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산 성지
충청남도 금산군에 속해있는 진산(珍山)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참수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尹持忠, 1759-1791년)와 권상연 야고보(權尙然, 1751-1791년)가 태어나고 성장한 곳이며,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신주(神主)를 불사르고 유교식 제사를 거부한 ‘진산사건’(珍山事件)이 발생한 곳이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참수 이후 그들이 나고 자란 진산군은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저버린 강상죄(綱常罪)에 해당되어 지역 전체가 연좌의 벌을 받아 5년간 현(縣)으로 강등되었다.
1791년 신해박해(辛亥迫害)의 원인이 된 진산사건은 윤지충과 그의 외종사촌인 권상연이 신주를 불태우고 유교식 제사를 폐한 사건을 말한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A. Gouvea, 湯士選)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지충은 권상연과 함께 이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또 이듬해인 1791년 음력 5월 윤지충은 어머니인 권씨(권상연의 고모)가 사망하자 음식을 드리거나 신주를 모시는 등의 유교식 제사 대신 천주교의 예절에 따라 정성껏 장례를 치렀다. 이는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일은 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유언이기도 했다.
당시 사회 안에서 패륜의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친척과 이웃들이 윤지충과 권상연을 무군무부(無君無父)의 불효자로 고발함으로써 이 사건이 조정에까지 알려졌다. 이로 인해 윤지충과 권상연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고,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權日身, (?-1792년)와 이승훈 베드로(李承薰, 1756-1801년), 최필공 토마스(崔必恭, 1745-1801년), 이존창 루도비코(李存昌, 1759-1801년), 최창주 마르첼리노(崔昌周, ?-1801년) 등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었다.
이와 함께 회유책으로 천주교 서적을 없애고 자수한 이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는다는 내용의 포고문이 전국에 붙게 되었다. 그 후 12월 8일(음 11월 13일) 윤지충과 권상연은 전주 남문 밖(현재 전동 성당 부근)에서 참수되고, 이승훈은 배교했음에도 불구하고 면직되고, 권일신은 유배가는 도중 사망하고, 그 외의 교우들은 배교하고 석방됨으로써 신해박해는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그 결과 서학서의 구입이 금지되는 등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더욱 강화되었다.
체포령을 듣고 피신했던 윤지충과 권상연은 진산 군수가 그들 대신 숙부를 감금하자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진산 관아에 자수하였다. 관아에서 진산 군수의 회유와 협박을 용감히 이겨낸 그들은 전주 감영으로 이송되어 더욱 혹독한 형벌을 당했다. 죽음을 각오한 그들은 “천주님을 큰 부모로 삼았으니, 천주님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결코 그분을 흠숭하는 뜻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윤지충은 “만약에 제가 살아서건 죽어서건 가장 높으신 아버지를 배반하게 된다면 제가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증언하며 권상연과 함께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당시 전라 감사가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유혈이 낭자하면서도 신음 소리 한 마디 없었습니다. 그들은 천주의 가르침이 지엄하다고 하면서 임금이나 부모의 명은 어길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하였으며, 칼날 아래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였습니다.”
한국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성장한 곳에 위치한 지방리 공소는 자연부락인 가새벌(지방2리 가사벌 마을, 사제관이 있는 곳)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순교 이후 진산 지역에는 신자들의 활동이 잠시 주춤하였으나, 고산 지역에 흩어져 살거나 다른 지역에서 피난 온 신자들을 중심으로 재개되었다. 가새벌도 그 중 하나였는데 병인박해 이전부터 길게는 기해박해 전부터 몇몇 신자들이 이곳에 거주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김영삼이 체포되어 전주에서 순교하고, 1877년에는 김영삼의 동생인 김 사도 요한이 한양에서 옥사하고, 1878년에는 김춘삼 사도 요한이 가새벌에서 잡혀 한양에서 옥사하여 순교하였다. 병인박해의 영향이 여전히 남아 있던 1876년에도 이곳에는 신부가 방문하여 공소를 치렀다. 1885년에 프랑스 선교사 조스(Jean B. Josse, 1851-1886년) 신부가 방문한 이후 가새벌에서는 매년 공소가 치러졌고, 1910년을 즈음해서는 진산과 금산 지역의 중심이 되는 공소로 성장하였다. 공주로부터 이사해 온 이씨 일가의 활동은 이 공소의 성장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가새벌에는 일찍부터 공소가 형성되었으나 공소 건물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16년에 이르러 첫 번째 공소 건물을 갖게 된 가새벌 공소는 신자 증가에 따라 새로운 건물을 필요로 하였다. 1927년에 새로운 부지에 건물을 지음으로써 현재의 지방리 공소가 마련되었다. 공소 건물이 완성된 후 이의규 회장과 신자들은 본당 승격을 위해 노력하였고 그 결과 1929년에 초대 주임신부가 파견되었다. 그러나 1931년 대구대목구로부터 현재의 전주교구가 분리됨에 따라 성직자 부족으로 지방리는 다시 공소가 되었다. 이후 지방리에 신부를 파견할 것이 검토되었으나 금산에 그 자리를 양보해야만 했다. 군청소재지인 금산에 1935년에 본당이 설립되자 지방리는 그 관할 공소가 되었다. 공소였음에도 금산 지역보다 신자가 많고 기존의 성당과 사제관을 가지고 있던 지방리 공소는 금산 본당이 성장할 때까지 계속해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본래 전라북도에 속했던 진산 지역은 몇 차례의 행정개편 대상이 되었고, 1963년에 충청남도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전주교구 관할이던 진산 지역이 대전교구로 편입되기까지는 좀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국 최초의 순교자가 성장한 곳이고 많은 순교자들의 땅이며 호남 선교의 요람이었기에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던 중, 1980년 8월 29일 당시 전주교구장 김재덕 주교는 금산 본당에 속한 모든 것을 대전교구로 이관하였다. 진산이 속한 금산군의 지리적 여건과 대전에 가까운 생활권, 신자들의 편의와 보다 효율적인 신앙지도를 위한 결정이었다. 그래서 금산 본당 관할의 지방리 공소도 대전교구의 한 공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2009년에는 다시금 공소에서 진산 성지성당으로 승격되어 교회사적 중요성을 재확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