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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출신인 마유미는 자신이 게이샤가 된 것은 태어나기 전부터 운명지워진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가난하고 형제가 많은 집안에서 태어난 우리 어머니는 여덟 살 때 게이샤 집에 팔렸어요. 어머니는 할머니가 진 빚을 갚기 위해 손님과 잠자리를 같이 했는데, 그만 나를 임신했던 거예요. 아버지라는 사람은 나를 자기 자식이라고 인정하지 않았어요. 결국 난 어머니처럼 게이샤가 될 수밖에 없었지요.
여섯 살 되던 해, 여섯번째 달 제6일에 이 직업에 발을 들여 놓는 의식을 치렀어요. 게이샤에 입문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첫 번째 「단골손님」을 갖게 됐어요. 「단골손님」이라는 표현을 쓰기는 내키지 않지만 말이에요. 이건 마치 내가 돈을 받고 몸을 팔았다는 느낌을 주거든요. 나는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남자들과, 그것도 돈과는 전혀 무관하게 정을 통했어요. 이런 점은 어머니를 닮은 것 같아요. 어머니 역시 돈에 눈이 어두워 몸을 팔지 않았다는데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거든요. 어머니는 게이샤 집에서 월급으로 받는 것 외에 손님들한테 직접 돈을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사람이에요.
내가 처음으로 진짜 사랑에 빠졌을 때 어머니가 그러더군요. 「꿈깨라. 너는 네 일을 멸시하게 될거야. 계속해서 네가 고집을 부린다면 경제적 파탄을 맞게 될거다.」라구요. 그리고 나서 어머니는 내게 2가지 선택권을 주었어요. 어머니와 애인,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는 거죠. 나는 결국 어머니를 택할 수밖에 없었어요. 어머니에 대한 나의 의무는 다른 어떤 것보다 앞서니까요.
내가 살아온 54년이라는 세월을 돌이켜 보면, 그래도 나는 참 행복한 삶을 누렸구나 싶어요. 비록 어렸을 때 에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느꼈던 때도 있었지만 이 바닥에서 생활하면서 빚을 한 푼도 지지 않았다는 것은 성공한 거나 다름없거든요. 나는 지금 이 생활에 만족해요. 하지만 다시 한 번 이 세상에서 태어난다면, 그때는 남자로 태어났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훨씬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아요.』
교토에서 큰 게이샤 집을 운영하고 있는 유리꼬 역시 슬픈 사연을 갖고 있다. 『내 고향은 규슈(九州)섬이에요. 그 곳 남자들은 쇼비니즘(Chauvinism,광신적이고 배타적인 애국주의) 옹호자로 유명하죠. 그 곳에서는 사내아이만 환영을 받고 계집아이는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아요. 어렸을 때 우리 집은 아주 부유했는데, 형제들이 항상 날 못살 게 구는 거예요. 처음엔 왜 나를 그토록 괴롭히는지 이유를 몰랐어요. 내가 열한 살 되던 해, 할머니가 그러시는 거예요. 나를 길러 준 어머니는 생모가 아니라고. 그래서 나는 친모를 찾아 나섰어요. 하지만 그녀는 가난한 목수와 재혼을 해서 아이를 4명이나 더 낳아 나까지 양육할 수가 없었어요. 결국 나는 육지의 한 병원으로 팔려갔죠. 나를 낳아 준 친어머니가 나를 팔다니. 정말 끔찍한 일이었어요.
4년동안 병원에서 새벽 6시부터 밤1시까지 죽도록 일만 했어요. 그 땐 정말이지 사는 것이 너무 절망적이어서 차라리 죽는게 낫다고 생각해 자살을 기도했어요. 하지만 자살 기도가 실패로 끝났을 때 , 나는 다시 혼자 힘으로 일어서자고 결심했지요. 몇 년 동안 이 도시 저 도시를 전전하면서 클럽이나 카바레 같은 술집에서 일하다 열일곱 살 때 교토까지 흘러들어왔어요. 뜻밖에도 거기서 한 게이샤를 만난 거에요. 그녀는 나더러 일본의 전통 예술을 배우도록 설득했어요. 수련을 받으면서 나는 마치 천국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요. 당시만 해도 다른 대안이 없었죠. 단지 이 길을 걸어야만 게이샤 집에 진 빚을 갚을 수 있었으니까요.
내 첫 고객은 일흔두 살의 고령이었지만 막강한 재력가로 게이샤 집에서 귀빈 대접을 받는 사람이었어요. 그는 내게 아주 친절하게 대해 주었고 훌륭한 후원자였죠. 하지만 게이샤에 입문한지 3년쯤 지나자 나는 더 이상 그가 필요없을 만큼 많은 고객을 확보하게 됐어요. 그래서 그에게 한 남자를 사랑하고 있으며, 그와 결혼할 생각이라고 말했더니, 그는 내게 축하한다며 결혼 자금까지 주었어요. 하지만 거짓이 탄로한 후 나는 몸을 숨기고 작은 클럽을 내야 했어요. 그때 내 나이 스물 두 살이었죠.
당시에 내 생애 최고 목표는 어머니같이 살지 말자는 것이었어요. 적어도 자기 몸으로 낳은 자식을 버리는 일은 하지 말자 마음 먹었던 거죠. 고양이 같은 미물도 새끼를 버리는 짓은 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나는 버림받은 어린 소녀들을 내 집으로 데려와 친자식처럼 보살피며 재능을 개발시켜 주기 시작했어요. 그 중 한 소녀는 마이꼬가 되기 위해 1년이라는 수련과정을 무난히 마쳤어요. 나는 그 애를 재워주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학교도 보내 주었어요. 그 애에게 매달 새로운 기모노도 사주어, 이제는 한 벌에 1500만원이나 하는 기모노가 무려 35벌이나 돼요. 마이꼬 한 명을 양성하는데에 나는 3억 7500만원이라는 엄청난 돈을 투자했어요. 그 중 약2억2500만원 정도를 돌려받았으니, 손해를 많이 본 셈이죠. 하지만 나는 이 소녀들이 필요해요. 이 애들이 내집에 명성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죠. 내가 뛰어난 마이꼬를 많이 데리고 있기 때문에 손님들이 우리 집을 신뢰하고 더 자주 찾는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나는 그 애들의 수련 과정에 드는 돈은 얼마든지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겁니다.
교토에서 마이꼬는 처녀여야 합니다. 결코 몸을 팔아서는 안되는 거죠. 단 한번만이라도 남자와 관계를 가지면 더 이상 예술에 집중할 수 없게 되거든요. 하지만 내 집에 있던 마이꼬 가운데 한 명이 한 사내를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녀를 조용히 내보내 결혼할 수 있도록 해 주었어요.』
이제 일본 남자들은 자신의 경제적·사회적 능력을 과시할 때 게이샤를 찾기 보다는 골프 클럽에 참가하거나 경주용 차를 모는 것을 더 즐긴다. 과거 명성을 떨쳤던 게이샤 촌은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빛이 바래고 있다. 오락실, 영화관, 상점, 러브 호텔이 엄청나게 증가했고, 텔레비젼에서 매주 공공현히 공연되는 포르노와 현란한 바와 나이트 클럽이 게이샤의 영역을 잠식하고 있는 것이다. 20세기초만 해도 약 8만명의 여성이 게이샤에 종사했지만, 이제는 약 1만명 정도의 게이샤가 활동하고 있을 뿐이다. 이들 게이샤도 대개 온천에서 일하며 매춘과 술접대를 함께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들은 더 이상 게이샤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지 않으며, 정통적인 게이샤를 존경하는 것 외에 그들의 선배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 이들의 수련과정은 지극히 짧고 형식적이며, 예술보다 돈을 더 추구한다. 700년에 걸친 게이샤의 전통이 서서히 무너져 가는 것이다. 이제 일본에서 게이샤의 예술을 제대로 평가하려는 의지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또한 대부분의 일본인은 이제 다도(茶道)때 그릇의 올바른 위치나 반달 모양의 둥근 눈썹 등에 대해 세심한 정성을 쏟고, 더 완벽한 아름다움을 구현하기 위해 전 생애를 바쳤던 정통 게이샤를 구식이라고 여긴다. 물론 아직도 나이 많은 소수의 남자들만은 전통적인 게이샤를 올바르게 평가할 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