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자리
손진숙
내겐 대중들의 앞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소심 증세가 있다. 모임에서 자기소개를 해야 할 때면 가슴이 떨리고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할 말을 죄다 잊어버린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앞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 여성회관 겨울방학 특강으로 ‘리더십 스피치’가 있었다. 망설이다가 수강신청을 했다. 강의 첫날인데 서두르지 않아 지각을 했다. 열심히 경청하는 사람들 앞을 지나가기가 민망해 그냥 뒷자리에 앉았다. 강의 도중에 칠판의 글씨가 흐릿하여 알아보기 어렵고, 강사의 음성도 희미하여 알아듣기 힘들었다. 기회를 틈타 앞자리로 옮겨 앉았다. 그제야 글자도 뚜렷이 보이고, 발음도 분명히 들렸다. 그런데 앞뒤에서 와닿는 시선을 잠시도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몸가짐을 바르게 가지기 위해 한층 신경이 쓰이는 앞자리였다.
나는 육 남매 중에서 다섯째로 태어나 비교적 큰 탈 없이 성장할 수 있었다. 오빠, 언니들의 등 뒤에 서 있기만 해도 일이 처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집안에서 우환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지만 어리다는 이유로 정황을 모른 채 지나온 세월이었다.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하나 머리를 스치는 사연들, 가정을 이끌어가는 사람은 그 파란곡절들을 머리 싸매고 해결하는데 오죽 애를 태웠을까.
이제 와서야 늦철이 들었는지 장남인 큰오빠가 고달팠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병환으로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가장 노릇을 하는 자리, 등 뒤에는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층층이 커가는 동생이 있었다. 한시도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없는 어려움의 연속이었으리라. 그렇게 집 안팎의 대소사를 두루 챙겨야 하는 어깨가 무거운 앞자리였을 것이다.
겨울 산행을 할 때에도 선두가 제일 힘이 든다. 어느 해 겨울, 눈이 내리는데 등산을 하게 되었다. 가지산 중턱에 오르니 눈이 허벅지까지 쌓여 있었다. 그 눈을 헤쳐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아 모두 주저하고 있을 때였다. 산행대장격인 O씨가 앞장서서 푹푹 발자국을 찍으며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 따뜻한 온기가 가시지 않은 그 발자국을 포개 밟으며 무사히 정상에 오르는 성취감을 맛보았다. 두려움을 무릅쓰고 앞장서 가려면 여간만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으리라.
등산로를 따라 걷다가 자칫 허방을 딛거나 이끼 낀 돌을 디디면 위험에 처할 수가 있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걸음이 얼마나 조심스럽겠는가. 또 가파른 벼랑이나 험한 바위가 가로막을 때에도 선두는 마지막 한 사람까지 무사히 오를 수 있도록 손을 잡아끌어주거나 로프를 단단히 매어 당겨 준다. 앞자리의 도움에 힘입어 전원이 낙오자 없이 위험한 구간을 넘길 수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담임선생님의 입은 약간 비뚤어진 편이었다. 짓궂은 학생들은 ‘입삐딱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학생들에게 별난 선생님이라 우리들은 거리감을 느꼈다.
어느 날, 그 선생님을 골탕 먹이려고 여학생 몇이 수업시간에 아무 발표도 하지 말자는 모의를 했다. ‘세상에 비밀은 없다’고 하였던가. 그 사실이 선생님 귀에 들어가, 공모자들은 양호실로 불려갔다. 화가 화톳불같이 인 선생님은 굵은 매를 들고 한 사람씩 나와 엉덩이를 맞으라고 했다. 아이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선뜻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눈치 싸움에서 지고만 내가 먼저 나갔다. 매를 다 맞고 자리로 돌아오자 한 친구가 나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니가 왜 먼저 나가서 맞니? 제일 세게 맞았잖아. 주모자인 xx가 먼저 맞아야지.” 그 친구의 귓속말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 건 왜일까.
앞자리는 조심스러운 자리이다. 정 맞기 쉬운 모난 자리다. 앞자리는 뒤에 오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자리이다. 프로메테우스의 고난이 없었다면 인류가 불을 사용하지 못했을는지도 모르며, 콜럼버스의 모험이 아니었다면 아메리카 대륙은 미개의 땅으로 남아 있을는지도 모른다.
나는, 나 아닌 누군가를 위해 앞자리에서 희생하고 봉사해 본 적이 있었던가. 기껏해야 잘 보이지 않고, 잘 들리지 않아 앞자리를 찾는 족속에 불과하다.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앞자리를 차지하고 뭇시선에 신경 쓰고 있는 내가 새삼 한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