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참나가 아니고, 몸은 나의 소유물입니다.
身不是我,身是我所有的
* 정토대경해연의淨土大經解演義 (제8집)에서 발췌
견해상의 착각 중에서 첫째는 몸이 나라고 집착하는 신견身見입니다. 나는 어디에 있을까요? 일정한 것이 여기 존재하는데, 이것이 나입니다. 이것으로 인해 고민이 크고, 이것이 바로 영원히 육도六道를 벗어날 수 없게 합니다.
우리들은 비록 경계에 계입契入하지 못했을지라도 이렇게 여러 해 동안 부처님 공부를 하였습니다. 몸이 내가 아님을 알라고, 부처님께서는 수없이 말씀하셨고 우리들도 명백히 경청하였습니다. 몸, 이것은 무엇입니까? 몸은 나에게 딸린 것(我所)이고 나의 소유물입니다. 내 몸에 입은 이 옷은 내가 아니라, 나의 소유물이고 나의 옷입니다. 여러분들은 나의 소유물은 생멸하지만, 나는 생멸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체는 생멸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신체는 생멸이 있지만, 나는 생멸이 없습니다.
서양철학자(데카르트)는 매우 똑똑합니다. 무엇을 나라고 말합니까? 그는 몸이라 말하지 않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사고는 보통사람 보다 뛰어납니다. 나는 생각할 수 있고, 그것이 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육신은 생각할 수 없는 물질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나의 이 몸, 정신의 일부분이 곧 나입니다. 물질은 생멸이 있고, 정신은 생멸이 없습니다. (이런 사고는) 보통사람에 비해 조금 뛰어납니다. 우리 동양에서는 일반적으로 영혼이라 하고, 영혼을 나라고 여기며 이것에 집착합니다. 이것에 집착하여 비록 멸하지 않을지라도, 육도에서 몸을 버리고 다시 태어납니다. 이러한 일은 진실이고, 절대 거짓이 아닙니다.
현재 가장 분명한 과학적 증거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서양의 최면술입니다. 매우 많은 사람들은 미국의 브라이언 와이스(BRIAN L. WEISS)의 보고를 간과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미국에 사는 도반께서 저에게 알려준 것으로 그보다 뛰어난 사람은 많지만 책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책이 나온 후로 13가지 다른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에 유통되었고 유명해졌습니다. 당연히 그는 매우 틀림없는 사람이고, 최면에서 큰 성취를 이룬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최근 요 며칠에 호주의 도반께서 그가 호주에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제가 원래 그를 만나려고 했는데, 그가 와서 우리들에게 보고하는 장을 마련하고 그의 시간으로 꽉 채워서 각 자리마다 모두 그를 만날 수 있도록 준비하였습니다. 최면 속에서 우리는 과거 세상에 존재하게 됩니다. 과거는 한 세상에 그치지 않고, 어떤 사람의 경우 최면에서 열 몇 개의 세상, 스물 몇 개의 세상에 나타날 수 있다고 합니다. 저는 와이스 박사의 보고에서 일찍이 어떤 사람이 마치 수십 개의 세상에 살았던 것처럼 거의 4천년 이란 오랜 세월을 앞으로 밀어서 집도 없이 동굴에서 거주하던 상고시대, 그런 시대에 살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바로 영혼이 다시 태어난 모습입니다.
육도六道는 진실이고 거짓이 아닙니다. 옛 인도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살던 시대의 인도는 종교의 나라로 그들 종교 신도는 모두 선정 공부가 있었고, 학술계 안에도 선정을 닦을 줄 알았으며, 선정 속에서 공간차원을 돌파할 수 있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육도 안의 공간차원을 모두 돌파할 수 있었는데, 사선팔정四禅八定으로 그들은 비상비비상천非想非非想天도 볼 수 있었고, 아래로 아비지옥阿鼻地獄도 볼 수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거짓이 아니라 누구나 선정에 들면 누구나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이 이렇게 선정에 든 사람에게 물어서 그들에게 본 지옥의 상황과 천당의 상황을 가르쳐 달라고 청하여 그들이 말해주면 모두 다 같은 말이니 거짓이 아닙니다. 그들은 천문 관측기구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차원을 돌파하기 위해 선정공부를 이용합니다. 현재 과학은 공간차원이 존재함을 확실히 알고 있지만 어떠한 방법으로 돌파할지 모르고 있고, 그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옛 인도에 살던 이런 종교 학술계의 대덕들은 몇 천 년 전에 만약 인도의 가르침 따라 말하면 인도교 장로는 저에게 그들의 역사는 1만 년의 오랜 세월이라고 알려줄 것이지만 오늘날 우리들 이 세계는 8,500년이라고 학술계에서 승인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불교와 비교하면 5,000년 빠릅니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 1만년의 오랜 세월을 말하고 서로 믿지만, 저는 그들이 역사의 기록을 대대로 전해 왔다고 믿습니다.
공간차원을 돌파하는 것은 모두 같지 않습니다. 경계가 완전히 서로 같지 않아 모두 육도윤회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영혼실재에 대해서 중국의 성인은 이 일에 대하여 그들도 알고 있었지만 알아도 말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엇 때문에 말하지 않았을까요? 일반 세속의 군중들은 이러한 경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잘못 말하여 그들의 심사心思를 어지럽히고, 그들에게 허튼 생각을 하게하면 말하지 않는 것만 못하고 정도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공자(夫子)께서 인도人道·천도天道·귀신鬼神에 대해서 한 말은 매우 적습니다. 이것은 모두 기감機感이 같지 않고, 그래서 교학敎學의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육조혜능六祖惠能 대사께서 나我를 깨달았을 때 말씀하신 나는 무엇입니까? 자성이 곧 나입니다. 이것이 불법이 설하는 것으로 자성이 나임을 세속에 따라 설명해 보겠습니다. 세속에 따라 설명하면 영혼이라거나 영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혼은 신령하지 못한데, 혼은 신령해야 합니다(魂不靈,魂要靈). 당신이 세간에 환생하여 반드시 큰 부자 큰 귀한 집안을 선택하면 훨씬 편안합니다. 당신이 빈궁한 집안에 환생한다면 잘못이지 않겠습니까? 미혹하면 깨어있지 못하므로, 그는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공자께서는 좋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공자께서는『역경易經』, 「계사전系辭傳」에서 “떠도는 혼은 (다른 몸으로) 변하고 정과 기가 (모여서) 사물이 된다(遊魂爲變,精氣爲物)”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마디 말씀은 좋은 말씀입니다! 귀신은 속도가 매우 빨라서 동요하여 멈추지 못하고, 일정하여 머물지 못하여, 속도가 매우 빠릅니다. 진실로 그것은 떠도는 혼이니, 이 말은 이치(道理)가 매우 타당합니다. 불법에서는 미혹한 혼(迷魂)이라 말하는데, 그는 미혹한데, 미혹해서 이것이 자기 자신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실재로 말하는 것은 바로 불가에서 말하는 아뢰야식阿賴耶識입니다. 아뢰야식이 미혹하여 깨달았다 할 수 없고, 자성이라 하지 못하며, 법성法性이라 하지 못합니다. 한가지 일,미혹과 깨달음이 같지 않은 이름입니다.
우리들 범부는 부처님과 하나의 성性, 하나의 자성, 하나의 영성으로 털끝만큼의 차별도 없습니다. 우리들은 현수국사賢首國師의『망진환원관妄盡還源觀』에서 이러한 정보를 얻었는데, 그 어르신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매우 상세하고 너무나 훌륭합니다. 우리들은 그것을 배운 후에 비록 증오證悟는 못하더라도 해오解悟는 할 수 있고, 이러한 사실진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보살님과 조사님들께서 결정코 우리들을 속이시지 않으므로 우리들은 그들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부처님 공부를 하는데 별다른 것이 없고 바로 그것을 찾아 돌아오는 것, 자리의 본래면목을 찾아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논문의 제목인「망진환류妄盡還源」에서 환류還源란 찾아 돌아오는 것으로 참 나를 찾아 돌아오는 것입니다.
몸은 거짓 나입니다. 몸을 참나라고 여긴다면 당신은 잘못되었고, 엄청나게 잘못되었습니다. 그래서 몸은 참나가 아니라 나의 소유물이라고 맨 처음 깨닫습니다. 이러한 사실진상이 참으로 분명하고 참으로 뚜렷한데, 당신은 죽음을 두려워합니까?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왜일까요? 생사가 없기 때문에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목숨을 버리는 것은 옷을 벗는 것과 같아서 내 옷이 더러워지면 벗어 내버리고 다시 새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아뢰야식도 이와 같습니다. 아뢰야阿賴耶는 불법에서 신식神識이라고 합니다. 이 몸이 늙어서 잘 사용할 수 없으면 새 몸으로 바꾸지만, 어떤 사람은 바꿀수록 좋아지는데 어떤 사람은 바꿀수록 나빠집니다. 이러한 영향의 크기는 육도 안에서 인천은 좋고, 축생·아귀·지옥은 나쁜데 당신은 어떤 몸으로 바꾸겠습니까? 이 안에서 업인과보業因果報를 말하게 됩니다.
당신의 선한 마음(心善) 착한 일(行善)에서 선악의 표준은 무엇입니까? 자성, 자성의 성덕性德입니다. 자성성덕에서 핵심은 우리들이 현재 사용하는 일반적 말로 말하자면 바로 사랑(愛)이고, 불법에서는 자비慈悲라고 하고 유학자들은 인의仁義라 하며, 본성 속에서는 바로 사랑입니다. 확실히 견성見性한 후에 자성의 사랑은 자연히 흘러나와서 결정코 분멸함이 없고, 결정코 집착함이 없으며, 깨달은 사람의 사랑하는 마음은 우주에 두루 하고 법계에 두루 합니다. 마치 빛의 파장, 전자파와 같이 법계와 허공계에 두루 하여 모두 다 느끼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