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7과 가나안 길에서의 실족과 징계
연구 범위: 레 10:1~11, 24:10~16; 민 11:4~35, 15:32~36, 21:4~9
기억절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히 12:5,11).
요지
광야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 생활에 있어서도 실족함에는 징계가 따른다.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믿음을 발휘한다면 피할 수 있는 많은 어려움들을 스스로 불러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 어려움들을 통하여 우리는 회개의 교훈을 배우고 믿음을 회복하게 되며, 그 결과 참고 견딘 만큼의 값어치가 있게 된다.
개관
레 10:1~11 | 민 11:4~35 | 민 15:32~36 | 레24:10~16 | 민 21:4~9 |
다른 불로 분향하다 타 죽음 | 불만으로 멸망함 | 고의로 안식일을 범하다가 돌에 맞아 죽음 | 훼방자가 돌에 맞아 죽음 | 불뱀에 물림 |
서론
이 주일에는 사건들의 발생 순서를 무시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족했던 사건들과 결과를 중심으로 공부해 보고자한다. 이들 중 두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을 출발한 때부터 가나안 변방에서 믿음에 실패하기 전까지의 사이에 일어났다. 나머지 세 사건은 그 후 광야에서의 방랑 생활 중에 발생하였다. 이 사건들은 모두 실족함의 결과로 생긴 징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의 거듭된 실패와 회복 속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역사의 특징이었던 만성적 진퇴의 기복을 본다.
징계는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이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 이니라”(히12:6). 그것은 또한 주께서 아직도 우리 속에서 희망과 가치를 보신다는 증거이다. 우리가 징계를 당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 속에 더 강한 품성을 계발시키고 우리가 다시는 넘어지지 않도록 우리를 당신께 더욱 가까이 붙들어 매시기 위해 아직도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이스라엘 역사 후기에, 하나님께서는 질그릇을 만들고 있는 토기장이의 환상을 통하여 예레미야에게 이 진리를 보여 주셨다. 토기장이가 질그릇을 다 만들고 보니 결정적인 흠집이 하나 있어서 도무지 원래의 목적대로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토기장이는 그 질그릇을 버리지 않고 다시 녹로 위에 얹어 놓고 물레를 돌려가며 모양을 빚었다. 이제는 주인의 집에서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말이다(렘 18:1~6). 실족함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원래의 목적에 전연 합당하지 않은, 하나님께서도 원래대로 돌리실 수 없는 상태에 놓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징계를 받아들이고 그 징계가 우리를 다시 꼴 짓도록 허락한다면, 토기장이께서는 우리를 유용한 목적에 쓰이도록 다시 빚으실 것이다.
이번 주일에 배우게 되는 다섯 가지 사건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실족을 넘어서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배도에까지 이르렀다. 그들의 실례는 우리로, 그들과 같이 회개가 부족한 자들이 되지 않도록 경고해 준다. 우리들 각자는, 징계 받음으로 해서 더 심한 완고함에 빠질 것인지, 아니면 그 징계를 통하여 회개함에 이를 것인지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다른 불로 분향하다 타 죽음(레 10:1~11)
나답과 아비후는 무슨 죄를 지었으며, 왜 그랬는가?(레 10:1,9)
답:
9절은 아론의 두 아들이 그들의 거룩한 의무를 수행하면서 어느 정도 술에 취해 있었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엘렌 화잇은 그 사실을 확언한다). 술에 취한 그들은, 바로 며칠 전에 하나님께서 친히 피우신(레9:24) 제단의 거룩한 불을 꼭 사용해야 할 이유를 깨닫지 못하였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명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보통 음식 만드는 불에서 취한 핀 숯을 사용하였다.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성막 봉사를 위하여 아버지 아론과 형제들과 함께 7일 동안의 거룩한 위임식을 가진 지가 불과 며칠도 채 안 되었다(레 8, 9장). 그들은 불이 하늘에서 제단으로 내려오는 것도 보았다. 그들은 모세와 함께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해 시내 산에 오른 선택된 사람들 중에 하나였다(출 24:1). 그러나 무엄하게도, 처음 제사장으로서의 거룩한 직무에 들어가기도 전에 술에 취하다니 !
신약에서 사도 바울은 주정 음료 사용에 대해 어떤 이상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가?(고전 10:31, 3:16,17, 6:19,20 참조)
답:
“하나님께서 한때 주정 음료를 허용하셨던 것을 근거로, 주정 음료를 사용하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라는 오늘날의 주장은 정당화될 수 없다 … 하나님께서는 한때 노예 제도나 일부다처제 혼인도 허용하였었다.”(본교 성경 주석 1권, 1003).
신약은 술 취함에 대해 어떤 특별한 경고와 정죄를 발하고 있는가?(고전 6:10)
답:
하나님께서는 아론에게, 그의 아들들의 죽음과 관련하여 어떤 지시를 하셨는가?(레 10:6,7) 왜 그러셨는가?(3,10,11절)
답:
만약 아론이 인간의 감정을 따라 행동했다면, 틀림없이 그는 하나님께 대한 일련의 불만과 불평으로 시작했을 것이며, 많은 사람들이 육체적 · 영적 생명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 왔을 것이다. 죄에 대한 공정한 형벌이 이르러 올 때, 우리가 그 죄인의 죄를 조장하는 거짓 동정을 보이는 것은 결코 그에게 호의가 되지 못한다.
우리는 이 나답과 아비후의 경험을 통하여, 거룩한 사물에 돌려져야 할 경외심에 대해 어떤 교훈을 배울 수 있겠는가?(3절)
답:
우리는 하나님의 거죽하심과 위엄에 대해 보다 깊은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기 위해 친히 몸을 낮추신 것이 사실이나, 그분은 또한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시는 지존 무상하신 자이시다”(사 57:15).
(알아봅시다) 다음에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면전에 서게 되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웃사(삼하 6:6,7)
이사야(사 6:1~5)
다니엘(단 10:7~12)
사 울(행 9:3~9)
요 한(계 1:12~17)
<참고> “하나님께 대한 참 경외심은 하나님의 한없는 위대하심을 느끼고 그분의 임재를 깨달음으로써 고취된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러한 인식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인상 지워져야 한다. 기도의 장소나 시간은 매우 거룩한 바 이는 하나님이 거기 계신 연고이다. 그리고 경외심이 행동과 태도에 나타나게 될 때, 그 느낌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시편 기자는, ‘그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시 111:9)라고 선포한다. 천사들도 하나님의 성호를 말할 때는 얼굴을 가린다. 하물며, 타락하고 죄 많은 우리는 얼마나 더 큰 경외심으로 하나님의 성호를 말해야 하겠는가”(선지자와 왕, 40).
거룩한 성소 봉사를 위한 위임식에서, 아론의 이 아들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예배를 위해 그분께서 지시하신 일들을 아주 무시하였다. 신속한 응징만이 그들의 대담한 불경건에서 야기될지도 모를 무서운 결과들을 저지시키는 최선의 방책이었다.
불만으로 멸망함(민 11:4~35)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을 떠난 직후에 어떤 불평이 일어났는가? 그 불평은 어떤 자들과 함께 시작되었는가?(민 11:4~6; 출 12:38)
답:
특별히 회중은 무엇을 바랬는가?(민 11:13)
답:
원래 육식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준비하신 음식이 아니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면서,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동물을 죽이는 일이 보편화되었다. 홍수 후에, 하나님께서는 몇 가지제한과 함께 육식을 허용하셨다(창 9:1~5). 여기서는 음식으로 허용된 동물과 허용되지 않은 동물을 하나님께서 뚜렷이 구분하지는 않으셨지만. 방주로 들어가는 짐승들이 “정결한”, 혹은“부정한” 짐승으로 명시된 사실은 이미 부정한 짐승과 정한 짐승의 차이점과 그 구별법이 알려져 있었음을 암시한다. 후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음식으로 사용될 수 있는 동물과 사용될 수 없는 동물을 구별하는 원칙을 주심으로써 이 문제를 좀 더 분명히 해주셨다(레 11장; 신 14장).
(알아봅시다) 태초부터 식욕은 사단이 사람들을 유혹하여 죄를 범케 하는 성공적인 수단이 되어 왔다. 다음 말씀들은, 식욕과 식사와 영적 행복의 밀접한 관계를 어떤 방법으로 나타내고 있는가?
창 3:1~7
창 25:29~34
삿 13:2~5
마 4:1~4
고전 10:31
(생각해 봅시다) 마가복음 7장 15~23절의 예수의 말씀과 디모데전서 4장 1~5절을 인용하면서, 신약 시대에는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에 대한 구분이 폐지되지 않았느냐고 말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음식에 대해 불만족해 한 결과는 무엇이었는가?(민 11:18~20,33,34).
답:
민수기 11장은 불평으로 가득한 장이다. 여기서는 모세까지도 자신에게 지워진 짐에 대해 하나님께 불평하고 있다(10~15절).우리 자신의 문제들에 집착하여 불만족하기가 얼마나 쉬운가! 반면에, 우리들이 받고 있는 축복을 보며 감사하기는 왜 그리도 어려운가!
“유다는 원망하는 자들, 불만을 토하는 자들, 그 정욕대로행하는 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16절), 특히 이 이스라엘백성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 같으며, 성경은 이들을 자신들의 운명을 탓하는 자들로 말하고 있다. 그들은 결코 만족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즐겁게 해주실 수 없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항상 하나님의 지혜보다 자신의 지혜를 더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그 방법은 무한하신 지혜에서 나온 계획이다. 우리가 다른 방법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얼마나 흔히 우리는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입으로만 기도하는가? 우리의 마음과 입술이 일치되는 경우는 정말 얼마나 드문가!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것만 구하기 위해 얼마나 조심해야 되겠는가! 너무도 자주 우리의 기도와 바램들은, 그것들이 응답 된다면 우리의 파멸이 불가피한 그런 끔찍한 것들이다.”(아담 클락의 주석 1권, 656, 657).
한 달 동안, 백성들은 메추라기 고기를 먹었다. 그런 음식에 아주 진저리가 나도록 말이다. 그들 중 가장 반역적이었던 사람들은 그들이 고기를 먹기 시작하자마자 죽었다(민 11:33). 그 외 많은 사람들이 식욕에 방종함으로써 그 달 안에 죽었다. 그러나 그 달에도 만나는 여전하였다. 필시 징계를 통하여 교훈을 얻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물에 새롭게 감사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고의로 안식일을 범하다가 돌에 맞아 죽음(민 15:22~36)
하나님께서는 범죄에 관하여 무슨 차별을 두셨는가?(27~31절)
답:
(생각해 봅시다) 이 구절들은, 고의로 지은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말하는가? 구약의 성소 봉사에는 고의로 지은 죄를 속하기 위한 어떤 희생적 대책이 마련되어 있었는가?(레 4:1,2; 히 10:26, 27 비교) 고의가 아닌 죄와 같은 것이 있는가?(약 4:17)
민수기 15장 32~36절에 묘사된 안식일 범법 사건은 왜 그렇게 심하게 처벌되었는가?
답: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 중 이것이 안식일을 범한 유일한 사건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범죄자들은 모두 약식으로 즉결처분되었는가? 이 경우는 특별히, 앞 구절들에 주어진 주제넘고 고의로 저지른 죄에 대한 실례로서 소개된 것이다. 이 사람은 하나님께 도전하기 위하여 고의로 공공연하게 안식일을 더럽히고자 하여 나갔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변방에서 보인 불신의 결과로 그들을 40년 동안이나 광야에 있게 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하여 분노하였다. 이것은 무심결에 생각 없이 지은 죄가 아니요, 사전에 계획된 반역이었다.
훼방자가 돌에 맞아 죽음(레 24:10~16)
훼방은 셋째 계명에 금지된 대로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을 불경스런 태도로 사용하는 것 그 이상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재판관에 의해 자신에게 내린 결정에 분노한(부조와 선지자 하권, 9) 이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고 그분을 저주하였다.
“성경에서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이나 품성을 비방하는 경우에 “훼방”, “모독” 등의 말을 사용하였다. 이 훼방은 직접적일 수도 있고(행 6:11), 하나님의 능력의 증거를 사단에게 돌리는 경우처럼(마 12:31) 간접적일 수도 있다. 또 자칭 하나님이라 한다든지 하나님의 특권을 가장할 경우(마 9:1~6, 26:65; 요 10:33, 36) “참람”이 란 말을 쓰기도 했다“(본교 성경 사전, 148).
혀가 악을 추구할 가능성에 대해 야고보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약 3:2~10)
답: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혀를 사용하지 않고서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할 수 있는가?
<참고> “격분을 이기지 못해 한 말에 대하여 그처럼 혹독한 형벌을 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대하여 의문을 갖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사랑과 공의는 모두 하나님께 대하여 악의로 한 말들이 큰 죄임을 보여 줄 것을 요구한다. 최초의 범죄자에게 내려진 보응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성호는 존중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는 경고가 된다”(부조와 선지자 하권, 10).
불뱀에 물림(민 21:4~9)
무엇이 불뱀의 공격을 받게 만들었는가?(5절)
답: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여행하는 동안 뱀에게 물리지 않도록 그들을 보호하셨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감사하지 않고 마구 불평하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보호를 거두시고,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보호가 없는 광야 여행이 어떠함을 경험하도록 허락하셨다(신 8:15). 많은 사랑들이 이 독사들에게 물려 몸이 퉁퉁 부어 죽었다.
이스라엘의 후세들은 놋뱀에 대한 하나님의 교훈을 잘 이해하지 못했으며 특히 그들에게 땅의 어떤 형상이라도 만들지 말라고 명하신 사실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였다. 랍비들은, 죽어가는 자들에게 생명을 준 것은 뱀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그것을 설명하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놋뱀을 바라보고 이 이상한 일을 명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했다. 랍비들이 잘 가르쳐 왔듯이, 그들에게 생명을 준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었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이 사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셨는가?(요 3:14,15)
답:
<참고> “백성들은 뱀 그 자체에는 자기들을 구원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사람을 물어 죽이는 뱀의 모양대로 만들어진 표상이 그들의 치료를 위하여 들린 것처럼,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나신 분께서 그들의 구속주가 되실 것이었다(롬 8:3). 이스라엘 백성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제사 그 자체에 자신들을 죄에서 자유롭게 하는 효능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구리뱀에 아무 효능이 없는 것처럼 제물에도 아무런 효능이 없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셨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을 구주께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의 상처를 치료하는 일에나 저희의 죄를 용서하는 일에나 그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보이는 길밖에 없었다”(시대의 소망 1권, 226, 227).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구세주를 나타내시는 데 하필이면 왜 죄의 상징인 뱀을 사용하셨는가?(고후 5:21)
답:
“우리 각자는 옛날의 그 반역적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옛 뱀에게 계속 물려 왔다. 우리 각자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롬 5:12~19, 6:23). 우리 각자는 자기들의 죄 짐을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께 드려 왔다. 그래서 우리 각자에게 생명과 치유가 제공되었다. ‘어떻게 ? ’라고 당신은 질문할 것이다. 그것은 믿음의 행위인 바라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사 45:22)”(쟌 J. 카터, 어드벤티스트 리뷰, 1985년 10월 24일, 7).
이스라엘 후세들이 놋뱀으로 무슨 짓을 한 것으로 보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르쳐 보이고자 하셨던바 오실 자 구속주에 대한 믿음의 교훈을 그들이 이해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는가?(왕하 18:4)
답: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위들이 구원을 확신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피해야 한다.
보충학습: “우리 앞에 있는 혼란과 고통의 때, 국가와 민족들이 생긴 이래 일찍이 없었던 그러한 고통의 때에, 높이 들린 구세주가 모든 나라 사람들에게 제시될 것인바, 믿음으로 그분을 바라보는 자들은 모두 살 것이다”(교회증언 8권, 50).
요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험은 우리에게, 실족함은 항상 징계의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것은 또한 회개는 용서와 회복함에 이른다는 것도 보여 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리 깊은 죄에 빠졌다 할지라도 그들이 회개하고 자신들의 죄를 자백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들을 기꺼이 다시 취하셨다. 우리를 하나님과 분리되게 하는 유일한 것은 고의로 짓는 죄, 즉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죄이다.
적용
하나님께서 나를 징계하실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더 크게 반역할 것인가, 아니면 그분께서 나를 다시 당신께로 이끄시는 데 대해 감사할 것인가?
어떤 지역에서 내가 하나님의 교회와 실제적으로 관련을 갖지 않고서도 ‘실족한 자’가 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