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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여주성당 설립
1. 북여주 성당 설립 배경 및 과정
북여주 성당 설립 배경은 여주성당의 제19대 김기원 사도 바울 주임신부(2002년 1월 29일 부임)님 재임 시 신자수가 4,005명(남자 : 1,729명, 여자가 2,276명)이었으며 지리적으로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어 신자들의 원활하고 효율적인 신앙생활을 위하여 여주성당에서 분가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후 2004년 10월 1일 여주성당 본당 신부님을 비롯한 모든 신자들의
축복을 받으며 여주군 여주읍 천송리 322-1번지의 4032㎡ 대지위에 신자 들이 초대 신부로 부임하신 이인석 헤로 신부님에 주도하에 가칭 천송리 성당에서 첫 야외 미사를 했다.
2004년10.11.임시 성전건립을 위하여(비닐 하우스 성전을 짓기 위하여 공사를 시작하여 2004년 10.17일 하우스 성전 안에서 이인석 (헤로 신부님 영명축일을 맞이 하였다.
그후 2005.01.02. 북여주성당최초까페를
개설하여fttd;;//cafe>daum>net/dyejsa 하였으며 신자들과 공유하였다.
그후 05.01.14일 주보성인 예수의 성녀 데레사/주보성인으로 교구청 으로부터 승인을 받았으며.
그후 2005.01.25.일부 최초 임병길 (도밍고)1대 총회장과
구반장을 선임 하여 본격적으로 전신자가 하나가 되어 본당 성당 신축을 위하여 노력 하였으나 질서가 없어 북여주 신축 성당은 제거름만 치기도 하였다.
그런사이 어느덧 시간이 지나 2005.10.16.일 첫 본당의 날을 맞아 체육대회 및 주보 성인 성녀 데레사 축일 및/추수 감사도 함께 축하 하기도하였다.
2005.11.19. 초겨울 비닐하우스의 원인불상 화재로 인하여 제의실 및 일부 성전이 소실 되었으나 위기 극복을 위한 신자들의 간절한 기도와 노력으로 12.11. 조기에 복구여 미사을 할수 있었다.
2006년 2월 5일 첫 성전 건축 위원회를 발족하였으며 건축 위원장에당시 부회장이던 김태현(베드로)을 선임하여 임명식를 가젔다.
2006.02.09.본당 설립 건축 계흭서를 교구청에 접수 하였으며
다시성당을 제정비
제2대총회장으로 서정용(다두)회장님을 06.03.12. 선임
본격적으로 전 신자가 하나된 모습으로 , 2006년 4월 6일부터 본당 신축을 위한 묵주기도 100만단 봉헌과 건축기금 조성을 위한 여주 고구마 재배 및 판매에 모든 신자들이 피곤함도 잊은 채 솔선수범 하였다.
당시 본당 부회장 김태현 회장님게서 중고 버스를 기증하여 2006.09.10.일부터 각 지역을 돌며 본당 버스를 운행 하기도 하였다.
그후 본당 신축성당의 위치가 잘못돼여 2007년 02.09일 교구청 건축 위원장으로부터 북여주 성당 신축공사 관련하여 건축물 (성전 및 사제관)신축설계도면 심의 요청하여 2007년02월02.09일 교구청 건축위원회에 승인을 바닫다.
(설계변경 도면 참조 및 설계 변경 내용 )
번호 | 구 분 | 변경 내용 | 비 고 | |
당 초 | 변 경 | |||
1 | 건물의 배치 변경 | -성당은 좌측에.사제관은 우측에 배치함. | 성당은 우측에.사제관은 좌측에 변경하여 배치함. | A-09 배치도 참조 |
2 | 건물의 층수 조정 | -지하 1층.지상 2층 | 지상3층으로 변경 | A-03 설계개요 참조 |
3 | 건축 면적 변경 | -669.71m2 | 790.47m2중) 120.76m2 | A-03 설계개요 참조 |
4 | 연면적 변경 | -1.032.74m2 | 1.429.76m2 중) 297.02m2 | A-03 설계개요 참조 |
2007.04.14. 고건선 대리구장님 방문으로 본당 신자들을 격려 하셨다
2007년 5월 20일, 신부님을 비롯한 신자들의 본당 신축에 간절한 기도와 노력, 전국의 여러 성당 신부님들과 신자들의 도움으로 드디어 성당 기공식을 하게 되었으며, 뜯하지 안캐 당시 부회장겸 건축위원장 김태현(베드로)도 사임 하시였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1대 이인석 헤로 신부님께서 2007.06. 어느날 조수연(스테파노) 저에게 총회장을 맏아 달라고 하시였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던 저의 집사람 이순자(아나스다시아)은 똑똑하고 훌룡한 사람들도 2명씩이나 중간에 사임 하시는데 당신은 몸도 아픈사람이 더군다나 하우스 성당에서 성당도 지어야지 말도 많은데 몇칠도 못하고 상처만 받고 한다고 극구 말리였습니다. (당시집사람은 전례분과장을)맞고있었다
그레서 저는 신부님 저는 도저희 못하겠다고 말씀 드렸다‘
신부님께서는 힘들다고 다 안한다면 성당은 누가짓느냐 하시면서 힘들어 하시는 신부님의 모습을볼 때 저는 다시 고민하게 돼였습니다
그날밤 저는 잠을자는데 꿈속에서 어느 사막을 것고 있는데 머리에 가시관 쓰시고 모래속에 목많 내노고 나를 보면서 스테파노야 내가 식키는 일인데 왜자꾸 거절하느냐 저는 그소리에 깜짝놀라 예수님 잘못했습니다 하고 깨어보니 꿈이 였습니다.
저는 잠자고 있는 집사람을 깨워서 묵주기도 고통의 신비5단을 바치고 꿈 이야기을 하였드니 그때사 저의 집사람도 당신 뜻대로 하세요 하며 승낙 하였습니다.
꿈을꾼 다음날 신부님께 총회장을 하겠다고 말씀 드리니 신부님께서는 기뻐 하시면서 쾌이 승낙 하시였다.
2007년07월15일 3대총회장겸건축 위원장으로 임명받고본당의 모든 어려운점을 보완하여 2007년08월30일 본당 성전건축을 착수 하계 돼였다.
어려움도 많았지만 전신자가 하나된 마음으로 삽과 호미를 들고 부평리 고구마 받에가서 야외 미사를 하고 끛나면 삽과 호미를 들고 일을하여 각성당의 많은 신자들의 도움으로 거기에서 나온 수입으로 성당 신축기금을 모아 우리의 성당은 차츰 차츰 자리를 잡게 되였다.
그러던 저는 2008년01월19일 총회장 연수을 마치고 집에 오게 돼였다.
부픈 꿈을 안고 다음날 성당에 가서 신부님께 인사하는 순간 청청 병력갇은 말을들었다. ( 탄액 )
아 나에게 올겄이 왔구나 저는 총회장 연수를 하는동안 예수님앞에 무릅을 꿀고 부족한 저에게 막중한 일을 맞기셨을 때 어떠한일이 닥처도 주님의 말씀을따라 성당을 완성하겠다는 나의 결심도 다 잊어버리고 망설이게 돼였다.
그날저녁 걱정과 두려움에 고민을 하다가 순간 깊은밤에 깜박 잠이들었다.
하얀옷을입고 예수님게서 나타나시여 스테파노야 왜그리 겁을내느야 니가 생각하는게 나에 나의뜯이니 니생각되로 하거라 하시는 말씀에 깜짝놀라 깨어보니 꿈이였다.
저는 다음날부터 다시 힘을내여 신부님께 안심 식히고 집사람 등에는 어린 손녀딸 업고 집집마다 찿아다니며 당시 쉬고있는 교우 설득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나의 모습이 신자들의 마음에 다앚는지 한사람 한사람 신자들이 모이기 시작하였습니다.
2008.03.09. 비닐하우스 성당을 철거하고 신축성당에 첫 미사를 하였다.
그후 2008년 3월30일 당시 최덕기 (바오로 주교님께서 저의 성당을 방문 하셨다 마침내 2008년 7월 13일 건평 지상 3층 총 405평과 사제관 38평(공사비17억/성가대.등.시설비=21억원)을 완공 함으로써 3년 6개월여간 미사를 드렸던 비닐하우스를 철거하고 입당 미사를 올리게 되었다.
2008년 10월10일 정식으로 1년3개월 만에 성전 준공 승인을 밪았다
그리고 수원교구 북여주본당 (주임 이인석 신부님)은 2009년 4월 26일 여주군 여주읍 천송리 322-1에서 교구장 이용훈 주교 주례로 새 성전 봉헌식을 가졌다.
그러다 초대 이인석(헤로)주임 신부님은 갇은 수난과 고생끚에 북여주 성당을 주님께 봉헌 하시고 2009년 08월29일부로 정든 북여주 성당을 등지고 당시 용인대리구 양지 성당으로 가시였다.
2. 주보성인
스페인 카스틸레의 아빌라에서 태어난 데레사(1515-1582)는 아우구스티 노회 수녀들로 부터 교육받았으나 건강 때문에 그곳을 떠났는데, 그 후 오랫동안 수도 생활을 갈망하던 나머지 1536년에 아빌라에서 가르멜 수녀가 되었지만 수녀원을 떠났다가 또 다시 입회하는 등 건강 때문에 상당한 고통을 받았다.
그녀는 1555년과 56년 사이에 최초로 환시를 보고 불안에 떨었지만, 성 베드로 알칸타라의 지도로 모든 진실을 알게 되면서부터 개혁 가르멜 수도원운동에 뛰어들게 된 것이다. 그녀가 메디노 델 캄포에 제2의 수도원을 세울 때 십자가의 성 요한을 만났으며, 그 이후로 많은 도움을 주고받았다.
그녀는 스페인 전역에서 가르멜의 개혁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난관 또한 많았다. 데레사는 자서전을 비롯하여, [완덕의 길], [영혼의 성] 등의 영성서적을 저술함으로써 교회사상 가장 돋보이는 신비가 중의 한 분으로 꼽힌다.
성녀는 알바 데 토르메스에서 선종했고, 1622년에 시성 되었으며, 1970년에 바오로 6세에 의해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교회 박사로 선언되는 영광을 얻었다.
3. 성당 봉헌일
봉 헌 일 : 2009년 4월 26일
주 례 : 이용훈(마티아) 주교
총공사비 : 21억원
2023년 05월 17일 (편찬 위원장 조수연 스테파노)
4. 본당 공소 약사
가. 도전리 공소
소재지 :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원심동1길 5
설 립 : 1957년
편 입 : 수원교구 북여주본당 도전공소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원심동1길 5)
도전공소는 1957년에 설립됐으며 신자들이 약초를 팔아 비용을 마련하고 직접 나무를 베고 흙을 발라 지금의 공소를 지었다. 하지만 공소의 뿌리는 18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곳에 처음 복음의 씨앗이 뿌린 사람은 정 안토니오와 송선일로 전해진다. 정 안토니오의 아내인 임 카타리나가 1871년까지 이어진 병인박해로 순교하자, 정 안토니오는 송선일과 함께 원심이(도전공소의 옛 이름)로 피난한다. 임 카타리나는 박순집의 아내인 임 바르바라(우리나라 최초의 수녀인 박황월의 모친)의 사촌동생이기도 하다.
(도전리 공소 전경)
정 안토니오와 송선일이 원심이(도전리의 옛 지명)에 정착하고 불과 4, 5년 후 충주 배일곡에서 살던 남원 양씨 곡산공파 양재형이 박해를 피해 이곳에 이주해 오며 교우촌을 이루기 시작했다. 항간에 알려진 도전공소의 뿌리가 1801년 신유박해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기록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고 공소 신자이자 도전3리 이장인 박용식씨가 전해왔다.
이후 우도(Oudot, Paul, 오보록 吳保祿, 1865∼1913) 신부가 1890년에 원심이에서 신자들과 생활하면서 경당을 짓고(뮈텔주교일기 2권, p. 497~498, 한국교회사연구소 1993년 5월 15일 간행 참고) 한국의 언어와 풍습을 익힌 후 1891년 10월 10일 전라도 고산 차돌백이 주임으로 이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한편, 원심이 공소와 비슷한 시기에 설립되었던 인근의 교우촌은 현재 모두 폐쇄되어 없어졌지만, 원심이 공소만큼은 아직 마을 주민들의 관심과 애정 어린 정성으로 유지되고 있다.
출처 : 가톨릭평화신문(2020.10.12.)
나. 가야리 공소
소재지 :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오감길 56 (가야리 167-1 번지)
설 립 : 1986년
편 입 :
여주 관내에 공소 신자 수가 100명이상인 공소는 원심이공소(현 도전리공소)와 오감공소(현 가야리공소)였다.
1945년 해방 무렵 오감공소 신자 수는 30여 세대 120여명이였다.
현 공소는 1986년 신축되었다.
2023년 05월 17일 (편찬 위원장 조수연 스테파노)
첫댓글 자료는 조수연 스테파노 형제님께 카톡으로 받은 내용을 정리 하여 올렸습니다.
첨부화일은 원본입니다.
네~~
산 역사의증인 이시군요 여주 성당있을때 몇번 미사드렸는데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밝은 표정들이 눈에 선합니다. 고생들 많으셨습니다 회장님외 모든 신자분들 고생하셨기에 지금 우리가 편하게 누리고 있음을 무한 감사드립니다^^♡
이렇거 많은분들이 관심과 사랑 감사합니다
지적사항이 전혀없네요. 수정사항도 지적도해주시고 추가시항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