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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트웨인의 10가지 명언
1.사람은 진정한 자신의 진가를 깨닫지 못하면
스스로에게 만족할 수 없다.
2.슬픔은 혼자서 간직할 수 있다.
그러나 기쁨이 충분한 가치를 얻으려면
기쁨을 누군가와 나누어 가져야 한다.
3.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어떤 물건을 몹시 탐내도록 만들려면,
그것을 손에 넣기 어려운 것으로 만들면 된다.
4.우리들의 죽음 앞에서는 장의사마저도
우리의 죽음을 슬퍼해 줄만큼 훌륭한 삶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
5.인간은 얼굴을 붉히기도 하며,
혹은 붉힐 필요가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6.좋은 책이 있어도 읽지 않는 사람은
그 책을 읽지 못하는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다.
7.좋은 친구와 좋은 책, 그리고
살아있는 양심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생활이다.
8.친구의 본래 임무는,
당신의 형편이 나쁠 때 당신을 편들어 주는 것이다.
당신이 옳은 곳에 있을 때는 거의 누구나 당신을 편들 것이다.
9.화가 날 때는 100까지 세라.
최악일 때는 욕설을 퍼부어라.
10.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책은
당신으로 하여금 가장 많이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11.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 이틀있는데,
첫번째 날은 내가 태어난 날이고,
두번째 날은 내가 이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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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닥치기 쉬운 위험은 너무 높은 목표를 잡아서 실패하는 것이아니다.
목표를 너무 낮게 잡고 성공하는 것이다.
- 미켈란젤로 -
김빼순(2016.9.28~2018.3.8)
1
해질녘이면 알아서 돌아오던 빼순이가 돌아오질 않았다. 어둑살이 짙어지기 전, 빼순이를 부르며 윗밭을 올라가 봐도 기척이 없다. 불길한 생각이 밀려든다. 날은 이미 어두웠다. 내려와 마당에 불을 켜놓고, 장화를 신고, 손전등을 들고 윗밭을 샅샅이 살피고 상열네 마당으로, 새로 지은 집 쪽으로 다녀 봐도, 아.. 없다. 필시는 사단이 난 것이다. 그렇게 골짜기 외진 곳들을 죄다 살피고 혹시 돌아와 있는 건 아닌가 싶어 집으로 내려오다가 손전등으로 언뜻 은행나무 켠을 비추었을 때, 시커먼 물체가 멈칫한다. 겨우내, 아니 병아리 때부터 빼순이를 노리던 놈들, 골짜기를 떠돌던 회색 줄무늬 고양이 두 마리가 허연 것 앞에서 모가지를 꺾고 있다. 끝났구나..! 쌍욕을 해대며 냅다 돌멩이를 집어던지고 뛰어 올라갔다. 깜깜한데도 흙바닥이 허옇다. 손전등을 비추니 모가지가 꺾인 채 가슴팍 맨살과 노르스름한 엉덩이를 드러낸 빼순이가 까만 눈을 말갛게 뜨고 있다. 빼순아, 어떡해.. 내가 제 이름을 부르니 그제야 맹하게 떠 있던 눈이 사르르 감긴다.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을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목울대에 뜨거운 것이 치밀어오른다. 병아리 때부터 내 어깨와 등을 타고 놀던 빼순이, 고개를 떨군 채 억세진 두 다리를 손에 꾹 쥐고 사과나무 쪽으로 가서 내려놓았다. 땅을 파고 뭍기 전 기도를 했다. 기도 밖에 해 줄 게 없었다.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게 눕혀 주고 삽으로 흙을 떠넣었다. 피냄새를 맡은 고양이들이 더는 건드리지 못하게 넙적한 방석돌을 찾아 그 위에 무겁게 얹었다. 겨울이 물러났는데, 네가 그리도 기다리던 봄이 왔는데, 이제 곧 풀들이 싯푸르게 돋아날 텐데, 온 산에 꽃들이 만발할 텐데, 그동안 네 숨소리로 집이 참 환했는데, 자주 귀찮긴 했지만 말썽꾸러기 하나 있어 텅 빈 집이 그나마 활기찼는데..
닭장 문을 열어주면 그렇게 좋아하며 푸드득 날아오르던 빼순이는 이제 없다. 늦도록 마당불을 켜 놓아도 집이 다르다. 이곳은 다른 집이다.
2
눈 뜨자마자 닭장 문 열고 바닥에 모이를 뿌려 줄 일 없어졌다.
부엌과 작업실 앞 쪽마루에 똥을 싸놓으면 야단을 치다가 좇아다니며 똥 치울 일 없어졌다.
멸치대가리든 야채든 과일이든 밥풀떼기든 모이를 따로 챙길 일 없어졌다.
빼순이가 돌아오지 않으면 골짜기 돌며 빼순이를 외쳐부를 일 없어졌다.
윗집 아주머니네 상추를 죄다 먹어치워 미안해 할 일 없어졌다.
멀리 나가 일을 보다가도 만사 제치고 돌아와 모이며 물 챙길 일 없어졌다.
수돗가에서 오줌을 누다가 달을 볼 때, 닭장 안에서 들리던 빼순이 꼴꼴거리는 소리 들리지 않는다.
부엌 일을 하면서 국에 들었던 멸치를 그릇에 옮겨 담는 일, 상추를 씻으며 꼭지 부분을 떼어내 보관하는 일, 사과를 먹은 다음 사과껍질들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먹기 좋게 잘게 자르는 일, 밥통에 눌어붙은 밥풀들에 물을 붓던 일, 조개나 어패류를 먹고 나면 마당 댓돌 위에 올려놓고 망치로 가루를 내던 일, 어쩌다 마트에 가면 버리는 채소들에 눈을 두던 일이 모두 없어졌다.
왕보리수나무에서 새가 울면 고개를 모로 꼬고 올려다 보던 빼순이는 내 가슴 속에 들어와 살 뿐,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닭장도, 모이그릇과 물그릇도, 자루에 담긴 묵은 쌀과 왕겨도 아주 다른 물건이 되어버린다.
그까짓 닭 한 마리 죽은 걸 가지고 뭘 그러느냐 싶겠지만, 우여곡절을 겪으며 긴 시간을 함께한 죽음에 슬픔이 없을 수 없다. 큰아이가 블로그에 끄적거려 놓은 글을 읽었는지, 불도 안 켠 채 부엌에서 술잔을 뒤집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아빠, 괜찮아? 으응, 아빠 안 괜찮아. 어제는 뉴스서천 허국장이 와 주었다. 하루는 혼자, 하루는 허국장과 폭음을 했다. 각시와 둘이 남았을 때, 서로 아무 말 못하고 눈도 잘 마주치지 못하다가 어느 한 순간 둘이 펑펑 울었다. 빼순이의 흔적들이 이 집에, 내 몸 구석구석에 남아 있다. 오늘은 겨우 닭장 문 열어 안을 깨끗이 치우고 태울 것들 내놓고 태웠다. 빼순이를 뭍은 사과나무 아래 가서 한참을 앉았다 내려왔다.
*미세먼지 자옥하다. 그래도 자할배네 집바깥엔 복수초 샛노랗게 피었다. 그 꽃 보고 웃다가도 우리 차 지나가면 욕을 해대던 자할매는 재작년 산자락에 뭍혔다.
*눈만 뜨면 "미투운동"으로 낯익은, 또는 낯이 선 이름들이 줄을 잇는다. 안희정의 행각을 어떻게 봐야 할까. 구역질이 난다.
"햇살은 곧게 나아가다가 막히면 그림자를 만들어 놓는다. 물은 흘러가다 웅덩이를 만나면 그걸 다 채운 뒤에야 반드시 다음으로 흘러간다. 빛과 물이 가졌던 이 잣대는 세상이 만들어지면서 지금까지, 또 내일 그 어느 날까지도 변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 수 있다."(임길택의 '바램 하나' 중에서)
*
세 장의 사진과 세 장의 그림 - 현장예술가 최병수
여기 한장의 사진이 있다. 1987년 6월 9일, 경찰이 쏜 최루탄 직격탄을 머리에 맞고 피흘리며 쓰러지는 이한열 열사의 사진이다. 6월 항쟁의 한복판에서 발생한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군사독재에 맞선 민중들의 투쟁이 더욱 크게 타오르는 계기가 됐고, 결국 정권은 '6.29 선언'이라는 회유책으로 당시 핵심 요구 중 하나였던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7월 9일 열린 장례식에는 1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메워 87년 6월 항쟁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그런데 이 사진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게 된 것은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제목의 판화 때문이기도 하다.
http://www.moca.go.kr/html/item/item_image.jsp?artwork_image=DP/DP-06175.jpg
지금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판화를 그린 사람은 '현장예술가' 최병수다. 초등학교 졸업 학력으로 목수로 일하다 우연한 기회에 민중미술을 접하게 되었던 그는 신문에 난 사진을 보고 그날 밤을 새워 목판화를 새겼다고 한다.
1987년 그는 이한열의 사고 소식을 버스에서 옆사람이 보던 신문을 통해 알게 됐다. 충격에 휩싸인 가운데 왠지 신문에 난 그 사진을 판화로 새겨 가슴에 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는 하룻밤을 꼬박 새워 손바닥만 한 판자에 이한열이 피 흘리며 쓰러지는 사진을 새겨넣는다. 다음날 그가 손수건에 이를 찍어 집회장에 나가자 너도나도 달라고 해 몇천개를 찍었다. 누군가 그것을 대형 그림으로 그릴 것을 제안했다. 목수로서 공간 개념에 밝았던 그는 먹줄을 퉁겨서 그리면 되겠다고 여기고 ‘겁없이’ 덤벼들었다. 80년대 민중미술이 낳은 빼어난 양식, 걸개그림이 탄생한 순간이다. - <한겨레21> 제532호 (2004. 10. 28.)
이 판화를 시작으로 그는 '장산곶매', '노동해방도''펭귄이 녹고있다'
여기 또 한 장의 사진이 있다. 미국의 폭격으로 목숨을 잃은 이라크 어린 소녀와 그 소녀를 양손으로 들고 있는 할아버지의 사진이다. 그런데 소녀의 발목이 포탄에 의해 완전히 뭉개져 너덜너덜하게 붙어있어 전쟁의 끔직함을 더해준다. 이 사진 역시 사진보다는 그림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데, 바로 '너의 몸이 꽃이 되어'란 작품이 그것이다.
그림에는 어린 소녀의 끊어진 발목 대신 꽃무더기가 그려져 있다. 소녀의 발목에서 흘러나온 꽃들이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라크 땅을 덮고 있다. 그림을 보는 순간 난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미국의 침략전쟁의 참혹함에 대한 비판과 어린 소녀의 죽음에 대한 애도 그리고 평화에 대한 기원이 담겨 있는 그림은 슬프지만 참 아름다웠다.
이 그림을 그린이 또한 최병수였다. 그는 미국의 이라크 대공습이 있기 얼마 전인 2003년 3월에 반전평화팀의 일원으로 인간방패가 되어 직접 바그다드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런 그였기에 사진을 보고 받은 충격을 그림으로 옮기고 또 직접 시를 쓰기까지 했다.
너의 몸이 꽃이 되어
외마디 절규로, 지린 고통으로
피 흘리며 잠을 자고, 피 흘리며 잠을 깨며
저 하늘로 날아갔지
아이들아 용서해라! 애원한다 아이들아!
잔인한 현실, 탐욕스런 현실을
살육을 설교하고 자행하는 자들의 총과 칼을
너의 몸이 꽃이 되어, 누 천년 누 만년
너의 넋이 꽃이 되어
너의 넋이 꽃이 되어
그런데 얼마 뒤 그가 위암으로 위를 60%나 잘라내고 투병중이라는 소식이 들렸다. 난 그가 부디 병을 이겨내고 다시 일어나 작품활동을 계속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했다.
그리고 여기, 세 번째 사진이 있다. 자신의 몸을 불살라 칠흙같은 어둠의 장벽에 작은 총구 하나를 내고자 했던 전태일 열사의 영정을 끌어안고 가슴 아파하는 이소선 어머니의 모습이다. 이소선 어머니는 전태일 열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갖은 회유와 탄압에도 타협하지 않았고, 70-80년대 내내 투쟁하는 모든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어머니가 되셨다.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을 노동현장에 뛰어들게 만들었던 <전태일 평전>의 초판본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의 표지에 실리기도 한 이 사진은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역사, 그 시작을 상징하는 한 장면이다.
지난 9월 3일, 이소선 어머니께서 81년 동안의 삶을 마감하시고 아들 전태일 열사가 있는 곳으로 떠나셨다. 많은 이들이 이소선 어머니를 추도하기 위해 빈소를 찾았고 추모글과 추모시를 썼다. 이소선 어머니 마지막 가시는 길에 함께 하고 싶었지만, 꼭 서울까지 가봐야만 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에 장례위원 참가신청만 하고 마음으로 대신했다.
그리고 뭐가 그리 바빴는지 장례식 날이 하루 지난 뒤에야 트위터에서 장례식 모습들을 찾아보았다. 그러던 중 하나의 그림을 보는 순간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림에는 위의 사진과는 반대로 이소선 어머니의 영정을 아들 전태일 열사가 들고 있었다. 영정 속의 사람과 영정을 들고 있는 사람, 그 두 사람만 바뀌었을 뿐인데 그림은 정말 많은 것을 얘기해주고 있었다. 그 그림 속에는 전태일 열사의 삶과 이소선 어머니의 삶이 모두 다 들어 있었다. 아 이런 게 예술이구나 싶기도 했다.
그런데 이 그림을 그린 사람 역시 최병수였다.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이름! 그는 역시 암을 이겨내고 살아있었구나, 살아서 이렇게 아름답고 감동적인 작품을 또다시 나에게 보여주는구나 싶은 생각이 드니 그에게 참 고마웠다.
또 몇 년 뒤 그가 또 다른 작품으로 아름다움과 감동을 전해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찾아보니 몇 년 전 그의 삶과 작품을 담은 책이 두 권 나와 있다. <목수, 화가에게 말걸다>(김진송, 최병수 지음, 현실문화연구)와 <병수는 광대다>(박기범 지음, 노순택 사진, 현실문화연구)가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