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남서산시부석면송시리(가마시)를 찾아서
<傳統地域에 있어서 村落의 形成 과 發展 >
-瑞山市 浮石面 松枾里/佳麻枾를 中心으로-
-----------------------------------------------------------
제출일 : 년 월 일 제출자 : 우완룡(사회학전공)
-----------------------------------------------------------
이 논문은 현대 건설의 간척 사업으로 지리적, 생태적 변화 폭이 넓은 전통 마을을 모델로 하였다.
序論
1. 硏究 目的과 硏究 地域의 槪觀
이 연구는 서산 지역과 천수만 태안 반도의 사회 변화 연구를 목적으로 한다.
연구팀이 이 지역을 연구 대상으로 선정하게 된 이유는, 현대건설이라는 자본의 힘에 의하여 대규모의 天水滿(灣) 간척 사업이 이루어지는 등 근래의 여타 지역보다 다르게 산업화의 경험 폭이 상당하게 크다는 점과 지리적으로 외지에 속하여 향토사료의 근거가 아직도 빈약한 점을 착안하여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여러 부분의 연구 소재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천수만 간척 사업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지역은 사람들의 큰 관심을 받지 못 하던 곳이었다. 간척 사업이 있고 난 후 향토사료 정리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문화 보존 움직임도 있지만, 오랜 傳說이 있는 [검은여]의 사진을 한 장이라도 찍어둔 사람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도 이 지역에 대한 무관심 정도를 익히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러나 간척 사업이후 상업주의에 편승한 중, 소규모의 자본들이 유입되어서 각종 위락 시설과 숙박시설을 설치하여 경관을 훼손하고 인심을 피폐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더구나 검증되지 않은 일부 연구자들에 의해서 사실과 상관없는 내용이 활자화되어 전파되는 등 미래를 생각하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교육적 책임감까지도 가지게 하고 있다.
우리 연구팀은 서산 지역과 태안 반도를 연구하기 위한 先行 작업으로서 전통 농촌 마을을 미시적으로 살피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모델을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송시리 1구 877번지 일대인 [가마시]라는 동네를 선정하였다.
이 마을을 선정하게 된 것은 이 마을의 지리적 조건이 천수만과 접해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전통 마을이라는 것 등이다.
우리가 이 지역, 서산군 부석면 송시리 1구 가마시[佳麻枾]을 좀 더 심도 있게 살피기 위해서는 서산 시가지 읍내와, 그리고 지형적으로 天水滿을 둘러안고 있는 홍성군 일부지역과 태안군 일부 지역을 살피는 것은 간과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촌락 형성은 결국 인간집단에 의한 개척의 역사“*주1)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林野開拓과 海岸開拓, 그리고 氏族集團을 살펴야 할 것으로 보았다.
이 과정에서 서산시 주변의 泰安이나 洪城 등의 지역도 살피기로 하겠다. 그리고 특별하지 않는 한 인용출처는 참고 문헌으로 대신 하도록 하겠다. 그 이유는 지역 사료가 거의 다 향토 사료에 의존하고있고 향토 사료라는 것도 옛날이야기 형식의 수준에 가까운 내용도 많기 때문이다.
本論
1, 가마시는 어떤 마을인가?
충남 서산시 부석면 송시리1구 의 서쪽 방향과, 갈마리2구 의 북쪽 방향으로 만나는 움푹 들어간 곳에 [가마시]라는 마을이 있다. 지금은 생강 마늘 등 특작 농사를 많이 하는 15호 정도의 조그마한 마을이다. 이 마을의 이름이 [가마시]이다. 그런데 [가마시]라는 이름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가 오래 동안 정리되지 못하고 있다가 근자에 와서 문헌에 오르내리고 있으나 사실과 다르게 왜곡되어져 이를 정확히 밝혀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한 지역의 역사가 파편처럼 미시적일 지라도 그 미시적 역사가 모자이크 화 할 때는 거시적 역사도 되기 때문에 미시적 역사를 바로 찾아내는 작업은 학문적으로도 중요할 뿐 아니라 연고자들에게는 고향의 자긍심을 심어 주는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연구팀은 이 연구의 가설로 “가마시의 원 이름은 가굴[佳窟]이다.” 라고 설정하였다. 그리고 2차 가설로는 “갈마리와 송시리의 각각 한 글자씩을 빌려서 사용 하다가 자연스럽게 생긴 이름이다” 라고 세워 보았다.
이 마을의 모양을 보면 주변이 온통 아름드리 소나무 숲에 싸여 있어서 경관이 아름답고 또 동네가 영어의 C 자 모양을 뒤집어 놓은 모양으로 서편으로 한곳만 터졌는데 터진 그 곳으로 보이는 약 500M 바로 앞이 천수만 이다. 그러니까 마을 중심부에서 천수만 까지는 거리가 1 km 도 못되고 마을 안쪽까지 논이 있는데 그 논이 예로부터 佳窟[가굴] 논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또 논 위쪽 ,즉 동네 중심부에서는 맑은 물이 솟아 나왔고 이 마을의 생성 이래로 동네 사람들이 우물로 사용한 곳이다, 그 뒤로는 대나무 집(권영대씨 집-아래사진첨부)上代 영감이 심었다는 대추나무 한 그루가 있었고 대나무 집 바로 뒤에는 이 마을 최초의 정주자로 알려진 최씨 조상의 무덤이 있는데 이 곳에서 “봉황이 날아올랐다“ *증언:서형원)는 전설이 있으며 그 봉황이 봉락리로 날아갔다는 전설도 있다.
이 마을 좌우에는 팽나무와(임영재의 집-아래사진첨부) 살구나무와 오동나무(이연복의 집) 등 있어서 이 얼마나 아름다운 그림 같은가를 생각하면 佳(아름다운) 窟이란 이름이 맞는 듯 하게 한다. 더구나 이 마을에 사람들이 정착하고 난 후부터는 삼(麻)과 모시(?)농사를 많이 했기 때문에 그 정경이 아름다워서(佳) [가마시]佳麻? 라는 說이다. 또 하나는 당시의 이 마을의 지리적 여건이 행정적 여건과 모순되어서 가마시가 행정적으로는 송시리 지만 실제로는 갈마리와 왕래가 더 빈번하였다. 사실적으로 여러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80년대 初까지만 하더라도 이 지역 사람들이 외지에 나가서나 군대에 갔을 때 집으로 보내는 편지 주소를 쓸 때도 반드시 갈마리 2구(가마시)라고 썼다. 그렇게 해야만 편지가 잘 전해 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증언)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는 가마시 사람이 여타 송시리 사람들과는 거의 왕래가 없어서 누가 누군지도 잘 알지도 못하는 실정이었다. 이는 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증언하고 있다. 실제로도 1950-60년대에 [가마시]를 갈마리로 행정 편입 시켜 보려고 생긴 주민 운동이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주:이때 주민을 대표자로 禹福成 -우완룡의父-이라는 분이 선출 되었다한다), 이런 전 후로부터 사람들은 이 마을을 지칭하여 渴馬里의 馬와 松枾里의 枾를 한 글자씩 따서 馬枾라고 즐겨 불렀다. 아마 이렇게 불려지기 전부터 이곳이 아름답다(佳)해서 佳 字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佳馬枾 가마시] 라고 불렀을 것이라고 보여진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설문지를 돌려 가장 근접하고 적당한 이름에 동의하라고도 하였고. 인터뷰를 하기도 하였으며 문헌 자료도 찾아보았다. 그런데 문헌은 거의 전무하였으나 현재 부석면 노인 회장이고 과거에는 대두리에서 염전을 하시던 李晶馥이라는 분이 쓰신 [우리고장 부석] 이라는 面 향토지에서 가마시를 풍수지리적 해석을 하여 “갈마리가 말(馬)이니까 말의 옆에 붙은 날개 형국이므로 佳馬翅 ” 라고 해석한 것. 그러나 날개라는 것이 전통적으로 나쁜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날개는 양쪽이 모두 있어야하는 것인데 한 쪽만 있는 날개는 병들었거나 불구자를 가르키는 것으로서 풍수 지리적 해석으로는 피해야만 하는 해석일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뭔가를 잃어버린 사람을 한쪽 날개가 꺾였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이 해석은 주민들간에 거의 동의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이정복 옹이 여기서 사용한 [가]字는 오늘날에 거의 사용되어지지 않는 글자이며, 더구나 이 글자는 원래 날개라는 뜻보다는 오히려 풍수 지리적으로 명당 [당]字로 곧잘 사용되어 왔고, 수량을 헤아릴 때 個字의 同形으로서 一 個 二 個 할 때 사용되어졌던 글자이다. 그렇다면 [가마시]가 “날개의 형국이라“는 이러한 해석은 역사적 뒷받침도 빈약하고 주민들이 동의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그 신빙성이 빈약한 해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정복 옹이 이를 완고하게 고집할 수 있는 것은 전통적 지역에서의 유지라는 점과 현직 노인 회장이라는 헤게모니, 또 한편으로는 과거에 한문학을 수준 높게 익혔다는 것이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만들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연구팀이 이 옹을 인터뷰하려고 수차례 시도하였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서 인터뷰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주변 탐문 결과 이 옹의 지역사회에서의 영향력은 막강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결국 [가마시] 마을의 이름을 크게 세 가지로 해석 되고 있는 실정이다.
1)일부 주민 말에 : 마을에 삼(麻)과 모시(?)가 많아서 아름답기(佳) 때문에 [가마시]佳麻? 라는 說.
2)풍수지리 주장 : 갈마리가 말(馬)이니까 말의 날개 형국으로 [가마시] 人1 馬?? 라는 것.
그러나 人1 字는 오늘날에 사용되어지지 않는 글자이며 더구나 날개라기보다는 個 字의 同形으로서 수량을 一 個 二 個 할 때 사용되던 글자이다
李翁의 해석은 역사적 뒷받침도 빈약하고 날개라는 것이 전통적으로 나쁜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주민들이 동의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신빙성이 빈약한 해석이다.
3)역사 인류학적 고증 : 가마시가 행정적으로는 송시리 지만 실제로는 갈마리와 왕래가 더 빈번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渴馬里의 馬와 松?里의 ?를 한 글자씩 따서 馬?라고 불려졌다.
그런데 이렇게 불려지기 전부터 원래는 이 곳이 경관이 아름다워서(佳) 즉 佳 字를 써서 이지역 특유의 어감에 맞게 [佳窟]이라고 불렀던 것인데 [佳]자가 [馬?]라는 글자를 만나면 자연스럽게 후에 사람들이 이것을 섞어서 사용하던 중에 [佳馬?] 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상은 연구팀이 여러 가지 사료나 전설, 또는 지역 지명 등을 비교하면서 밝혀낸 것으로서 뒤받침 될 자료가 충분하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어떤 가설보다는, [가굴] 의 [가] 字와 갈마리의 馬자, 그리고 송시리의 ?字가 3[字]者 결합하여 [가마시]가 되었다는 가설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연구팀은 위의 내용들을 다음과 같이 설문하여 보았다.
이 설문에서 절대적 대다수 사람들은 연구팀의 논의에 무게를 두고 지지해 주었다.
이제 우리가 탐구해야만 할 문제는 이 동네 사람들이 왜 이렇게 변두리 주변 마을로 오게 된 것일까 하는 문제이다. 사회 이동의 요인을 탐구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서두에서 언급한 林野開拓과 海岸開拓, 그리고 氏族集團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하여 탐색한 결과 이 마을 최초 이주자는 崔氏라는 것과 비등한 시대에 權氏가 이주 해 와서 살았다는 것을 찾아내었다. 그것은 최씨의 조상 11대조(최종필 기준)가 이 갈마리에 있고 8대조의 묘소가 가마시 에 있음을 인터뷰로 확인하였다. 그리고 권씨의 조상(권영수 기준)도 가마시에 있음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이들 조상의 정확한 사회 이동 이유를 찾기란 여간 큰 작업이 아니라서 상당한 시간적 여유가 더 필요하리라고 보여진다. 단지 가설 적으로 고려 시대의 최씨 무신정권 의 퇴락 후와 조선의 안동 권씨 가손 등이 어떤 연유에 의해서 이곳으로 이주해왔을 것이란 추측을 갖게 한다.*2)
우리가 지금의 마을 거주자 이동 경로는 큰 어려움 없이 찾아낼 수 있었는데, 그것은 이들의 2대나 3대 자손이 아직도 주변에 정주하고 있거나 그 거주지를 큰 어려움 없이 확인 할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을 최초 정주자로 보고있는 최씨는 현재 조상의 묘만 있고 너머 마을 갈마리의 돌무르 라는 곳에 한 집만 살고 있으며 권씨 역시 자손들이 모두 이농하고 권영수씨 한분만 마을에서 1Km거리에서 살고 있다.
이 마을에는 현재 강은환, 김정배, 김형옥(일명 조선 흥엑이 라고 함)김무진씨 박상운,씨 서동0씨 이대교씨 이연복씨 우백룡씨 임영재씨 유기창씨 홍승수씨 등이 살고 있다. 그 외에는 중심부 외곽의 두어 가구가 있다.
그러면 이 마을을 간척 사업과 관련하여 사회 살펴보기로 하겠다.
2. 간척 사업 이전의 산업과 생활
1) 굴 양식업과 어업활동
서산 간척 사업이전 천수만 갯벌에는 굴, 바지락, 조개 등 다양한 어패류가 존재했다.
이곳 주민들 대 다수가 어업을 본업으로 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으나*) 주민의 경제 활동은 주로 어업을 중심으로 이루어 졌다. 해변 마을을 중심으로 어업을 본업 혹은 부업으로 하는 경우까지를 따져 본다면 비율이 70% 정도 되었을 것이다.
여러 어업 활동 중에서 굴 채취는 상당히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굴은 石花굴로서 돌에 붙은 것을 채취하였다. 해안 돌 뿌리 등에서 돌을 캐다가 바다에 질서 있게 줄을 맞춰 넣어두면 그곳에 굴이 달라붙어 석화굴이 되는 것이다. 그밖에 갯벌에서는 낙지나, 바지락, 소라, 게, 새조개, 까막 조개, 맛 등도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그래서 남자는 고기나 낙지를 잡고 여자는 주로 굴과 조개를 채취 하였다.
............................................................................
*주1)이문종. 전통지역에 있어서의 촌락의 형성
*주2) 각 집안의 족보나 가계도는 별첨으로한다.
=========================================================================
중략
-------------------------------------------------------------------------
3, 서산시와 태안군의 약사와 홍성군 서부면의 지명 탐구
★서산군
시대와 연대, 그리고 주요사항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고대 755
신석기 시대-돌도끼, 돌화살촉 발견(두지두, 계도, 장고도)
마한-치리구국(지곡면), 신소도국(태안읍)
백제-성대혜현(태안), 지륙현(지곡면), 여촌현(해미읍), 기군(서산읍) 설치
신라 경덕왕 14년, 기군은 부성군, 지륙현은 지육현, 성대혜현은 소태현으로 개칭, 여촌현은 혜성군(당진)의 속현이 됨.
고려
1018 현종 9년, 지육현은 지곡현으로 개칭하고 부성군의 속현이 됨. 여읍현은 홍주의, 소태는 운주의 속현으로 됨.
1), 부석면 전통 마을들의 전설과 역사
간월도리(看月島里)란 이름은 서산(瑞山)이란 군호(郡號)보다도 오랜 이름이다. 서령정씨(瑞山鄭氏)의 시조(始祖)가 된 원외랑(員外郞) 정신보(鄭臣保)가 자기의 조국이었던 송(宋)가 원(元)에 망하자 이곳 간월도(看月島)에 와서 정착했다는 기록1)으로 본다면 서주(瑞州) 서산(瑞山)이란 군호(郡號)는 간월도리(看月島里)에서 출생한 정신보(鄭臣保)의 아들이 되는 양열공(襄烈公) 정인경(鄭仁卿:1267원종8년-1365충렬왕 31년)이 나라에 큰 공을 세운 공로로 고려명종12년(1182)에 부성현이 폐군된지 102년만인 고려 충렬왕 10년(1284)처음으로 서주(瑞州)라는 군호(郡 )를 얻었었으므로 서산(瑞山)이란 시군호 보다도 위이고 흔히 서산지방에서 회자되는 무학대사(無學大師)의 출생과 관련된 것 보다는 훨씬 년대가 올라가는 것이다. 그뒤 조선시대에는 일관되게 서산군 화변면(禾邊面) 간월도리(看月島里)란 지명으로 일관되게 지속되어 왔고 구한말인 1895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태안군 안면면 소속으로 바뀌고 일제 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에도 마을명의 변화없이 안면면(面) 소속의 서산군 소속이 된다.
1937. 7. 1에는 안면면 소속에서 부석면 소속이 되어 옛 禾邊面 소속이었을 때 함께 했던 이웃마을들과 60여년만에 한 面이 되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간월(看月)이란 이곳에서 성장한 무학대사(無學大師 일명 無鶴大師)가 간월암(看月庵)에서 수도(修道)할 때 맑은 바닷물속에 비친 달을 보고 성불하는데서 유래되었다는 것이 전래되는 연원이다.
호산록(湖山錄)에 의하면 원통대(圓通臺)는 간월도(看月島)연못 암석위에 있다.
거사몽련(居士蒙年)이라 부르는 자가 있었는데 연못이 바다가운데 무인절경(無人絶境)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모정(茅亭)을 짓고 살기를 생각하고 찾아가 보았더니 천년된 고목(古木)백여그루가 하늘을 닿을 듯하고 등나무의 넝쿨이 나무위를 덮고 있기 때문에 해가 보이지 않고 인적이 끊기었다. 등나무 가운데를 보니 옛 기와 8백여장이 쌓여 있었다. 또 초당(草堂)의 황폐한 기지가 있는데 추백(秋栢)나무 여러그루가 살아 있고 퇴락한 뜰 자욱이 완연하여 옛 모습을 볼수 있으니 그곳은 양열공(襄烈公)정인경(鄭仁卿)이 지은 초당의 옛 기지이고 그 기와도 역시 양열공(襄烈公:정인경(鄭仁卿))이 개체 한 것이다.
그후에 거사몽년(居士蒙年)이 암자(庵子) 한칸을 짛고 쌓였던 기와를 사용하여 덮었다고 한다. 그러한즉, 내가 친히 거사에게 들어둘 것이다. 얼마후에 내가 정씨(鄭氏)족보를 보았드니 양열공(襄烈公)이 간월도(看月島)에 살았는데 7-8세때부터 문장이 능숙했으며 정사(精舍:공부하는집)를 건축하고 글이나 읽고 섬가운데서 고기잡이나 낚시질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고 한다.
본읍사람 조안방(趙安邦)이 판관(判官)이 됐을 때 마침 시간을 이용하여 섬가운데를 가서 원통대(圓通臺)를 찾았드니 도리위에 현판이 걸렸는데 쓰기를 낙가산 원통사(落加山 圓通寺)라는 여섯자 였다. 자획이 맑고 힘있어서 가히 사랑스러우며 근자에 서에의 법칙에 명가로 자칭하는 자라도 능히 만분의 1분을 비슷할바 아니었다. 현판쪽은 아주 고고하고 판자에 사방으로 그린 줄은 모두 좀벌레가 먹어 훼손?榮?.
10년후에 또 가서 보았더니 현판 쪽은 없어지고 스님이 있다가 다가와서 말하기를 가야산(伽倻山)에 기맥과 정신이 모두 이 섬에 모였기 때문에 이 섬에서 세성인(聖人)이 나온다 하였으니 가야산을 떨치는 자가 아닌가? 의심이 간다.
이곳 출신 양열공(襄烈公) 정인경(鄭仁卿)선생으로 인하여 오늘날 까지 우리모두가 사용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관호(官 )가 있으니 서산사람으로서는 양열공(襄烈公)의 위업(偉業)에 대한 현창사업(顯彰事業)을 크게 벌리는 운동이 있어야 할 것이다.
간월도(看月島)란 천수만(淺水灣)속의 조그만 섬이 이렇도록 위인(偉人)들을 배출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은 풍수상(風水上) 가야산의 맥(脈)이 이곳으로 모였다는 것도 생각할수 있지만 이곳이 고려시대에, 우리나라와 중국(宋나라)과의 사신(使臣)들이 왕래하는 주요 통로였기 때문에 너무나 자연스런 현상이라 할수 있다. 중국사신들이 송(宋)나라 수도였던 낭징(南京)에서 배를 타고 고려땅에 오는 통로가 이 천수만의 끝 지점인 현 해미면 양림리(良林里)에 있었던 양능포항(良陵浦港)에 배를 대고 내리어 산수리(産水里)에 있었던 안흥정(安興亭)에서 쉬어서 오갔던 것이다. 흔히 사신 다니든 곳이 현 태안군 근흥면 정죽리 안흥항으로 알고 있지만 옛 사신 왕래길의 안흥(安興)이란 해미 "안흥(安興)"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도 해미면 산수리에는 안흥정지(安興亭址)라는 표석(標石)이 있고 주변의 300여평의 객관(客 )자리에는 무수한 와편(瓦片)들이 쌓여 있어 옛날, 사신들이 오가든 상황을 말해주는 것이다.
1123(고려인종 1)에 송나라 사신 노윤적(路允迪)을 따라 왔던 서긍(徐兢)이라는 사람이 당시 서울 개성에서 1개월간 머무르면서 보고 들은바를 고려도경(高麗圖經)이라는 책으로 쓰고 그려 40권으로 펴낸일이 있다. 이 책에서 안흥(安興)으로 들어가는 산천경개(山川景槪)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는데 아마 이 간월도(看月島)를 비롯한 천수만(淺水灣)일대의 풍광(風光)일 것이다.
간월도(看月島)는 서산지방의 대표적 역사인물을 배출한 곳일뿐더러 서산을 대표하는 특산품인 "어리굴젓"으로도 유명하다. 이 어리굴젓은 옛날"상감님"에게 올리는 진상품이었다고 전해지는 유명한 것으로 현대에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10여년 전 일본나라 여자대학 교수이며 서산과 일본천리시간에 자매결연에 큰 역할을 했던 와까야마(苦山)교수는 서산에 왔다가 이미 알고 있었던 "간월도 어리굴젓"을 이것은 세계적인 명품이라면서 한통을 구하여 가져간 일이 있다.
"어리굴젓"이란 이름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을 내놓고 어리란 매운 고춧가루를 넣어 먹으면 혓바닥이 어리해지기 때문이라고 모 방송에서 인터뷰하는 것을 보고 크게 실소한 일이 있다.
냉장시설이 없던 시절에는 늦여름까지 굴젓을 저장해 놓고 먹기 위해서는 짜게 담그는 짠 굴젓이 있었고 그때그때 먹는 얼 저린 굴젓 등 두 종류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어리굴젓이란 간을 덜 짜게 담그는 "얼 저린 굴젓"이란 뜻이다.
간월도(看月島)에는 원통대(圓通臺) 간월암(看月庵) 벌말(筏村), 새말(新村)등의 지명이 있다.
갈마리(渴馬里)란 마을의 어딘가에 지형의 생김에 풍수상(風水上) 말(馬)이 목이 말라 물을 먹는 형국(形局)이 있어서 이에 유래 되었다 전해진다.
서산지방에서 갈마리(渴馬里)란 독립된 이명(里名)으로 이곳 말고는 없다. 그러나 자연부락으로 불려지는 여러군데의 갈마음수(渴馬飮水)의 풍수상형국(風水上形局)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갈마리의 어느곳에 갈마음수형국(渴馬飮水形局)이 있는지 또 있다면 음택(陰宅)인지 양택(陽宅)인지 알려진 것도 없다. 부석면(浮石面)의 주산(主山)인 도비산(都飛山) 정상에 올라 서편(西便)으로 펼쳐진 지역전체를 조망(眺望)해 본다면 부석면(浮石面)의 중심이랄수 있는 면소재지인 취평리를 멀리서 감싸 주고 장검천(長劍川)이 휘돌아가는 형태야 말로 풍수(風水)에 아무런 식견(識見)이 없는 사람이라 하드라도 갈마반도(渴馬半島)가 지역전체를 보호해주고 감싸주는 기운을 느낄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형국이야말로 면소재지 취평리는 물론 부석사에 까지 서기(瑞氣)가 미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이러한 연유로 갈마음수(渴馬飮水)라 했을까? 아니면 이 지역이 마산면(馬山面) 소속으로 있을때인 먼 옛날 국가에서 경영하던 목장지대(牧場地帶)였으니 가뭄이 심할때는 수백마리의 말들을 몰아 이곳에 옮기어 물을 먹이고 거두는 것이었으므로 이에서 연유되어 갈마(渴馬)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 아닐까도 생각해 볼수 있다. 갈마리(渴馬里)란 마을 이름은 조선시대는 물론 구한말 일제강점기등 일관되게 통용된 마을 이름이다. 1759년(영조35)에 발간된 여지도서(與地圖書)에는 106호의 가구에 306명이 사는 부석면 전체로 볼때에도 인구수로는 큰 마을이었다.
갈마리는 면 소재지는 아니지만 면명(面名)이 된 부석(浮石)이 있는 마을로 면내에서 그 중요도로는 어느 곳 보다 높은 곳이라 할수 있다. 높은 산이 없고 해발 4~50m의 저산성(低山性) 구릉지대로 서산지방의 전형적인 지세(地勢)다. 논밭이 비옥하여 사람살기에 좋고 주생산은 마늘 생강으로 소득을 높이는 곳이다.
80년대초에 완공된 B지구 대단위 간척지가 매립되기전까지만 하여도 부근의 천해간사지에서 반지락 굴등이 많이 생산되어 어업소득도 높았던 곳이다.
갈마리는 돌모루(石隅), 사정터(射亭址), 땡겻, 모심이(苧植), 산짓물들 영암(靈岩), 삼복치(三復峙), 진재(長峴), 토끼재(兎峴), 개야지들(小犬野), 부들배미(蒲畓), 고잔마을(古棧高岑), 안고잔(內古棧), 불당골(佛堂谷), 황섬(黃島), 검연여(黑嶼) : 浮石)등의 자연마을과 지명이 있다.
강당리(江堂里)는 조선시대(朝鮮時代)에 화변면(禾 面)10개리중 우천리(牛川里)로 분리된 마을로 1759년(영조 35)에 간행된 여지도서(與地圖書)에 의하면 가구 131호에 232명의 인구가 사는 가장 큰 마을이었다. 이것이 구한말인 1895년에 강촌(江村) 시동(詩洞) 서당동(書堂洞)등 3개 마을로 세분 되었다가 일제 강점기인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때에 강촌(江村)마을과 서당동(書堂洞) 일부와 시동(詩洞)일부가 합해져 한마을이 될 때 강촌(江村)에서 강(江)자를 따고 서당동(書堂洞)에 당(堂)자를 따서 강당리(江堂里)가 되었다.
강당리(江堂里)란 지명은 현 운산면 용현2리(雲山面 龍賢 2里)의 조선조때 행정리명(行政里名)이었고 현재에도 자연부락명으로 불리워 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지역사를 잘 모르는 학자들이 글을 쓸때에 운산면 용현 2구의 옛 역사전거(歷史典據)를 인용할 때 현부석면 강당리(江堂里)를 구분 못하여 잘못 인용되는 오류가 왕왕(往往) 있어 왔다.
망등산(望登山 해발 83.6m)에서 발원하여 마을 중심을 흐르고 3km의 하천(河川)의 이름이 소내(牛川)로 불리워 졌고 이에 따라 옛마을 이름이 우천리(牛川里)라 했던 것 같은데 두차례의 행정구역 개편을 거치는 동안 원래 이름과는 거리가 먼 강당리(江堂里)가 된 것이다. 이과정에 옛날 우천리(牛川里)에 속해 있었던 시동(詩洞)의 많은 부분이 지산리(芝山里)로 편입되고 서당동(書堂洞)의 일부는 칠전리(七田里)와 마룡리로 편입되어 나가므로써 옛날에 이세(里勢)가 컸던 옛 우천리(牛川里)인 강당리(江堂里)는 이웃과 경계한 옛 산저리(山底里)(1759(영조35년)당시25가구)인 지산리(芝山里) 보다도 작은 마을이 되었다. 1992년의 간행된 부석면 면세일람에 의하면 지산리는 252호에 973명 사는 큰 마을이 되고 강당리는 196가구에 757명이 거주하는 마을로 된 것이다.
강당리(江堂里)에는 전주이씨 회안대군파(懷安大君派)가 80%이상이고 그외에 서령유씨(瑞寧柳氏)문숙공 위촌유백순(韋村柳伯淳)의 후손들 600여년 가깝게 세거해 오고 있는 토착(土着 集姓村)마을이다. 마을이름의 머리글자가 된 강촌(江村)은 강당리의 동북변(東北邊)에 위치한 자연마을인데 강(江)이란 이름을 얻을수 있는 어떠한 자연 여건이 없는 마을임에도 무슨 연유로 강촌(江村)이란 이름을 얻었다..
현재는 매립되어 육지로 변한 A지구 간척지가 바다였을 때 이곳을 거쳐서 고북면 쪽으로 건너가던 바닷길이 있었는데 이러한 것을 서산지방 방언으로는 감 또는 강(江)을 건넌다고 했으니 이에서 연유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강당리(江堂里)는 서쪽으로 칠전리와 접해 있고 북으로는 지산리(芝山里)와 접해 있으며 남으로는 마룡리(馬龍里)와 접해 있으며 옛부터 부자(富者)가 많아 부자마을로 이름 났었을뿐더러 크고 작은 인물들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강당리(江堂里)는 서당동(書堂洞) 신당(新塘) 시어지(詩洞) 새터(新基) 강촌(江村) 한터(大基) 배양골, 불너머리 각후동(角后洞) 육간월(陸看月) 절굴(寺谷)등의 자연마을이 있고 어치기 저수지(貯水池), 소내(牛川) 소내다리(牛川橋) 큰개(大浦) 동미(東山) 동산정(東山亭) 두멍배미논 둥구재 말배미(斗畓) 망등산(望登山) 문필봉(文筆峯) 배알산(拜謁山) 봉우재 불당골(佛堂谷)사장터(射亭址)등의 지명과 숭덕사(崇德祠)가있다.
대두리(大頭里)라는 이름은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화변면(禾邊面)대두리(大頭里)로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일관되게 쓰여오다가 1895(고종32)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마산면 대두리 낙양리(馬山面 大頭里 洛陽里)와 화변면 대두리 낙양리(禾邊面 大頭里 洛陽里)등 4개마을로 분할 운영된 일이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에는 2개의 대두리(大頭里)와 낙양동(洛陽洞)일부가 합쳐져 부석면 대두리(浮石面 大頭里)로 되었다.
이제까지 읍면동의 행정구역을 살펴본바로는 아래 하부조직인 동리(洞里)에서만은 분할내지 변동이 있어 왔는데 이 대두리(大頭里)에서만 화변면(禾邊面)관할에서 마산면 (馬山面)으로 일시 일부가 분할 편입 되었던 일이 있었음을 알수가 있다. 여지도서(與地圖書)에 의하면 조선시대 화변면 대두리(禾 面 大頭里)는 가구수(家口數)가 71호에 207명(남105명, 여 102명)의 인구가 사는 큰 마을이 었다.
대두리(大頭里)라는 이름은 1994년에 발행된 서산의 문화 제6호 p54, 강동원(姜東源)이 쓴 대두리 지명유래에 의하건대 대두리와 봉락리 경계선상에 있는 해발 70m의 산 이름이 한점산(一点山 : 漢点山)인데 이 한점산 머리근처 마을이라는 뜻이라하고 작다는 의미가 한점(一点)이 크다는 의미의 한점(漢点)으로 변하여 대두리(大頭里)라 한 것 같다고 조심스러운 언급을하고 있다.
그러나 백제사를 연구한 사학자 김성호(金聖昊)는 「비류백제(沸流百濟)와 일본의 국가기원(國家起源)」에서 대두리(大頭里)란 비류백제(沸流百濟)가 졸본부여(卒本扶余)에서 다물도(多勿都)에 나라를 세웠는데 다물(多勿)이란 복,구토(復 舊土)라는 어원이었다 하고 이 다물계(多勿系)지명으로 서산부석면의 대두리(大頭里)도 포함 시키고 있으며 그런데 일본(日本)으로 건너간 도왜집단(渡倭集團)의 중심세력을 이 다물계집단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두리(大頭里)라는 지명은 단순한 한점산(一点山)에서 연유되었다고만 볼수가없고 이 다물계(多勿系)지명의 역사적 사실을 규명 한다면 이 대두리(大頭里)라는 지명을 역사의 중심에서는 새롭게 조명을 받게 될 것이다.
대두리는 서두에서 언급되었듯, 조선시대에는 마산면(馬山面)과 화변면(禾邊面)의 경계 지점이었고 1895년에는 4개의 마을로 구분되었던 경계 구분이 복잡한 지역이다. 현재에도 부석면 소재지인 취평리의 남쪽에 위치 경계해 있는 마을로 외부인들에게는 경계 구분이 어려운 마을이다.
대두리에는 고래들, 고래모퉁이 고리짝베미 논, 구억말, 내건너, 느리재, 다락골, 당재(堂峙), 당재골(堂峙谷), 대두저수지(大頭貯水池), 동산, 뒷굴(後谷), 들마당(野場),띠밭모랭이, 마룻들, 말무덤, 말무덤재, 매봉재, 모얀, 부엉굴, 부엉배, 사양골(斜陽洞), 서낭당(城隍堂), 수랑배미(水 畓) 아래말(下村), 양지편(陽地便), 오릿굴(五里谷?鴨谷) 웃말(上村) 장자마당터, 점산(点山), 중탱이, 차돌배(石英岩)등의 자연마을과 지명이 있다.
마룡리(馬龍里)는 조선시대에 대잠리(大岑里)와 마룡교리(馬龍橋里)로 되어 있었고 구한말인 1895년 행정구역 개편때도 변동없이 그대로 있다가, 일제강점기인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대잠리(大岑里) 마룡교리(馬龍橋里) 서당동(書堂洞)일부가 합쳐져 마룡교리(馬龍橋里)에서 다리교(橋)자를 빼고 마룡리(馬龍里)라 하였다.
여지도서(與地圖書)에 의하면 대잠리(大岑里)에는 37가구에 104명이 마룡교리(馬龍橋里)에 47가구에 140명으로 합계84가구 244명이 사는 큰 마을이었다.
1993년 부석면 간행 면세일람에 의하면 마룡리에는 140가구에 634명이 사는 것으로 기록 되어 있다. 서당동의 일부가 편입된 것을 가안한다면 옛날과 현재가 큰 변화는 없는 것으로 생각이 된다.
마을의 이름이 된 마룡(馬龍)에 대한 배경은 이러하다. 마룡리(馬龍里)4반 짚은개(深浦)마을에는 1929년의 난공농장(難谷農場)이 된 간척지(干拓地)가 매립도기 전에는 짚은개(深(심)浦(포))바닷가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에 담수(淡水)가 자연용출(湧出)하는 약 6~700평의 넓이 경주실꾸러미 한 개를 풀어도 끝이 닿지않는 수심의 큰 연못(淵池)에 얽힌 전설은 이렇다.
우리지방 어디엔가에서는 옛날 그리고 아주 먼 옛날 어느농가에 애기를 낳았는데 이 아이가 너무도 범상치않은 애기장수 였다고한다. 겨드랑밑에는 날개같은 비닐이 돋아나 있고 낳자마자 스스로 일어나 앉고 서고 할뿐만 아니라 말까지 하는 것이었다.
이소문은 순식간에 퍼져서 이 애기장수가 크게 되면 나라를 휘어잡는 무서운 사람이 될 것이란 이야기 가 있었다.
옛날에는 이러한 사람은 역적이 된다는 얘기가 있어 역적이 나면 삼복을 멸하게 되는지라 겁을 먹은 그의 부모들이 죽여 버렸다는 것이다.
그 뒤 마룡리 용못(龍淵)에서 용마(龍馬)가 나왔는데 용마(龍馬)의 주인 될 장수는 이미 애기 때 죽어 없어진지라 3일간 연못주변에서 하늘을 보고 구슬피 울다가 어디론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후로 이 연못을 용마연(龍馬淵)이라 했고 마을 이름도 이에서 얻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조 때 마을 이름 중에 다리(橋)자를 넣은 것은 마룡리(馬龍里)2반 장안(市內)에 길이 6m폭2m의 나무다리가 있었는데 이에 유래된 것이 아니었을까 고로(古老)들은 전한다.
마룡리(馬龍)에는 예나 지금이나 산천외 자연경관이 뛰어날뿐더러 토지가 비옥하고 옛날에는 인간이 살아가는데 기본이되는 어염시수(魚鹽柴水)를 모두 갖춘곳이서 살기에 좋은 곳이었는데 지금도 환경이 오염되지 않고 인심이 좋은 곳으로 소문나 있다.
마룡리(馬龍里)에는 고잠(高岑) 날근터(樂隱洞) 마룡(馬龍) 도라시 짚은개(深浦) 장안(市內)등의 자연 마을이 있고 국사봉(國師峯) 난곡농장(難谷農場)과 심포저수시(深浦貯水池) 여우고개 용못터(龍淵池) 장군개(將軍浦) 창포샘(菖蒲井) 국샘(國井) 갯들겡이 등의 지명이 있다.
봉락리
조선시대에는 봉락리(鳳洛里)라는 독립된 마을이 없었다. 현 봉락리 대부분은 화변면(禾邊面)칠전리(漆田里)에 속해 있었던것으로 추정된다. 구한말인 1895년 행정구역 때에 1)칠전리(漆田里)가 칠전리(七田里) 낙양리(洛陽里)노라포리(老羅浦里)네개 마을로 분리 되었다가 일제때인 1914년에 낙양리(洛陽里)의 일부와 봉동(鳳洞),노라포리 그리고 칠전 일부가 합쳐져서 봉락리(鳳洛里)가 되었다.
그동안 지명(地名)의 변천사를 문헌과 현지조사를 통해 확인해 보면서 알게된 것은 현대감각과 상상만으로는 이해 할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미 전편에서 언급해 왔지만 조선조때 행정구역이 일정한 산맥이나 하천등 명확한 경계에 의하여 획정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엉뚱하게도 남의 행정구역안에 섬처럼 들어가 있는 월경처(越境處) 상아비입지(象牙飛入地)와 같이 이해할수 없는 것이 많을뿐더러 일도면(一道面) 이도면(二道面) 동도면(東道面)같이 길(道)을 기준으로 행정구역이 획정 되었던 것을 알수가 있다.
화변면(禾邊面)지역은 신라시대에서 조선조 초기까지 있어 왔던 2)향소부곡(鄕所部曲)의 한 종류인 화변소(禾邊所)가 있었던 곳이다. 소(所)란 이미 다 아는 바와 같이 공예품을 제조하던 기술자 집단의 거주지이다.
칠전(漆田)이란 옷칠을 생산하는 옷나무 밭이란 뜻이다. 칠(漆)은 현대 사회에서도 도료(塗料)로는 가장좋은 것이지만 조선조에 있어서는 칠(漆)을 사용한 나전(螺鈿)등 일상용 가구(家具)는 물론이고, 죽염에 쓰는 관(棺)까지도 칠을 사용한 것이 최고로 쳤던 것이니 이 지역은 현대의 안목으로 본다면 대단한 기술이 있는 산업기지 이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영조 35년(1759)년에 작성된 여지도서(與地圖書)에서 보면 칠전리(漆田里)는 가구가 89호 인구 234명의 두 번째로 큰 마을이었다.
현재의 칠전리(七田里)에서 금곡(金谷)사기점(沙器店) 서당동(書堂洞)지역이 제외되었던 점을 감안 한다면 칠(漆)의 원료생산과 가공에 종사했던 사람들의 수가 얼마나 많았는가를 가늠할수 있다고 본다.
봉락리(鳳洛里)에는 검은돌(黑石) 탕정(湯井) 수캐골, 사고개(祠峴)산골(山谷) 서낭댕이(城隍堂) 낙양동(洛陽洞) 봉동(鳳洞) 노라실(老羅室) 노라포(老羅浦) 봉락저수지(鳳洛貯水池) 감나무골(?木谷)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월계리는 조선조 때에는 불모동리(不毛洞里)라는 마을이름으로 불리워 왔던 곳이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불모동리(不毛洞里)는 현 월계리와 송시리가 합쳐 있었던 마을명이다.
이 불모동리(不毛洞里)가 1895년의 구한말 행정구역 개편 때에 월계리(月溪里)와 내송리(內松里)로 구분되었다가 1914년 일제강점기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월계리(月溪里)와 내송리(內松里)일부, 그리고 취포리(翠浦里)일부, 수현리(秀峴里) 일부가 합쳐져서 월계리(月溪里)가 되었다.
월계리(月溪里)라는 이름은 마을의 중심을 흐르는 냇물이 맑디맑아서 달빛이 비쳐지면 하늘에 있는 달이 냇물 속에도 있기 때문에 "달내(月溪)"라 부르게 되었고 이에서 마을 이름도 시적(詩的) 마을 이름이 되었다.
맑은 시냇물이라면 환경이 오염이 되지 않았던 1970년대 이전에는 휘영청 ''달빛''이 밝은 밤이면 어느곳 시냇물인들 그런 정경이 없었겠는가? 그럼에도 이 마을이 달내(月溪)라는 이름을 얻었던 것은 이런 이름을 지을수 있는 문학적 감성이 뛰어난 선비들이 이 마을에 살았기 때문이다.
월계리(月溪里)는 북(北)에는 청금산(靑衿山), 동(東)에는 두화산(杜花山:해발 101m)등 문래산(文來山)으로부터 남주(南走)하는 해발 100m 내외의 산맥(山脈)이 병풍처럼 동편에 쳐져 있어
서남(西南)으로 펼쳐진 분지 형 마을이다. 서산~창리간, 부석~태안간 주요 지방도와 근접한 위치에 있고 시(市)와 면(面)소재지와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면서도 직접 그런 주요도로와 접해 있지 않은 관계로 실제는 오지(奧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고유한 전통이나 환경이 타지역에 비하여 덜 소멸되고 훼손됐다고 볼 수 있는데 ''달내(月溪)''라는 마을 이름으로 보면 이를 위해서 더더욱 환경이 덜 오염되게 하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주민은 생업을 자연 여건에 따라 강수리(江秀里)와 같이 마늘과 생강을 주업으로 하는 농업마을이다. 월계리에는 달래(月溪), 도곡(都谷), 송내(松內), 흥천(興川), 바래미(風山), 환두골(環都谷), 황새골, 두구미(圓山), 황곡(黃谷)등의 자연마을이 있고 청금산(靑衿山), 두화산(杜花山) 장검천(長劍川) 등의 지명이 있다.
지산리(芝山里)는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산저리(山底里)로 불리우던 곳인데 1895년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산저리(山底里) 달천리(達川里) 시동(詩洞) 지파동(芝杷洞) 도천리(桃天里)등 5개 마을로 분리 되었다가 일제때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서 산저리(山底里) 달천리(達川里) 지파동(芝杷洞) 도천리(桃川里)와 시동(詩洞)의 일부를 합하여 지파동(芝杷洞)에서 지(芝)자를 따고 산저리(山底里)에서 산(山)자를 따서 지산리(芝山里)가 되었다. 지산리(芝山里)는 해발 351m 도비산(都飛山)정상봉(頂上峯)의 남사면(南斜面)을 포함한 남동향(南東向)개활지(開豁地)로 아늑하게 펼쳐진 마을이다.
마을 전체의 형상(形象)은 풍수상(風水上)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가 뚜렷하게 잘 이루어 졌고 높이솟은 도비산(都飛山)이 서북풍(西北風)을 막아주고 남동(南東)으로 확트인 천수만(淺水 ) 바다와 접해 있어서 어염시수(漁 柴水)를 잘 갖춘 곳으로 농경사회(農耕社會)에서는 사람살기에 어느곳보다도 유리했던 곳이다.
그래서일까 서산지방에서는 입향(入鄕)의 역사가 긴 서령유씨(瑞山柳氏)50여호를 비롯한 전주이씨 회안대군파(全州李氏懷安大君派)100여호 평양조씨(平壤趙氏)50여호가 500~600년간을 집성촌(集姓村)을 이루며 평화롭게 살아온 것이다.
지리적 자연 여건이 좋아서일까 이마을에는 수백년전으로 올라가는 효자 국현남(鞫賢男)과 유동원(柳東源) 그리고 그의 부인이며 효부인 밀양손씨(密陽孫氏)등 2개소의 정려(旌閭)가 있다.
마을 주민의 인심이나 향풍(鄕風)이 어떠했었던가를 이해가 될 것이다.
1960년대에서 70년대초까지만 하여도 서산지방은 현대적 산업시설이 거의 없는 농촌지대 였었다. 이 시기에 서산군(현 태안군 지역 포함)내에서 논 밭(田畓) 지가(地價)가 가장 비싼 곳으로도 이름났었는데 원인은 한정된 지역내에서의 토지의 부족도 있었지만 비교적 자연적 수리원(水利源)이 좋고 토질이 비옥했기 때문이었다. 고로(古老)들에 의하면 이곳주민들은 어느 곳 보다도 인심좋은 것이 가장큰 자랑이라 하였다.
지산리(芝山里)에는 도요동, 달천(達川) 지파동(芝杷洞) 구억말(九億村) 남아시들 벌어지 문뱅이 산재(山底) 방아다리, 벌떡운지 등의 자연마을이 있고, 관청 모랭이 등우골 물바위 무릅절터 말등산 대숲모랭이와 같은 지명이 있으며 동사(東寺)와 국현남 및 유동원의 효자정려가 있다.
창리(倉里)는 부석반도의 남쪽 끝머리에 위치한 마을로 조선시대에 왜현리(倭縣里)이었는데 구한말인1895년 행정구역개편 때에는 항촌(項村)과 창촌(倉村)으로 분할되었다가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창리(倉里)가 되었다. 조선시대에 왜현리(倭縣里)라 했던 것은 박시언(朴始彦)이란 군수가 이곳에 침입해왔던 왜적(倭敵)을 격파하는 전과(戰果)가 있었으므로 그때부터 왜현리(倭縣里)라 했다고 1926년 발행 서산군지에는 기록되어 있다.(禾邊面 倭縣里 諺傳 瑞山郡守 朴始言 擊倭縣之故 曰 倭縣里). 창리(倉里)는 조선시대 이곳에 1)주사창(舟師倉)이 있었으므로 유래된 이름이다.
동군지(同郡誌)에는 주사창(舟師倉)2)15칸(間)이 화변면 왜현리(금부석면 창리)에 있는데 그후에 군기창고가 되더니 1896(건양원년)에 없어졌고 다만 그 부지는 231평 2홉 7작이라 기록되어 있어 현 마을 이름도 이에 유래된 것을 알수 있다.(舟師倉十五間在禾邊面內 倭縣里今浮石面倭縣里)(今倉里是藏軍器之朝鮮朝建陽元年申頹壞口遺擊地二百三十一坪二合七勺). 주사창(舟師倉)에는 수군선박(水軍船舶)을 매어 두는 곳으로 거북선 1척 방선 1척 동후선(척후선으로 추정됨)3척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926발행군지 하권 69쪽 舟師船舶所餘字龜船一隻防船一隻冥船一隻同候船三隻) 최근 어떤 역사학자가 창리(倉里)가 바닷가이므로 조창(漕倉)이 있었던 곳이라 잘못 기록한 것을 바로 잡아준 일이 있는데 최근 년에는 시(市)에서도 주사창에 대한 자세한 안내판을 현지마을에 세워진 것을 보았다.
우리 지역에서 마을 유래에 대하여 군지에 이렇게 자세히 기록된 곳은 창리(倉里)뿐인데 마을로서는 중요한 역사를 간직한 자랑스러운 곳이다.
창리(倉里)에는 항촌(項村:목말)창촌(倉村)등의 두 개의 자연마을로 구분되고 구창터( 倉址) 닭섬(鷄島) 쏘아섬, 대섬(竹島) 상고개(上峴) 시루섬(증) 검조도 : (檢鳥島) 아니배 조도(鳥島) 창말나루터(倉津)
칠전리(七田里)는 전회 봉락리(鳳洛里)편에서 밝혔듯이 조선시대까지는 옷밭(漆田)마을인 칠전(七田里)였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1895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옷밭(漆田)마을이라는 칠전리(七田里)라는 이름은 없어지고 일부는 봉동(鳳洞)과 낙양리(洛陽里)로 되고 일부는 금굴리(金堀里) 사점리(沙店里)로 분리되고 일부는 서당동(書堂洞)으로 분리 편입 되었었다.
일제때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금굴리(金掘里)사점리(沙店里)가 합쳐지고 서당동(書堂洞)일부가 분활 되어 칠전리(七田里)라는 마을이 되었다.
칠전리(七田里)는 옷밭(漆田)에서유래된 것이지만 어느새 유래와는 아무런 관련없는 일곱칠자(七)로 쓰여지는 바람에 글자 뜻대로라면 일곱 개의 밭이 있는 동리가 되었다.
칠전리(七田里)는 동서간(東西間)은 1km 미만의 넓이로 좁고 남북(南北)은 긴 마을이어서 북쪽 봉락리(鳳洛里)경계 지점에서 남쪽 마룡리(馬龍里)경계지점 까지는 4km가 넘는 긴 마을이다.
그럼에도 이장(里長) 한 사람이 관할하는 단리(單里)마을이기 때문에 북쪽마을 주민과 남쪽마을 주민간에는 접촉 기회가 작은 마을이다.
마을회관이 있는 중심 마을은 지금도 옷밭골(漆田谷)이라 부르는데 이 근방에는 지금도 옷나무들이 약간 남아 있어 옛 잔영(殘影)을 엿 볼수 있다고 한다.
최근 학계나 행정기관의 연구기관에서 생활문화의 옛 유적지나 유물에 대한 조사가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데 고분(古墳)도요지(陶窯址)와요지(瓦窯址) 불적(佛蹟)등 현시적(現示的)으로 나타나는 것에 한하여 조사하고 이러한 각종 옛물품을 만들어 내는 기능(機能)과 장인(匠人)들의 기술 수준과 유래에 대하여는 소홀한 것 같다.
이곳이 89가구가 사는 옷밭(漆田)마을이 었다면 그들이 만들어 냈던 물건은 무엇이며 그 질이나 용처는 어디였을까? 그러한 모든 것들에 대한 것을 흔적이라도 찾아보았으면 하는 것이다.
오늘날 미국이나,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고 세계 일류국가가 된 것은 기술자를 최우대하는 정책에 기인 된다는 것을 이해 한다면 화변소(禾 所)<기술자 집단 거주지>를 상징하는 칠전(七田)이라는 마을의 유래나 내력에대한 같은 연구가 거듭되어야 할 것이고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옷나무(漆田)에 대한 보호대책도 있어야 할 것이다.
칠전리(七田里)에는 성적골(聖積谷) 옷밭골(漆田谷) 손부락재, 통개(桶浦) 금곡(金谷) 해빈여(海濱嶼) 지지골 서근들뿌리, 사기점(沙器店) 국사봉(國師峯) 왜봉산(倭峯山) 서당동(書堂洞)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2), 천수만 주변의 지명해설.
◆부석면(浮石面)【면】 서산군 1읍 17면의 하나. 본래 서산군의 지역으로서 마산면(馬山面)이라 하여 시동(?洞), 갈마(渴馬), 월계(月溪), 수현(秀峴), 취포(翠浦), 강경(江境), 가전(柯田), 사장(沙場), 송정(松亭), 평리(坪理), 대두(大頭)의 11개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월계리 일부는 인지면에 넘겨 주고, 화변면(禾邊面)의 산저(山底), 지파(芝巴), 도천(桃天), 시동(詩洞), 강촌(江村), 서당(書堂), 봉동(鳳洞), 낙양(洛陽), 마룡(馬龍), 칠전(七田), 창동(創洞)의 11개리를 병합하여 적돌강(積乭江)에 있는 커다란 바위가 밀물 때에도 물에 잠기지 않고 마치 더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부석면이라 하여 가사, 갈마, 강당, 강수, 대두, 마룡, 봉락, 송시, 월계, 지산, 창리, 취평, 칠전의 13개리로 개편 관할하다가,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에 의하여 안면면의 간월도리를 편입하여 현재 14개리가 됨. 동쪽은 바다 건너 고북면과 해미면, 남쪽은 바다 건너 안면면, 서쪽은 바다 건너 남면과 태안읍, 북쪽은 팔봉면과 인지면에 각각 닿음.
◉가사리(柯沙理) 【리】본래 서산군 마산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가전리와 사장리를 병합하여 가사리라 해서 부석면에 편입됨.
가사교(柯沙橋) 【다리】길현, 원산 사이에 있는 다리. 길이 6m
가사저수지 [인평저수지] 【저수지】가사리와 태안면 인평리에 걸쳐 있는 저수지.
가전(柯田) 【마을】→갈밭.
갈미 【마을】갈밭 북쪽에 있는 마을.
갈밭 [가전] 【마을】사쟁이 동남쪽에 있는 마을. 전에 갈밭이 있었다 함.
강경벌¹ 【마을】강경벌에 있는 마을.
강경벌² 【들】⇒ 강수리의 “강경벌”.
길현(吉峴) 【고개】→ 길현고개.
길현고개 [길현] 【고개】갈밭에서 강수리 배짤말로 가는 고개.
대성농장(大成農場) 【농장】사쟁이 서쪽에 있는 농장. 넓이 1만평.
동머시리 【마을】갈밭 동쪽에 있는 마을. 앞에 못이 있음.
동머시리광산 【광】동머시리 북쪽에 있는 금광.
둥구뫼 [원산] 【산】갈밭 동쪽에 있는 둥근 산.
사대감제방 【뚝】→ 사댓감뚝.
사댓감뚝 [사대감제방] 【뚝】사쟁이 남쪽에 있는 뚝.
사장교(沙場橋) 【다리】사쟁이 남쪽에 있는 다리. 길이 6m.
사쟁이 [사장이] 【마을】가사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산양굴 【마을】사쟁이 서쪽에 있는 마을.
소등이곶이 【곶】사쟁이 남쪽에 있는 곶.
연봉산(蓮峯山) 【산】사쟁이 북쪽에 있는 산. 봉우리가 연꽃 같다 함.
옻샘 【샘】강경벌 동쪽에 있는 샘. 옻 오른 데에 효험이 있음.
원산(圓山) 【산】→둥구뫼.
인평교(仁坪橋) 【다리】→흥인교.
인평저수지(仁坪貯水池) 【저수지】→가사저수지.
일주정(一柱亭) 【정】대성농장 안에 있는 정자.
청룡뿌리 【부리】갈밭 서쪽에 있는 산부리.
평정들 【들】갈미 남쪽에 있는 들.
한애물골 【골】사재이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흥인교(興仁橋) [인평교]【다리】사장이 서쪽에 있는 다리.
◆ 간월도리(看月島里) [간월도] 【리】본래 서산군의 지역으로서, 간월도라 하였는데, 고종 32년(1895) 지방 관제 개정에 의하여 태안군 안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간월도리라 해서 사산군에 부석면에 편입됨.
간월도(看月島) 【섬】→간월도리.
간월암(看月庵) 【절】간월도에 있는 절. 1941년에 안면 면장 박동래(朴東來)와 중 송만공(宋萬空)이 옛 절터에 다시 세웠음.
범말 【마을】간월도 남쪽에 있는 마을.
새말 【마을】간월도 북쪽에 새로 된 마을.
원통대(圓通臺) 【바위】간월도에 있는 바위. 예전에 거사(居士) 몽년(蒙年)이란 사람이 이곳에서 살기 위하여 등나무 100여주를 심어서 위가 집처럼 되었다 함. 또 한 초당터가 있는데, 고려 때 정인경(鄭仁卿)의 옛터라 함.
큰말 【마을】간월도에서 가장 큰 마을.
◆ 갈마리(渴馬里) [갈마지, 갈마곶, 갈마] 【리】본래 서산군 마산면의 지역으로서 큰 벌판이 곶이를 이루었으므로 갈마곶 또는 갈마지, 갈마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시동 일부를 병합하여 편입됨.
갈마(渴馬) 【마을】→갈마리.
갈마곶(渴馬串) 【마을】→갈마리.
개새밋들 【들】 쇠꽂모랭이 서쪽에 있는 들.
개야짓들 【들】갈마지 앞 남쪽에 있는 들.
거문녀 [부석] 【바위】 고잔 서쪽에 있는 바위. ① 빛이검음. ② 60명이 앉을 만한 바위가 물 위에 더 있는 것 같음. 이 바위로 인하여 면의 이름이 되었음.
고두리뿌리 【부리】고잔 남쪽에 있는 부리
고잔(高棧) [고잠] 【마을】갈마리에서 가장 큰 마을. 곶이로 되었음.
고잠(高岑) 【마을】→고잔.
도낏재 【고개】영암에서 송시리로 가는 고개.
돌모루 [석우] 【마을】고잔 동북쪽에 있는 마을. 모롱이에 돌이 있음.
땡꼇 【마을】모시미 동남쪽에 있는 마을.
모시미 [저심] 【마을】돌모루에 동쪽에 있는 마을. 옛날에 모시가 유명하였음.
뱅상굴 【들】돌모루 남쪽에 있는 들.
부들배미 【논】개야짓들 서쪽에 있는 논. 부들이 많았었다 함.
부석(浮石) 【바위】→거문녀.
불당곡(佛堂谷) 【마을】→불당골.
불당골 [불당곡] 【마을】돌모루 동북쪽에 있는 마을. 전에 불당이 있었음.
사정터(射亭터) 【터】돌모루 동쪽에 있는 사정의 터.
사정터나무 【나무】사정터에 있는 느티나무.
산짓물들 【들】모시미 남쪽에 있는 들.
산짓물샘 【우물】산짓물들 복판에 있는 샘. 물이 잘 나고 참.
삼복고개 【마을】모시미 동북쪽에 있는 고개.
석우(石隅) 【마을】→돌모루.
쇠꽂모랭이 【모롱이】고잔 서쪽에 있는 모랭이. 모양이 쇠꼬챙이처럼 생겼음.
수랑배미 【논】황섬들 동쪽에 있는 논. 수렁이이 있음.
안고잔 【마을】고잔 안쪽에 있는 마을.
장검교(長劍橋) 【다리】→장금교.
장금교 [장검교] 【다리】땡꼇 동남쪽 장금내(군, 산천)에 놓인 다리. 길이 20m. 1964년에 놓음.
저심(苧心) 【마을】→모시미.
진재 【고개】불당골에서 송시리로 가는 긴 고개.
황섬들 【들】고잔 서쪽에 있는 들.
◆ 강당리(江堂里) 【리】본래 서산군 화변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강촌과 시동, 서당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강촌과 서당동의 이름을 따서 강당리라 하여 부석면에 편입됨.
각후동(角後洞) 【마을】→뿔너머동네.
강촌(江村) 【마을】강당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대기(大基) 【마을】→한터.
대포(大浦) 【개】→큰개.
동뫼 [동산] 【마을】동산정 밑에 있는 마을.
동산(東山) 【마을】→동뫼.
동산정 【산】한터 뒤에 있는 산.
두멍배미 【논】서당동 서쪽에 있는 논. 두멍처럼 생겼음.
등기산 [등기재] 【산】강촌 동쪽에 있는 산. 정월 대보름날 이곳에서 달맞이를 함.
등기재 【산】→등기산.
말배미 【논】소내다리 북쪽에 있는 논. 모앵이 네모진 말(斗)처럼 생겼음.
망등산(望登山) 【산】강촌 북쪽에 있는 산. 전에 국상이 있을 때 망곡(望哭)했다 함.
문필봉(文筆峯) [봉우재] 【산】새터 서쪽에 있는 산. ① 붓끝처럼 뾰죽함. ② 예전에 봉화를 들던 곳임.
배알산(拜謁山) 【산】강촌 서남쪽에 있는 산. 마룡리 구사봉 맞은 편이 됨.
봉기(鳳基)【마을】→새터.
봉우재 【산】→문필봉.
불당곡(佛堂谷) 【골】→불당골.
불당골 [불당곡] 【골】강촌 남쪽에 있는 골짜기. 전에 불당이 있었음.
뿔너머 동네 [각후동, 사당동] 【마을】강촌 북쪽에 있는 마을. 곶처럼 나온 산부리가 있음.
사정터 【터】동산정 위 남쪽에 있는 정자 터. 전에 활쏘던 곳임.
새터 [봉기] 【마을】강촌 서쪽 봉우재 밑에 있는 마을.
서당동(書堂洞) 【마을】→뿔너머동네
서령염전(瑞寧鹽田) 【염밭】시어지 동쪽에 있는 염밭. 넓이 2-3정보.
시어지 [시동] 【마을】강촌 동쪽에 있는 마을. 시인이 많이 났다 함.
어치리 저수지 【저수지】서당동 복판에 있는 저수지.
우천(牛川) 【내】→소내
우천교(牛川橋) 【다리】→소내다리.
육간월(陸看月) 【모롱이】문필봉 남쪽 기슭에 있는 산부리. 간월도리 건너가 됨.
저수지방죽 【뚝】어치리저수지 남쪽에 있는 뚝.
절굴 【마을】뿔너머동네 북쪽에 있는 마을. 전에 절이 있었다 함.
큰개 [대포] 【개】강촌 남쪽에 있는 큰 개. 여러 골짜기 냇물이 합쳐서 이곳에 모여 나감.
한터 [대기] 【마을】강촌 복판에 있는 마을.
회안대군묘(懷安大君墓) 【묘】동산정에 있는 이조 태조의 제 4남 회안대군 방간(芳幹)의 묘.
강수리(江秀里) 【리】본래 서산군 마산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강경리와 수현리를 일부를 병합하여 강수리라 해서 부석면에 편입됨.
갓굴밭 【마을】아랫강수 서쪽에 있는 마을.
강경(江境) 【마을】아랫강수 서북쪽에 있는 마을.
강경벌 【들】강경 앞에 있는 들. 가사리와 통하였음.
강경저수지(江境貯水池) [강수저수지] 【저수지】강경 남쪽에 있는 저수지. 넓이 4정보, 몽리 면적 41정보. 1943년에 만듦.
강수리공동묘지(江秀里共同墓地) 【묘】갓굴밭 서쪽에 있는 공동묘지.
강수저수지(江水貯水池) 【저수지】→강경저수지.
기촌(機村) 【마을】→배짤말.
능허대(凌虛臺) 【대】돌뿌리 남쪽에 있는 대.
돌뿌리 【부리】아랫강수 서남쪽에 있는 부리. 돌이 많음.
돌뿌리 제방 【뚝】돌뿌리 동쪽에 있는 뚝. 길이 1km, 폭 3m. 1957년도에 만듦.
말똥산 【산】능허대 남쪽에 있는 산.
밤굴 [율곡] 【마을】아랫강수 동쪽에 있는 마을.
배짤말 [기촌] 【마을】아랫강수 북쪽에 있는 마을. 옥녀가 베를 짜는 형국이라 함.
버드렁치 【마을】웃강수 동북쪽에 있는 마을.
빼재¹ [수현] 【마을】빼재고개 밑에 있는 마을.
빼재² [수현] 【산】웃강수 동북쪽에 있는 산. 산이 높게 빼어났음.
빼재고개 【고개】빼재 산 남쪽에 있는 고개.
상강수(上江秀) 【마을】→웃강수
서낭당이 【고개】배짤말에서 취평리로 가는 고개. 서낭당이 있음.
솔섬말 【마을】아랫강수 남쪽에 있는 마을. 솔밭이 많음.
수현(秀峴) 【마을】→빼재¹
수현(秀峴) 【산】→빼재²
아랫강수 [하강수] 【마을】강수리를 위아래로 나누어서 아래쪽이 되는 마을.
안골 【마을】용수동 안쪽에 있는 마을.
요곡(堯谷) 【마을】→요꼴.
요꼴 [요곡] 【마을】웃강수 북쪽에 있는 마을.
용난터 【터】갓굴밭 북쪽에 있는 터. 용이 났다 함.
용수동 【마을】웃강수 남쪽에 있는 마을.
웃강수 [상강수] 【마을】강수리를 위아래로 나누어서 위쪽이 되는 마을.
율곡(栗谷) 【마을】→밤굴.
청금산 【산】용수동 동남쪽에 있는 산.
하강수(下江秀) 【마을】→아랫강수.
해나지 【마을】 밤굴 남쪽에 있는 마을.
◆ 대두리(大頭里) [한머리, 대두] 【리】본래 서산군 마산면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큰 머리처럼 되었으므로, 한머리 또는 대두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화변면의 낙양동 일부를 병합하여 대두리라 해서 부석면에 편입됨.
고래 【들】사양동 앞에 있는 들. 물이 좋음.
고래모통이 【모롱이】고래 옆에 있는 모롱이.
고리짝배미 【논】고래모통이 북쪽에 있는 논. 모양이 고리짝처럼 생겼음.
구억말 【마을】→부엉굴.
구억지 【마을】모얀 남동쪽 구석진 곳에 있는 마을.
내건너 【마을】부엉굴 남쪽 내 건너편에 있는 마을.
냇매미 【논】구억지 남쪽에 있는 논. 개울을 개간하였음.
느리재 【고개】사양골에서 취평리로 가는 고개. 경사가 느림.
다락굴 【골】사양굴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당재¹【고개】한머리에서 취평리로 가는 고개. 당집이 있음.
당재²【골】당재 밑에 있는 골짜기.
대두(大頭) 【마을】→대두리.
대두리양식장(大頭里養殖場) 【양식장】한머리 서쪽에 있는 굴 양식장.
대두염전(大頭鹽田) 【염밭】한머리 서북쪽에 있는 염밭. 넓이 11정보. 1912년에 만듦.
대두저수지(大頭貯水池) 【저수지】→중탱이저수지.
대삿가올샘 【우물】사양골 동쪽에 있는 샘. 이 샘물을 받아서 못을 만들었음.
대삭가올소류지 【못】대삿가올샘 밑에 있는 못.
동산 【산】한머리 서쪽에 있는 산.
뒷굴 【마을】사양골 북쪽에 있는 마을.
들마당 【마을】모얀 남동쪽에 있는 마을. 넓은 타작 마당이 있었음.
띠밭모랭이 【모롱이】고래모통이 동쪽에 있는 모롱이. 띠가 많이 남.
마랫들 【들】고래 남서쪽에 있는 들.
말무덤 【묘】모얀 북쪽에 있는 큰 무덤. 예전에 말이 전장에서 죽은 주인의 의복을 물고 이곳까지 와서 기진하여 죽었으므로 그 죽은 자리에다 묻었다 함.
말무덤재 【고개】말무덤이 있는 고개.
매봉재 【산】사양골 동쪽에 있는 산.
명막굴 【골】상고집매 동쪽에 있는 골짜기. 명매기가 많이 삶.
모얀 【마을】사양골 북쪽에 있는 마을. 도비산(군, 산천)쪽이 됨.
부엉굴 [구억말] 【마을】한머리 동쪽에 있는 마을. 부엉배가 있음.
부엉배 【바위】부엉굴 동쪽 봉암산(군, 산천) 중턱에 있는 바위. 부엉이가 살았음.
부엉이배미 【논】고래모통이 동족에 있는 논.
사양골 [사양동] 【마을】한머리 동남쪽에 있는 마을. 좋은 샘이 있음.
사양동(斜陽洞) 【마을】→사양골.
상고집매 【모롱이】띠밭모랭이 동쪽에 있는 모롱이. 상여집이 있음.
서낭당 【당】사양골 남쪽에 있는 서낭당.
수랑배미 【논】고래 서쪽에 있는 논. 수렁이 있음.
아래말 【마을】사양골 아래쪽에 있는 마을.
양지편 【마을】붕엉굴 양지쪽에 있는 마을.
오릿굴 【마을】사양골 남쪽에 있는 마을.
웃말 【마을】사양골 위쪽에 있는 마을.
장자마당터 【점】부엉배 바로 뒤쪽에 있는 터. 장자가 살았다 함.
점산 【산】한머리와 사양골 사이에 있는 산. 그릇점이 있었음.
점앞 【논】점산 앞에 있는 논.
조사배미 【논】당재 서북쪽에 있는 논.
중탱이 【논】한머리와 사양골 사이에 있는 논.
중탱이저수지 [대두저수지] 【저수지】중탱이 위에 있는 저수지. 넓이 2정보, 몽리 면적 13정보. 1940년에 만듦.
차돌배¹【마을】차돌배가 있는 마을.
차돌배²【바위】다락굴 서남쪽에 있는 차돌로 된 바위.
한머리 【마을】→대두리.
◆ 마룡리(馬龍里) [마룡] 【리】본래 서산군 화변면의 지역으로서 못에서 말이 나왔다 하여 마룡이라 한다 하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서당동 일부를 병합하여 마룡리라 해서 부석면에 편입됨.
고잠(高岑) 【마을】마룡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높은 산밑이 됨.
국사봉(國師峯) 【산】도라시 동남쪽에 있는 산. 전에 중국 가는 사신이 이곳에서 제사 지냈다 함.
낙은동(樂隱洞)【마을】→날근터.
난곡농장(蘭谷農場)【농장】심포 남쪽에 있는 농장.
날근터 [낙은동] 【마을】고잠 남쪽에 있는 마을.
도라시 【마을】고잠 동남쪽에 있는 마을.
마룡(馬龍) 【마을】→마룡리.
심포(深浦) 【마을】→짚은개.
심포저수지 【저수지】→짚은개저수지.
여후고개 【고개】짚은개에서 강당리 서당동으로 가는 고개. 전에 여우가 있었음.
용못터 【터】짚은개 서쪽에 있는 못터.
장군개 [장군포] 【개】마룡리 남쪽 끝에 있는 개.
장군포(將軍浦) 【마을】→장군개.
장안 【마을】마룡리에 있는 마을.
짚은개 [심포] 【마을】고잠 서쪽에 있는 마을. 앞에 깊은개가 있음.
짚은개저수지 [심포저수지] 【저수지】짚은개 북쪽에 있는 저수지. 1929년에 만듦.
창포샘 【우물】고잠 남쪽에 있는 우물. 창포가 많음.
윗노라실 [상노라포] 【마을】노라실 위쪽에 있는 마을.
장승배기 【마을】봉동 남쪽에 있는 마을. 장승이 서 있었음.
죽논 【논】→궁논.
청용뿌리 【부리】봉동 동쪽에 있는 산부리.
탕관배미 【논】감니뭇골 복판에 있는 논.
탕점 【마을】검은돌 북쪽에 있는 마을.
하노라포(下老羅浦) 【마을】→아래노라실.
황새바위【바위】감나뭇골 동쪽에 있는 바위. 동그랗고 넓적함.
흑석(黑石) 【마을】→검은돌.
흑석저수지 [봉락저수지] 【저수지】검은돌 남쪽에 있는 저수지. 넓이 2정보.
◆ 송시리(松?里) 【리】본래 서산군 마산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송정리와 시동, 갈마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송정과 시동의 이름을 따서 송시리라 하여 부석면에 편입됨.
가마시 【마을】송시리 870번지 일대로서 갈마리에서는 북쪽으로, 감꿀에서는 서쪽에 위치한다.
가꿀(앞가굴) 【마을】
가꿀 【논】
간사지 【논】
감꿀 [시동] 【마을】송시리에 으뜸되는 마을. 전에 감나무가 있었음.
구억말 【마을】속말 북쪽 구석에 있는 마을.
뒷골 [죽림] 【마을】구억말 서쪽 산 너머에 있는 마을.
마등산 【산】→말뚱산.
말뚱산 [마등산] 【산】구억말 서쪽에 있는 산. 높이 96m.
서낭고개 【고개】송시리에서 강수리의 아랫강수로 가는 고개. 서낭당이 있음.
속말 【마을】감꿀 복판에 있는 마을.
송정(松亭) 【마을】감꿀 동북쪽에 있는 마을.
시동(?洞) 【마을】→감꿀.
은방틀 【들】속말 앞에 있는 들.
은배미 【논】속말 남쪽에 있는 논. 수원이 좋은 샘이 있고, 은방울꽃을 심었다 함.
시오리 【논】
마당배미 【논】
◆ 월계리(月溪里) [달내, 월계]【리】본래 서산군 마산면의 지역으로서, 달내 또는 월계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수현리, 취포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월계리라 해서 부석면에 편입됨.
달내 【마을】→월계리.
도곡(都谷) 【마을】→돗골.
돗골 [도곡] 【마을】환돗골 북쪽에 있는 마을.
두거미 【마을】환돗골 서쪽에 있는 마을.
두하산 [두화산] 【산】환돗골 동쪽에 있는 산. 높이 101m.
두화산(杜花山) 【산】→두하산.
바라미논골 【골】환돗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논이 있음.
솔안 [송내] 【마을】황골 남쪽에 있는 마을. 앞에 소(沼)가 있음.
송내(松內) 【마을】→솔안.
월계(月溪) 【마을】→월계리.
월계리공동묘지 【묘】솔안 동쪽에 있는 공동 묘지.
청금산(靑金山) 【산】솔안 북쪽에 있는 산.
환도곡(環都谷) 【마을】→환돗골.
환도곡저수지(環都谷貯水池) 【저수지】→환돗골저수지.
환돗골 [환도곡] 【마을】월계 동쪽에 있는 마을. 돗골에서 가장 큼.
환돗골저수지 [환도곡저수지] 【저수지】환돗골 남쪽에 있는 저수지. 1928년에 설치했음.
황곡(黃谷) 【마을】→황골.
황곡저수지(黃谷貯水池) 【저수지】→황골저수지.
황골 [황곡] 【마을】돗골 서북쪽 큰 골짜기에 있는 마을.
황골고랑 【돌】황골에 있는 돌.
황골저수지 [황곡저수지] 【저수지】황골 남쪽에 있는 저수지. 1928년에 시설함.
황새골 【골】환돗골 동쪽, 두하산 서쪽에 있는 골짜기.
흥천곡(興千谷) 【마을】→흥천꼴.
흥천꼴 [흥천곡] 【마을】두거미 남쪽에 있는 마을.
◆ 지산리(芝山里) 【리】본래 서산군 화변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산저리, 지파동, 도요리, 시동 일부를 병합하여 지파와 산저의 이름을 따서 지산리라 하여 부석면에 편입됨.
관청모랭이 【모롱이】지산리에 있는 모롱이.
국효자문 【정문】서당굴 주앙에 있는 국 효자의 정문.
남아시 【들】남아시논이 있는 들.
남아시논 【논】도요동 서남쪽에 있는 논.
남아시샘 【우물】남아시에 있는 샘.
달앳개 【개】달천 동쪽에 있는 샘.
달천(達川) 【마을】동요동 남쪽에 있는 마을.
대숲모랭이 【모롱이】철쟁이재 끝에 있는 모롱이.
대전 【마을】도요동 서쪽에 있는 마을.
도요 【마을】→도요동.
도요동(桃夭洞) [도요] 【마을】지산리 중앙에 있는 마을.
도욧개 【개】도요 동쪽에 있는 개.
돌팍뫼 【산】달천 남쪽에 있는 산. 돌이 많음.
동사(東寺) 【절】→동절.
동아시 【들】달천 동쪽에 있는 들.
동앳굴 【골】산저 서쪽에 있는 골짜기.
동절 [동사] 【절】산저 동쪽에 있는 절.
떡갈나무 【나무】지파동 북쪽에 있는 덕갈나무. 서산군 내에서 가장 오래 된 나무임.
망등산 【산】지파동 서쪽에 있는 산.
매봉재 【산】지파동 서쪽에 있는 산.
무릅절터 【터】산저 북쪽에 있는 절터.
문뱅이 【골】달천 남쪽에 있는 골짜기.
물바위 【바위】동절 남쪽에 있는 바위.
방교(芳橋) 【마을】도요동 동쪽에 있는 마을.
방교들 【들】방교 서쪽에 있는 들.
버러짓들 【들】산저 동남쪽에 있는 들.
사고개 [사현, 사우고개] 【고개】도요동 서쪽에 있는 고개. 취평리에서부터 지산리가지 고개가 넷이 있음.
사우고개 【고개】→사고개.
사현(沙峴) 【고개】→사고개.
산저(山底)【마을】→산제.
산제 [산저] 【마을】도요동 남동족에 있는 마을. 도비산(군, 산천-) 밑이 됨.
새양골 【골】산저 북쪽에 있는 골짜기.
생굴 【골】산저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좋은 샘이 있음.
서당굴 [서당동] 【마을】도요동 북쪽에 있는 마을. 서당이 있었음.
서당동(書堂洞) 【마을】→서당굴.
서하시 【들】달천 서쪽에 있는 들.
소도비산 (小都飛山) 【산】→작은도비산.
수틀팍재 【고개】도요동 동북쪽 작은도비산에 있는 고개.
안산밑 【들】방교 앞 산 밑에 있는 들.
애겨물골 【골】애겨물샘이 있는 골짜기.
애겨물샘 【샘】지파동 서쪽에 있는 샘.
윳판바위 【바위】지파동 동쪽에 있는 바위. 윷판이 그려져 있음.
작은도비산 [소도비산] 【산】도요동 북쪽, 도비산(군, 산천) 옆에 있는 작은 산.
점텃골 【골】방교 서쪽에 있는 골짜기. 점이 있었음.
정원골 【골】산저 북쪽에 있는 골짜기.
정원괴목 【나무】정원골 북쪽에 있는 느티나무. 둘레 1.5아름.
지산염전(芝山鹽田) 【염밭】달천 동쪽에 있는 염밭.
지파동(芝巴洞) 【마을】도요동 서북쪽에 있는 마을.
철쟁이재【고개】도요동 북쪽, 작은도비산 북쪽에 있는 고개. 전에 철장(鐵杖)을 박았었다 함,
통산배미 【논】 방교들 가운데 있는 논. 동그란 샘이 있어 물이 잘 남.
홍규석광산(紅硅石鑛山) 【광】도요동 북쪽에 있는 광산. 홍규석이 남.
◆ 창리(倉里) [창말, 창촌, 왜현리] 【리】본래 서산국 회변면의 지역으로서, 이조 때 주사창(舟師倉)이 있었으므로 창말 또는 창촌이라 하였는데,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창리라 하여 부석면에 편입됨.
검조도(檢潮島) 【섬】→아니배.
구창터 【터】창말 북쪽에 있는 창고 터.
닭섬 [조도] 【섬】아니배 동쪽에 있는 섬. 물새가 많이 앉음.
대섬 [죽도] 【섬】창말 동쪽에 있는 섬. 대나무가 많음.
목말 [항촌] 【마을】창리 북쪽에 잇는 마을. 지형이 목처럼 되었음.
삼고개 【고개】목말에서 창말로 가는 고개. 셋으로 되었음.
시루섬 【마을】창말 남쪽에 있는 마을. 지형이 시루처럼 생겼다 함.
아니배 [검조도] 【섬】창말 남쪽에 바다 가운데 있는 섬. 큰 바위로 되었는데 이 바위가 물에 잠기는 정도를 보아서 조수의 높낮이를 알게 됨.
양어방죽터 【논】창말 남쪽에 있는 논. 전에 고기를 기르는 방죽이었음.
조도(鳥島) 【섬】→닭섬.
주사창터(舟師倉-) 【터】창말에 있는 주사창의 터. 이조때 이곳에 주사 선박소(舟師船舶所)를 두고, 구선(龜船), 방선(防船), 병선 각 1척, 사후선 3척을 두어서 이 지방을 지키게 하였음.
죽도(竹島) 【섬】→대섬.
창리염전터 [창촌염전터] 【들】목말 남쪽에 있는 들. 전에 염전이 있었음.
창말【마을】→창리.
창말나루터 【나루】창말에서 남쪽 안면도 소애로 건너가는 나루터.
창말당 【당】양어방죽터 남쪽에 있는 신당. 배가 떠날 때 이곳에 제사를 지내어 배의 안전을 빎.
창촌(倉村) 【마을】→창리.
창촌염전터(倉村鹽田-) 【터】→창리염전터.
토끼섬[토도] 【섬】창말 남동쪽에 있는 섬. 모양이 토끼같다 함.
토도(兎島)【섬】→토끼섬.
항촌(項村) 【마을】→목말.
◆ 취평리(翠坪里) 【리】본래 서산군 마산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취포리와 평리를 병합하여 취평리라 해서 부석면에 편입됨.
도비광산(島飛鑛山) 【광산】→부석광산.
뒷논틀【논】새말 남쪽에 있는 논.
부석광산(浮石鑛山) [도비광산] 【광산】취평리 동남쪽 도비산(군, 산천)에 있는 광산, 홍규석을 캠.
부석사(浮石寺) 【절】취평리 동쪽 도비산(군, 산천) 서족에 있는 절. 유금헌(柳琴軒)이 고려가 망함을 슬피여겨 이곳에 집을 짓고 글을 읽으며 세월을 보내다가 죽었는데, 그를 따르던 중들이 그 집을 절로 만들었다 함.
산밑골 【골】톳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도비산(군, 산천)밑이 됨.
산밑저수지 [취평저수지] 【못】산밑골에 있는 못.
새말 [신촌] 【마을】취평리 북쪽에 새로 된 마을.
성안 【마을】취평리 서쪽에 있는 마을.
수도암(修道庵)【절】부석사 동북쪽에 있는 절.
신촌(新村) 【마을】→새말.
우리얼고랑 【골】새말 북쪽에 있는 골짜기.
장검교(長劍橋) 【다리】→장금교.
장금교 [장검교] 【다리】성안 서쪽에 있는 다리.
취개 [취포] 【마을】취평리 동쪽에 있는 마을.
취평저수지(翠坪貯水池) 【저수지】→산밑저수지.
취포(翠浦) 【마을】→취개.
토곡(土谷) 【마을】→톳굴.
톳굴 [토곡]【마을】취평리 남쪽에 있는 마을.
평풍바위 【바위】취평리 동쪽, 도비산(군, 산천) 북쪽에 있는 바위. 모양이 병풍 같다 함.
◆ 칠전리(七田里) [옻밭굴, 칠전] 【리】본래 서산군 화변면의 지역으로서 옻나무 밭이 많으므로 옻밭굴 또는 칠전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서당동 일부를 병합하여 칠전리라 해서 부석면에 편입됨.
국사봉(國師峯) 【산】성적굴 동쪽에 있는 산.
금곡(金谷) 【마을】칠전에 있는 마을.
봉전제방(鳳田堤防) 【뚝】⇒ 봉락리의 “봉전제방.”
사기점(沙器店) 【마을】금곡 남쪽에 있는 마을. 전에 사기점이 있었음.
서근돌뿌리 【부리】사기점 북쪽에 있는 부리. 돌이 푸석푸석함.
성적굴 [성적동] 【마을】칠전 북쪽에 있는 마을. 절이 있었음.
성적동(聖積洞) 【마을】→성적굴.
성절말 [형제울, 형제리] 【마을】옻밭굴 북쪽에 있는 마을. 절터가 있음.
손부락재 【고개】금곡 북쪽에 있는 고개.
옻밭굴 【마을】→칠전리.
왜봉산 【산】사기점 복판에 있는 작은 산. 사기점의 굴뚝이 있었음.
절터 【터】성절말 동북쪽에 있는 절 터.
지짓굴 【마을】사기점 옆에 있는 마을.
칠전(七田) 【마을】→칠전리.
칠전교(七田橋) 【다리】칠전리에 있는 다리. 길이 5m, 너비 4m.
통개 【개】금곡 북쪽에 있는 개.
해빈녀(海濱 )【바위】사기점 서쪽 바다에 있는 바위. 밀물에는 안 보임.
형제리(兄弟籬) 【마을】→성절말.
형제울 【마을】→성절말.
결론
이제 남은 문제는 이 동네 사람들이 왜 가마시로 오게 된 것일까 하는 문제이다. 사회 이동의 요인이 무었나를 탐구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다양한 접근을 통하여 탐색한 결과 이 마을 최초 이주자는 崔氏라는 것과 비등한 시대에 權氏가 이주 해 와서 살았다는 것을 찾아내었다. 그것은 최씨의 조상 11대조(최종필 기준)가 이 갈마리에 있고 8대조의 묘소가 가마시 에 있음을 인터뷰로 확인하였다. 그리고 권씨의 조상(권영수 기준)도 가마시에 있음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사회 이동 이유를 찾기란 여간 큰 작업이 아니라서 상당한 시간적 여유가 더 필요하리라고 보여진다. 단지 가설 적으로 고려 시대의 최씨 무신정권 의 퇴락 후와 조선의 안동 권씨 가손 등이 어떤 연유에 의해서 이곳으로 이주해왔을 것이란 추측을 갖게 한다.*2)
.............................................................................
주 : 1)호산록(湖山錄) : 1619(광해군 11년)에 간행된 서산지역 최고의 읍지
2)인터뷰: 다수의 지역 관련자
참고문헌
3. 도서명:[ 시와 진실 ]
도서 분류 : 사본, 희귀본, 향토자료 ( Manuscripts & book rarities )
10, 참고 문헌 : 한국 지명 총람4 [충남 편 하], 한글학회, 1977
11, 참고 자료 출처 : 연세대학교 제 2학기[공통사회교육론]
담당 교수 : 양성헌. 2002 9월 ~11월
12, 장성철. 2002. 연세대학교 , 발전 사회학
13. 김왕배. 2002 농촌과 도시. 연세 대학교
13. 김왕배. 2002 농촌과 도시. 연세 대학교
*이 논문의 완성 본을 만나기원하시는 분에게는 다음카페[대학과 사회]과학기술환경 게시판에 있음을 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