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땅은 명장 이일(李鎰)이 출생하고 영면한 영원한 고향
이일 장군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중종 33년(1538) 용인군 포곡면 신원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용인 이씨로, 이백지의 7대손이다 이백지는 여말 선초의 명신으로 전라좌수사, 관찰사 등의 직책을 지낸바 있다. 그가 죽자 조정에서 부의를 표시하기까지 하였다.
이일장군의 자는 중경, 시호는 장양이다
그는 성품이 뛰어나고 영특하였으면 힘이 장사였다. 일찌기 명종 13년(1558)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과 경성판관 등을 거쳐 전라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평생을 국방에 바치면서 야인 정벌에 남다른 공을 세웠다
이 무렵 함경도는 북쪽으로 여진과 국경이 인접하고 있어서 번호의 침범이 빈번하였다. 선조 16년(1583) 니탕개가 북변을 침범하여 경원부를 함락시키고, 종성까지 포위되는 위기에 이르렀다. 조정에서는 이일장군을 정원부사로 임명하여 니탕개를 몰아내도록 하였다.
1587년 니탕개가 다시 2만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회령을 공격재 오자 회령부사의 명을 받고
평정에 나섰다. 이 싸움에서도 이일장군은 뛰어난 지략과 용맹으로 큰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함경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그 뒤 녹둔도에 여진족이 침입하자 이듬해인 1588년 두만강을 건너 여진의 시전부락을 소탈 하라는 명을 받았다. 이때 추도의 번호도 함께 쳐들어왔다.
추도의 번호는 김우추로 하여금 방어케 하였다. 추도의 번호는 쉽게 소탕되었으나 시전의 번호는 세력이 강대하고 군사의 수가 많아 평정하기 어려웠었다.
이에 원군을 요청하니, 조정에서는 회령부사 변언수 온성부사 양대수를 좌우위장을 삼아 그를 도와 시전의 번호를 공략하게 하였다
이 싸움에서 모든 전략을 세웠던 이일 장군은 시전 번호의 근거지 4개 부락과 소굴 3백여개소를 불지르고, 여진족 8천여명을 복베는 전과를 올렸다
이싸움에서의 전공을 인정받은 그는 모든 병사의 귀감으로 추앙되었다. 그리고 이후로는 여진족이 변방을 침범해오는 일이 근절되다시피 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임진왜란의 명장인 이순신 장군이 일시 조산보의 만호로 부임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호적의 침공을 막고, 이를 추격하여 격멸시키는 전과도 올렸다
1589년에는 전라병사가 되어 신립장군,정언신 등과 변비의 군비 상황을 의논하였다
임진왜란 상주전투 패전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명장 신립을 도순변사로 이일장군을 경상도 순변사로 임명하여 부산. 동래가 함락되었을 경우 이를 방어토록 하였다. 당시 54세의 노장이었던 이일장군은 신립과 더불어 조선 최고의 명장으로 신망이 높았으며 당시 한양에서는 이일장군이 야인을 물리치고 풍악을 올렸을때처럼 왜인을 물리치고 한양을 한바퀴 돌며 풍악을 올릴 줄 알았다.
그는 왕명을 받고 종사관인 조방장 몇 명을 인솔하고 진지로 내려가면서 병사들을 모았다. 북상하는 왜적을 상주에서 맞아 싸웠으나 수와 무기에 있어 워낙 큰 차이가 나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전투에 패해 충주로 후퇴하였다. 충주에서 도순변사 신립의 진영에 들어가 재차 왜적과 싸웠으나 대항할 무기도 변변치 않고 병사 또한 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패할 수 밖에 없었다 신립장군은 탄금대에서 전사하고 이일 장군은 후일을 도모하고자 사잇길로 도망하여 황해 평안도로 피하였다. 조정에서는 그가 충주 싸움에서 패하여 도망한 죄가 크다고 하여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을 폈다. 성에 유성룡은 이일 장군이 패전한 것에 대하여 <징비록>에 " 이일은 객장으로 수병도 없고 창졸간에 충돌한 것이기 때문에 당하지 못하였음은 자명하다"고 기록하였다. 이에 선조는 그가 전투의 경험이 많은 무장이며 그간의 전공을 감안하여 용서하고 오히려 격려하였다
그 후 이일 장군은 서울로 올라와 선조의 근위대장으로 있으면서도 임진강 등지에서 왜군 6백여명의 목을 베어 그들의 기세를 꺾은 바 있다. 그러나 왜적의 세력이 평양까지 미치자 인심이 혼란해지고 드디어는 평양까지 미치자 인심이 혼란해지고 드디어는 평양까지 함락되었다.
선조 임금은 다시 의조로 피난하기에 이르렀다. 이때문에 인심은 더욱 흉흉하였다. 이때 이일장군은 동변방어사의 임무를 띠고 민심을 환기시키고 왜적과 맞서싸웠다. 세자 광해군을 3천명의 군사로 시위하다가 평양 왕성탄 전투에서 왜적 80여명을 사로잡기도 하였다
때마침 명나라의 이여송이 수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원정해오자 이들의 힘을 입어 왜적을 소탕하고 끝내는 평양을 탈환하여 민심을 수습하였다. 평양을 탈환한 공로로 백금 20냥을 하사받았다
이듬해 평안도병마절도사를 지냈고 그 뒤 지중추부사 비변사 당상 훈련원지사를 지내면서도 주로 군사와 관련된 업무를 맡았다. 함경북도 순변사. 상도순변사의 임무를 띠고 왜적의 빈번한 침범에 대치하여 크고 작은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한양이 수복되자 우변포도대장이 되어 난리를 치른 수도의 치안유지에 힘썼다. 충청도에서 송유진 등의 난이 일어나자 순변사로 그 뒷수습을 맡았다
선조 28년(1595). 왕의 특지로 다시 함경북도북병사가 되고, 지충추부사, 행호군을 거쳐 함경도 남병사가 되었다. 선조 34년(1601). 임진왜란 당시 상주에서 부하를 사형한 것에 대한 살인죄의 혐의를 받고 호송되다가 정평에서 64세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죽은 뒤 무고함이 밝혀져 신원되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일설에는 그가 선조33년에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로 재임중 왕의 소환을 받아 상경도중 정평에 이르러 병을 얻어 별세하였다고 한다) 그의 묘소는 용인군 모현면 매산리 고시능에 자리잡고 있으며, 부인 전주 이씨와 함장되었다. 그의 묘소 앞에는 묘갈만이 있고 묘역에는 묘갈, 상석, 향로석이 있으며, 좌우에 문인석이 있다. 묘갈은 145*60*16센티미터의 크기의 화강석으로 되어 있다.
그의 묘역은 용인군 향토 유적 21호로 지정되어 있다. 묘소 측면에 안내판이 있어 그의 업적을 가늠할 수 있으나, 아쉬운 점은 길가 입구쪽에 세워졌으면 더욱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984년 10월에 그의 후손들이 힘을 모아 묘소입구 마을에 신도비를 새로 세웠다
그이 저술로는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지은 <제승방략>이 있으며, 현재 <장양공시전호정벌도>가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 병법의 고전인 <제승방략>을 증보하여 짓다
이일 장군은 항상 북경지역 야인이 침범하는 것을 염려하여 비변책을 마련코자 하였다
이에 조선초기에 김종서가 저술한 것을 선조 21년(1588)에 시의에 맞게 정리하고 저술하였다
제승방략은 야인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함경도 8진과 이에 소속된 각 보의 방수를 논한 병서이다. 이일 장군은 이 책을 여러 장수들에게 배포하여 참고토록 하였다 이책은 훗날 군대에서 시강의 표본으로 간행되었다
현재 2권1책의 목판본이 전한다. 내용은 권1과 권2의 상반까지에는 도내 각 진의 위치와 산천의 형세, 노정의 원근, 성보의 배치, 행군의 절목 등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각 진보에서 일났던 야인의 침범사건을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당시에 어떠한 사건이 일어났는가를 살필 수 있다.
또, 적의 침입에 대비한 응변책, 봉수, 복병, 체탐, 망해 등의 배치를 열거하고 있다. 향화야인부락의 위치와 추장, 호수 등도 부기하였다. 권 2의 끝부분은 속록의 형태로 국경 수비의 군무 29조, 금령 27조, 육진군관의 관명으로 되어 있다. 끝부분에는 이일 장군의 <청행제승방략장> 등이 있다.
이 책은 선조때 야인에 대처한 조선시대의 비변책은 물론 두만강 주변의 야인부락 사정도 자세히 살필 수 있으며, 연산군 이래의 주요고사도 알 수 있어서, 여진관계사연구의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현존하는 판본은 현종 11년(1670)에 이선이 중간한 것인데 그 내용이 비록 함경도 지방에 국한되어 있지만, 조선중기의 군사 운용의 병법을 연구하는데 있어 유일무이한 자료이다
글: 홍순석 교수
(강남대 한국학연구소장)
(장양공시전호정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