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료총서
20집 輿地圖書 下
慶尙道
龍宮
人物
高麗
全元發
鷹揚軍 民部典書 璡之子 版圖摠郞大年之孫 典法摠郞忠儆之曾孫 入元朝爲 榮祿大夫 兵部尙書 集賢殿太學士 本國 封 竺山府院君 號 菊坡 子 僴 司僕判事 孫 强․謹․敬等俱捷巍科歷揚淸顯
贈金得培詩
江闊脩鱗縱
林深倦鳥歸
歸田乃吾志
非是蚤知機
入享蘇川祠
寓居本朝
趙峿琴柔
新增
鄭毗
東萊人麗末登第官至應敎麗朝政亂棄官來居于本縣九潭里後改名承源入享浣潭祠
金得男
麗朝登第官至吏曹參判
高士原
麗末登第本朝官至藝文館直提學
權綏
安東人登第官至監司
文傑
初名彬政丞龜之六世孫登第官至獻納出宰襄陽淸愼居官 宣廟朝褒 賜嘉名曰傑入享于箕川祠 원주
李文興
高麗文烈公兆年之八代孫登第專任國學作成人材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 전원발(全元發) 가계도
① 民部典書 全璡
② 元나라 兵部尙書 集賢殿太學士 全元發
③ 版圖摠郞 全大年
④ 典法摠郞 全忠儆
⑤ 司僕判事 全僴
⑥ 全强, 全謹, 全敬
◎ 응양군[ 鷹揚軍 ]
공학군(控鶴軍)이라고도 한다. 목종 때 설치되어, 근장(近杖)·친종(親從)이라 하여 친위군(親衛軍)의 임무를 맡았다. 용호군(龍虎軍)과 함께 이군(二軍)에 속하며, 지휘관인 상장군(上將軍)은 군부전서(軍簿典書)를 겸하여 반주(班主)라 하였다. 가장 상위인 부대지만, 규모는 가장 작아 1령(領) 1,000명으로 조직되었다. 상장군이 군의 최고지휘관, 대장군(大將軍)이 부지휘관이 되고, 장군(將軍) 1명이 영(領)을 영솔하였으며, 중랑장(中郞將) 2명이 장군을 보좌하였다. 그 밑에 낭장(郞將) 2명, 별장(別將) 2명, 산원(散員) 3명, 위(尉) 20명, 대정(隊正) 40명 등이 배속되었다.
이 중 상장군·대장군은 근장상장군(近杖上將軍)·근장대장군(近杖大將軍)이라 하여, 16명으로 구성된 합좌합의기관(合坐合議機關)인 중방(重房)의 구성원이며, 장군은 친종장군(親從將軍)이라 하여 장군방(將軍房)의 구성원이었으며, 중랑장은 근장중랑장이라 하여 낭장방(郞將房)의 구성원이었다. 고려 말까지 존속하여 공양왕 때에 8위(衛)의 하나가 되었으며, 조선시대까지 명칭과 군제가 계승되어 전기에는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 10위의 하나가 되어 응양위라 하였다. 1451년(문종 1) 군제개혁 때에 폐지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응양군 [鷹揚軍] (두산백과)
◎ 민부전서(民部典書)
고려 후기 민부(民部)의 정3품 최고 관직.
◎ 판도총랑(版圖摠郞)
고려후기 판도사(版圖司)에 속한 정4품 관직.
◎ 전법총랑(典法摠郞)
고려시대 전법사(典法司)의 정4품 관직.
◎ 사복-판사(司僕判事)
고려 시대에, 사복시에 속한 으뜸 벼슬. 정삼품으로 충렬왕 때 폐하였다가 충선왕 때 일시 복원하였으나 다시 공민왕 때 없앴다
◎ 제 목 : 龍宮閑居次金蘭溪得培韻
용궁에서 한거하면서 난계 김득배의 운을 빌어-전원발(全元發)
江闊脩鱗縱
林深倦鳥歸
歸田是吾志
非是早知機
강 넓어 큰 고기들 마음껏 놀고
깊은 숲에 지친 새 돌아오는구나!
시골로 돌아옴이 내 뜻이지만
진작에 기미를 안 것은 아니었도다.