 성실하고 충성스런 그의 생활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목동으로 광야 빈들에서 양을 쳤으나 누가 보지 않는다고 해서 자기의 직무에 태만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상 17장 34절에서 35절 말씀에 보면,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게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었나이다”라 한 것을 보면 양 한 마리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누가 보거나 안보거나 알아주거나 안 알아주거나 상관없이 맡겨진 일이 크든 작든 최선을 다하는 다윗을 보시고 마음에 기뻐하시고 귀하게 쓰셨습니다.
4. 깨끗한 그릇을 쓰십니다.
아무리 값진 그릇이라도 깨끗하지 못하면 쓸 수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7장 1절 말씀에 보면, “우리의 영과 육이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보이는 외모에 신경을 많이 씁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내부를 깨끗케 해야 우리 주님께서 귀히 쓰시는 것입니다. 철저히 회개하고 우리의 생활이 거듭나서 참 그리스도인과 같이 되어야 하나님께서 귀한 그릇으로 사용하십니다.
결 론
주께 헌신하고 겸손함으로 빈 그릇이 되고, 믿음으로 귀한 그릇이 되고 순종과 충성으로 쓰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어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그릇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막에서 생수가 흐르리라
사 35:1-10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을 범치 못할 것이며 … 오직 구속함을 얻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본문은 선지자 이사야가 멀리 천년시대를 바라보면서 예언하신 말씀인 동시에 오늘날엔 우리들의 영적 생활에 신령한 교훈을 주는 말씀입니다. 사막을 여행하는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생수입니다. 사막에는 생수가 없기 때문에 사막을 여행하다가 물이 떨어져 헤매이다가 신기루 현상을 만나면 죽게 됩니다. 그런데 만일 이 사막에 생수가 솟아오른다면 사막을 여행하다 물이 떨어져 죽어 가는 사람에게는 기적이요 또한 생명의 물줄기가 됩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통하여 “사막에 생수가 흐르리라”는 제목으로 새 천년, 새 희망을 여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사막은 물이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에게 가장 큰 문제는 물 문제를 해결하는 문제입니다. 사막에는 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은 언제나 가죽부대에 사막을 통과할 때까지 먹을 물을 넣어 가지고 길을 떠나게 됩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사막같은 이 세상을 여행하는 성도들에게 절대로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신령한 생수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아모스서 8장 11절 말씀에서 “양식이 없어서 기근이 아니요 물이 없어서 기갈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없어 기근이요 기갈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막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목마른 인생들에게는 이 하나님의 생수된 말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생수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인생의 갈증을 해결해 보려고 과학의 물, 금전의 물, 권세의 물, 그리고 향락의 물을 먹고 심령의 목마름을 해결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해결할 수 없어서 절망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생수의 근원되는 하나님을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 2:13)고 말했습니다.
새 천년 인생들은 여전히 갈급한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런 인생들에게 예수께서 크게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가 강같이 흐르리라 하시니 … ”(요 7:37)고 하셨습니다.
성령받지 못한 자의 심령은 물 없는 사막과 같습니다. 돈을 얻어도, 명예를 얻어도, 권세를 얻어도 만족도 없고, 평안도 없고, 기쁨도 없고 감사도 없고 고독하고 적막합니다. 새 천년에는 사랑하는 여러분들의 신앙 생활속에 성령으로 충만하여 생수가 넘쳐흐르기를 축원합니다.
2. 사막에는 초목이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옛날에 「왕소근」이 몽고에 납치되어 가서 몽고 사막을 바라보며 시를 읊기를 호지(胡地) 무화초(無花草)하니 춘래(春來)에 부이춘(不以春)이라 했습니다. 이는 몽고 사막에는 화초가 없으니 봄이라도 봄이 온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사막에는 화초가 없습니다. 언제나 쓸쓸하고 적막하기만 합니다. 뜨거운 사막의 바람에 모래만 불어대는 곳입니다. 물이 없으니 자연히 초목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꽃과 나무를 심어 놓으셨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나무만 무성하고 일년 내내 꽃이 없는 나무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와이나 동남아 남태평양 같은데 가보면 모든 나무에 너무나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있는 것을 보게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꽃들을 보며 감탄을 합니다. 감탄사가 연발됩니다. 만일 이 세상에 꽃과 나무가 없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삭막하겠습니까? 사막을 이 세상에 비유하고 인생을 여행자로 비유한다면 화초는 이 세상에 소망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꽃이 없는 세상이라면 소망이 없는 인생의 삶을 말합니다. 소망없는 사람은 사막을 통과하는 나그네처럼 지루하고 답답하고 두려움속에 살아가는 사람일 것입니다. 참으로 고통의 골짜기 험악한 골짜기를 통과하는 느낌입니다. 이런 인생은 비관하다가 자살하고 맙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막길이 생수가 솟아오르고 꽃이 피고 초목이 무성하며 벌 나비가 날고 아름다운 새들의 노래 소리가 들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사야 35장 1~10절에서 “메마른 땅과 사막아 기뻐하여라 황무지야 내 기쁨을 꽃피워라 아네모네처럼 활짝 피워라 기뻐 뛰며 환성을 올려라” 했습니다. 그리고 “사막에는 샘이 터지고 황무지에 냇물이 흐르리라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늪이 되고 메마른 곳은 샘터가 되며” 했습니다.
이와 같은 축복이 새 천년 모든 성도들 위에 성령님의 영이 덮여오듯이 이루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3. 사막에는 길이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옛날 사막을 통과하는 사람들 중에 길을 잘못 들어 끝없는 사막을 방황하다가 죽은 사람이 수없이 많습니다. 이와 같이 인생이라는 광야에서도 길을 잘못 찾아 방황하다 멸망당하는 인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생들에게 행복을 약속해주는 듯한 이 세상의 길이 많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무신론의 공산주의길, 자본주의자의 황금길, 신비주의자의 유혹의 길, 공자의 도덕의 길, 석가의 대자대비의 길, 소크라테스의 철학의 길, 현대인들의 과학의 길 등 많이 있습니다.
무신론이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론입니다. 이것을 주장하는 자들은 세상에서 참으로 인간답게 살려면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어 사는 공산주의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무신론자들의 공산주의는 20세기 말에 소련의 역사적인 변혁에 의해 이 세상의 어느 곳에서도 실현의 꿈은 불가능한 꿈의 이론임이 증명되었습니다. 혹자는 역사 발전의 단계상 소련이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 바로 사회주의로 이양되었기에 실패했다고 보기도 하지만, 그러나 스웨덴과 같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양된 국가도 지금 현재 국민들 사이에서 놀고 먹으려는 자세와 성도덕의 문란 등 사회적으로 문제점이 커져 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만들려고 한 무신론의 공산주의 길은 막혀 버렸습니다. 물질만능 경제만능의 자본주의자들의 길은 어떠합니까? 자본주의는 황금만능주의를 탄생시켜 사람들이 인간답게 한번 살아 보려고 돈을 벌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돈의 노예가 되어서 참으로 인간답게 사는 것이 아니라, 가정이 깨어지고 사회는 온갖 범죄와 퇴폐문화만 가속화시킬 뿐 참 행복의 길을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과학만능주의자들의 길은 어떠합니까? 현대는 과학의 도움으로 교통, 건설, 의학 등 인간의 삶을 좀더 빠르게, 편하게, 인간의 수명까지 연장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점과 더불어 인간의 내부를 과학은 조급하고, 자고하며 사나우며 무정하게 만들어 이제 인간은 과학에 의해 만들어진 온갖 핵무기의 위험속에서 또는 자연의 파괴로 모든 생태계가 파괴되어 지구의 멸망을 두려워하며 불안과 공포 속에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인간에게 온갖 행복을 다 약속해 줄 것 같았던 과학도 인간에게 행복을 약속해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이 왜 사막같은 이 세상에서 방황해야 합니까? 근본문제로 돌아가 보면 죄악의 문제입니다. 이 죄악 때문에 행복으로 가는 길이 막혔습니다. 이 길을 열기 위해 죄 없는 예수님이 오셔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를 없애 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과 하나님과의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사이에 죄악의 구렁텅이를 없애주는 다리 역할을 해주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께서 가는 고속도로를 건설해 주신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으로 충만하면 생수가 흐르고 길이 환하게 열려 이 세상을 즐겁고 복되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 천년을 맞이하여 이 복된 소식을 민족과 세계를 향하여 열심히 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사막에는 쉴 곳이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사막에는 인가도, 여관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막을 횡단하려면 천막이 필요합니다. 영적으로 보면 이 세상은 사막과 같아서 쉴만한 여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종일 뜨거운 열풍과 모래바람이 불어대는 사막을 여행하다 피곤하면 쉴 곳이 있어야 하겠는데 나무도 없지요, 물도 없지요, 어디서 뜨거운 태양 피하여 쉬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진정한 안식처가 없습니다.
가정이 안식처가 됩니까? 직장이 안식처가 됩니까? 어디에 안식처가 있습니까? 황혼이 저물고 피곤한데 어디서 쉬겠습니까?
이와 같이 불쌍한 인생들을 향하여 주님께서 안식처가 되어주신다고 친히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짐 때문에, 실연 당했기에, 자식 때문에, 남편 때문에, 사업 때문에 “우는 자여 오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피난처요, 도피성이요, 안식처이십니다.
독일 청년 진센도르프는 백작이요, 부자요, 젊은 청년이요, 부러울 것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마치 물 없는 사막처럼 만족이 없었습니다. 그는 마음에 내 마음에 만족을 주는 생수를 발견하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그 생수를 따르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집을 떠나서 온 세계를 여행하면서 마음에 만족을 찾아 다녔습니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만족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 어느 미술관을 들리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성상(聖像) 앞에 서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위에 쓰여진 글을 우연히 보았습니다. 그 글은 “나는 너를 위해 내 몸을 주었건만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주려느냐?”는 성구였답니다. 그는 그 글을 읽는 순간 그의 마음에 감동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겸손히 무릎을 꿇어 기도하기를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받으소서” 하고 자신의 인생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기쁨과 확신에 찬 모습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지위와 재산을 가지고 주님을 헌신하여 모라비안 형제단의 지도자가 되어 목마름이 극심한 이 세상에 생수이신 예수님을 전하는 귀한 사명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진젠도르프 백작이 이끄는 이 모라비안 형제단은 선교를 위하여 엄격한 훈련을 하였고, 1732년에 도버와 니취만을 서인도로 파송하였고, 1733년에 다비드를 그린랜드로 그리고 1734년에 슈팡겐베르그를 미국 조오지아에 파송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막에 샘이 솟는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 천년에는 성령 충만함으로 우리의 신앙의 갈증을 해결함 받고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하는 귀한 사명을 잘 감당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원 목사 편 ∙∙∙∙∙∙∙∙∙
● 성결대학교 7회 졸업
● 미국 ATS 신학박사
● 예수교 대한성결교회 총회장 2회 역임
● 성결대학교 이사 역임
● 예성 선교사 훈련원장
● 서울충신교회 <강남구 수서동 743-1>
☎ 3411-8477-9, 445-8938
◈ 네 가지 감사 (히 13:14-15)
◈ 세 종류의 믿음 (마 14:22-33)
네 가지 감사
히 13:14-15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어느 신앙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상록수는 날씨가 변해도 항상 푸르다. 찌는 듯한 여름에도 겨울의 혹한에도 푸르다. 우리의 신앙생활 역시 그래야 한다. 주변 사정이 아무리 변화 무쌍해도 그것에 영향받지 않는 변함없는 감사가 이어지는 생활이어야 한다.”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하나님은 구원받은 그의 자녀들에게는 감사하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항상 감사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이런 명령에 대해 솔직히 우리는 하나님이 지나치게 요구하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이 세상에 어찌 감사할 일만이 있겠습니까? 괴로움에 찌들어 감사보다는 불평을 더 많이 할 수밖에 없는 세상,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항상 감사하는 성도가 될 수가 있을까요?
나는 4가지 감사하는 면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1. 우리는 “얻어서(찾아서)라도 하는 감사”부터 배워야 합니다.
불평은 자기에게 해를 가져올 뿐인데 반하여, 감사는 언제나 자기에게 유익을 가져옵니다. 다음 사실은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 2차 세계 대전 후, 일본 와까야마 지방 출신의 해군 장교인 가와가미 기이찌는 전쟁 후 귀국하게 되었는데, 고향에 돌아와 보니, 사랑하는 조국은 눈 뜨고 볼 수 없으리 만큼 피폐해 있었습니다. 불평․불만만 품고 살아가는 중에, 그만 전신이 굳어져 버려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병원에 가서 진찰했지만 치료의 길이 없었습니다. 이 때 와까야마에 있는 정신 치료가 후지다씨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이러한 처방을 해 주었습니다. 매일 밤 ‘감사합니다’란 말을 억지로라도 만 번씩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날부터 돌아와 자리에 누운 채로 하고 싶지 않는 감사이지만 매일 밤 계속하는데, 어떤 날 아들이 두 개의 익은 감을 나무에서 따다가 “아버지 이거 잡수셔요”하는 것입니다. 그 때 그 몸에 배기 시작한 감사가 참 감사가 되어, 너무나 감사한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고맙다고 하면서 손을 내 밀게 되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손의 움직임을 발견하게 되고, 차츰 전신이 움직여져서 불치의 병은 치료되고, 감사의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실로 감사하는 이에게는 감사할 일이 자꾸 생겨집니다.
사람은 무언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을 때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는 법입니다. 우리가 얻어서 하는 감사를 배우려면 열심히 기도의 문을 두드려서 응답을 받는 재미를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이러한 감사를 많이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많이 구한 분은 많이 얻었으니 그 만큼 감사도 많을 것이고, 반대로 적게 구하거나 거의 구한 것이 없는 사람은 얻은 것도 없으니 감사도 적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분이 나에게 “어떻게 하면 기도를 잘할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그분에게 “물질적이라도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비록 그것이 세상의 것이라 할지라도 필요한 것을 구하여 보십시오.”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때에 따라 세상의 것도 주시기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세상 것은 금방 이루어주십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아! 나 같은 사람에게도 하나님은 축복해 주시고, 내 기도에도 응답해 주시는구나’ 그러면서 기도하는 재미를 갖게 됩니다. 그런 후에는 성결을 위한 기도도 하게 됩니다. 처음부터 마음의 성결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차근차근 신앙의 수준을 끌어올리십시다.
2. “비교해서 하는 감사”를 배워야 합니다.
이것은 어려웠던 때를 잊지 않고 늘 기억하는데서 나오는 감사입니다. 가난했던 과거와 그런대로 살만한 지금을 놓고 비교하는 것이며, 건강한 지금과 병약했던 과거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감사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님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것은 잠시 뒤로 놓아두고 말입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과거를 잊지 말라고 누누이 당부합니다. 풍부하게 먹고 마실 때마다, 십일조를 드릴 때마다, 나그네로 대접할 때마다 애굽의 종살이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은 아담을 만드셨을 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도 그러하셨거니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부르셨을 때에도 그들로 하여금 감사의 찬송을 듣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감사가 넘치는 자녀들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미래의 소망을 바라보며 현재의 고난에 대하여 감사를 합시다. 이것은 과거의 고난을 생각하며 현재의 평안에 대하여 감사하는 것보다 몇 배나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신앙인 아니면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감사입니다.
한 사람이 쿠테타를 모의하는 것을 알고 당국에 그 사실을 알려 줌으로 큰 혼란을 막았습니다. 그것을 모의했던 사람들은 곧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곤 끝입니다. 돈을 주어도 얼마의 감사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인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세월은 흘러갔습니다. 하루는 왕이 잠이 오질 않습니다. 왕은 역사책을 가져오도록 해서 읽습니다. 궁중일기 같은 것입니다. 읽다보니 과거에 있었던 쿠테타에 대한 것을 고발하므로 위기를 모면케 해 주었던 바로 그 내용이었습니다. 신하에게 묻습니다. “쿠테타의 음모를 알려준 사람에게 무슨 상을 내렸느냐?” “아무 상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왕은 밖에 있는 사람을 불렀습니다. 밖에는 바로 이 사람 모르드개를 미워하여 그를 처형하고자 허락을 받으려고 온 하만이라는 총리가 있었습니다. 살 자와 죽을 자가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에스더’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만일 모르드개의 쿠테타에 대한 고발에 대하여 당시에 상급을 주었더라면 급박한 위기에서 무엇을 가지고 벗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당시로서는 서운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것을 활용하여 위기에 처한 당신의 자녀를 구출해 주신다는 진리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한 청년이 억울하게 옥에 갇혔습니다. 그 감옥에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 둘이 들어왔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그 청년에게 은혜를 입고 풀려나서 복직이 되었습니다. 그 관원을 향해 이 청년은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나 감옥을 나간 그는 그만 이 청년을 잊고 삽니다. 삼 년이 지난 어느 날입니다. 왕이 꿈을 꾸고는 해석하는 사람을 찾습니다. 아무도 해석을 못합니다. 이때 그 감옥에서 풀려난 관원은 그 동안 잊고 있던 감옥 속의 청년 요셉을 기억합니다. 이렇게 해서 청년 요셉은 왕 앞에 나가 그 꿈을 해석합니다. 왕은 그를 애굽의 총리로 삼습니다. 이 때 그의 나이 삼십이었습니다. 여기서 나이 삼십을 주목해야 합니다. 당시 애굽의 법으로 총리가 되려면 그 나이가 삼십은 넘어야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계획을 보세요. 정말 멋지지요. 우리는 장래 일을 모르나 하나님은 장래의 모든 일을 아시며 당신의 자녀들을 인도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간 것 같지만 실상은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을 만나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 관원이 요셉을 잊어버린 것도, 모르드개가 선한 일을 하고도 아무 상도 받지 못한 것도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렇게 일하십니다.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것으로 그의 자녀에게 갚아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현재의 고난 중에서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대신 감사를 해야 합니다. 감옥 안에서도, 아무런 상이 없어도 그들은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일치라도 소홀히 함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높여 주시기까지 참고, 내일의 아름다운 꿈을 위하여 오늘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만이 성공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도 계속되는 ‘감옥생활’이라면 감사하며 기다립시다. 거기에는 분명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3. “만들어서 하는 감사”를 배워야 합니다.
누가 보아도 감사할 만한 일에 감사라는 것은 당연한 태도입니다. 그런 감사를 했다고 해서 감격하거나 놀랄 만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감사는 이방인들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감사였습니다. 사실 그러한 감사조차도 못한 유대인들의 행위가 오히려 부끄러울 뿐입니다.
누구나 감사할 수 있는 일만 가지고 감사한다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범사의 감사는 불가능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감사하려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감사할 수 없는 것들까지 만들어서 감사하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러나 실은 만들어서 하는 감사는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너무나도 고차원적인 감사라 사람의 힘으로는 안되기에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선물로 받아야 합니다.
송명희 시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왜 날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하나님께 원망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왜 나를 이렇게 만드셨는지를 깨닫고 나서부터 감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이 얼마나 장수하는가, 얼마나 가지고 누리는 가에 참된 가치가 있지 않고 어떻게 사느냐에 있는 이상, 나의 장애가 결코 감사 못할 선물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요 수많은 일을 했던 우찌무라 겐죠가 있습니다. 그는 일본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이질이라는 질병으로 뇌성마비를 얻어, 듣는 것과 보는 것과 눈꺼풀 움직이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 사람, 우찌무라 겐죠였습니다. 그의 몸은 머리만 크게 발달하고 나머지는 어린아이의 것 그대로인 채 흐느적거리는 볼품없는 몰골이었습니다. 그는 실로 거울을 볼 필요도 없었고, 화장을 할 필요도 없는 그야말로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어머니 한 분밖에는 없었는데, 어머니가 성경책을 머리맡에 펴두고 머리를 받쳐놓고 나면 돌아오기까지 그 장만을 보아야 하는 불편 때문에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고린도후서 12장을 읽어 내려가던 중이었습니다. 주님이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신 말씀을 자기에 대한 말씀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처럼 눈에 박힌 가시를 제해 주시기를 구했으나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이 약한데서(약한 자 안에서) 온전하여 진다”(고후 12:9)고 하였니다. 그는 눈꺼풀을 이용해서 자판(字板)을 집어갈 때 윙크하는 방식으로 복음적인 시를 지어 두 편을 발표하였습니다. 뒤늦게 책과 방송을 통하여 완악한 일본인을 회개시키는 사도로 쓰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선택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이렇게 변모되기까지 어머님의 극진한 사랑과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을 회개시키려 찾아온 목사님 덕분이었다고 했습니다. 다음은 그의 회고적인 시 “괴롭지 않았더라면” 입니다.
만일 내가 외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을
만일 모든 형제 자매들도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을
만일 우리 주님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을
사랑하는 여러분! 감사할 조건이 있었기에 감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인도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악에 빠지지 않도록, 신앙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감사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감사는 스스로 걸어갈 힘이 없을 때 우리를 도우실 끈이 될 것입니다.
영국에 살던 청교도 102명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것이 1620년 일입니다. 미국에 도착한 청교도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 중 반 이상이 굶어죽고 병들어 죽었습니다. 게다가 남아있는 사람들마저 해마다 겹치는 흉년으로 고통을 당했습니다. 도무지 밝은 전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금식기도를 선포하고 경건한 이 신앙인들이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금식을 선포하고 기도를 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땐가 또 한번 대단히 어려운 위기에 놓이게 되자 그들은 다시 금식기도를 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금식기도를 놓고 의논하는 자리에서 어떤 농부 한사람이 이렇게 제의를 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금식하면서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달리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비록 농사가 흉년이 들고 형제 자매들이 병으로 쓰러지는 어려움을 겪지만 이 가운데서도 우리가 감사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식량이 풍족치 않고 여건이 유럽보다 편안하지는 않지만 신앙의 자유가 있고 정치적인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는 광대한 대지가 열려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금식 대신에 감사기간을 정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어떻습니까?” 농부의 그 말은 참석한 사람들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금식기도 주간을 선포하는 대신 감사주간을 선포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금식해야할 상황에서 감사를 찾아 벌인 추수감사의 축제가 오늘의 미국을 있게 한 것입니다.
신촌에 있는 세브란스병원 심장병동에 가면 지은이의 이름도 없는 무명의 詩가 걸려있습니다. 가슴으로 그 詩를 읽게 됩니다.
주님! 때때로 병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 인간의 약함을 깨닫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가끔 고독의 수렁에 내던져 주심도 감사합니다 / 그것은 주님과 가까워지는 기회입니다
일이 계획대로 안되게 틀어주심도 감사합니다 / 그래서 나의 교만이 반성될 수 있습니다
아들 딸이 걱정거리가 되게 하시고 부모와 동기가 짐으로 느껴질 때도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 그래서 인간된 보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먹고 사는데 힘겨웁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 눈물로써 빵을 먹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의와 허위가 득세하는 시대에 태어난 것도 감사합니다 / 하나님의 의가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땀과 고생의 잔을 맛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주님!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 우리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4. “예수가 좋아서 하는 감사”를 배워야 합니다.
이것은 초자연적인 감사입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독자들에게 권유하는 신앙생활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당시 히브리서의 독자들은 매우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습니다. 믿는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사회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견디기 어려울 만큼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밝은 햇살이 조금도 비치지 아니하는 음지에 몰려 웅크리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히브리서 기자는 ‘항상 찬미의 제사’를 드리라고 합니다. 현실의 고난이 견디기 어려워도 흔들리지 아니하는 감사와 찬양을 쉬지 말고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과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예수로 말미암아”,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그가 다스리시는 영구한 도성 때문이라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감사가 가능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감사를 “찬미의 제사”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왜 그렇습니까? 초자연적인 감사에는 희생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가난해도 예수 때문에 감사할 수 있다면 부자로 사는 것에 대해 자기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를 좋아해서 하는 감사는 세상 것을 송두리째 빼앗겨도(순교를 당해도) 할 수 있는 최상의 감사입니다. 모든 것을 잃을 지라도 끝까지 남는 감사입니다.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감사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말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
바울의 고백을 끝으로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7-14)
세 종류의 믿음
마 14:22-33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난 사건이 4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두 번이 기록되어 있는데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항해하던 중 두 번이나 풍랑을 만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이 배에 타고 함께 동행하셨을 때이며, 또 한 번은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을 때입니다.
이번에는 두 번째였는데,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던 제자들은 거친 바람을 만난 것입니다. 물결이 거세어지고 배는 심하게 흔들렸으며, 예기치 않았던 풍랑으로 제자들은 심한 고난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고된 인생살이의 한 단면을 보여 준 것으로 예수 믿으면 모든 것이 다 평안할 줄 만 알았는데 그렇지 않음도 말해주는 좋은 대목이기도 합니다. 인생들은 고난 풍파가 없는 에덴동산과 같은 낙원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쉴 새 없이 밀려오는 환난을 헤쳐나가야 하는 존재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흔히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기를 “주여 오늘도 평탄한 길을 걸어가게 하옵소서, 아무런 고난이나 고통을 경험하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기도를 합니다만 예기치 않았던 풍랑을 만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이 다가오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고난이 다가오는 것은 그들이 불신자들이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믿는 성도들에게까지 고난이 다가오느냐는 것입니다.
마 8:23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바다를 건너갔는데도 불구하고 풍랑을 만났음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시지 않고 제자들만 배를 타고 항해를 했다면 풍랑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나 예수님을 모시고 갔는데도 왜 풍랑을 만났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하는 질문만이 아니라 믿는 우리 자신들로 스스로에게 반문하며 때로는 고민도 하고 불평도 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창조주로서 만물을 다스리는 분이시건만 왜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도록 하셨을까? 의문을 갖게 됩니다. 제자들은 시원치 않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변변치 못했지만 그런대로 집을 버리고, 하던 일을 제쳐놓고, 부모 형제의 곁을 떠나 주님을 따르고 섬겼던 헌신된 제자들이었습니다. 그토록 헌신한 제자들이었는데 풍랑을 만났고, 또한 예수님을 모시고 갔는데도 풍랑을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시원치 않게 믿는 사람들이 풍랑을 만난다고 하면 그럴 수도 있으려니 생각할 수 있겠지만 예수님을 믿고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들에게 풍랑이 다가온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기도 합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남들이 고난을 겪을 때는 이렇게 이렇게 하면 된다고 말을 하지만 실제로 우리 자신이 고난에 들어가면 먼저 원인을 나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서 찾고 나중에는 하나님에게서 찾으려고 합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고난이 오히려 유익이라고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봉독해 드린 본문 말씀을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했습니다. “건너편으로 건너가라” 예수님의 이 명령에 순종해서 갈릴리 바다를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난 것입니다. 그것도 생사를 가늠하는 무서운 풍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다가 풍랑을 만났다고 하면 아마 그럴 수도 있으려니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떻게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행위로 풍랑을 만났다면 당연하다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제자들의 경우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건너가라고 명령하신 말씀에 순종하여 가다가 풍랑을 만났으니 무슨 연고이겠습니까?
요나 선지자는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제대로 순종하기는 커녕 오히려 거역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났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이 되어집니다만 제자들은 그런 경우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이기적이고, 세속적이고, 정욕적인 세상 사람들을 떠나 고요한 곳에 가서 기도하기 위하여 건너편으로 건너가다가 풍랑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과거, 현재, 미래의 일들을 아시고 계시기 때문에 제자들이 풍랑을 만날 것을 다 아시고 계셨을 것입니다.
본문 22절에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배를 타고 건너가라고 명령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재촉하사”라는 말을 헬라어로 “에낭카센(ηναγκασεν)”이라 하며, 그 의미는 “억지로 시키다”입니다. 바다의 풍랑이 일 것도 아시면서 급히 서둘러 바다를 건너가라고 명령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도 억지로 가게끔 강요하신 것인데 말입니다.
그 명령을 내리신 이유를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첫째로, 정욕적이고 세속적인 무리를 떠나라는 뜻이었습니다.
요 6:15절에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제자들을 재촉하여 바다를 건너가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죄인들을 회개시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결코 사람들을 육신에 속하게 하여 마치 그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세상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마귀의 일을 멸하고, 정욕적이고, 육신적이고, 세속적인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되어지도록,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육신적이고, 정욕적이고, 세속적인 무리들로부터 떨어져서 한적한 곳으로 가라는 것이며, 어서 빨리 너희들도 그러한 욕심들을 벗어버리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제자들을 바다 건너편으로 보낸 후에 홀로 기도하시기 위하여 그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23절에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라고 하였습니다. 눅 6:12에는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기 위해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낮에 예수님께 나왔던 무리를 위하여 다시 한번 기도하시고, 내일에 있을 일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늘 따라 다니는 제자들이 신앙 안에서 살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셋째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훈련시킬 목적으로 바다를 건너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이 마치 온실의 화초처럼 유약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어떤 풍랑, 환난이 다가올지라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강하고, 견고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바라시는 대로 온전한 신앙, 견고한 신앙을 갖추어야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는 것(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은 하루 아침에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진 풍파를 경험하고 많은 어려움을 경험하여 승리할 때에 비로소 온전한 신앙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보화인 순도높은 순금을 만들려 할지라도 고온의 풀무불 속에 넣어 녹여야 합니다. 만일 적정온도까지 오르지 아니하면 금이 녹지도 않거니와 이물질이 생겨 쓸모없는 것이 많이 생기게 됩니다.
이렇듯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과 연단을 통해서 견고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 그 속에 어떠한 능력이 담겨질지라도 감당할 수가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한 달란트를 맡기셨을 때에는 한 달란트 밖에는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며, 두 달란트를 맡기셨을 때에는 두 달란트를 감당할 수 있으나 3달란트나 5달란트는 감당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5달란트를 맡기심은 1, 2 달란트만이 아니라 그 이상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나에게 맡겨만 주시면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예를 들어봅니다. 우리 나라 야구 선수는 프로와 아마추어로 나눕니다. 프로 선수라고 하여도 1군과 2군 선수가 있습니다. 신문이나 TV에 나오는 선수들은 1군에 속한 선수들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1군에 있는 선수가 매일같이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면 2군에 있다고 하여 홈런을 치지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1군에 있는 선수는 열심히 해야 2군에 떨어지지 않는데 만일 게을렀다면 여지없이 2군으로 추락하고 맙니다. 반면 2군에 있는 선수는 무서울 정도로 피눈물나는 훈련과 실전 속에서 실력을 향상시켜야만 1군으로 올라올 수가 있습니다. 1군과 2군에 있는 선수들의 연봉이라든가 대우는 생각보다 전혀 다름을 볼 때에 우리 신앙의 세계에서도 보다 향상되는 실력을 키워나가야만 합니다. 1군과 2군에 있는 선수를 구분하는 것은 감독과 코치가 할 일입니다. 내가 1군으로 올려보내 달라고 해도 되지 않습니다. 프로의 세계는 실력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에게 맡겨진 달란트를 잘 감당할 때에 그 이상의 것을 하나님께서 맡기실 것입니다. 오늘 3종류의 믿음을 통해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평안함에만 머물러 있는 제자들의 모습(믿음)을 봅니다.
예수님의 요청으로 배를 타고 먼저 바다 건너편으로 가게 된 제자들을 봅니다. 이들 모두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여 바다 건너편으로 가는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라면 가고 올 수도 있는 사람들입니다. 설령 고난이 뒤따른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만한 믿음과 각오가 되어 있는 제자들이었습니다.
(마 14: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인 3-6시경에 풍랑으로 인하여 고생하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이 물위로 걸어 오셨습니다. 날이 컴컴하여서도 그렇겠지만, 고생을 당하고 있는 자기네들을 도우려고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서 제자들은 놀라 ‘유령이라’고 하며 무서워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시라는 것은 꿈에라도 아니 생각하지도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잘못 적용시킨 것입니다.
애굽을 억지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이 있을 때마다 그들은 속이 끌어올라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며 시비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네들 생각에는 애굽을 나오면 곧 바로 축복의 땅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가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모세도 자기네들에게 애굽을 떠나자고 이야기하면서 어디로 떠나는 것이냐는 질문에 가나안 땅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사실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가는데는 직선거리로 약 200-300km라면, 이사 보따리를 들고서라도 불과 2주일 아무리 늦어도 1달이면 충분합니다. 그런 거리를 왜 그렇게 빙글빙글 돌아서 가는지 충분히 항의를 할만 했습니다.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신경질이 나다못해 항의까지 했을 것입니다. 자기네들 생각에는 이사를 가는 식으로 몸과 살림만 가지고 가면 된다고 생각을 했는데 하나님의 생각은 결코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네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만드시고자 하심에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달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홍해쪽으로 오지 않고 육지쪽을 통해 가나안으로 가려고 했다면 애굽 군대가 쳐들어와서 그들을 모두 잡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홍해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며 이스라엘 백성은 육지같이 홍해를 건너가게 하신 반면 애굽 군대는 바다 한 가운데 수장하심으로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지 못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2군에 머물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그대로 믿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자기네 생각에 입각하여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다보니 자기네들을 도우려고 오시는 예수님을 유령이라고 단정을 짓고 오히려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네들의 고정관념 즉 인간의 생각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회복될 수 없는 마지막 말기의 암에서 축복을 받아 고침을 받게 되었는데, 그것을 가리켜 아내가 우연이라고 하다가 다시 병이 재발되어 1달만에 남편은 결국 죽게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로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면 말조심, 생각조심입니다. 사람과 사람에 있어서도 예의로 말을 해야 합니다만 하나님께 대하여서는 말 뿐만이 아니라 생각에서도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뵈웠을 때에 제일 먼저 회개한 것이 입술로 지은 죄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의심하지 마십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어리석게 불신한다거나 불평하는 것은 결코 자신에게 유익하지 못합니다. 설령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감사를 하다보면 더 감사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아멘
어리석은 제자들의 모습을 보신 예수님은 즉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하시며 안심을 시켰습니다. 예수님의 자상하신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의 모습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형편과 사정을 아시고 때를 따라 도와주시는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고 감사와 찬양을 드리십시다.
2. 어찌하든지 예수님을 닮으려는 베드로의 믿음을 봅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2군에 있는 야구선수들이 가장 바라는 소원이 있다면 홈런을 치는 것도 아니며, 안타를 많이 치는 것이 아니라 2군에서 빨리 1군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제자들 중에 이러한 부분에서 가장 빨리 대응한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마 14:28)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 대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말한 제자는 베드로 밖에 없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그러한 제안도 하지도 못했거니와 생각조차 하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베드로의 말한 것을 보면 그리 신앙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했는데, ‘주여 만일 주시어든’이란 말을 빼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했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여하튼 100%의 믿음의 말이 아니라 50%정도의 믿음의 말이지만, 베드로의 뜻밖의 요청에 예수님은 “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이 온전하기에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요청에 응답해 주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설령 우리 믿음이 연약하더라도, 100%의 믿음이 못될지라도 간구하는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 14: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베드로는 상상을 초월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인간으로서 물위를 걷는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육으로 오신 예수님이셨기에 가능하였지만 그 누구도 해 보지 못했던 일입니다. 그러나 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자기의 발을 배에서 옮겨 물위로 내딛었습니다. 그때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엄청난 사건입니다.
자기로서는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 다시 말하면 ‘유령이 아닌 예수님이시라면’이라는 전제에 ‘물위로 오라 하소서’ 한 것 뿐이지 정말로 자기가 물위로 걷게 해 달라는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도하는 그대로 (100%) 똑같이 응답해 주시지는 않습니다. 필요에 따라 유효적절하게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한 번 다시 봅니다.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우리의 기도가 결코 완벽한 것은 아니기에, 때로는 철없는 아이와 같은 기도도 많겠지만 모른 형편과 사정을 아시는 하나님(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라 응답해 주시니 얼마나 감사합니다.
‘오라’는 짧은 한 마디를 믿고 배에서 내려 물위를 걷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십시다. 그리고 그 뒤에서 침을 삼키며 호기심으로 바라보는 나머지 11제자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다. 만일 그네들도 생각이 있다면, 얼른 2군에서 1군으로 올라가고자 원한다면 “나를 보좌 좌우편에 앉게 하소서”라는 요구보다는 서로들 목소리를 높여 “주여 나도 물위로 걷게 하소서”라고 기도를 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물위를 걷다가 갑자기 불어닥친 바람을 보고 베드로는 무서워 바다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되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단지 베드로의 틀림없는 실수요 부끄러움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에는 어떠한지요? 다른 11제자들은 이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잘난 체 하다가 보기좋게 물 속에 빠졌구나, 그러면 그렇지 어떻게 사람이 물위를 걷는다는 말인가? 자기가 하나님인가? 예수님만 걸을 수 있는 것을 왜 걷겠다고 했는지? 쯔쯔 … !”
그런데 예수님은 물에 빠져가는 베드로를 건져주신 후에 이렇게 책망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너, 왜 잘난 체 하다가 물 속에 빠졌느냐, 꼴 좋다, 필요없는 기적은 행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이야, 공연히 내 흉내를 내다가 물 속에 빠졌구나, 다음부터는 그렇게 하지마!”
예수님이 베드로를 책망하신 것은 단지 (마 14:31)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는 말씀 뿐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나만 바라보고 올 것이지 … ”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배에 앉아서 구경만 하고 있던 다른 제자들에게는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는 책망의 말씀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믿음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나에게 만일 물 위를 걷다가 물 속에 빠진 베드로를 택하겠느냐? 배에 앉아서 남이 물에 빠지는 것 즉 실패하는 것을 보고 있는 11제자들의 경우를 택하겠느냐? 고 묻는다면 물에 빠지기는 하였지만 베드로 쪽을 택할 것입니다.
(마 14: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물위로 걸어갔던 베드로의 믿음과 구경만 하고 있는 다른 제자들의 믿음을 비교하면서 우리는 어떠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까? 다른 제자들은 물위를 걸어오신 예수님의 신비스러운 모습과 물 속에 빠져가는 베드로를 건져주시고 배에 오르시매 곧 바람이 그치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보면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는 것뿐이었습니다. 이들의 믿음을 보고 듣고하는 것으로 가질 수 있는 믿음이라면, 비록 물 속에 빠져 들어가는 위험과 그로 인한 부끄러움을 당하기는 하였지만 예수님을 바라보고 물위로 걸을 수 있었던 베드로의 믿음은 결코 비웃음거리가 아닌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할 믿음입니다. 베드로의 모습을 바라만 보았던 다른 제자들은 물속에 빠진 베드로를 비웃었을 것입니다.
나에게 어떠한 믿음을 갖겠느냐고 묻는다면, 베드로의 모습을 보고 비웃는 물 위를 한 발자국도 걷지 못했던 다른 제자들보다는 비록 물 속에 빠지기는 했지만 예수님을 바라보고 파도와 바람이 이는 바다 물위로 걸어갈 수 있었던 베드로의 믿음을 가지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남들이 하는 일들을 보고 이렇게 저렇게 평가하기는 매우 쉽습니다. 그러나 막상 나에게는 그들보다 더 잘한다는 보장도 없거니와 그렇게도 못하는 부끄러움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3. 예수님과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베드로가 물위로 걷지 않았다면 감히 어떻게 예수님과 같이 물위를 걷는 믿음을 가지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가 물위로 걸었으므로 우리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물위로 걸어야 합니다. 세상을 두려워해서는 이런 일, 저런 일, 아무 일도 못합니다. 아니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우리에게 이런 저런 공포와 두려움을 가지게 하여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에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고자 각오를 하셨기에 어떠한 협박에도 굴하지 않으시고 떳떳하고 담대하실 수가 있으셨습니다. 죽이겠다는 위협을 무릅쓰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으며 스스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분명히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셨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계집아이 앞에서 3번씩이나 부인했지만 예수님은 중상모략하고 죽이려는 대제사장 앞에서도 위풍당당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 어떠한 것도 예수님을 넘어뜨리지는 못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당장 예수님처럼 그러한 모습으로 세상을 대하지는 못할망정 베드로처럼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라는 기도는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말입니다. 그러한 용기조차 없거들랑 배에 앉아서 조용히 되어지는 일만 바라보고 있으면 될 것입니다. 공연히 자기는 물위로 걸어보지도 못하고 물위로 걷다가 물 속에 빠진 베드로를 비웃지 말고 말입니다.
여하튼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과 같은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필히 기도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