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시학, 이 시인을 주목한다 >
모래 이야기
김 덕 남
고니는 굵은 갈필, 물떼새는 세모필로
사초를 쓰고 가는 모래톱 가장자리
예서체 발자국마다 생의 어록 담는다
콩게 달랑게가 지하 성전 짓고 있다
달빛을 걸어놓고 꺾으며 내지르며
판소리, 파도의 완창 유장하게 듣는다
누군가의 꿈을 위해 날마다 솟는 빌딩
그 속에 뼈를 묻어 십자가 지고 섰다
불길도 꾹 참아내는
된바람도 막아서는
거울
김 덕 남
좌우가 바뀐 채로
거울 속서 누가 본다
똑바로 보려거든 그대를 뒤집어라
한 번쯤 뒤집고 보면 가는 길이 보이리
영문글자 자리 바꿔
달려오는 앰뷸런스
앞차의 백미러엔 생명길 뚫고 있다
꽉 막힌 내 안을 본다
거울 하나 찾는다
꼬리곰탕
김 덕 남
꼬리곰탕 한 그릇을 바닥까지 비우다가
할배는 와 안 먹능교? 배고프다 해놓고는
와 이레 속이 답답하노 먹은 기 얹힜는강
소나 사람이나 한가지 아닌가베
잔등을 긁어주면 꼬리로 날 휘감았제
지금도 동동 뜨고 있는 국물 위의 그 목소리
쟁기질 할라카머 쇠꼬리 보질 말어
밭둑의 바우에다 두 눈을 탁 박어야제
팽팽히 당긴 고삐에 이랴! 소리 들린다
감각을 찍다
- 시각장애인 사진전시회
김 덕 남
얼굴은 잘렸어도 웃음은 남아 있다
넘어질 듯 비스듬한 빌딩의 저 안간힘
비켜난 무게의 중심 위태로운 생의 찰나
날아가는 파랑새에 초점을 맞추다가
기억으로 셔터 눌러 담아보는 세상 빛깔
디카 속 화면 가득히 살고 있는 피카소
모지랑숟가락
김 덕 남
여름엔 감자 등을
겨울엔 호박 속을
쓱쓱 긁다 제 살 깎아
껍데기만 남은 당신
한평생
닳은 손끝엔
반달꽃이 피었다
<자전적 시론>
세상을 썩지 않게 만드는 천연 방부제
김 덕 남
어느 날 오른 쪽 어깨 위에 몰캉한 혹이 만져졌다. 초란(初卵) 반쪽을 엎어놓은 듯 볼록하다. 의사의 진단은 지방종 지방혹이라 한다. 사막을 건너는 낙타도 아니고 왜 혹이 생겼을까? 짊어지고 가야할 짐이 많아서일까? 메스를 들이대어 들어낸 지방덩어리, 눈물이 굳은 듯 반투명물질이 내 눈앞에 놓여졌다. 한 때는 나의 분신으로 경계 없이 소통하며 낙타의 혹처럼 에너지원 구실을 했을 텐데…. 그 혹을 잘라내고 실밥을 묶을 때도 수술에 대한 불안, 걱정보다는 시의 재료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만큼 시조는 내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절실한 나의 과제이다.
시인이 되리라고는, 더군다나 시조시인이 되리라고는 5 ~ 6년 전만 해도 생각조차 못했다. 학창시절 문학이 좋아 문예반 활동을 꾸준히 하였지만 교내 수상이외엔 아무 성과가 없었다. 다만, 대학에서 교육행정직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도서관의 다양한 책을 꾸준히 읽던 중 소설가를 꿈꾼 적은 있었다. 그것은 오로지 꿈이었다. 꿈을 이루기 위한 실천은 전혀 없었으니. 내 시조의 원천이자 자양분은 내가 처한 외로움과 그리움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 그리움의 중심엔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었다. 기억에도 없는 아버지는 실체가 없는 막연한 그리움이었다. 그러나, 청상으로 하나 딸을 키운 어머니는 나의 전부였다. 30여 년 전 어머니를 잃었을 때의 상실감은 무엇으로도 메꿀 수 없었다. 일과 독서, 그것이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직장에서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을 즈음, 가슴에서 꿈틀거리는 욕망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직장 내 문학동아리를 만들고 평생교육원에서 현대시 창작실기를 수강하며 습작을 시작했다. 자유시 중심이었으나 나의 습작에는 3,4음절의 운율이 저절로 생겨나니 시조야말로 나의 체질에 딱 들어맞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시조의 역사나 이론도 모른 채 공무원문예대전에 입상하여 행정안전부장관 상을 받게 된 것이 커다란 촉매제가 되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으로 부산시조시인협회에서 실시하는 시조연수를 받으며 본격적으로 이론과 창작공부에 들어갔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그 재미에 푹 빠져 헤어날 줄 모르니 왜 이렇게 늦게 시작했을까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해 말 부산시조신인상과 이듬해 초 국제신문 신춘문예에 며칠 사이로 당선되어 시조시인이란 이름을 얻었다.
“시는 체험이다”고 릴케가 『말테의 수기』에서 말한 것처럼, 직접체험이든 간접체험이든 체화된 언어로 시를 써야 감동을 준다고 생각한다. 나의 체험은 다양하지는 않지만 태생적으로 좀 특별하지 않았을까? 문학은 살아온 만큼 그 깊이를 느낄 수 있다는 말에 동의한다. 체험을 위해 애써 고난을 자초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주어진 고난을 탓하지 않고 문학적으로 승화한다면 얘기는 달라지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나는 내 삶을 불행의 범주에 넣지 않는다.
시조는 시대정신을 풀어내는데 앞장서야 한다. 정약용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시대를 아파하고 퇴폐한 습속을 통분히 여기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물며 時調란 이름으로 詩를 쓴다면 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어느 작가의 “시는 세상을 썩지 않게 만드는 최상의 방부제”란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그렇다, 나도 그 대열에 동참했다. 그래서 시조시인이라는 이름에 자부심을 느끼며 어깨 또한 무겁다.
시조는 정형시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황금률의 틀이 있다. 이 틀이 낡았다고 그릇을 깨트릴 것이 아니라 틀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내면을 확장해나간다면 우리의 민족시인 시조는 세계화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시조의 고수라고 일컫는 일부 시인들이 가끔 틀을 깨는 시조를 발표하는 것을 본다. 물론 내재율은 지켰다고 하겠지만. 그것을 보고 신인들도 덩달아 흉내를 내는 것을 보면 늦깎이로 등단하여 연륜이 짧고 내공이 부족한 나로서는 심히 당황스럽다. 시조 정형의 틀을 벗어나면 자유시가 되는 것임을 왜 모를까?
시조를 쓴다는 것은 자기 내면을 찾아가는 수행의 과정이라고 본다. 시조의 절제와 함축, 시대정신을 담아 운율까지 얹어가는 과정이 나를 다듬는 그릇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시와 삶을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시는 시대로 삶은 삶대로 간다면 그것은 시인의 길은 아닌 것이다. 이 말을 하고보니 신춘 당선 소감을 지키지 못할까 덜컥 겁이 난다.
“이제는 질곡의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그 한 권의 책을 함축하여 한 편의 시로, 그 한 편의 시에 다시 가락을 얹고 절제와 여백을 더하는 노력을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촌철살인의 기가 느껴지고 단칼에 벨 수 있는 한 수의 격을 가진 율을 지으면서 그리움을 뿜어내고 싶습니다.”
이렇게 겁도 없이 당선소감을 내었다. 등단 후 짧다면 짧은 기간이지만 초심을 잊고 사고의 깊이 없이 기성시인들의 흉내만 낸 것이 아닌가 내 자신이 심히 두렵고도 두렵다.
- 《시조시학》 2013. 겨울호. '이 시인을 주목한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