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
설탕 같은 비가 내린다. 유난히도 인색했던 비다. 지난겨울에 강설도 없었고 6개월간 비다운 비가 없었다. 가뭄으로 산하가 시름 중이다. 올봄에는 기록에 남을 동해안의 대형 산불도 예년에 반밖에 내리지 않은 비 탓도 있다. 평소 고마움을 모르고 살아가는 여러 가지 중에 공기의 고마움, 물에 대한 고마움을 잊고 있다. 사실 우리나라는 물 부족 국가다. 그러나 누구 하나 물에 대한 고마움에는 인색하다. 수도꼭지만 틀면 쏟아지는 물, 골짜기마다 지천으로 흐르는 물을 보며 절약에 대한 미덕을 버린 지 오래다. 아파야 건강할 때의 고마움을 느끼듯 가뭄 끝에서야 비의 고마움을 아는 것이 나이기도 하다. 길고 긴 기다림 끝자락 6월 초 연휴에 비가 내린다.
우산을 쓰고 매일 걷는 동네 팔거천 둔치를 걷는다. 눈길 가는 곳마다. 미소가 보이고 귀를 열면 웃음소리가 들린다. 환희의 찬가다. 먼지만 날리던 잔디가 굽었던 허를 편다. 몇 개월을 그렇게 기다렸는지 지친 모습에 생기가 돈다. 팔거천 가장자리로 눈을 돌리면 물이 좋아 물가에 터를 잡았던 갈꽃도 해맑은 웃음을 보인다. 개망초의 꽃술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하늘의 축복이다. 자주색의 꽃대를 올린 갈퀴나물도 넝쿨에 힘이 솟고, 황새냉이의 하얀 꽃에도 미소가 번진다. 큰고랭이는 늘씬한 줄기를 타고 내리는 비로 모처럼 시원하게 세수하고, 축 늘어졌던 모메 줄기도 링거를 맞은 듯 생기가 돈다. 지칭개의 힘없던 다리에도 힘이 들어가고 하늘거리는 꽃대가 늘어진 김의 풀도 비로 인해 다시 자세를 바로잡는다.
지난주 시골 텃밭에도 가뭄은 비껴가지 않았다. 너풀너풀해야 할 상추가 빳빳하기만 하고 키 크기를 주저했다. 고추도 지주대에 몸을 기댄 채 힘을 못 쓰고 넝쿨을 뻗어야 할 호박은 제자리에 맴만 돌고 있다. 깻잎도 주름을 펴지 못한 체 성장을 주저하고 푸른 잎에 흰 핏줄을 선명하게 해야 할 쌈 배추도 기다림에 지쳤는지 풀이 죽었다. 허리까지 흙에 묻힌 대파는 그나마 덜 괴로운지 줄기를 조금씩 밀어 올리고 있다. 두 번은 베어야 할 정구지는 풀이 죽은 지 오래고 뿌리에 힘을 줄 의지를 잃어간다. 그나마 일주일에 한 번씩 수돗물을 뿌려 주지만 깊은 가뭄 앞에는 장사가 없다. 시름시름 앓고 있는 텃밭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인생 4대 기쁨이 있다. 과거에 급제하고, 신혼 첫날밤의 환희, 고향 친구를 만나는 것, 가뭄 끝에 내리는 비가 바로 4대 기쁨이다. 더 기쁜 것은 소년 과거 급제, 무월의 첫날밤, 천리타향에서 만난 고향 친구, 7년의 가뭄 끝에 내리는 비다. 오늘 내리는 비는 4대 기쁨의 하나다. 비록 7년의 가뭄은 아니라도 거기에 버금가는 달콤한 비다. 기다리는 것은 비록 혼자만의 바램은 아니다. 산이 그렇고 들이 그랬다. 숨 쉬는 생명체는 모두가 바라던 비다.
걷던 걸음을 멈추고 고인 물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에 마음을 맡긴다. 가는 비의 작은 동그라미 굵은 비에 큰 동그라미가 그려진다. 금방 만들어졌다가 사라지고 그 위로 다시 만들어지기를 반복한다. 물속에는 유수량이 줄어 숨쉬기가 힘겨웠던 팔뚝만 한 잉어는 내리는 비가 반가운지 꼬리를 힘차게 휘졌고, 피라미가 떼를 지어 유영한다. 모두가 내리는 비를 즐기고 있다. 둔치를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가볍고. 강가에 터를 잡은 온갖 생명체는 환희의 찬가를 부른다. 물속의 고기도 비를 반긴다. 지금 내리는 비는 그냥 내리는 비가 아니다. 웃음이 있고 기쁨이 넘치는 단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