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작품으로 조명(照明)하는 ‘나래’ 40년
제2부
장강에 올린 닻, 그 화려한 비상 / 권 갑 하
51. 30년을 딛고 불혹의 여정을 향해
“작품으로 본 나래 30년”전반부는 2대 회장을 지낸 리강룡 시인에 의해 6년에 걸쳐 나래시조에 연재되어 체계적이고 깊이 있는 정리가 이뤄졌다. 그 나머지 10년사의 정리가 필자에게 맡겨졌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 나래시조 40년사 출판 목전에까지 이르렀다. 출판기념 행사 일정이 잡혀 있는 상황에서의 촉박한 시간도 시간이지만, 워낙 재주가 없어 맡을 상황이 아니었지만 달리 도리가 없어 며칠을 고민하다 동인들의 해량을 간절히 바라면서 부득이 펜을 들었다.
나래 제57호 《아무도 금긋지 않았네》는 1997년 6월 21일 정광영 회장 편집 담당으로 안동 한빛기획에서 발간되었다. “항상 새롭게 사물을 보자”는 정 회장의 글이 머리글을 장식했고, 회원신작과 안중식, 박재숙, 오민필, 정광영, 윤신근, 안남춘 등 회원들의 수필이 실렸다. 그리고 중국 조선족 문단에서 중견 시인으로 활동하는 허홍식 님의 「룡정」 외 11편의 시조가 특집으로 실렸다. 57호에는 대구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박상용 시인과 울산에서 활동하는 신동익 시인이 신입 회원으로 참여해 신작을 선보였다. 박상용 시인은 한문교사로 특히 한시에 밝았다. 세계시인대회에 우리나라 한시부문 대표시인으로 참가할 정도로 본인의 활동 또한 적극적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런 지병의 악화로 2000년대 초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아 동인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2000년 이후 필자가 편집주간을 맡아 나래시조를 편집할 때 박 시인은 시조보다는 주로 한시 작품을 보내왔는데, 한자 선별 등으로 편집에 애로가 많았던 기억이 새롭다.
눈썹보다 짧은 하루 총총 걷는 산비알에
넉넉히 타는 가을 차곡차곡 채워 가면
목화밭 하얀 이랑에 긴 설움도 꽃이 된다.
- 「사시사모곡 - 4.가을」
박 시인은 「사시사모곡」과 「망향」두 편을 선보였는데, 모두 서시와 봄, 여름 , 가을, 겨울, 그리고 결시로 구성되어 현대시조에서는 볼 수 없는 형태를 띠었다. 이렇게 박시인의 시에는 이미지나 형식에서 한시적인 모습들이 자주 등장해 식상한 면이 적지 않은데, 위 시편은 감각적인 이미지로 어머니에 대한 사모의 정을 담아내고 있다.
반면 신동익 시인은 늦은 나이에 문단에 나왔지만, 작품에 대한 진정성이 남다른 분으로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젊고 실험적인 작품들을 선보였다. 그런 탄탄한 작품성으로 뒷날 ‘나래시조문학상’도 수상하게 되는데, 그런 점에서 필자는 늘 신 시인의 작품을 눈여겨 읽고 있다.
백두산 솔뿌리에
복령처럼 맺힌 내력
실핏줄 가닥가닥
실꾸리처럼 감은 心琴
가얏고 명줄을 타고
징소리로 울어라.
- 「백두산 산울림」 여섯째 수
위의 작품에서도 신 시인의 남다른 창법을 들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촛불을 밝혀 두고 / 잠드셨네 잠드셨네 / 또한 해일을 하네 / 내 깊은 잠속에서”(첫째수 부분),“선혈이 눈물이 / 해일하던 반만년을”(둘째수 부분) “이 여기 저 저기 / 피와 눈물이 가시면 / ‘한얼’과 ‘한멋’의 씨앗 / 보석처럼 반짝이리”(넷째 수 부분)에서 볼 수 있듯 비문법적으로 보이지만 색다른 의미를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안중식, 박재숙, 오민필, 정광영, 윤신근, 안남춘 시인의 수필은 시가 아닌 산문으로 동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좋은 공간이다. 눈에 띄는 것은 박재숙 시인의 ‘시가 있는 산문’이다. 박 시인은 필자가 편집을 맡았을 때도 자주 ‘시가 있는 산문’을 보내와 게재하였는데, 상당한 산문적 필력이 느낄 수 있었다.
당신과 나의 모든 것이
새로운 이름 되어
바람 한 소절 새로 이는
처녀지로 다달으면
돌아온
먼 길을 잊는다 해도
새로운 땅 경영하리.
- 「봄비 맞으며」 둘째 수
이번 호의 ‘시가 있는 산문’「산다는 것은」에서도 삶에 대한 잔잔한 사유와 깊은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글에 따르면 시인은 당시 남편의 연이은 사업 실패로 생활의 큰 고통을 받고 있는 데다 빈혈과 우울증 등으로 큰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런 고통 속에서 아버지의 삶과 말씀들을 되뇌는 구절구절은 읽은 이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진솔된 글이기에 그 만큼 감동도 큰 글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경제적 고통 때문이었는지 뒷날 시인은 ‘나래’ 활동마저 중단하고 마는데, 고통 속에서 새로운 삶을 일구고픈 박 시인의 그리움이 「봄비 맞으며」 시편에 아프게 배여 있다.
시골 밤 깊은 어둠 쑥향기 피우는데
개똥불 한 점 잡아 불씨로 심었더니
별빛이 익는 소리가 한 마당에 깔리네.
- 「시골밤」전문
중국 조선족 중견 시인 허홍식 시인의 작품 12편이 실렸다. 허 시인은 1942년생으로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1963년 문단에 데뷔했는데, 시, 소설, 수필 등 500여 편을 발표한 중견작가로 약력에 나와 있다. 군데군데 고투가 보이고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감각이 남달리 신선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대로 시조의 율격을 잘 살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위 작품은 모깃불을 피우는 시골 여름 풍경이 그 배경인데, 개똥불을 잡아 불씨로 심었더니 별빛 익는 소리가 한마당에 깔린다는 표현은 매우 돋보인다 할 것이다.
52. IMF 경제 상황 속에서 타오른 詩魂
1997년 12월 23일 나래시조 제58호 《외로움 파도로 깎는》이 안동 한빛기획에서 출판되었다. 정광영 회장의 시조 압축의 중요성을 강조한 “절약정신”이 머리글로 실렸고, 24인의 신작이 펼쳐지고 있다. 제9회 ‘나래시조문학상’은 이대영 시인의 「휴전선에서」가 차지했다. 白水 선생님은 심사평에서 “시조라는 그릇은 아주 절묘한 그릇이기 때문에 能手가 담으면 천지의 法音이 다 담기고도 자리가 남지마는, 凡手가 담으면 자칫 티끌만 잘못 내려앉혀도 쨍그랑! 금이 간다”면서 “「휴전선에서」를 뽑아든 이유는 시로서 갖추어야 할 향기가 모자라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특별히 흠잡을 곳이 없고, 이 시인의 시적 연륜을 보아냈기 때문”수상작 선정 이유를 적고 있다.
푸른 산 맑은 강물
그림 같은 이 산하를
울며 버린 세월 따라
길로 자란 쑥대밭에
오늘도 가슴 찌르는
길로 자란 녹슨 아픔
- 「휴전선에서」 첫째 수
이대영 시인은 1930년 충남 공주 출생으로 1967년 중앙일보에 「복날」을 투고했을 정도로 시조에 일찍 눈을 떴는데, 나래시조에는 1982년에 입회했다. 나래 입회를 계기로 본격 창작에 들어가 1985년 《시조문학》 가을호에 추천된다. 필자가 쓴 작품론에는 1)고향 그리고 어머니, 그 끝없는 그리움, 2)지친 도회의 삶을 다독이는 따뜻한 눈빛, 3)뜨거운 조국애, 그 사랑으로 가슴 적시는 산하, 4)세태를 외면할 수 없는 예리한 풍자 등으로 나눠 시세계를 조명하고 있다. 작품론에 인용했던 “문학 분야에는 문외한이었기에 나의 이러한 단점과 약점을 남몰래 메우기 위해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가엽고 애처로운 아내의 쓸쓸한 병상을 홀로 지키면서 생전에 글다운 글 한편 써보기 위해 오늘도 깊어가는 가을밤을 귀뚜리와 지새우고 있다”는 시인의 시작노트는 지금도 필자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이제는 남은 눈물 거두고 싶습니다
하늘 나라 그곳에도 꽃은 피고 있는지요
가슴에 오롯한 봄밤 별이 되어 뜬 당신
이제는 남은 그리움 달무리에 묻습니다
환하게 미소 지으며 금방이라도 오실 듯한
어머니 다정한 말씀 뜨락 가득 내립니다.
- 「사모곡 1」 전문
제2회 ‘나래시조신인상’에는 안남춘 시인이 당선됐다. 1958년 생으로 필자와 동갑인 안 시인은 국악인으로 이미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白水 선생님은 심사평에서 “나는 외 이 시인이 아직 문단에 나오지 않았었는지 모르겠다. 짜임새 있는 율격과 어머니를 그리는 서정이 조화되어 잘 익은 참외처럼 단내가 난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을 정도로 시조가 익어 있었다. 시인은 신인상을 받기 전부터 나래 행사 때면 빠지지 않고 참여할 정도로 나래 가족들과 가까이 지내왔었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 못한 데다 국악과 문학의 두 길을 걷어야 하는 남다른 고행(?)으로 지금도 시조창작에는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늘 아쉽다.
내 어머니 한처럼 고이 닳은 조가비
그 하얀 무언(無言)으로 우주를 잠재우고
껴안는 가슴들마다 출러이는 바다여
- 최상남,「망상해수욕장」둘째 수
제58호에는 리강룡 시인의 “지운 님께”라는 편지글이 눈길을 끌고 있다. 나래 초기에 동인으로 함께 활동하다 어느 날 갑자기 모습을 감춘 지운 최상남 시인의 시조 작품을 인편을 통해 전해 받았는데, 주소를 몰라 작품과 함께 지운님을 그리는 마음을 담아 공개 편지글로 나래시조에 실은 것이다. 시인은 지운 최상남과 전향란, 양선희 세 사람을 훗날 우리나라 여류시조의 맥을 이를 것으로 기대했을 정도로 지운에 대한 깊은 동인의 정과 그리움을 편지글에 담고 있다.
나래 59호인 《남아서 타는 자리》도 정광영 회장에 의해 안동 한빛기획에서 편집 출간되었다. 정 회장의 「시의 세계를 향하여」라는 머릿글에 이어 20명 동인의 작품이 실렸다. 1982년도의 활동사를 기술한 리강룡 시인의 ‘나래 30년’이 실려 있고, 림혜미 시인의 열아홉 살 때인 1947년 북한에 살 때의 추억을 담은 「그 여름의 묘향산 회억」이란 수필이 실려 잔잔한 추억의 시간을 주고 있다.
나래 60호인 《노래는 가끔 가지 끝에 걸리고》는 1998년 11월 24일 발간됐다. “요즘 범람하는 시들 대부분이 서정시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지만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없음은 치열하게 사물의 본질을 찾아 나서지 않았고, 찾아내지 못한 때문으로 생각된다. 객관화된 눈으로 사물을 보아내지 않고, 직접적인 화자의 심정을 토로함으로써 감동을 줄인 데도 그 원인이 있다”는 정광영 회장의“시인의 눈, 서정시의 오해”라는 머릿글이 눈이 띈다. 26명의 신작이 실렸고, 제10회 나래시조문학상 수상작인 김은숙 시인의 「작은 나무이고 싶네」가 빛나고 있다.
바람이 휘몰이 하는 자작나무 숲에서
갈숲 노래 듣고 사는 작은 나무이고 싶네
봄이면 산자락에 누워 바다소리 귀에 묻고
사랑도 잠시 한 때
감기 같은 거라고
산목도 추정에 겨워
훌훌 옷을 벗는데
이 목숨 허물 벗듯이
거듭 태어날 수 있다면
그 깊은 겨울에도 죽음처럼 찾아오는
고독한 침묵이 좋아 차가운 땅 더듬이로
처연히 버티고 서서 나이를 먹고 싶네.
김은숙 시인은 삼척 출신으로 1991년 뒤늦게 문단에 나오지만 남다른 창작력으로 『강물 위의 시간들』『네가 오기로 한 날에』 등 다수의 시집을 엮어내는 한편 강원 여류시문학회 회장 등 활발한 문학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백수 선생님은 심사평에서 “평범 속에 비범을 구하는 平沙落雁을 할 줄 아는 시인, 범사에 순리를 좇는 시인”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1999.6.20 발행된 나래 제61호 《시간의 뒷모습》은 “아직 불씨는 남아 있다”는 머리글로 시작하고 있다. 좋은 문예지가 되기 위해서는 “첫째 좋은 글이 많아야 하고 둘째 경비 걱정이 없어야 하고 다음은 좋은 편집이 되어야 하는데 세 가지 모두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현실”이라며 편집자의 산고를 토로하고 있다. 22명의 신작이 실렸고, 특집 1로 백수 정완영 선생님의 말씀을 녹취한 “아직 못다 부른 나의 시, 나의 인생”이라 지상 중계가 실렸다. 이 녹취문은 백수 선생님의 동시집 『엄마목소리』 출판을 축하하는 나래 동인들의 자리를 종로에서 갖고 그 자리에서 오고간 내용을 필자가 녹취해 재정리한 글이다. 백수 선생님의 말씀은 언제 들어도 그 폭이 광활하고 깊이가 바다처럼 깊어 늘 지나고 나면 아쉬움이 남아 이날은 마음먹고 말씀 전체를 녹취한 것이다. 현장감 있게 정리하여 언제 읽어도 그 느낌이 생생하게 다가온다는 칭찬을 듣곤 하늘 글이다. 특집2는 ‘오민필 동인 정년퇴임 기념 특집’으로 꾸며졌다. 오 시인의 대표작과 동인들의 축하 글과 시가 풍성하게 실렸다.
공원 벤치에 앉아 늦은 저녁을 끓이다
더 내릴 데 없다는 듯 찻잔 위로 내리는 눈
맨발의 비둘기 한 마리 쓰레기통을 파고 든다
돌아갈 곳을 잊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지
눈꽃 피었다 지는 부치지 않은 편지 위로
등 굽은 소나무 말없이 젖은 손을 뻗고 있다
간절히 기댈 어깨 한번 되어 주지 못한
빈 역사(驛舍) 서성이는 파리한 눈송이들
추스린 가슴 한쪽이 자꾸 무너지고 있다.
- 권갑하 「세한의 저녁」 전문
이어 필자의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수상작 「세한의 저녁」이 실려 있다. 이 작품은 필자가 출퇴근길에 만나는 노숙자들의 신산한 삶을 형상화한 작품인데, 《월간문학》 12월호에 실린 것이 가까스로 심사에 포함되어 그 해 12월에 수상을 하게 된 것이다. 또 하나의 섬이 되어 현대적 유배의 삶을 살고 있는 노숙자의 초상을 추사의 세한도의 이미지에 오버랩 시킨 작품으로 비교적 쉽게 쓰여진 작품이었다. 당시 IMF로 인해 부쩍 늘어난 노숙자들의 모습들이 수많은 이미지로 내면에 새겨졌고, 그러한 이미지들에게 지금까지도 내 시를 지배하고 있다. “바로 오늘 우리가 느끼는 현실의 온도를 은유로 잘 이끌어내는 깊은 맛을 지니고 있다. 시조의 정형을 잘 지키면서 시대의 한 단면을 이처럼 날카롭게 도려내는 감성에 축하를 보낸다”는 심사평이 새삼스럽다.
53. 어둠 속에 새천년의 문이 활짝 열리고
1999년 총회에서 김은숙 시인이 제5대 회장에 피선됐다. 이를 계기로 회장이 《나래시조》편집 발간 업무를 겸해오던 체제에서 이를 분리하기로 하였다. 이에 삼척에 있는 김은숙 시인이 회장을 맡고 서울에 거주하는 필자가 편집주간을 맡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나래의 역사에 걸맞게 이제는 편집 발간이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야 한다는 동인들의 염원에 따른 것이기도 하였다. 필자가 편집 업무를 받아 첫 기획으로 새천년맞이 기념 ‘동인 시선집’으로 62호를 발간하기로 했다. 30여 년 동안 각자가 일구어 온 힘들었으나 즐거웠던 문학 활동의 여정을 되돌아보며 창작 활동에 새로운 다짐을 하기 위함이었다. 나래 62호 시선집은 고문이신 정완영, 박재삼 선생님의 글과 초대 회장 정석주 시인의 대표작을 앞머리에 싣고, 27명 회원들의 대표작을 3~4편씩 실었다. 이와 함께 제3회 나래시조 신인상 당선작인 전현구 시인의 「간성기행」이 실렸다.
달빛이 밤을 새워 바다 품고 잠들더니
새벽에 연꽃 같이 아침해를 올립니다
하늘 땅 삼라만상이 자비 가득 실립니다
백두대간 솟구쳐서 송지호를 만들고
산바람 스쳐가다 갈대밭을 이루더니
소나무 늙은 가지에 세월 소리 흐릅니다
고등어 반 토막을 막대기에 매달아
바위틈 참게 잡는 사람을 만납니다
아뿔사! 살고 죽는 일 일순인가 합니다.
- 전현구, 「간성기행」 전문
전현구 시인은 1944년 원주 출생으로 당시 원주 교육청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미 『누군가 부르는 소리』『고사리 꺾다 심봤다』『울다가 웃다가』등의 수필집을 펴내고 있었다. 김은숙 회장의 추천으로 신인상에 응모했는데, 건강이 좋지 않아서인지 이후 나래 활동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였다. 당선작은 제목 그래도 간성 기행에서 보고 느낀 점을 시로 형상화한 작품인데, 달빛이 밤 새워 바다 품고 잠들다가 새벽에 연꽃 같은 아침 해를 떠올림을 자연의 자비로운 은혜로 해석한 점이나, 바위틈에서 참게 잡는 풍경을 보고 살고 죽는 일이 일순이라는 사유를 길어 올리고 있음에서 어느 정도 시적 자질의 가늠할 수 있다. 이 작품에 붙은 白水 선생님의 심사평은 두고두고 새겨 읽은 명문이다.
“시로 가는 길은 法이라는 길이요, 매사에 거스르지 않는 순리의 길이다. 이 길이 다하는 곳에 시의 성소(聖所)가 있고, 그곳에 다다라야 비로소 시의 진체(眞諦)인 진언(眞言)을 얻어 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시(詩)란 말씀(言)의 종교(寺)인 것이다. 말을 얻어내야 문자가 나오고, 문자를 얻어내야 문장이 나오며 문장을 다 일어내야 비로소 금싸라기(진언)가 나타나는 법이다.”
54. 제11회 나래시조문학상 시상
나래 제63호 《아직은 이별이라 말자》는 200.7.10 도서출판 ‘좋은날’에서 발간했다. 김은숙 회장의 “갈매기는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보고 있다”는 머리말이 앞머리에 실렸고, 이어 민병찬 시인의 소시집을 펼쳐진다. 이번 호부터 좀더 깊이 있는 편집을 위해 중견시인 순으로 집중 조명하는 ‘소시집’ 기획을 한 것이었다. 「아내의 바지랑대」외 13편의 작품에 “자성으로 뿌리는 사랑과 희망의 씨앗”이란 문무학 문학평론가의 평론이 실렸다.
기저귀 나폴거릴 땐
울음 가끔 찝어 널고
얼룩 옷 늘어날 때쯤
투정 자주 내 걸더니
지금은 통치마 곁에
내 한숨도 헹궈 넌다.
- 「아내의 바지랑대」전문
민병찬 시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씨’라는 낱말을 키워드로 문무학 문학평론가는 민병찬의 시세계를 매우 깊이 있게 조명하고 있다. 위의 작품은 ‘바지랑대’라는 매개물을 통해 아내의 일생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이고 있는데, 이 시편에서 우리는 시인의 아내 사랑이 지극함을 알 수 있다.「일요일」이란 작품의 셋째 수 초장 “한 주일 뎁힌 가슴 아내 빰의 다림질로”라는 표현에서도 아내에 대한 사랑을 더욱 절절하게 확인할 수 있다. 민 시인의 「딸을 보내고 2」는 딸을 시집보내는 아비의 심정을 절실하게 담고 있는 수작인데, 이처럼 시인의 시편에는 편편이 인간적인 정이 넘쳐난다. 시인은 “시조와의 만남과 동행”이라는 ‘시인의 말’에서 자신의 시조 활동 범위가 ‘나래’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면서 “시조가 나의 내면세계에 끼친 영향은 종교의 반열에 드는 든든한 지팡이 역할을 해 주었고, 내 정신 영역을 관류하는 큰 물줄기였음을 부인할 수 가 없다. 시조가 때로 거칠어지는 내 숨결을 가라앉혀 주었고 엉클어진 심혼에 가닥을 바로 잡아 주는 섬섬한 손길이었다. 흐려진 거울을 닦고 나 자신의 경대가 되어 주었다. 시정의 번잡하고 때묻은 장사꾼의 세계에 침잠해 있을 때, 더 이상의 수렁에 빠지지 않게 잡아주고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 안심입명의 도리에 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회원신작에는 24명의 회원이 참여했다. 제11회 나래시조문학상은 김인숙의 「겨울바다」가, 신인상에는 고성환의 「산촌일기2」가 올랐다. 김인숙 시인은 1985년 《현대시조》백일장 금상, 1988년 《시조문학》2회 천료로 문단에 데뷔하였는데, 누구보다도 나래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는 중견 시인이다.
멀어지는 연습을 위해
다시 찾은 겨울 바다
인적 끊긴 모래밭엔
끈적이는 인간 내음
악연도 이쯤에서는
숙연(宿緣)이라 부르리
넓어지는 연습을 위해
다시 찾은 이 바닷가
수평선 한 금 너머
몰려오는 파도소리
사람도 이쯤에 서면
한 알 모래 아닌가.
- 김인숙, 「겨울바다」 전문
남편은 술에 절어
대처로만 떠돌아도
올망졸망 자식들의
초롱한 눈망울에
선홍빛
희망을 걸어
밭을 메던 어머니.
- 고성환,「산촌일기 2」 둘째 수
신인상에 오른 고성환 시인은 필자와 문청 시절을 함께 보낸 시인으로 시, 소설, 수필 등 모든 분야에 재능을 가진 시인이다. 한국문인협회 문경지부 사무국장을 맡는 등 지역 문단에서 비교적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온 시인인데, 이번에 시조로 다시 등단 절차를 밟은 것이다. 그러나 다양한 장르에 참여해서인지 이후 시조 창작은 많이 부진한 편이어서 늘 아쉽게 생각하고 있다.
55.‘소시집’통한 작품세계 집중 조명
나래 64호 《내 마음의 떠돌이별》은 2001년 1월 26일 도서출판 ‘좋은날’에서 발간했다. “혼돈은 희망의 출발점이다”라는 머리말을 통해 “이제 문제는 작품의 질적인 향상과 함께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지속적인 창작 활동만이 바야흐로 도래하는 우리시 시조의 시대를 맞아 한 단계 발돋움하는 계기가 될 것”라며 “나래시조 동인들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시조문학의 길을 향해 한마음으로 묵묵히 걸어갈 것”을 다짐하고 있다. 그 동안은 회장이 머리말을 써왔는데, 이번 호부터는 ‘나래 동인 일동’이라는 이름으로 머리말을 싣고 있다.
푸른 하늘을 가로지르는
큰 말씀 녹이고도
솔바람도 몇 바디쯤
녹여서 앉은 맵시
귓속말
내줄 것 같아
무릎걸음 다가선다.
- 신후식,「청화백자」 전문
소시집은 신후식 시인을 집중 조명하고 있다. 신 시인은 1946년 문경 출생으로 경북도청에 오래 근무한 행정공무원으로 『조령산성』 등 다양한 향토 역사 사료집을 출간했으며, 『빈 마음』『두 사람』『밤하늘 별빛 하나』 『산울림에 지는 송화』 등 4권의 시조집을 출간한 중견 시인이다. 황인원 시인은 작품론에서 신후식 시인의 시편은 “인간성 회복을 지향하고 있고 그 기점은 동양적 사고에 있다”면서, “이러한 인간성 회복은 새로운 세계가 도래했지만 허구로만 이뤄진 세상에 동양적 세계관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진실의 샘물이 필요하다는 시인의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위의 작품 「청화백자」에 대해서는 “청화백자를 단순히 사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배움을 주는 지혜의 존재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는 세상의 모든 존재물은 생명이 있으며 그 생명으로부터 우리의 삶의 지혜를 들을 수 있는 대상이라는 시의식이다. 이러한 시의식은 동양적 세계관에 직접적으로 닿아 있는 것”이라고 평하고 있다. “네티즌의 시조세상”이란 제하의 ‘시인의 말’에서 “올해 <시조세상>이라는 시조 사이트를 개설하여 네티즌들에게 시조를 알리고 있다”면서 “청소년들이 이 <시조세상>을 통하여 우리 민족문학인 시조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시조의 저변으로서 우리의 문화를 일구어 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여 이 밤도 자판기를 두드린다”며 근황을 알려주고 있다.
김매는 호미 끝에 모질게 한 대 당한
뭉개진 종아리통 질질 끌고 절뚝이며
흙더미 후미진 곳을 파고드는 지렁이야
죽기보다 더 힘든 삶에 절은 내 영혼
모진 고통 참고 견딘 한 맺힌 엄숙한 너
자내 온 뒤안길 보며 너를 닮아 서러워라.
- 심칠성, 「土龍」 전문
신작특집에는 28인이 2편씩 참여하고 있는데, 새로운 얼굴로 심칠성 시인이 눈에 띈다. 심 시인은 1992년 충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울산시조시인협회 부회장으로 활동 중이었다. 초등교사로 오래 재직했으며 이미『세월에 서서』『솔씨의 생명』등의 시집을 펴낸 상태였다. 위의 작품은 김을 매는 호미에 몸을 찢긴 지렁이를 보면서 자신의 생을 뒤돌아보는 작품인데, 자신의 삶 또한 ‘죽기보다 힘든 삶’으로 몸을 찢긴 지렁이를 닮아 있음을 성찰하고 있다. 리강룡 시인의 <나래30년> 연재에는 1980년대 마감 부분과 1990년대 초반의 활동사가 담겨져 있고 <동정>에는 장세득 시인이 오랜 침묵을 깨고 다시 창작 활동을 시작하였다는 소식이 반긴다.
나래시조 제65호 《그 섬에 눈이 내리네》는 2001.7.28 <도서출판 문학과청년>에서 발간됐다. “문학인들이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머리글은 혼란한 정치상황과 고은의 미당 비판, 소설가 이문열 비판 등의 사회적 혼돈 속이지만, “나래인들은 늘 깨어 있는 정신과 식지 않는 열정, 남의 의견을 존중하는 겸손한 자세로 알찬 결실을 맺어 가는 문학의 길을 걸어갈 것”을 다짐하고 있다.
늦은 밤 돌아오는 길 동작대교 차창 너머
잠 깊은 강물 속에 빠진 불빛 너무 곱다
내 꿈도 저승에 잠들면 이승만큼 고울까.
- 정완영, 「이승의 풍경화-강물에 빠진 불빛」 전문
초대시로 白水 선생님의 「이승의 풍경화」가 실렸다. 쉬우면서도 시적 깊이를 놓치지 않으시는 백수 선생님의 시편이 너무나도 곱게 다가온다. 이어 박재숙 시인의 ‘시가 있는 산문’ 「고향 서라벌이여」가 실렸다.
나는 그때 보았다 남천대 물소리를
나는 그때 들었다 반월성 햇살 한 줌
그 옛날 영락에 빛나던
그 바람 한 올까지
황룡사 빈 절터를 흘러 온 전설 시린데
임해전 전각 위로 수양버들 늘어지며
안압지 깊은 물 속에
그때 그 달이 뜬다.
이럴 때 내 몸 속에 흐르는 여왕의 피
자존의 강으로 흐른 영혼 영원히 대를 이으리
이 순간 하나가 된다
순간 속에 합일한다.
- 박재숙, 「영원까지」 전문
박 시인은 시조 작품도 우수하지만, 소설에 오랫동안 매달려 관계로 산문 또한 깊이와 격조를 지니고 있다. 시인은 자신의 고향에 관한 시조 작품을 통해 고향 서라벌에서의 유년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그 때 그 하늘은 왜 그리 푸르르고 바람은 왜 그리 상큼 했을까. 숲은 어찌 그리 향기롭고 물맛은 또 왜 달기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디 그분입니까. 우리들은 뭘 믿었는지 꿈은 애드벌룬처럼 부풀었습니다. 대중성과 문학성을 두루 갖춘 소설을 쓰겠다고 큰소리치던 그 패기 어디로 가고 나는 어디로 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라며 때묻지 않은 유년시절의 꿈과 오늘의 어려운 현실을 아프게 그려 보이고 있다.
신작특집에는 27명이 참여했고, 제12회 나래시조문학상 수상작과 강숙려, 우중근의 나래시조 신인상 당선작이 실렸다. 나래시조문학상 수상자인 이상진 시인의 작품 세계는 리강룡 시인이 썼다.
사철의 빛살들을
뜨락 가득 쓸어 담아
생인 손 앓으시듯 걸어오신 긴 여정을
이제는
내려놓으소서
벽오동 푸릉 그늘에.
무명베 오지랖에
빈 마음 채우시며
피와 살 삭아 내린 앞 뒤 들 사래마다
가없는
모정의 세월
뼈에 새겨 아픕니다.
어머님 불러보면
가슴 가득 메어오고
앓아 눕는 신열인양 몸조차 가눌 길 없어
내 오늘
엄동의 설야
뜬눈으로 지샙니다.
- 이상진, 「사모곡」전문
이상진 시인은 1958년 고흥 출생으로 1980년대 중반 나래에 몸담아 나래시조 주간을 맡는 등 묵묵히 나래시조에 봉사해온 시인이다. 특히 남다른 향학열로 뒤늦게 경북대에서 경영학 박사과정을 이수했으며, 한국품질경영연구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품질경영’과 관련해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등 맹활약을 하고 있다. 그런 바쁜 사회활동으로 시조 창작이 부진해 필자는 늘 아쉽게 생각하고 있다. 리강룡은 시인은 “섭리에 대한 예찬과 서편제 정서의 거리”라는 제목 아래 1) 향수의 시편과 서편제 정서, 2)흔들리는 세월 한 잎, 3)산,꽃,물,새, 4) 순수로 갈무리하여 소망을 누리는 일상, 5)사모곡 등 크게 다섯 영역으로 나눠 “그의 첫 시집은 ‘예찬 시집’이라 할 만 하다. 그는 서편제의 고향 남도 땅에서 나고 자랐다. 그의 「사모곡」같은 작품은 바로 서편제의 가락에 익숙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로맨티스트이다. 자유분방의 폭은 넓지 않더라도 곳곳에 진한 낭만이 깃들여 있다. 그러나 그의 시는 서편제의 유연성은 갖추었으되 계면조의 애절함은 절제되어 있다. 눈물보다는 밝고 건강한 쪽이며, 시작태도는 신의 섭리에 순응하며 그 솜씨를 찬양하는 쪽이다”라고 시세계를 선명하게 요약하고 있다.
리강룡 시인의 <나래30년>은 “39) 반년간 첫 출발의 의미, 40)불혹의 시대를 마감하며, 41) 지령 50호 기념 특집의 풍경. 42) 또 한 번의 도약을 위하여”로 이어지는 1990년대 초반의 활동사인 통권 47호에서 51호까지를 정리하고 있다.
고와라
예뻐라
저리도 아름다워라
날마다
일흔 번에 일곱 번씩 말하다 보면
어느새
이 세상 천지
꽃들 가득 피겠네.
- 강숙려, 「꽃세상 만들기」 전문
신인상을 받은 강숙려 시인은 진주 출신으로 캐나다에서 살고 있는 시인으로 이미『그리움은 안개로 뜨고』 『안개의 불』 『곁에 있어도 그리운 우리는』 등의 자유시집을 출간한 기성 시인이다. 당선작도 그렇지만, 강 시인은 특히 단수시조에 재능을 보여주고 있다. 우중근 신인도 『그대가 그리울 때』 『산은 산이 주인이고 물은 물이 주인이다.』라는 자유시집을 출간한 기성시인인데 이번에 시조 시인으로 다시 등단한 것이다.
56. 6년 동안의 대장정, “나래30년”연재 마쳐
나래 제66호 《가슴에 남은 웃음》은 2002년 1월 24일 도서출판 알토란에서 출간됐다. “우리를 향하는 문학운동”이란 머리글을 통해 나래의 활동 방향을 선명하게 밝히고 있다.
“오늘날 전국 규모의 순수 동인 활동을 펼쳐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전문지를 표방한 대다수의 문예지들마저 생존을 위해 자신들이 배출한 문인들의 발목을 잡고 동인지로 전락한 상태인데다 도별 또는 지역별 문학단체들의 비교적 넉넉한 재정으로 지역 단위 의 문학 활동에 갇혀 버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지역주의를 심화시켜 전국단위의 문인 상호간 이해의 폭을 좁히는 등의 부정적인 요소가 적지 않다. 이러한 현실에 따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나래시조는 전국 단위 동인 활동의 전통을 묵묵히 이어가고 있다. 너와 내가 아닌 ‘우리’를 향하는 통합의 문학 운동이라고나 할까. 그러기에 나래는 그 동안도 그래왔듯이 문단 내의 편가르기나 지역주의로부터 벗어나 순수성을 지켜나갈 것이다. 나래의 희망은 바로 여기에 있다.”
초대시로 정완영 선생님의 「평창 가는 길」이 실렸고, 리강룡 시인의 소시집이 꾸며졌다. 시지프의 바위 1외 14편의 작품에 이정환 시인의 “초달을 마다 않는 기품의 시인”이라는 평론과 자신의 문학관을 담은 “삶의 길, 문학의 길”이란 시인의 글이 실렸다.
적막한 풋목에서 바람 앞에 부대껴도
떼지어 손 흔들면 신명나는 우리 자리
달뜨면 문득 일어나 짓을 일도 있단다.
- 리강룡, 「자리1-강아지풀」 전문
인적 없는 이 갯가에 내가 홀로 선다 해도
진분홍 꽃 등불을 적요의 뜰에 높이 달고
한 생애 가시 끝을 버리어 나를 초달하리라.
- 리강룡, 「자리 18- 해당화」 전문
이정환은 작품론에서 “이 서러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시인으로서, 한 사람으로서 그의 견실한 자세의 일단을 잘 보여주고 있는 시편이다. 부단히 자신을 초달한다는 것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내적 성찰을 게을리 하지 않으리라는 결의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 생애 가시 끝을 벼리어 나를 초달한다는 것’은 자신을 끊임없이 치는 일이다. 그리하여 안으로 도사리고 있는 악한 것들과 부정과 불의에 대적하여 종내 그를 쓰러뜨리고 올곧은 삶을 견지하고자 하는 강인한 의지를 내비치고 있는 것”이라며 리강룡 시인의 초달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리강룡 시인은 시조와 평론 모두에 뛰어나지만, 동인 활동 면에서 후배들의 귀감이 되는 참교육자요, 꼿꼿한 선비 시인이다. 바쁜 교직생활 속에서도 늘 작품의 질적인 면에 집중하면서 동인활동의 세세한 부분까지 관심과 배려를 아끼지 않고 있는 것이다.
‘시가 있는 산문’에는 박주익의 「다산초당 기행」이 실렸고, 신작코너에는 27명이 참여했다. 1961년생으로 전남대 법대를 나온 박 시인은 소방서에 근무하고 있는데, 전남 강진 출생으로 특히 강진의 문화 창달에 다양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시인이다.
리강룡 시인이 6년 동안 집필해온 ‘나래 30년’ 마지막 회가 실렸다. 그 대장정의 마무리 감격을 시인은 이렇게 적고 있다. “나래사의 원고를 뒤적이며 지나온 6년! 그 동안 바쁜 일상과 원고 마감의 틈바구니에서 숨가쁠 때마다 ”이번 호 한번쯤은 걸러볼까“하는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울 때가 적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이제 열세 번의 연재를 끝으로 창회 30년(1966~1996) 동안의 나래, 나래인, 나래 동인지의 걸어온 길을 더듬는 작업에 마침표를 찍으려 한다.” 리강룡 시인의 쓴 ‘나래 30년’은 단순한 흐름의 정리가 아닌 30년 동안 발표된 주요 작품을 평론 수준으로 정리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깊다. 작품을 논할 때는 냉철한 평론가의 관점을 잃지 않았으며 인물을 그릴 때는 무척이나 따뜻하고 끈끈한 동지애를 글 속에 담아냈다.
나래 67호 《슬픈 손》은 2002년 8월 19일 도서출판 알토란에서 출간됐다. “한편의 시조 같은 월드컵 신화”란 머리말에 이어 白水 선생님의 「김포시초 1」 신작이 실렸다. 소시집에는 박필상 시인이 특집으로 꾸며졌는데, 「손을 씻으며」외 14편의 작품이 실렸다. “시조는 시다”라는 ‘시인의 말’과 “빛의 축제 푸르른 승천의 꿈”이란 제목의 이종문 시인의 평론이 실렸다.
오늘도 어제처럼
슬픈 손을 씻는다
비릿한 세상 때로
더럽힌 마디마디
씻어도 오염이 되는
슬픈 손을 씻는다.
움켰던 주먹 펴면
균열의 강이 울고
우우우 일어서서
흩어지는 바람 바람.
모두 다 쓸려간 뒤의
갯벌 같은 이 고적(孤寂).
오늘도 어제처럼
슬픈 손을 씻는다.
거칠고 분별없는
욕망의 쇠갈쿠리,
비워도 되채워 있는
슬픈 손을 씻는다.
- 박필상, 「손을 씻으며」 전문
박필상 시인은 1950년 의령 출생으로 부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시인인데, 1981년 나래시조와 인연을 맺은 이후 누구보다도 열심히 문학 활동을 해왔다. 『나를 찾아서』『꿈꾸는 바람』『광대』 등의 시조집을 출간했으며, 부산시조시인협회 사무국장으로 맡기도 했다. 그러다 IMF 이후 어려워진 경제사정에 창작 활동도 영향을 받아 요즘은 나래시조 활동에도 참여가 뜸한 상태다. 박 시인은 필자가 이제 막 시조에 입문할 무렵 이미 상당한 궤도에 오른 상태여서 필자에게 창작에 관한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려준 시인이다. 위의 작품에서 알 수 있듯 박시인의 시세계는 암울한 현실, 혼탁한 세계를 극복하려는 자기 정죄와 현실 초극의 의지로 집약된다. ‘손’은 우리의 ‘거칠고 분별없는’ 욕망을 상징한다. 시인은 이러한 어쩔 수 없이 더렵혀진 손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면서 ‘오늘도 어제처럼’ 손을 씻고 있는 것이다. 손을 씻는 행위는 자신의 마음을 씻는 정죄(淨罪)의식에 다름 아니다. 그만큼 맑은 영혼을 지키려는 순결 의지가 강하게 표출되고 있다. 이러한 정죄의식과 순결 정신으로 시인이 마침내 이르고자 세계는 새봄의 축제와 같은 세계이다.
광대는
혼을 쏟아
피리를 불었다.
광대는 몸을 사뤄
불춤을 추었다.
마침내
광대는 죽고
세상은 온통 빛의 축제.
- 박필상, 「봄비」 전문
이 작품은 제1회 직지사 시인학교 때 멋진 현대 가요로 작곡되어 발표되었는데, ‘시인은 광대’이며, ‘시는 광대가 벌이는 굿판’이라는 시인의 문학 사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종문은 이를 “봄비가 자기 스스로의 육신의 소멸을 통하여 온 천지를 뒤덮는 축제를 벌이듯이, 시인은 마침내 자신의 생명을 바침으로서 지상적 삶의 구체적인 현실 속에 ‘온통 빛으로 이루어진 축제’를 꿈꾸고 있다”면서 “이는 그의 의식의 지향점이 대단히 건강한 시인임이 분명하며, 이것만으로도 그의 시는 우리의 가슴을 흔들어준다”고 평했다. 아무튼 박필상 시인이 다시 나래의 무대로 돌아와 새봄의 축제를 마음껏 펼쳐주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가슴, 허기진 날은 그냥 길을 나서자
은혜처럼 번져오는 따슨 햇살 받으면서
찌든 삶 겨운 넝마는 훌훌 벗고 떠나보자.
그래, 사랑이란 감미롭고 눈부신 거지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그 노래 흥얼거리며 묵은 체증 날리는 거야.
달빛, 고요할 쯤엔 발길 한 번 멈추는 거지
그러다 떠오르는 이름 석 자 불러보면
오래 전 만났던 그 별빛 문득 반짝이잖아.
- 신진식, 「그리움 15」 전문
제13회 ‘나래시조문학상’은 신진식 시인에게 돌아갔다. 1961년생인 신 시인은 약관의 나이에 《한국문학》 전국 대학생 문예에서 장원을 한데 이어 20대 초반인 1983년 민족시 백일장 장원과 《시조문학》 천료를 통해 문단에 나온 시인이다. 그만큼 그는 일찍 자신의 시적 역량을 과시했으며, 나래시조에 들어와서도 젊은 시인으로서 총무를 맡아 봉사하는 등 매사 열심이었다. 그러던 그가 공인중개사 유명 강사로 두각을 드러내면서 자신의 말대로 ‘눈코 뜰 새 없는’ 유명세를 치루게 됨에 따라 시조 창작에 거의 시간을 투자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나래뿐 아니라 시조단 전체로도 큰 손실이요, 아쉬움이라 할 것이다. 리강룡 시인은 작품 세계를 논하면서 “열네 편의 ‘그리움’을 골똘히 감상”해 보면, “비유를 위하여 적절히 가져다 쓴 보조관념하며, 그 절절한 서정하며, 그리움이란 추상적인 제재를 다루면서도 관념의 세계에 머무르지 아니한 시를 짜는 능력, 그리고 시어를 조탁하는 능력 등이 어느 한 작품도 그냥 지나치기 어려움을 발견하게 된다”면서, 수상작인 이 작품도 “ 사랑과 희망을 잃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여유를 가지고 한 걸음 물러서서 느긋하게 세상을 바라볼 것’, ‘누가 뭐라 해도 세상에서는 사람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할 것, ‘이상을 잃지 말 것’ 등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그러나 그 교시의 기능을 수행함에 있어 윽박지르지 않고 속삭이듯 낮은 톤으로 독자에게 다가오고 있다”고 칭찬을 아기지 않았다.
2002년 ‘나래시조신인상’에는 황봉학, 강신숭 두 시인이 올랐다. 황봉학 시인은 이미 사랑시집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말』을 출간한 바 있고, 인터넷상에서 활발한 문학 활동을 펼쳐와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시인이다. 이제 시조 장르로 영역을 확장한 것인데, 신인 당선작인 『파계사에서』도 상당히 안정된 보법으로 남다른 서정을 우려내고 있다.
청동 운판이 울면 새들도 둥지를 튼다
삭발한 은행나무에 얼기설기 둥지를 튼
한 가족 까치 네 마리 옹기종기 정답다.
스님은 목어를 치고 잉어는 꼬리를 친다
살얼음 얼기 시작한 초겨울의 연못가엔
물안개 자욱히 일어 추운 줄도 모른다.
겨울 달빛이 살며시 팔공산에 떠오른다
시린 바람은 춤사위로 법고에 울고
세상의 모든 짐승들 겨울밤이 따습다.
산 아래 속세에서 하나 둘 등불이 켜지고
산 깊은 파계사에서 범종이 울려온다
고되고 지친 마음들 종소리에 묻힌다.
- 황봉학, 「파계사에서」전문
57. 계간 시조전문지로 전환과 신예 시인 영입
제68호를 기점으로 《나래시조》는 시조전문지로 전환하고 일대 편집 혁신을 단행했다. “나래시조는 1980년 창간시의 정신으로 돌아가 새로운 개념의 시조전문지 형태로의 발전적 개편을 단행합니다. 공정성과 객관성을 확보하여 명실상부한 시조전문지로 거듭나겠습니다.”며 후기에 시조전문지로의 전환의 변을 담고 있다. 1993년 제48호부터 반년간지로 전환하여 작품의 내실을 다져온 《나래시조》는 10년 만에 다시 동인들의 숙원이었던 창간 당시의 발간 주기인 계간지로 거듭난 것이다. 계간지로 전환하면서 잡지의 성격도 ‘동인지’에서 ‘시조전문지’로 완전 탈바꿈했다.
《나래시조》의 시조전문지로의 변신은 시대 변화에 부응하는 또 하나의 도전이었다. 시조전문지로의 전환 의미를 살펴보면 첫째, 문학단체라는 공조직에서 객관성 있는 시조전문지를 발간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개인이 아닌 문학 단체가 갖고 있는 열린 시스템과 편집과 운영에 있어 상업 문예지가 갖는 폐단을 견제하고 해결할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는 것이다. 요즘은 개인이 운영하는 문예지들마저 자신들의 상업적 시장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문예지 출신들을 모아 동인 단체를 결성하고 있는 실정이지만, 이는 선 문학 단체를 결성해 기반을 다진 뒤 공적 시스템 위에서 문예지를 발간하는 것과는 개념 자체가 완전히 다른 것이다. 둘째는 시조문학 운동을 좀 더 폭넓게 펼쳐 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상업적 이윤 추구가 아니라 시조문학의 위상 확보 측면에서 다양한 기획과 활동을 추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래시조》는 한국 시조단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수행하는 의무와 책임을 지니게 된 것이다.
《나래시조》가 계간 시조전문지로 전환하면서 첫 번째로 추진한 기획이 김천 직지사에서 “우리 민족시 시조를 읽고 쓰자!”라는 슬로건 아래 “시조사랑, 직지사 여름 시인학교”를 주관한 것이었다. 직지사 녹원 큰 스님과 백수 선생님 간의 각별한 정리와 당시 새로 부임한 주지 자광스님과의 인연으로 직지사 여름 시인학교 개최가 이뤄질 수 있었다. 「‘시조사랑’ 제1회 직지사 여름시인학교」라는 제목 아래 모든 시조시인들과 시조를 사랑하는 모든 독자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시조문학의 여름 대축제”개념으로 그 활동 방향을 잡고, 주요 행사는 1)창작 강좌, 2)시조암송대회, 3)시조를 노래로 작곡해 공연하는 시노래 공연, 4)시조백일장, 5)문학기행이라는 영역으로 구성했다. 이와 함께 참가자 전원에게 소정의 참가비를 받는 원칙을 세웠다. 문예진흥기금이나 지자체의 지원에 의해 이뤄지는 행사가 아니라 말 그대로 나래시조에 의해 자생적으로 개최되는 문학 축제행사인 만큼 재정적 자립 의지가 그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다소 모험이 아닐 수 없었지만, 참가비 부담은 수익자부담 원칙에 그대로 밀고 나갔다. 필자가 행사 전체를 총괄 구상하고 추진하는 당사자로서 하루하루가 피를 말리는 어려움이 뒤따랐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첫해 행사임에도 150여명의 참가자들이 참가해 성황을 이루었고, 모든 진행은 계획대로 진행되어 참가자들로부터 ‘너무나 좋은 프로그램’이라는 호평을 받는 행사로 마무리되었다.
시조전문지로 거듭나면서 또 하나 중요한 기획은 ‘시조와 묵향의 만남전’이었다. 회원의 시조를 서예작품으로 만들어 나래시조에 싣는 기획인데, 첫 작품은 白水 정완영 선생님의 시조 「사란(思蘭)」을 서예가 우치 손태원 시인께서 서예 작품화하였다.
본문 편집은 리강룡 시인의 ‘시가 있는 산문’을 앞머리에 배치하는 다소 파격적인 편집으로 시작했다. 신작 초대 코너에는 시조단의 정예시인 7명의 신작을 실었고, 새로 가입한 신예 임성화 김조수 곽홍란 박희정 이근덕 손태원 등 6명 시인의 특집을 꾸며, 필자가 “여섯 빛깔의 개성 찾기”라는 평론을 붙였다.
철없이 익은 사랑 갈참나무 불태운다
노을빛 젖어들어 활활 타는 그대 생각
갈꽃은 안테나 세워 임의 소식 꿰어 운다.
어둠이 잦아들면 별로 뜨는 그리움
밤새 물소리 길을 잃고 시름 앓다
새벽녘 창가에 와서 하늘 한 장 내민다.
- 임성화, 「가을연가 2」 부분
임성화는 199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이다. 건강한 서정과 뛰어난 감성으로 신춘 당선작을 표제시로 한 시집 《아버지의 바다》를 펴내고, 울산에서 어린이시조 지도에 남다른 열정을 쏟고 있다. 「가을연가 2」에서 알 수 있듯 감상에 젖지 않는 부드러운 감성으로 그의 상상력은 가을 숨소리까지 손에 잡힐 듯 꿰어내고 있다. “밤새 시름 앓다” “새벽녘 창가에 와서 하늘 한 장 내민다”는 구절은 특히 돋보이는데, 녹록치 않은 서정의 깊이로 안정된 보법이 빛을 발하고 있다.
멀어지는 뭍이여 이승 끝의 살붙이여
불혹 넘은 가장의 어깨 첫 바다를 걸머멘다.
뱃머리 닻을 올리며 억센 파도를 껴안는다.
해역을 밭으로 일궈 그물질을 해 본다
땅 위의 삶보다 더 맵고 짠 소금빛 나라
노동의 비늘이 되어 현란하게 반짝인다.
고향에 두고 온 손짓 선잠을 흔들어댄다
손톱의 초승달 무늬 다시 돋는 그리움은
칠흑의 어둠 속에서 하얀 포말로 부서진다.
푸득푸득 내 새끼 은갈치 금조기들
너희들 빛난 생애 세상 어귀 내걸릴 때
희생이 사랑인 줄을 사람들은 몰랐다.
- 김조수, 「처녀출항」 전문
김조수는 중앙시조백일장 연말 장원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바꾼 첫해인 2000년에 당선한 시인이다. 김 시인은 신인문학상 당선 그 자체로도 시적 자질을 충분히 평가받은 셈인데, 당선작 「처녀출항」에 대해 “밀도 높은 작품으로 전반적으로 무게가 실려 있다”“억센 파도와 맞닥뜨리는 결연한 의지가 잘 녹아 있다”며 심사위원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바다를 끊임없이 부대끼는 삶의 현장으로 인식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 시인은 생의 뼈저린 아픔과 곡진함을 맛 본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가슴 울리는 절구를 건져 올린다. 이후 김 시인은 남다른 선비정신으로 고풍스러우면서도 매우 현대적인 시세계를 개척해나가고 있다.
처용의 달을 안고 즈믄 바다 찾아 간다
깨어진 복사뼈로 곤두박힌 질경이풀만
무너진 언덕 괴면서 피돌기로 잇던 섬.
속살 찢어 일구던 땅 푸른 싹 언제 돋을까
희미해진 눈 비비며 북극성 불러와서
파도는 잠들 수 없는 빈 새벽을 깨웠다.
톡톡 튀는 포말 앞에 짙붉게 타는 동백
수평선 끌어당기면 어둠도 부서지고
먼 하늘 가로질러서 천궁을 퍼올렸다.
보길도 비탈마다 돌아갈 길 열어 놓고는
조선의 검은 깻돌 자르르 물살에 굴려
서늘한 무명의 아침 씻어 널고 있었다.
- 곽홍란, 「보길도 시편」전문
곽홍란은 200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시조 문단에 나온 시인이다. 1997년 매일신문에 동시가 당선되어 《글세, 그게 뭘까》라는 동시집도 펴냈는데, 아동문학과 극시, 시낭송 등의 분야에서 남다른 재능을 드러내고 있다. 신춘문예 당선작인 위 시는 늦은 저녁 보길도라는 공간적 섬에 당도하여 새벽을 거쳐 새아침을 맞는 시간적 과정으로 이어져 있다. ‘달, 즈믄’의 밤 이미지가 ‘북극성, 어둠도 부서지고’의 새벽 이미지를 지나 ‘서늘한 무명의 아침’으로 열리고 있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캄캄한 밤이 주 배경이지만, ‘달’과 ‘피돌기’, ‘포말’과 ‘동백’ 등과 같은 흰색과 붉은 색의 대비는 이미지의 단순화를 막아주고 있다. 셋째 수의 수평과 수직적 이미지의 충돌도 그러한 시각적 이미지를 더욱 강화시킨다. 다가서는 ‘수평선’과 이를 가로질러 일어서는 ‘천궁’의 수직적인 이미지의 충돌은 강한 인상을 남긴다. 이처럼 시인은 치밀한 구조와 이미지의 배치를 통해 시적 긴장을 지속적으로 강화시켜 나간다. 보길도를 통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깨인 역사의식이다. 유배의 섬으로 상징되는 보길도는 우선 그에게 ‘깨어진 복사뼈로 곤두박힌 질경이풀’들이 ‘무너진 언덕을 괴면서’ ‘피돌기’를 하고 있는 아픈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런 역사이기에 ‘잠들 수 없어’ ‘파도’가 ‘새벽을 깨우’는 것이며, ‘튀는 포말 앞’에서 ‘동백은 붉게 타’는 것이다. ‘먼 하늘 가로질러서 솟구치는 천궁’도 그러한 의식의 역동적 표출에 다름 아니다. 어둠을 지나고 새날을 맞는 깨어남을 통해 보길도는 이제 열린 역사의 섬으로 환생한다. 보길도는 이제 사방으로 ‘열린’ 섬이 되어 마침내 멍든 ‘조선’의 역사까지 깨끗이 씻어 준다. 여기에서 우리는 희망을 일궈 가는 곽홍란의 시세계를 만나게 된다.
말보다 깊은 기억 바랑에 가득 채워
보이지 않는 그곳, 뜬눈으로 올라간다
끝없이 타는 목마름 발길마다 밟으며
한 걸음 내딛으면 또 다가서는 생의 갈증
기어이 넘어야할 불혹의 기나긴 고비
바래고 주름진 흔적 혈흔으로 남는다
난타 당한 푸른 수액 꽃가지에 동여매고
맨발로 계단을 건너 당도한 세월의 길
렌즈 속 흔들리는 구도, 돌아서서 지운다
삭정이 성긴 힘줄 안으로 삭혀두고
막막한 저 발자국 정수리에 또 새길까
지워도 뚜렷이 남는 육면체를 꿈꾸며
- 박희정, 「흔들리는 구도」 전문
박희정은 2002년 대한매일 신춘문예 당선으로 문단에 나왔다. “열병처럼 쏟아지는 언어들을 모아 몸짓으로 풀어보리라. 때로는 단아하게 또 유장하게”라는 다짐처럼 그의 작품에는 신인다운 패기와 참신함이 우러난다. 박희정은 불혹의 고갯마루에 서서 ‘보이지 않는’ 새로운 길을 탐색한다. 고뇌와 방황의 젊음을 지나 인생의 절정기, 비로소 생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되는 나이가 불혹(不惑) 아닌가. 누구나 이쯤에 서면 지난날에 대한 회한이 없을 수 없다. 불혹에 이르는 길은 ‘맨발로 계단을 건너’와 ‘혈흔이 남아 있는’ ‘바래고 주름진’ 그런 힘든 길이다. 하지만 시인은 ‘한 걸음 내딛으면 또 다가서는’ 그런 생에 대한 갈증을 가슴에 안고 ‘불혹의 기나긴 고비’를 넘고 있다. 그러나 렌즈 속으로 돌아본 세상은 여전히 흔들리는 구도 속에 놓여 있다. 그런 지난날과 이제는 결연히 결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미혹함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서는 불혹의 길목이기 때문이다. 그럼 점에서 이 작품은 첫째 수에 제시되고 있는 바처럼 삶에 대한 강한 희망과 새로운 다짐으로 모아진다. ‘타는 목마름’을 ‘발길마다 밟으며’ ‘보이지 않는 그곳’을 향해 ‘뜬눈으로 올라가’는 강한 의지를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 지향점은 ‘지워도 뚜렷이 남는 육면체’로 상징된다.
우리의 고운 만남 하늘이 내린 선물
그 선물 소중하게 속내 깊이 간직하여
영원히 아름다웁게 곱게 피게 하리라.
- 이근덕,「고운 만남」첫째 수
맺을 땐 머금은 듯 몽실몽실 수줍더니
활짝 핀 고운 자태 어여쁘고 정결해라
녹줄기 빠알간 꽃잎 노랑나비 흰나비.
- 이근덕,「수선화」첫째 수
이근덕은 2002년도 《문학세계》에 「고운 만남」외 4편이 추천되어 문단에 나왔다. 현재 고령군청에 재직 중인데, 매사 인간적 정리가 깊고 열정이 뜨거운 시인이다. 「고운 만남」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에 대한 연가다. 소중한 만남이기에 보석처럼 더욱 빛을 발하는 사람으로 아껴 광영의 길을 함께 하겠다는 소망과 다짐을 담고 있다. 시인은 그 만남을 ‘하늘이 내린 선물’로 인식하며, ‘영원히’ 만남을 꽃피우겠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 삶에서 ‘만남’만큼 소중한 것이 또 있을까 싶다. 「수선화」는 북풍설을 견뎌내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수선화를 찬미하고 있다. 수줍음을 ‘몽실몽실’로 표현한 것이나 ‘빠알간 꽃잎’에 나울대는 ‘노랑나비 흰나비’ 등의 구절은 손에 잡힐 듯한 생동감을 안겨준다.
어슬렁 뒷짐 지고 숲 속 길로 접어든다
가다가 걸음 멈추고 가쁜 숨결 고르는 듯
병중작 칠십일과(病中作七十一果)여! 맥박소리 들린다.
흙마당 슬다 남은 비질자국 보이는 듯
새하얀 아가손이 쓰다 멈춘 낙서인 듯
다가온 계곡 물소리 문득 끊긴 저 정적.
꽃도 잎도 다 시들어 빈 대궁만 남은 가을
얼마나 깊었던가 잠겨버린 하늘 위로
동동 뜬 낙관이 하나 늦잠자리 앉아 있다.
- 손태원, 「판전 앞에서」셋째 수
손태원은 2003년 농민신문 신춘문예에「판전(板殿) 앞에서」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한 시인이다. 울산에서 ‘간송서실’을 운영하는 서예가인데, 이번에 시인으로 다시 등단한 것이다. 이 시는 추사 김정희 선생이 쓴 현판을 시적 소재로 삼고 있다. 서울 강남 봉은사 경판전에 전해오는 이 현판에는 어른 몸통만한 크기로 ‘판전(板殿)’이란 글씨가 쓰여져 있는데, 이 글씨는 고졸함의 극치를 이룬 필체로 평가받고 있다. 마치 어린아이가 써 놓은 글처럼 어떤 꾸밈이나 가식이 없는 고졸의 경지에 이른 작품이라는 것이다. 板殿이란 글자 옆에는 칠십일과병중작(七十一果病中作)라 쓰여져 있는데, 추사가 71세의 병든 몸으로 글씨를 썼다는 뜻이다. 이 현판을 쓴 후 추사는 사흘 만에 세상을 떴으니 그의 종필(終筆)인 셈이다. 추사의 작품을 시적 소재로 삼은 것은 서예가 시인으로 자연스럽다 할 것이다. 첫째 수에서 ‘어슬렁 뒷짐 지고’의 도입은 그 어떤 원숙한 경지로 들어섬을 암시한다. 그렇게 유유자적하며 숲 속 길로 들어 선 시인에게 가쁜 숨을 몰아쉬게 만든 것은 ‘칠십일과병중작(七十一果病中作)’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현판이다. 순간 시인은 71세의 병환 중에 있던 대서예가 추사의 거친 맥박소리를 듣는 듯한 격정에 빠져든다. 둘째 수에서 시인의 초점은 ‘板殿’이란 글씨로 옮겨간다. 언 듯 보기에 ‘비질자국’이 보이는 듯하고, 어린 아기의 ‘낙서’같기도 한 필체의 ‘板殿’이란 글씨에 강한 충격을 받는다. 고졸함의 극치에 이른 글씨 앞에 선 예술적 충격이다. 시인 자신이 서예가이기에 감동은 더욱 컸을 것이다. 그 깊은 경지의 예술세계에 몰입하게 되자 세상의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적 속으로 빠져든다. 고졸한 예술적 아름다움에의 몰입을 이 이상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쓸다 남은’과 ‘쓰다 멈춘’ 같은 수식어는 글씨의 고졸함을 더욱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삼라만상이 다 멈춘 듯한 ‘정적’이지만 그 속에서는 뜨겁게 용솟음치는 에너지가 느껴진다. 그런 점에서 종장의 ‘문득 끊긴 저 정적’이 환기시키는 효과는 무척 크다 할 것이다. 셋째 수에서 시인은 초점을 뒤로 물리면서 감동을 현실 세계로 끌어온다. 깊을 대로 깊어진, 계절로서 고졸의 경지에 이른 가을 하늘에 현판을 오버랩 시켜 시상을 더욱 심화시킨다. 비로소 ‘판전’ 글씨로 인해 그 동안 눈에 들어오지 않던 낙관이 비로소 떠오른다. 그런데 가을 하늘 위에 동동 떠오른 낙관 위에 늦잠자리가 한 마리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아, 이 수습할 수 없는 무위(無爲)의 경지여! 가식도, 욕망도, 기교도 없는 텅 비워 가득 찬 추사의 정신이여!
58. 매 호 거듭나는 편집의 혁신
《나래시조》 제69호는 2003년 6월 15일 도서출판 알토란에서 발간됐다. 계간 시조전문지로 바뀐 뒤 두 번째 발간하는 문예지다. 후기에는 “혁신호에 보내주신 격려에 깊이 감사드린다”며 “자기 혼자만 만족하는 문학이 아닌 현대시로서의 위상을 확립하고 독자와 함께 하는 시조문학 활동을 더욱 전개해나가겠다”는 다짐을 싣고 있다. 오민필 회장의 “직지사 여름 시인학교를 열며”라는 권두칼럼에 이어 제14회 나래시조문학상 및 신인상 발표가 있다. 나래시조문학상 수상자는 신동익 시인으로 결정되었고, 신인상에는 조동권, 최광일, 최재관 시인이 올랐다. 신동익 시인의 작품 세계는 “농선(農禪)의 삶, 깨달음의 시학”이란 제목으로 필자가 썼다.
입동은 달음박질로 빈 들녘 가로질러 온다
하늘을 시위로 당겨 등극하는 노란 참외
저기 저 할머니 천식도 묻어오느니 콜록콜록
이번엔 가까이서 연발의 따발총소리
숨 멈췄다 몰아쉬는 아버님 겨울 기침
감전된 기억, 古稀가 절절 절 절려온다.
선친께서 그랬듯이 모과 따다 앉히고
얇게 썰어 꿀에 재고, 뚝뚝 썰어 술 담근다
따끈한 모과향 짙은 그리움 환한 두 얼굴.
- 신동익, 「모과단상」전문
신동익 시인은 비교적 늦은 나이에 등단했지만, 남다른 부지런함으로 시밭을 일궈 2000년 두 권의 시집을 동시에 출간하는 놀라운 시력을 보여 주었다. 첫시집 《초강지처》가 공직생활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20여 년 동안 농축산업을 영위해오면서 온몸으로 얻어낸 시편들이라면, 두 번째 시집 《신불산 바람소리》는 그가 뿌리내리고 살아온 고향산천과 가족에 대한 따뜻한 사랑을 노래한 시편들로 구성되어 있다. 타고난 시적 감각과 남다른 직관력으로 그의 시는 보통 사람이 쉽게 다다르기 어려운 경지의 시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다. 수상작인 위 작품은 모과를 통해 할머님와 아버님에 대한 잔잔한 회상을 담아내고 있다. 물 흐르듯 흐르는 율조와 조금도 비껴가지 않는 참신한 비유로 선명한 주제의식이 돋보이는 명편이다. “입동은 달음박질로 빈 들녘 가로질러 온다”는 예사롭지 않은 구절로 시작되는 첫째 수는 늦가을 하늘에 등극하는 모과를 통해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올린다. 살아생전 아마도 천식으로 오래 고생하셨던 모양인데, 할머님의 기침소리를 ‘콜록콜록’으로 묘사한 것이 이채롭다. 이어 둘째 수에서는 아버님을 회상한다. 할머님과 달리 아버님의 기침은 ‘따발총소리’를 냈던 모양이다. 기침소리의 대비가 손에 잡힐 듯 절묘하다. 셋째 수에서 시인은 지난 날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모과 따다 앉’히고 ‘뚝뚝 썰어 술을 담근다.’ 할머님과 아버님에 대한 그리움이 따끈한 모과향으로 피어나면서 더욱 강한 시적 이미지를 획득하고 있다.
내 밭 한 뼘 없이 남의 밭만 일구다가
돌아볼 겨를 없이 다시 매는 남의 텃밭
세월은 밭 구분 않고 저 혼자 가는구나.
정시에 출근하지만 퇴근 시간 모호한
동트면 풀린 태엽을 다시 감고 일어서는
술 덜 깬 시계침 몇몇 새벽 거릴 밀며 온다.
-조동권 「세월」 전문
가지 끝 망울망울 산빛 받아 싱그럽고
둑길 번지는 쑥향 들판 가득 차 오른다
샛바람 머금은 햇살 볼우물 다 터질라
물올라 부푼 가슴 행여 뉘 볼세라
연분홍 가린 가슴 그 뉘에 혹 들킬까
홍조 띈 십 팔세 소녀 터질 듯한 꽃봉오리.
- 최광일, 「햇봄」 전문
신인상을 받은 조동권 시인은 이미 자유시로 등단한 시인인데, 이번에 시조로 다시 등단한 경우이다. 최근 들어 바쁜 회사 일로 시조 창작에 매달리지 못하고 있는데, 좀 더 적극적으로 활동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최광일 시인은 인터넷 상에서도 열심히 문학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시인이다. 백수 선생님은 심사평에서 “너무 기(奇)하고자 하면 안정감이 무너지고, 너무 평이해지고자 하면 무력해지는 것이 시의 길의 촉도(蜀道)라는 말은 만고의 금언임을 명심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찬바람에 갇힌 발걸음
기침과 나들이하고
닳고닳은 바람길에
더운 약물 적혀주면
내 생애 새벽은 올까
바람소리 숨소리
빈 가지에 걸린 연도
새움 트자 날고픈데
종다리 소리길에 떠
꽃놀이가자 재촉해도
가슴 속 짙은 땅거미
숨소리 바람소리.
-한재인 「천식앓이-사모곡」 전문
야시장 천막 안에서 냄비 밥을 해먹는데
파리란 놈이 죽기 살기로 더러운 발을 디민다
쫓아도, 다시 날아들고
다시 날아들고
국에 적신 밥알 두엇을 빈 그릇에 놓아줬다
그윽이 아주 그윽이 놈과 함께 나누는 밥
곡진의 한 생을 건너는 달디단 성찬이다
- 김윤철, 「겸상」 전문
툭!
소리 문득 보니
그 곱던 꽃 지는 소리
썰렁한 바람결이
가슴에 울먹인다
때 되면
가고 지는 일
뉘라서 말릴손가.
- 강숙려 「순리」 전문
「이 시인을 주목한다」기획에는 한재인, 김윤철, 강숙려 세 시인을 조명하고 있다. 한재인 시인은 1955년 포항 출생으로 1995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된 시인이다. 경제사정과 건강 문제로 요즘은 문단 활동을 중단한 상태인데, 언젠가 부산 송도에서 나래 총회를 할 때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문학을 논하던 시절이 떠오른다. 김윤철 시인은 1956년 생으로 인천에서 태어나 1997년 문단에 나왔는데 마산에서 살다가 지금은 천안으로 거처를 옮겨 살고 있다. 김 시인 또한 경제 문제로 문학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고 있다. 강숙려 시인은 진주 출신으로 현재 벤쿠버에 살고 있는 시인이다. 자유시와 시조 장르에서 왕성한 활동을 발휘하고 있는 시인이다. 시집 『꽃비가 되어 흐르네』 출판기념회를 서울 마로니에 공원 근처 찻집에서 가질 때 필자가 참가해 처음 얼굴을 뵈었는데, 매우 여성적인 이미지를 가진 분으로 기억되고 있다. 리강룡 시인은 평글에서 한재인의 「천식앓이」는 “사모의 정을 이처럼 곡진하게 표현한 작품을 발견하기도 그리 쉽지 않은 작품”으로, 김윤철의 「겸상」은 “시작법에서 자세한 관찰의 중요함을 실천한 본보기로 세울 만한 작품”으로, 또 강숙려의 「순리」는 “현상에 대한 시인의 상상력은 확장의 영역이 무한함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59. 통권 70호 기념“대표 시인 자선 나의 대표작 ”특집
2003년 가을호인 통권 70호는 2003년 9월 30일 도서출판 알토란에서 출간됐다. 제1회 직지사 여름 시인학교 개최 화보와 참가자 명단이 목차면에 컬러 화보로 실렸고, 상세한 행사 내용이 ‘시인학교 리포트’‘시조백일장 입상자 발표’‘시노래 악보’‘시인학교 참가기’순으로 기사화되었다.
바다를 떠나올 땐 말 못하는 고기였네
부처님 법문 배워 말문이 트였는지
뎅그렁, 한마디 말로 팔만경을 대신하네.
지느러미 다 닳도록 몸을 던져 정진하고
자비는 나를 버려 보시하는 것이라고
푸르게 멍이 들도록 온몸으로 경을 외네.
이 넓은 세상에서 직지사에 의지한 몸
부처님 도량이라 미풍에도 잠을 깬다
뎅그렁, 억겁을 울면 열반에 나도 들까.
- 이정숙, 「풍경」 전문
제1회 직지사 전국 시조백일장에는 이정숙 님의 「풍경」이 영예의 장원을 차지했다. 현장 백일장은 시적 감각과 순발력이 요구되는 것이어서 상당한 습작과정을 거쳐도 좋은 시를 현장에서 쓰기가 쉽지 않은데, ‘풍경’을 3수 시조로 안정감 있게 잘 형상화해낸 작품이라는 평을 얻었다.
《나래시조》는 통권 70호 기념으로 “우리 시대 대표시인 자선 나의 대표작”을 특별 기획했다. 우리 시조단에서 작품 활동이 왕성한 정예 시인에게 자선 대표작과 창작 메모를 함께 청탁했는데, 강인순 권갑하 권혁모 권형하 경철 김남환 김광순 김몽선 김은숙 김종윤 김준 리강룡 문무학 민병도 민병찬 박권숙 신동익 신양란 신후식 오영호 유자효 유재영 윤신근 이기반 이동륜 이상범 이종문 조영일 전원범 조병기 조주환 정수자 전병희 정완영 지성찬 하순희 한분순 홍성란 등 1차로 38명의 시인이 참여했다. 주요 시인들의 작품을 ‘대표작 모음’이라는 이름으로 한 자리에 모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청탁에 응해 준 시인들께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
2004년 봄호인 《나래시조》 71호는 2004년 2월 1일 알토란에서 출간됐다. ‘시조와 묵향의 만남’ 코너에는 권갑하 시인의‘눈먼 하루살이의 사랑’을 서예가 손태원 시인이 썼고, ‘시조와 판화와의 만남’에는 곽홍란 시인의 ‘난꽃 지는 저녁’이 안준영 님의 판화로 제작돼 실렸다. 지난 호에 이은 나래시조 통권 70호 기념 “우리 시대 대표시인 자선 나의 대표작(2)”기획에는 권오신 김민정 김연동 김영재 김인숙 김종 김필곤 박영교 김필곤 박영교 박영식 박재숙 서우승 오민필 오승철 염창권 이상진 이정환 장지성 정광영 조동화 장재익 채천수 등 11명의 추가로 참여하고 대표작과 창작노트가 실렸다. 이어 2003년도 주요 문학상 수상작과 2004년도 신춘문예 당선작 특집이 실렸다. 신작특집에는 29명이 참가했고, 곽홍란 시인의 <한편의 시, 절망도 다스린다(2)> 연재가 이어졌다.
60. 白水 정완영 전국 시조백일장 개최
2004년 여름호인 《나래시조》 72호는 2004년 6월 1일 알토란에서 발간됐다. ‘시조와 판화의 만남전’에는 박희정 시인의 「꽃의 환생」을 안준영 님이 판화로 작품화했으며, ‘시조와 묵향의 만남전’에는 오민필 시인의 「탕자의 고백」을 서예가 손태원 선생의 서예로 작품화하였다. 제15회 나래시조문학상 및 신인상 발표가 있었는데, 문학상은 ‘수상작 없음’으로 결정됐고, 신인상에는 박선양, 홍승표, 이정숙, 박해자 시인이 당선됐다.
석탑을 마주보고 천년을 짚어본다
한 올 한 올 뜨개질한 이끼 돌옷 해 입고서
누구를 기다리는가, 산비탈에 홀로 서서
천년 전 종다리는 앞산에서 우는데
정답던 범종소리 어디로 가버리고
쓸쓸히 부는 바람이 공염불을 외고 있네
부처는 떠났지만 해탈한 석탑이 남아
천년을 하루 같이 절터를 지켰구나
석탑 앞 득도한 벚꽃이 만개하여 터지고
다람쥐도 부처 되려고 입산을 하였는가
이제 막 합장을 배워 석탑 위를 맴돌고
석탑은 지긋이 눈감고 또 천년을 헤아린다.
- 이정숙 「정림사지석탑」 전문
한 점 티 없는 미소
인고의 넉넉한 얼굴
영롱한 내심(內心)은
모질게 닳은 생애
씻기면
소박한 정도
조약돌로 빛나리
- 홍승표 「조약돌」 전문
절절한 소망들이 눈길마다 부딪치고
가쁜 숨 몰아쉬며 다다른 산마루
스님은 보이지 않고 확성기만 목이 쉰다
향 내[煙]는 구름 되어 갓전을 맴도는데
흰 뼈 째 타는 갈망 석순으로 쌓인다
하나만 빌라 하지만 빌 일이 한 둘일까
품안에 안고 온 바람, 차례를 세우다가
묻기도 전 알아챘다는 밝은 눈에 의지한 채
가만히 마음 비우고 두 무릎을 꿇는다.
- 박선양, 「갓바위」전문
날이 선 종아리가 어제인 듯 아픕니다
곰삭은 추억들이 새싹으로 돋아나서
불혹의 강을 건너온 이 가슴도 봄입니다
낮 익은 교정들이 맨발로 반겨주고
달리기 고무줄에 종소리도 귀가 먼데
땅거미 심술을 부려 하루해가 저뭅니다
아슴한 기억 저편 편집된 일상들이
손수건 휘날리며 입학한 그날이듯
까르르 웃음 지으며 나비 되어 오릅니다
단발머리 휘날리며 밟아온 여섯 층계
헛되지 않은 세월 차곡차곡 쌓은 탑에
그 마음 살뜰히 새겨 박꽃 같이 살렵니다
- 박해자, 「추억의 책갈피에는」 전문
2004년도 신인상을 받은 이정숙 신인은 제1회 직지사 시조 백일장에서 장원에 오른 분인데, 문학 활동을 적극 지원하는 의미에서 나래시조 신인상을 추가로 부여한 경우다. 홍승표 신인은 강원도 동해 지역에서 시와 수필 분야에서 이미 기성 문인으로 활동해온 시인인데, 이번에 당선작은 닳고 닳은 조약돌을 통해 삶의 깊이를 천착해낸 작품이다. 박선양 신인은 중앙시조 백일장에서 「개구리밥」이란 작품으로 강한 인상을 준 바 있는데, 제1회 직지사 여름 시인학교와 인연을 맺은 이후 시조 창작에 몰입해 이번에 등단을 하게 되었다. 당선작 「갓바위」는 대구 팔공산에 소재한 석불로 유명한데 “묻기도 전 알아챘다는 밝은 눈에 의지한 채 / 가만히 마음 비우고 두 무릎을 꿇는다.”는 깊이를 뽑아내고 있다. 박해자 신인은 “낮 익은 교정들이 맨발로 반겨주고 / 달리기 고무줄에 종소리도 귀가 먼데 / 땅거미 심술을 부려 하루해가 저뭅니다.”에서 알 수 있듯 남다른 시안(詩眼)을 지닌 신인으로 앞으로의 활동이 기대된다.
“이 시인을 주목 한다” 기획에는 김선호 신군선 이근덕 장세득 장용복 황봉학 등 6명의 신예 시인들의 작품을 집중 조명하고 있다. 리강룡 시인은 ‘여섯 빛깔의 스팩트럼, 그 속의 채도’라는 평론에서, 김선호는 우리 주위에서 만나는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을 가공하여 거기서 삶의 자세 내지 철학을 발견해내는 운을 갖고 있는 매력을 가지며, 신군선은 그리움을 안은 자신의 소나무 한 그루를 세우는데 성공하고 있는 반면 이근덕은 우리의 통념 안에서 소나무를 작가 자신의 스승으로 세우고 있다고 했다. 장세득과 장용복에게는 서경 중심에서의 탈피해 좀 더 심화된 세계로의 진입을, 황봉학 시인에게는 “하고 싶은 말 아끼기”를 특별히 주문하고 있다.
신작특집에는 29명의 신작과 연재기획으로 곽홍란의 <한편의 시, 절망도 다스린다(3)>이 이어졌다. 김주석은 계간평에서 “시살이(시삶)와 사람살이(사람삶)”를, 권갑하는 긴급진단에서 “디지털 시대 시조의 과제와 대응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2004년 가을호인 《나래시조》 73호는 2004년 10월 1일 알토란에서 발간됐다. 앞부분에 ‘시조사랑 제2회 직지사 여름 시인학교’ 행사 화보가 컬러로 실렸고, 백수 정완영 선생님의 ‘시로 가는 만행길’, 녹원 이상범 선생님의 ‘감성화첩’연재가 실렸다. 직지사 여름 시인학교 특집에는 자세한 행사 리포트와 우리시 암송대회 및 백일장 개최 결과, 시노래 악보, 정일근, 김주석, 문무학 시인의 창작강좌 원고가 게재됐다. 이어 강혜규, 박선양, 김정숙, 이용숙, 박병래, 김보람 등 6명의 참가기가 실렸는데, 하나같이 1박2일 동안 시조를 새롭게 알게 되었고, 시인들과 함께한 시인학교에서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며 아쉬움과 그리움으로 담아내고 있다.
어쩌자고 당신을 안아 푸른 물이 들었는가
건 듯 부는 바람에도 실핏줄이 절로 터져
끝끝내 참았던 울음 골짜기를 적시네.
차마 내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겠네
황악산 너른 품을 님 목소리 넘쳐흘러
나직이 나를 부르는 그 님 보러 예 왔네
직지사 마당가로 슬며시 스며들어
무심한 낯빛으로 탑돌이를 해본다
시름도 여기에 와선 발길 가만 멈춘다.
- 강혜규, 「산을 그리며-백수 선생님께」 전문
제2회 직지사 시조 백일장의 장원은 강혜규 님에게 돌아갔다. ‘산’과 ‘가족’이 시제로 주어졌는데, 위의 작품은 산을 시조단의 큰 선생님이신 白水 정완영 선생님에 비유한 작품으로 “어쩌자고 당신을 안아 푸른 물이 들었는가 / 건 듯 부는 바람에도 실핏줄이 절로 터져 / 끝끝내 참았던 울음 골짜기를 적시네.”라는 절창을 빚어내 높은 점수를 얻었다. 강혜규 시인은 청주에서 중등교사로 재직 중인데, 시조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어 앞으로의 문단 활동이 기대되는 신인이다.
서른일곱 부고장에
돈 삼만 원 넣고
안됐다 돌아서다
다시 채운 이만 원
모르지 더 편안할 지
그곳이 여기보다
- 조동권, 「모르지」 전문
김주석 시인의 「시조와 연정, 시조와 일상성」이란 계간평에는 조동권 시인의 「모르지」라는 작품이 눈길을 끈다. 자유시로 일찍 등단한 조 시인은 일상 속에서 소재를 찾고 이를 시적으로 형상화하는데 재능을 가진 시인인데, 여기 「모르지」라는 단수시조도 선명한 이미지로 독자의 뇌리에 오래 각인되는 작품이다. 경조금은 오늘날 누구에게나 적지 않은 부담은 주는 일인데, 그러기에 초장과 중장의 진술은 남의 일 같지 않은 공감력 강한 구절이다. 삼만 원을 넣을까 오만 원을 넣을까 하는 고민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경험적 현실을 앞에 던져 놓은 뒤 시인은 덤덤하게 망자에게로 눈길을 돌린다. 서른일곱의 요절 앞에 부의금의 액수를 더 보태어 망자의 편안한 길을 기원하는 시인의 속 깊은 마음이 인간적이며 따뜻하게 다가오는데,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이다.
61. 편집자문위원 위촉 통한 편집의 질적 향상
2004년 겨울호 《나래시조》 74호는 2005년 12월 1일 알토란에서 출간됐다. 白水 정완영 시인의 ‘詩로 가는 萬行길’과 이상범 시인의 ‘시가 있는 감성화첩’이 연재되고, “시조단의 큰 별, 초정 김상옥 선생 타계”를 기획특집으로 꾸몄다.
구두를 새로 지어 딸에게 신겨주고
저만치 가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 생애 사무치던 일도 저리 쉽게 가것네.
- 김상옥,「어느 날」 전문
전통적인 율격과 제재로 사실적 기법을 활용하여 현대시조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얻고 있는 초정 김상옥은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치열하게 변신을 통해 타계하는 순간까지 극도로 절제된 시어로 언어를 조탁하는 ‘언어의 사제’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은 대시인이다. 필자가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될 때 심사위원을 하신 인연을 갖고 있다. 이어 2004년도 주요 문학상 수상작 모음 특집과 정예시인 8인 특집, 그리고 35명이 참가하는 신작특집이 이어지고 있다.
짐에 넘친 산을 부려
감싸 도는 강도 거기
비단옷도 세월에 바래
남루가 된다더니
금강은 다 씻겨나가
동강으로 누었는데
그제는
별똥별이 해우소에 쏟아지고
어제는
뙤약볕이 석류 끼고 낮 잠 들고
지금 막
토란잎 징검다리를 소낙비가 절며 갔다
- 신후식의 「섭리」 전문
김주석의 계간평“시와 스트레스” 중에서 신후식 시인의 「섭리」부분을 인용한다. “이 시조에서 스트레스는 선뜻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시적 화자가 시문(詩文) 밖에 있기 때문이다. 다만 ‘소낙비가 절며 갔다’가 가져다주는 뉘앙스는 의미심장한 것이다. 그리고 그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놀랍게도 그 안에는 시적 화자의 집이 들어서 있다. 즉 이 시조는 자연 상황에 시적 화자의 삶이 묻어서 전해온다. ‘짐에 넘친 산’, ‘비단옷’은 같은 맥락을 형성하면서 지난 세월의 무상함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마치 흘러내려온 세월과도 같은 것이다. 따라서 이 시조의 구조는 하강구조를 취하면서 전체적인 시적 분위기도 가라앉는다. 지난 삶이 ‘오름’에 있었다면 삶의 의미는 ‘내림’에서 찾아진다. 짐을 부리는 행위, 남루해지는 것, 눕는 것, 쏟아내는 것, 잠드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생각해보면 ‘내림’의 행위들인 것이다. 이 ‘내림’의 행위는 ‘죽음’에 가까운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죽음’ 그 자체는 아니다. 죽음의 언저리에서 배우는 삶의 치유 행위이다. ‘씻김’이다. ‘절며 갔다’는 것도 이런 관점에서 해석할 경우 현재 삶의 적극적 뒤틂의 행위로 볼 수 있다. 뒤틀어본 삶은 오히려 접질린 뼈를 제자리에 갖다 놓듯이 고통스러우면서도 시원스러운 일이다. 그렇다면 ‘오름’은 ‘스트레스’인 셈이고 ‘내림’은 ‘치유인자(治癒因子)’인 셈이다.”
2005년도 ‘봄여름호’인 《나래시조》 제75호는 2005년 6월 1일 알토란에서 출간됐다. ‘시조와 판화의 만남전’에는 이승현의 시조 「바람」을 안준영이 판화로 제작했으며, ‘시조와 묵향의 만남전’은 김은숙의「작은 나무이고 싶네」를 우치 손태원의 서예로 작품화하였다.
이 무거울 때」이 수상작으로 결정됐다.
등짐이 무거울 때면 산마루에 올라봐라
가슴속 실린 오욕 메아리로 쏟아내면
하늘 길 절로 열리고 구름 비껴가느니
뒤꿈치 서로 세워 재기를 해보지만
산 위에서 굽어보면 너나 나나 한 점 미물
꽃상여 넘어간 자리 한 줌 재로 남으니.
- 김덕배, 「등짐이 무거울 때」
‘나래시조문학상’은 김덕배 시인의 「등짐이 무거울 때」가 수상작으로 결정됐다. 김 시인은 1994년 《현대시조》 신인상 당선으로 문단에 나와 『낮은 음계가 흐르는 노래』를 출간했다. 심사를 맡은 백수 선생님은 “원래 시의 役能은, 1) 굳어져 가는 인간 세상을 부드럽게 풀어주자는 것이고. 2) 숨 막히는 세상살이에 여유를 돌이켜 주자는 것이며, 3) 거칠어가려는 성정을 스스로 타이르자는 것이요, 4) 아무리 바쁜 세상살이라 할지라도 좀 천천히 가자는 것이며, 5) 우리가 저질러 놓은 병은 우리가 치유하자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라면서 “시의 뼈대, 시의 매무새, 시의 행장(시어)을 잘 갖추고 있어 위 작품을 상좌에 올린다.”고 평했다.
굳이 말로 안 해도 속을 훤히 꿰뚫어
가던 길 문득 잘라 갈대밭을 세우고 섰다
사는 일 다 그런 거다 맺혔다가 풀리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갈대밭을 휘휘 돌아
무시로 키를 세우는 바람을 달래본다
누군들 숨기고 싶은 아픔하나 없겠는가
저물녘 수면으로 번져 눈시울이 붉어지는
내게도 그런 아픔이 물 아래 누워있다
소리도 지르지 못해 가슴 온통 먹먹한
-강혜규, 「대청호를 거닐며」 전문
안개비 머리까지 잠겨버린 산하여
한해의 전조등 불빛 한 가닥 희망 걸고
칼바람 적송아래서 시린 限 녹인 元旦.
하얀 눈 사각사각 연이 되어 올라가듯
산줄기 동아줄에 매달린 여린 목숨
길손은 하얀 숨결로 한 생애를 호흡하네.
푸른 벽 둘러쳐 놓은 장엄한 베바우야
을유년 피어 올린 찬연한 무지개로
새천년 역사의 사직 미륵리로 문을 여네.
한해의 아픔 딛고 산고의 황금 卵을
조각달 눈맞추어 여명에 솟은 일출
해일의 아픔을 벗고 빛살 여린 山河여.
-김숙자, 「포암산 일출」 전문
한나절 집을 비우고 썰물이 남기고 간 말
밀물이 들어오며 주절주절 되 뇌입니다
소라는 물살을 베고 귀를 쫑긋 세웁니다
갯고랑 핥고 있는 망둥이는 속삭입니다
철썩이는 파도보다 부드러운 혀끝으로
첫날밤 옷고름 푸는 바로 그 소리입니다
그대는 섬이 아니라 뭇 깃발 펄럭이는
낯 설은 포구이며 낮거리 선술집입니다
갯벌은 하루에 두 번 옷을 입었다 벗습니다
-조성제, 「오이도에서」 전문
담청색 푸른빛이
휘광(輝光)을 감고 돌아
한 폭의 그림인양
눈앞에 펼쳐지니
소반에 가득한 향기
보옥처럼 비치네.
손끝에 튕긴 울림
아쟁(牙爭)의 향기인양
청아한 음률자락
허공에 맴도나니
타오른 석양 낙조도
그 깊이에 흐르네~
고고한 학의 자태
연꽃에 샤륵 앉듯
가없이 춤추는 혼
눈부신 그 빛살에
도공의 천년 숨결이
고요하게 엉킨다.
- 손홍집, 「고려청자」 전문
늪 속에 뿌리 내린 순백의 탄성으로
청아한 하늘 받쳐 다소곳 앉아 있는
흰구름 꽃잎에 실린 눈물 어린 순정아
- 정순택, 「백련」 전문
신인상에는 강혜규, 김숙자, 조성제, 손홍집, 정순택 등 다섯 명이 뽑혔다. 白水 선생님은 심사평에서 강혜규의 「대청호를 거닐며」는 “중장마다 佳句를 얻었다”고 했고, 김숙자의 「포암산 일출」은 중장은 무난하나 종장에서 아쉬움이 있다고 했으며, 조성제 「오이도에서」는 종장마다 모두 제자리에 앉혀놓아 쉽고 간명한 이미지를 도출해냈다며 가능의 지평이 열려있다고 칭찬했다. 손홍집의 「고려청자」는 “고려청자를 앞에 놓고 實寫한 작품이라면서 그 넘어 사유의 경지를 열어 나가야 할 것”이라고 격려했다. 정순택의 「백련」은 “늪 속에 뿌리내린 순백의 탄성으로” 이 초장 한 구절을 샀다면서 신인 모두 날로 정진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2005년도 신춘문예 당선작 특집과 함께 일본의 독도 망언을 규탄하는 의미에서 “독도시 모음 특집”을 꾸몄다. 33명의 신작이 참여했고, 시가 있는 산문에는 강숙려의 「인생은 홀로 나는 새이다」, 김인숙의 「시가 있어 지켜온 세월」2편이 실렸다. 김주석의 계간평 “시생각과 시모습”에는 2004년 겨울호에 실린 채천수의 「上疏-冶隱의 丹心」, 강인순 「바다에게 묻다」, 문희숙 「헌화가」등이 언급되었다.
62. 단수시조대상 및 단수시조백일장 연장원 배출
2005년 ‘가을겨울호’인 《나래시조》 76호는 2005년 11월 1일 발간됐다. 이와 함께 시조 평론 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서울대 장경렬 교수, 대구대 문무학 교수, 창신대 이상옥 교수, 계명대 이종문 교수를 나래시조 편집자문위원으로 모시고, 편집위원도 리강룡, 김민정, 김주석, 곽홍란, 이승현, 박선양, 이태순, 이원식 시인으로 재정비 했다. 편집 사정으로 가을 겨울호를 통합 발간했는데, 전체적인 편집 구성은 서벌시인 타계 특집, 직지사 여름 시조대축제 특집, 제1회 백수 정완영 시조백일장 입상작 모음, 2005년도 나래시조 신인상 발표, 정예시인 5인 특집, 신작특집 순으로 이뤄졌다.
목수가 일고 있는
속살이 환한 각목.
어느 고전의 숲에 호젓이 서 있었나
드러난
생애의 무늬
물젖는 듯 선명하네.
어째 나는 자꾸 깎고 썰며 다듬는가.
톱밥
대팻밥이
쌓아가는 적자더미.
결국은
곧은 뼈 하나
벼려지듯 누웠네.
-서벌 「어떤 경영」전문
2005년 8월 30일 시조 창작과 평론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뤄낸 서벌 시인이 타계함에 따라 나래시조는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선생님을 추모하는 기획특집을 꾸몄다. 천숙녀 시인이 소장하고 있던 서벌 선생의 육필원고와 「그 사람의 함박눈」외 7편의 대표작을 실었다. 시인연보를 정리해 싣고, 이상옥 교수의 「시조미학의 현대적 계승과 그 전위성」이란 서벌론을 실었다. 위의 작품은 시인의 시정신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이 시는 선명한 이미지를 창출과 연과 연사이의 미적거리변화로 이어지는 긴장 구조, 정형률이 빚어내는 리듬의 유기적 연관성 구축 등을 통해 이 작품을 살아 숨 쉬는 유기체로 형상화시켰다는 점에서 대표작 중에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등에 진 온갖 번뇌 발아래 부려 놓으면
매미 울음조차 여기선 길이 된다
뜨겁게 살고 싶어라, 뜨겁게 살고 싶어라
품은 뜻 곧게 세워 황악산 어우러진 숲
너 나 분간 없이 푸른 어깨 출렁여도
발끝에 목숨 꽂았던 캄캄한 생 있었지
뙤약볕 받쳐 인 정수리 저 눈부심
발걸음 멈춰 서서 앞 뒤 가늠할 때
말없이 훑는 속마음 달군 피 검푸르다
아린 상처 잠재우는 직지사 돌담길
귀엣말 푸는 걸음 땅 위에 지문 찍을 때
흉터는 연꽃을 피워 소름 물고 빛난다
- 정화섭, 「돌담-직지사에서」 전문
제3회를 맞은 직지사 여름 시조 대축제는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차원 높은 문학 축제 행사로 승화시켜나갔다. 특히 김천시의 지원 속에서 치러진 제1회 白水 정완영 전국 시조백일장은 큰 의미가 있는 행사였다. 白水 정완영 선생님의 권위에 걸맞게 대학일반부 장원의 상금도 현장 백일장으로는 가장 많은 300만원으로 책정했다.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역사와 전통이 빛나는 백일장 행사로 발전할 것으로 생각된다. 대학 일반부의 시제는 ‘하늘’‘돌담’‘계곡’이 주어졌는데, 영예의 대학 일반부 장원에는 대구에서 참가한 정화섭 님이 차지했다.
정예시인 5인 특집은 김차순, 이근덕, 이옥진, 천숙녀, 추창호 다섯 시인으로 꾸며졌다. 그중 새로운 얼굴의 추창호, 김차순 시인의 작품을 살펴보기로 한다.
긴 시간 짧은 궤적
꼬불꼬불 고물고물
풀쐐기 가는 양을
한동안 보았습니다
불현듯
돌아 보이는
나,
살아온 모습 같아.
- 추창호, 「어느 날」전문
억새풀 아우성 하늘 받쳐 든 한계
으스스 푸른 혼불 바람으로 머물고
피멍든 낡은 메아리
온몸으로 가을이다
고열로 삭은 살내 고사목을 꽃 피운다
겹겹이 신기루로 골짝길 포복하는
긴 세월 생목숨 달군 넌,
하나의 예술 祝典
祝典의 고갯마루 한뎃잠 자던 낮달
따가운 푸른 속살 설핏 설핏 목 내밀고
부르튼 날카로운 허공
맘껏 밟고 서있네
- 김차순, 「가을 한계령」전문
추창호 시인은 부산일보 신춘문예 출신으로 작품이 무척 탄탄한 시인이다. 위 작품은 풀쐐기의 가는 양을 바라보며 자신의 뒤를 돌아보는, 자아성찰의 작품이다. 시적자아와 풀쐐기의 동일시를 통해 깊은 시적 여운을 던지고 있다. 김차순 시인의 「가을 한계령」은 조금은 춥게 느껴지는 하늘의 낮달과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풀, 생목숨 달구듯이 붉게 물들고 있는 단풍 등을 통해 ‘가을 한계령’의 이미지를 감각적으로 살려내고 있는 시편이다. 위 두 시인은 탄탄한 작품만큼이나 문학 활동에도 적극적인데, 특히 인터넷 문학 활동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열적다 그대 향해 폭죽처럼 터지는 화냥끼
봄밤이 환해지다 하얘지다 아뜩하다
끝내는 분분이 날려 손 흔들고 말 것을
- 강혜규, 「벚꽃 지는 밤」 전문(2005년도 단수시조대상작)
늦은 저녁
홍차 한 잔
장밋빛 시간이 왔다.
눈 돌려 본 창밖엔
펑펑 터지는 흰 침묵들
천 개쯤 피운 밤 목련,
3월의 만찬이다.
- 김성찬, 「만찬」 전문(2005년도 단수시조백일장 연장원)
《나래시조》 제76에는 인터넷 문학클럽 『시로 여는 e 좋은 세상』에서 공모한 2005년도 단수시조대상 및 단수시조백일장 연장원 당선작이 발표되었다. 『시로 여는 e 좋은 세상』은 직지사 여름 시인학교에 참가자들이 중심이 되어 운영하는 ‘인터넷 문학클럽’으로 클럽장은 권갑하 시인이 맡고 별도의 운영진을 위촉해 운영을 활성화시켜 나가고 있다. 현재 단수시조의 창작 활성화를 위해 <단수시조백일장><단수시조작품상>(단수시조대상)<자유시백일장> 등을 공모하고 있으며 부설로 「문예창작대학 및 대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분기별로 ‘분기 장원’을 뽑은 뒤 연말 결선을 통해 최우수작인 연장원을 뽑아 백일장의 경우 기성 문인으로 대우하며, 기성문인들의 경우 <단수시조대상>을 수여하고 있다. 상패 외에 부상으로 70만원 상당의 전통 도자기를 수여해오고 있다. 제1회 단수시조대상작인 강혜규의 「벚꽃 지는 밤」은 “비유와 묘사법이 어우러져 빚는 묘한 아름다움을 창출하고 있다”는 평을 얻었다. 단수시조백일장 연장원 당선작인 「만찬」은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형상화하는 방식이 신선하다. ‘홍차 한 잔’의 ‘시간’에 시상을 오므렸다가 ‘천 개쯤' 피는 ’목련‘의 ’만찬‘으로 펼치는 것은 흔치 않은 역량이다. 또한 ’한 잔‘과 ’천 개‘,’장밋빛‘과 ’흰‘ 같은 한시의 대구법을 연상시키는 대비로 응축과 확장의 묘미를 살리며 밤 목련이 만개하는 순간의 ’만찬‘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평을 얻어 이들의 앞으로의 활동이 무척 기대된다.
외할머니
산소에
벌초를 갔었는데
놀랍게도 무덤가에 수박이 여럿이다.
작년에 내뱉은 씨가,
싹이 텄던 모양이다.
우와 !
이게 웬 떡?
낫으로 쩍, 갈라서
붉은 과즙들을 낱낱이 핧아 먹고,
씨앗은 멀리 뱉노니,
붉고도,
둥글거라.
- 이종문 「수박」 전문
《나래시조》 76호에 실린 이종문의 「수박」 은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운영하는 2006년도 1분기 문예지 게재 우수작품에 선정되어 문예진흥기금 지원금 100만원을 받았다. 시조전문지로는 유일하게 《나래시조》에 게재된 작품이 선정되었다. 이는 계간 시조전문지로의 편집을 쇄신하고 매호 좋은 작품을 청탁해 차원 높은 기획을 해온 성과라 할 것이다.
63. ‘문예지 게재 우수작품’에 연속 선정되다.
2006년 봄호인 《나래시조》 77호는 2006년 3월 1일 알토란에서 출간됐다. 권두 초대시로 백수 선생님의 「노래는 아직 남아」외 2편의 신작이 실렸다. 이중 「활 한바탕 사이던가」란 작품은 2006년 2분기 문예지 게재 우수 작품에 선정되어 지난 호에 이어 연이어 시조전문지로는 유일하게 나래시조에서 우수 작품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차지했다.
하루 해 넘기기는 태산보다 무거운데
구십 년 한 세상은 활 한바탕 사이던가
시위를 떠나간 화살 찾을 길이 없구료
대관령 높다 해도 눈썹 아래 매달리고
삼수갑산(三水甲山) 멀다 해도 감꽃만한 해가 가네
빈 하늘 더딘 새 한 마리 노을 속에 빠진 날
-정완영, 「활 한바탕 사이던가」전문
권두칼럼에는 이상옥 교수의 ‘초정과 시인정신’이라는 글이 실렸다. 2005년도 주요 문학상 작품상 수상작 특집과 2006년도 신춘문예 당선자 특집, 그리고 박희정, 이경임, 이석구, 이승현, 장명웅 등 신예시인 5인 특집이 꾸며졌다.
차마 읽지 못한 지난밤의 사연처럼
분분이 덮쳐오는 삼월 늦눈의 아침
때 없이 흔들리는 세상, 참말 알 수 없어라
낯설지만 태연하게 한 줄기 빛으로 와
성한 몸 숭숭 뚫어 하얗게 덧대놓고
끌끌한 시간의 거리 닫아걸고 마는 지
물 젖은 솜뭉치를 등짐 진 나귀모양
그대 먼 소식들은 눈발에 스러지고
엇갈린 결빙의 생채기 왜 이리 아찔한 지
- 박희정, 「늦멀미」 전문
벼르고 벼르다가 모처럼 시간 빌려 발자국 뒤로 한 채 지도 위에 길을 놓고
인적이 뜸한 이른 아침 감포로 차를 몰았다.
여기서부터 길게 휜
골짜기 아래 능선
입춘 지난 감은사지
하늘 높은 돌탑 위로
볍씨 문 청둥오리들
햇살 비껴 날아왔다.
훤하게 드러난 중심 지상의 문 앞인가 피리 구멍처럼 뚫린 탑신과 옥개석 사이
단청빛 비늘 번득여 목어 한 마리 헤엄치다.
바다가 바로 뵈는 대종천 한가운데
눈 뜨고 감는 사이 마른 잎 밀쳐내며
등 굽은 느티나무에 붉은 잎이 돋고 있다.
- 이석구,「여행」전문
찌그러진 동전 속 무너진 저 다보탑
다시 세울 수 있는 한 줌 빛 있다면야
시든 꽃 한 아름 품고 면벽수행 하겠는가
묽어지는 늪 속에서 아무리 발버둥쳐도
비빌 언덕배기도 움켜쥘 끈조차 없어
밑으로 곤두박이며 빠져드는 이 세상
낮은 코 치켜세우고 종종치는 사람들아! 슬픈 가면의 눈빛 적선하듯 뿌려대며
곤곤한 이 살얼음판 깨뜨리지 말게나
낸들 알콜중독자 되고 싶어 되었을까 살 에는 광풍狂風에 홀로 몸 되어보시게
누구도 먹지 않고는 배겨내지 못할 걸세
신선한 물고기도
잡는 법도 아니라네
웃음소리 묻어나는 툇마루에 걸터앉아
별 하나
올려볼 수만
있다면
그․뿐․이라네
- 이승현,「지하도를 맴도는 메아리」전문
앞 뒷산 숲길 따라 어엿이 선 굴밤나무
어느 것 하나 없이, 같은 높이 그 자리에
서러운 전설의 옹이 보듬어 안고 있다.
허리 살을 돌덩이가 난도질 할 때마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 옹송그려 보았지만
신열을 이기지 못해 떨어지는 저 도토리
뼈 속으로 스민 사연 켜켜이 눌러앉아
세월의 무게 따라 더더욱 불거지는
얼비친 보릿고개의 지울 수 없는 화인(火印)이다
곰삭아 깊게 패인 주름 속 그 밑에는
중증에 시달리는 건망증 환자 보라는 듯
봉긋이 새순이 돋는 굴밤 한 톨 있더이다.
- 장명웅,「굴밤나무에게」전문
박희정 시인은 2000년 《월간문학》, 2002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문단에 나온, 2000년대 등단한 시인 중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인 시인이다. 여기 선보인 「늦멀미」는 ‘삼월 늦눈’을 통해 ‘참 알 수 없는 세상’ 또는 ‘예기치 않는 사랑의 감정’에 직면하게 되는데, 그런 점에서 이 시는 결국 오지 않아야 할 때 온 늦눈처럼 늦게 온 사랑과 그리고 그것이 끝났을 때의 마음의 무거움과 상처를 담아내면서, 예고 없이 다가온 늦사랑에의 멀미를 상징하고 있다 할 것이다.
「마량리 동백」이 동아일보에 당선되면서 두각을 드러낸 이석구 시인의 「여행」은 먼저 행갈이의 변화를 통해 독자를 낯설게 만들고 있다. 이 시편도 ‘볍씨 문 청둥오리’‘피리 구멍처럼 뚫린 탑신과 옥개석 사이’‘단청빛 비늘 번득여 목어 한 마리 헤엄치다’ 등에서 알 수 있듯 감각적인 표현이 두드러지는데, 벼르고 벼르던 ‘감포 여행’을 통해 시인은 세월의 흐름을 읽어내고 있다.
2003년 《유심》 신인상으로 문단에 나와 시작과 평론에 남다른 활동을 펼치고 있는 이승현 시인의 「지하도를 맴도는 메아리」는 거리의 노숙자를 소재로 다룬 작품이다. 깊은 절망감 속에서도 ‘별 하나 올려볼 수 있는 만큼’의 희망의 빛을 찾아내려는 몸부림이 담겨 있다. 그만큼 시인의 가슴은 따뜻하게 느껴진다.
2004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문단에 나온 장명웅 시인은 고신대 의대 교수로 재직 중인 시인이다. 위 작품은 옛날 꿀밤을 떨어뜨리기 위해 돌로 나무를 쳤었는데, 이 나무에 난 상처를 소재로 지난날의 어려움을 잊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그 옛날 보릿고개의 아픔을 떠올리게 하고 있다. 쉽게 지나칠 소재를 시적 소재로 잡았다는 점에서 시인의 시적 역량을 가늠하게 하는 작품이다.
지난 호부터 신설된 ‘지난 계절의 좋은 시조 리뷰’코너는 《나래시조》는 물론 다른 문예지에 실렸던 우수 작품을 다시 읽게 만드는 기획으로 이번호에는 박옥위, 이종문, 이승현, 김경자, 조동화 시인의 작품이 선정됐다. 지난 호에 이은 이승현 시인의 좋은 시조집 찾아서는 정수자 시인의 『저녁의 뒷모습』으로 선정되었다.
64. 현대시조 100년을 조명하는 특집호 발간
2006년도 여름호인 《나래시조》 78호는 2006년 6월 1일 알토란에서 발간되었다. 이번호는 ‘현대시조 100년의 해’를 맞아 “현대시조 100년 성과 과제”라는 제목으로 특별기획을 꾸몄다. 특집1) 현대시조 100년의 의의 / 문무학, 특집2) 현대시조 100년 원로 회고 / 이상범, 윤금초, 특집3) 시조(시조단) 현실 진단 및 발전 방안 / 리강룡, 박기섭, 정수자, 신후식, 채천수, 정휘립, 특집4)“내가 좋아하는 현대시조, 옛시조, 시조집”설문조사 결과 분석 / 장경렬, 특집5) 정예시인 신작특집이 하나의 아우러진 말 그대로 대기획이었다. 필진에는 우리 시조단을 명실공이 대표하는 시인, 학자들이 대거 참여했다. 결과적으로 다른 어느 시조전문지도 현대시조 100년을 맞아 이처럼 알찬 기획을 한 잡지가 없었다는 점에서 나래시조의 현대시조 100년 특별기획은 그 의미가 깊다 할 것이다. 특히 현역 시조시인 100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내가 좋아하는 현대시조, 시조집, 옛시조”설문조사 결과는 포괄적으로나마 하나의 큰 윤곽을 밝혔다는 점에서 앞으로 두고두고 자료적 가치가 크다 할 것이다.
■ 시조시인 100인이 선정한 “내가 좋아하는 현대시조”
◇ 다수 추천 시조 50편(등단시인 순)
「가고파」(이은상) /「구룡폭포」(조운), 「석류」(조운) /「난초」(이병기) / 「백자부」(김상옥)/ 「봉선화」(김상옥) / 「개화」(이호우), 「달밤」(이호우), 「바람벌」(이호우),「살구꽃 핀 마을」(이호우) / 「보리고개」(이영도) / 「내 사랑은」(박재삼) / 「고무신」(장순하) /「산처일기」(이우종) / 「풍경」(김제현) / 「조국」(정완영),「부자상」(정완영), 「고향생각」(정완영), 「시암의 봄」(정완영), 「감」(정완영) / 「신전의 가을」(이상범) / 「어떤 경영」(서벌) / 「땅끝」(윤금초), 「주몽의 하늘」(윤금초) / 「겨울강」(박시교) / 「팽이」(이우걸), 「비」(이우걸) / 「물총새에 관한 기억」(유재영) / 「장국밥」(민병도) / 「자목련산비탈」(이정환), 「원에 관하여」(이정환), 「가구가 운다 나무가 운다」(이정환) / 「동백꽃, 지다」(이승은) / 「구절초시편」(박기섭), 「홍류동」(박기섭), 「새」(박기섭) / 「사고 싶은 노을」(오승철), 「송당쇠똥구리1」(오승철) /「비비추에 관한 연상」(문무학) /「해남에서 온 편지」(이지엽) / 「장엄한 꽃밭」(정수자), 「빈들」(정수자) / 「목욕을 하며」(정일근) / 「따뜻한 슬픔」(홍성란) / 「세한의 저녁」(권갑하), 「종」(권갑하) / 「천마총 13」(박권숙) / 「봄날도 환한 봄날」(이종문) / 「장롱의말」(이달균) / 「길」(강현덕)
◇ 시조 다수 추천 시인 25인(등단시인 순)
조운, 이병기, 김상옥, 이호우, 이영도, 박재삼, 정완영, 이상범, 서벌, 윤금초, 박시교, 이우걸, 유재영, 민병도, 이정환, 박기섭, 오승철, 문무학, 이지엽, 정수자, 홍성란, 권갑하, 박권숙, 이종문, 이달균
■ 시조시인 100인이 선정한 “내가 좋아하는 시조집”
◇ 다수 추천 시조집 20권(등단시인 순)
『조운시조집』(조운) / 『삼행시 육십오편』(김상옥) /『개화』(이호우), 『이호우시조집』(이호우) / 『내 사랑은』(박재삼) / 『채춘보』(정완영), 『연과 바람』(정완영), 『내 손녀 연정에게』(정완영) / 『땅끝』(윤금초), 『해남 나들이』(윤금초) / 『사전을 뒤적이며』(이우걸) / 『햇빛시간』(유재영) / 『묵언집』(박기섭), 『키 작은 나귀타고』(박기섭), 『비단헝겁』(박기섭), 『하늘에 밑줄이나 긋고』(박기섭) / 『저녁의 뒷 모습』(정수자) / 『발품』(채천수) / 『객토』(박권숙) / 『봄날도 환한 봄날』(이종문)
■ 시조시인 100인이 선정한 “내가 좋아하는 옛시조”
◇ 다수 추천 옛시조 12편(다수 추천 순)
1. 「동짓달 기나긴 밤을」(황진이)
2. 「묏버들 가지 꺾어」(홍랑)
3. 「이화에 월백하고」(이조년)
4. 「이화우 흩날릴 제」(이매창)
5. 「이 몸이 죽고 죽어」(정몽주)
6. 「어져 내일이야」(황진이)
7. 「나무도 아닌 것이(오우가)」(윤선도)
8. 「청산리 벽계수야」(황진이)
9. 「천만리 머나먼 길에」(왕방연)
10. 「반중 조홍감이」(박인로)
10. 「청초 우거진 골에」(임제)
10. 「십년을 경영하여」(송순)
문무학 시인의‘지난 계절의 좋은시조 리뷰’와 김주석의 계간평 “시술의 방식-시적 시상과 시적 기억”, 그리고 이승현 시인의 좋은 시조집 기획 연재가 이어졌다. 2006년도 나래시조문학상은 나래시조의 위상에 걸맞은 마땅한 우수작을 찾지 못해 수상작을 내지 못했다. 나래시조 신인상에는 김영기, 양윤애, 장금철 3명을 뽑았는데, 김영기 신인은 초등학교 교장에서 퇴임한 분으로 제주아동문학협회장을 역임했을 정도로 이미 기성 문인인데다 1994년 제3회 제주시조백일장에서도 장원을 했을 정도로 시조에도 실력을 갖춘 분인데, 이번에 나래시조 신인상으로 재등단의 절차를 밟은 것이다.
순애보 펼쳐 놓은 동백 숲에 앉아 보라
여심의 정절은 삼동을 품에 안아
애증의 불씨 하나로도 그리움 꽃 피워내는
열병을 앓을수록 시누대 흔들다가
갯바위 들이치는 산발한 원혼 앞에
한 번쯤 절망을 깨는 연습도 해 보아라
포말로 스러져야 가르마 타며 오는 바람
징 소리 내는 파도 앞에 시나브로 지는 동백
만나서 좋은 인연인 듯 마주보기 하고 있다
흐를 만큼 흘러와서 손잡고 섰나 보다
등대마저 예서는 혼자가 아니란 걸
꽃덤불 집어등 쪽으로 빠져보면 안다더라.
-김영기, 「오동도에 멈춰 서다」 전문
그 겨울 황악산 자시(子時) 넘어 불이 꺼지면
시름도 자릴 펴는가 경(經)을 덮는 풍경소리
흩어진 만 갈래 달빛 내 안 가득 차오른다.
선잠 깬 목탁 소리 졸음 겨운 새벽 예불
온밤 내 빛을 쫓다 길을 놓친 화두 하나
황매화 빈 가지마다 사홍서원(四弘誓願) 맺혀 있네.
마음은 빗살무늬로 반야심경 읊조리고
섬돌 위엔 가지런한 그리움의 흰고무신
설법당 카랑한 바람, 바랑을 걸머멘다.
- 양윤애, 「해제(解制)의 시간」전문
난간에 쓰러질듯
애처로운 네 모습
향상심 밝혀들고
정진하는 스님같이
눈보라 몰아치는 길
홀로 외로이 피었네
- 장금철, 「설중매」 전문
65. 나래시조 40년 기념 특집호 발간
2006년 가을호인 《나래시조》 제79호는 2006년 9월 1일 알토란에서 출간되었다. 표지에는 나래시조 40년을 축하하는 고암 정병례 선생의 삼족오 전각 작품이 나래시조를 환히 밝히고 있다. 컬러 화보(1)은 직지사 여름시조대축제 이모저모가 실렸고, 이어 나래시조 40년 활동화보가 양면에 걸려 컬러로 장식하고 있다.
79호 편집의 특징은 신예 시인을 부각시키기 위해 신설한 <신예시인 2인 특집>을 가장 앞에 배치 편집하였다는 점이다. 그 첫 기획의 주인공에는 박희정, 이승현 두 시인이 선정되었다. 박희정 시인은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이승현 시인은 2003년 《유심》 신인상으로 문단에 나와 누구보다도 활발한 창작활동을 펼치고 있는 2000년대 등단한 대표적인 시인이다. 이들의 젊은 목소리를 담긴 ‘2인 대담’과 대표작 7편, 그리고 문무학 시인이 작품론으로 구성되었다.
‘지난계절의 좋은 시조 리뷰’는 문무학 시인에 이어 김민정 시인이 집필을 맡았으며, ‘세계속의 시조’,‘이 계절의 수필’ 등도 새롭게 선보이고 있다.
이번호는 “나래시조 창회 40년” 기념 특집호로 기획되었다. ‘나래시조 40년 활동 약사’가 앞머리에 정리 게재되고, 협회 고문이신 白水 정완영 선생님의 「나래문학과 나」란 특별회고의 글이 실렸다. 그 외에도 <나의 나래시절><내가 본 나래><동인 회고사> 등이 실렸고 나래시조문학상 수상자 특집과 나래시조신인상 당선자 특집을 기획했다. 특집5는 2006년도 직지사 여름 시인학교 특집으로 활동 리포트와 제3회 시조암송대회 결과, 시인학교 화보, 연도별 시노래 작곡내용, 참가기 등이 게재되었다. 특집6은 제2회 白水 정완영 시조백일장 입상작이 실렸다.
닳을 대로 곱게 닳은 학동 해변 흑진주
언제쯤 내 노래도 저 빛깔로 윤이 날까
차르르
파도 밀려와
또 퇴고를 하고 있네.
- 이철우, 「몽돌」 전문
차라리 바람처럼 쓸고 가면 좋았을까
한 줄기 미련조차 남겨짐은 힘겨웠다
길 위에 또 하나의 길 두 볼에 난 하얀 길은.
가슴부터 머리까지 텅 비우면 가벼울까
아니아니 남긴 상처 안고 울면 편안할까
어차피 물이 되어야 가셔질 내 서러움.
찬란한 은빛 꿈으로 품지 못할 사랑이라
툭툭툭 가지 치듯 끊어버린 우리 인연
한 세월 흘린 눈물 속 새가지는 움트는데.
기다린 시간만큼 제 안에 고인 눈물
갖지 못 할 내 욕심 그것조차 짐이었다
천 년을 다시 또 천 번 옷자락은 스치는데.
- 김계정, 「눈물」전문
《나래시조》 79호에는 2명의 신인이 주목을 받고 있다. 그 첫째는 2006년도 단수시조백일장 연장원에 오른 이철우 시인이다. 이 시인은 2006년도 단수시조백일장 분기 장원을 거쳐 연장원에 올랐는데, 당선작 “「몽돌」은 몽돌 그 자체를 ‘노래’를 다듬는 소리꾼이나 시인으로 자연스럽게 끌어내는 솜씨하며, 몽돌의 ‘윤’이라는 빛깔 이미지로 절차탁마라는 관념을 부수는 신선미, 또 ‘파도’소리로 삶을 퇴고하는 관찰력과 자연스런 가락 운용에 좋은 점수를 주었다.”는 평을 얻었다. 그 다음은 제2회 白水 정완영 전국시조백일장 대학일반부 영예의 장원에 당선된 김계정 시인이다. 당선작 「눈물」은 현장 시조 백일장에서 시적으로 형상화가 쉽지 않은 시제임에도 최근 발생한 수재민들의 아픔의 눈물로까지 이미지를 확대하는 창작력으로 심사위원들로부터 좋은 점수를 얻었다.
등을 기대고 싶은 마음으로 살아간다
기대일 등이 없어도 기대고 싶은 가슴에선
산처럼 키워온 정이
강물 되어 흐른다.
건너지 못할 강 넘지 못할 산 하나를 두고
지나는 계절의 길목 다시 서성이고 있다
떨어진 잎새들 속에
뜸들이며 내미는 손.
건너지 못할 마음 넘지 못할 발길이라도
다가선 마음 자락 바람소리에 등 기대면
어둠도 숨겨온 사랑
별 총총 띄어 온다.
- 윤종남, 「사랑」 전문
신작특집에는 새로운 얼굴로 윤종남 시인이 눈에 띤다. 1959년생인 윤 시인은 1995년 문화일보와 1997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문단에 나왔는데, 이후 개인적 사정으로 창작은 중단했다가 올해 다시 활동을 재개한 시인이다. “건너지 못할 마음 넘지 못할 발길이라도 / 다가선 마음 자락 바람소리에 등 기대면 / 어둠도 숨겨온 사랑 / 별 총총 띄어 온다.”는 구절에서 읽을 수 있듯 어둠 속에 별을 띄우는 희망의 시편을 일구고 있는 시인임을 알 수 있다. 모쪼록 나래를 통해 왕성한 창작 활동이 이뤄지기를 기대해본다.
66. “작품으로 본 나래시조 40년사” 집필을 마치며
나래시조가 40년이란 긴 여정을 달려왔다. 그 활동의 중심에는 수많은 시조 작품이 아름다운 결실로 하늘의 어둠을 밝히는 별처럼 반짝이고 있다. 40년의 전반부인 30년은 제2대 회장을 지낸 리강룡 시인이 수준 높은 안목으로 정리해 《나래시조》에 6년에 걸쳐 연재했다. 필자는 그 나머지 기간에 해당하는 뒷부분의 10년사를 맡았다. 그러나 필자의 능력 부족에다 나래시조 40년사 편찬을 총괄 정리하는 일이 겹쳐 발간 일자에 쫓기는 바람에 깊이 있는 정리를 하지 못했음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2003년 이후는 계간 시조전문지로 전환되어 매호 250쪽 전후의 방대한 분량의 내용이어서 정리가 쉽지 않았다. 어쨌거나 40년 동안의 작품의 얼개는 대강 짜여진 셈이다. 부족한 부분은 《나래시조 50년사》 집필 시 더욱 세밀하게 보충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기대하건데, 이 글이 저 어둠 속에 빛나는 별처럼 찬연히 빛나는 작품들로 계속 이어지고 이어져 50년, 100년, 아니 영원으로 이어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