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中洞)의 역사
해운대 중심부에 위치한 동리라는데서 명명...현재 해운대 중심상가, 대천, 미포 등지
해운대 온천과 해수욕장 등 춘천천의 하류로 바닷가에 면한 곳 대부분이 중동지역에 있다. 구한말까지 대천(大川), 오산(梧山), 미포(尾浦), 신기(新基), 도전(島田), 청사(靑沙) 등의 자연부락을 통칭하여 중리라 하였는데 1942년 수영출장소에 편입되면서 대천, 오산, 도전, 미포, 온천 부락은 중일정(中一町), 신기, 청사 부락은 중이정(中二町)으로 나뉘었다.
1953년 해운대 출장소가 설치되면서 대천.온천 부락은 중1동, 오산.미포.도전 부락은 중2동, 신기. 청사 부락은 중3동으로 다시 나뉘어졌으나 1955년 중1, 중2동을 병합하여 중1동이 되고 중3동은 그래도 남아있다가 1960년 중2동으로 개칭되었다.
와우산(臥牛山)이 있는 중2동은 1972년까지만 하여도 골프장이 있었으나 택지개발로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었고 대형건물이 들어서 인구가 증가되면서 1974년에는 동백 초등학교가 개교되었다.
청사포와 미포지역은 바다를 주된 생활터전으로 삼았던 까닭에 바다와 관련된 풍속이 많았다. 특히 매4년마다 음력 10월 보름부터 닷새동안 치뤄지는 별신굿이 유명하다.
굿이 행해지는 기간동안 마을주민 모두가 금주(禁酒)를 하고 부부들도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으며, 온 주민들이 참여하여 풍어를 기원하고 마을과 집안에 액이 들지 않도록 지성을 드렸다.
현 해운대구청 주변지역은 조선시대에는 불모지였다. 그러나 구남초원에서 솟아나는 온천으로 인해 새로운 온천부락이 형성되었고 온천거리라는 지명이 붙기도 하였으며 지금은 해운대구청을 비롯하여 호텔, 여관, 은행, 상가 등이 즐비한 해운대의 중심가로 변모하였다.
대천마을
대천마을은 춘천천 상류에 위치하고 있는 자연부락으로 이곳은 일찍부터 농경지가 발달하였고 넓은 하상을 이루어 마을이 형성되었다.
대천이란 춘천하상의 넓은 땅을 지칭한 것으로 동하면 고문서 중 1854년에 기록된 동하도로 교량전부작자 성명성책(橋梁佃夫作者 姓名成冊)에는 전답경작자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어 대천마을은 아주 오래된 자연마을로 농업을 주업으로 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문서에서는 대천교가 좌동과 연결되어 있고 좌동과 인접한 마을임을 짐작하게 한다.
미포마을
이 곳의 형성시기는 알 수 없으나 임란 전후로 추정되고 있다. 와우산이 바다쪽으로 흘러내린 서남 해변가에 자리잡은 이 마을은 해운대해수욕장의 동쪽 끝에서 오산마을과 달맞이길의 아래쪽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미늘, 미포, 미암으로 불리워지는 이곳 지명은 소가 누워있는 형상이라해서 붙여진 이름인 와우산의 소 꼬리 부분에 해당되는 지역인 갯가였다고 미포라 지칭된 듯 하다. 해운대 해변의 끝 혹은 모퉁이 바위라는 뜻에서 미암이라고도 불리워졌다. 동쪽 송정으로 향하는 동해남부선 철로가 작은 터널을 통과하는 지점, 해안선이 불쑥 튀어나온 곳을 고두말 혹은 고두박이라고도 한다. 자그마한 방파제가 있어 소형 어선들이 정박하고 있으며 일부지만 아직도 근해어업을 하고 있다. 현재 이곳은 대형건물이 들어서고 횟집도 늘어났으며 오륙도를 왕복하는 해양유람선이 운행되고 있어 여름 해수욕철에는 많은 인파가 몰리는 곳이기도 하다.
지형이 오동잎과 닮은 ‘오산마을’
오산마을은 원래 봉림(鳳林)마을이라고 불리어 왔는데 지형이 오동잎처럼 생겼다하여 오산마을로 바꾸어 지칭하게 되었다 한다.
1938년 11월에 발행된 조선한여승람(朝鮮寒與勝覽)의 名墓篇에는 좥정재하(鄭在夏) 묘재남면(墓在南面) 중리오엽등손좌(中里梧葉燈巽坐)좦로 흠제(欽薺 노영경(盧永敬)과 학문을 익힌 정재하의 묘가 중리오엽등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곳 지명의 유래를 확실시 해 주고 있다. 옛날 이 곳에는 서당이 있어 주민들이 일찍부터 학문에 정진한 마을로 1937년에는 지금의 해운대초등학교 전신인 해운대공립보통학교를 설립, 운영하여 오다가 현 해운대초등학교 위치로 이설되었고 폐교한 자리에는 현재 삼성그룹연수원이 들어서 있고 사방이 소나무숲으로 운치가 좋은 곳이다. 현재 이 일대는 신시가지에 일부 편입되고 주택지화 되어 오동잎 모양의 옛지형은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섬밭 도전(道田)마을
오산과 미포 사이의 매우 지대가 낮은 마을이다. 동남쪽으로 바다가 있고 서북쪽은 춘천이 흐르고 있으며 지금은 매립되어 버렸지만 오산마을 쪽에 큰 못이 있어 사면이 물에 둘러싸여 큰 비가 내리면 섬처럼 보인다해서 섬밭이라 불리었다.
신기부락
달맞이길 해송교 밑을 지나 청사포로 내려가다 보면 처음 만나는 마을이다. 동해 남부선 철로의 위쪽에 위치한 마을로 한자(漢字) 지명을 한글로하여 새터마을이라고 부르는 이 곳은 옛날 청사포에서 혼인을 한 자식을 마을 테두리 안에서 새 살림을 내어 주었는데 그렇게 한 집, 두 집 이루어져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요즈음은 신기(新基)마을이라 별도로 부르지 않고 청사포마을 전체로 통용되고 있다.
푸른 뱀이 나왔다는 ‘청사포’
해운대와 송정 사이에 있는 한적한 갯마을로 동해남부선 철도의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마을은 서북쪽 산록에 위치한 새터(新基)마을과 철도를 경계로 접해 있고 동남쪽이 바다로 되어 있어 농경지가 거의 없는 어촌이다. 청사포의 지명 유래는 골매기 당산의 김해김씨 할매의 신격화(神格化)와 관련된 푸른 뱀이 나왔다는 전설로 인하여 1900년경까지는 청사포(靑蛇浦)라 하였으나 주민들이 뱀 사(蛇)자가 좋지 않다 하여 맑을 좥청(靑)좦자와 모래좥사(砂)좦자를 따서 청사포로 바꾸고 그 후 1927년 4월 이 곳 청사서당(靑沙書堂)의 현판을 걸 때 훈장과 학도들이 청사포라고 고침으로써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청사서당은 義塾(의숙: 공익을 위해 의연금으로 세워진 교육기관)으로 현 마을 회관자리에 있었으며 청사포는 물론 새터, 구덕포(九德浦), 송정(松亭), 좌동(佐洞), 미포(尾浦), 온천(溫泉)거리등 인근지역의 학도들은 대부분 이곳을 거쳐서 수영, 동래, 부산으로 진학해 간 것이다. 이 곳에는 유명한 다릿돌이 있는데 바다속에 징검다리처럼 암초가 형성되어 있어 아주 많은 양의 미역이 생산되어 그 수입으로 마을의 평안과 풍어를 기원하는 매년 3차례의 당산제와 4년마다 풍어제(豊魚祭: 별신굿)를 지내 왔다. 지금은 횟집이 많이 늘어나 생선회로 유명하며 신시가지가 조성되면서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